<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162화>
* * *
상소윤은 매점에서 3학년 본관으로 올라가면서 갑자기 억울함을 느꼈다.
‘어째 나만 사다 주는 거 같은데?’
매점에 가려고만 하면 진유성이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뭔가를 부탁한다.
어차피 갈 매점이니 귀찮은 건 아니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다.
매번 빵이나 아이스크림을 사다 주니 꼭 자신이 진유성의 셔틀이 된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3학년 1반 교실로 들어오니 진유성의 뒤통수가 보였다.
진유성은 태블릿 PC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는데, 뭔가 얄미웠다.
상소윤이 살금살금 진유성을 향해 다가갔다.
목 뒤의 옷 속에다가 아이스크림을 집어넣으려는 속셈이었다.
하지만.
쉬익-
기묘한 각도로 꺾인 진유성의 손이, 목덜미로 향하던 아이스크림을 낚아챘다.
누군가 보면 상소윤이 건넸다고 생각할 정도로 아주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느리구나.”
“와, 씨. 뒤통수에 눈 달렸냐?”
“정수리에 달렸다.”
역시 간첩이다.
“야, 앞으로는 네가 사 먹든가 같이 가든가 해라.”
“걱정 마라. 오늘은 지종수가 없어서 부탁한 것뿐이다.”
진유성의 전담 빵셔틀(?)인 지종수는 오늘 출석만 하고 조퇴했다.
아버지의 회사에서 중요한 행사가 있다면서.
‘이 자식은 지종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진유성이 태연하게 아이스크림의 포장을 벗기고는 먹기 시작했다.
상소윤도 진유성의 옆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물었다.
“뭘 그렇게 보냐?”
“소설을 보고 있다.”
“또? 얼마 전에 한국에 나온 소설은 다 본 거 같다면서?”
“새롭게 나오게 만들었다.”
그랬다.
진유성이 보고 있는 것은 CMSG 출판사로 들어오는 원고들이었다.
그때 상소윤이 재미있는 소리를 했다.
“야, 소설이 그렇게 좋으면 네가 직접 하나 써라.”
“쓰라고? 내가?”
“원래 뭔가를 좋아하면 직접 해 보고 싶어지지 않나?”
“흐음…….”
진유성은 직접 소설을 쓴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왜 그랬는지 생각해 보니까, 중원에서 가지고 있었던 고정 관념 때문인 것 같았다.
진유성은 신분의 귀천을 논하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사회의 보편적인 고정 관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고려의 왕족이자 천마신교주인 자신이 예인처럼 소설을 쓴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었다.
‘내가 편협했군.’
진유성이 상소윤에게 손을 내밀었다.
상소윤은 얼떨결에 진유성의 손을 잡고 악수를 했다.
“뭐야?”
“좋은 가르침이었다.”
“뭐라는 거야?”
상소윤이 늘 그렇듯 진유성을 이해할 수 없이 쳐다보다가 물었다.
“근데 우리 2교시 끝나면 그냥 가면 돼? 담임한테 말 안 하고?”
“아니다. 나갈 때 교무실에 들르라고 했다.”
“나도?”
“너도.”
오늘은 금요일이었고, 상소윤과 진유성이 함께 봉사 활동을 가는 날이었다.
점심시간부터 봉사 활동이라서 진유성과 상소윤은 2교시가 끝나면 담임에게 이야기하고 조퇴할 예정이었다.
본래 고등학생들의 봉사 활동이라고 하면 쉬는 날에 하는 것이지만, 이곳은 대정고.
학생들의 편의를 위해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학교였다.
아이스크림을 거의 다 먹어 갈 때쯤 2교시 수업 종이 울렸다.
잠시 뒤.
2교시 수업이 끝나자마자 진유성과 상소윤은 가방을 챙겨서 교무실로 향했다.
“너희 둘만 가는 거야?”
“네.”
“가서 대정고 이름에 먹칠하지 말고 열심히 해.”
연기훈이 종이를 내밀자 상소윤과 진유성이 서명을 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대정고를 빠져나왔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성북구에 있는 보육원이었다.
* * *
20년 전, 처음 게이트 사태가 시작되었을 땐, 나라에 수많은 고아들이 생겨났다.
통계적으로 한국 전쟁 이후에 가계 혈통이 가장 많이 사라진 시기기도 했다.
보호자가 사라진 아이들은 범죄의 희생양이 되기도 했고, 범죄를 저지르는 가해자가 되기도 했다.
국가에서는 부랴부랴 보육원에 많은 예산을 책정하며 종교 단체들을 움직였는데, 진유성과 상소윤이 이번에 향한 보육원도 그때 생겨난 곳이었다.
성북구의 <바른 보육원>은 종교 단체의 수녀들이 운영하는 보육원으로, 서울에서 시설과 평판이 가장 좋은 보육원이기도 했다.
상소윤은 진유성이 봉사 활동 장소로 보육원을 고른 게 의외라고 생각했었다.
진유성이라면 SG나 청소년 수련원 같은 곳에서 또라이짓을 할 거라고 예상했으니 말이었다.
하지만 진유성은 처음 목록을 볼 때부터 보육원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바른 보육원에 도착한 두 사람은 봉사 활동에 앞서서 원장 수녀님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다.
대정고는 매년 어마어마한 금액을 기부하는 학교였기 때문에 원장 수녀님의 입장에서도 고마운 곳이었다.
“두 분이 알아 둬야 할 게, 아이들 중에는 일부러 봉사자들한테 못되게 구는 애들도 있어요.”
“네? 왜요?”
“정을 안 주려고요. 내일 다시 올 것처럼 말하지만 안 오는 분들이 더 많거든요.”
“아…….”
“저는 이해해요. 바쁜 와중에 시간 쪼개서 봉사 활동을 온 거잖아요? 하지만 아이들은 계속 기다려 본 경험이 있으니까요.”
상소윤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만 해도 보육원에 다시 와야 한다는 생각은 전혀 안 했다.
상소윤은 다음에 꼭 다시 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두 사람은 원장 수녀님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는 원장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곤 아이들이 머무는 건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상소윤이 입을 열었다.
“야, 진유성.”
“왜 그러느냐.”
“애들 괴롭히지 마라.”
“내가 애들을 왜 괴롭히겠느냐.”
“너는 행동하는 것 자체가 사람을 괴롭히는 면이 있어. 그러니까 뭔가를 행동하기 전에 나한테 꼭 물어봐야 해.”
“웃기는 소리 말고 너나 잘해라.”
그들은 그렇게 보육 시설로 들어섰다.
건물에 들어가니 그들보다 일찍 온 대학교 봉사 동아리의 학생들이 보였다.
이들은 진유성이나 상소윤과 다르게 주기적으로 봉사활동을 오는 이들이었다.
“안녕하세요.”
“어, 안녕하세요.”
진유성과 상소윤은 대학생들과 인사를 나눴는데, 대학생들은 두 사람의 외모를 보고 조금 놀라고 있었다.
특히 상소윤을 보고 그랬다.
진유성에게는 매일 박색하거나 빢샊하다고 무시를 받지만, 상소윤은 연예 기획사에서 수십 번의 캐스팅 제안을 받은 사람이었다.
“뭘 하면 돼요?”
“저희가 수녀님들이랑 식사 준비를 하는 동안 애들이랑 놀아 주면 될 거 같아요.”
오후 4시까지는 다들 학교에 가 있을 시간이라서 보육원엔 영유아밖에 없었다.
그리고 영유아들의 식사는 전쟁이었다.
진유성과 상소윤이 해야 할 일은 아이들의 밥을 준비하고, 먹는 동안 놀아 주는 일이었다.
‘하마도 이렇게 작겠지?’
상소윤은 그런 생각을 하며 이제 막 돌이 지난 것 같은 아이를 품에 안았다.
그러자 아이가 울음을 터트렸다.
“으아아아앙!”
놀란 상소윤이 아이를 쓰다듬어 봤지만, 울음은 더욱 커졌다.
상소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진유성이 혀를 차며 다가왔다.
“불편하게 안고 있지 않느냐.”
“내가? 아닌데…….”
“이리 줘 봐라.”
상소윤이 불신 가득한 표정으로 진유성에게 아이를 건넸다.
진유성이 아이를 안자 금방 울음이 그쳤다.
상소윤은 그 모습을 보고는 놀랐다.
딱 봐도 진유성의 행동이 능숙하게 보여서였다.
“너, 애 본 적 있냐?”
“있다.”
“언제?”
“어렸을 때.”
“동생?”
“비슷했지.”
진유성이 봉사 활동 단체의 목록을 보자마자 보육원이 눈에 밟힌 것은 옛날 기억이 떠올라서였다.
진유성은 무신들의 반란 때문에 혈혈단신으로 명나라로 도망쳤다.
사실 명나라에 도착한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진유성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병사들을, 무공도 익히지 않은 몸으로 돌파했으니 말이었다.
하지만 명나라에 도착해서도 상황은 좋지 않았다.
당시 명나라는 관과 무림의 정세가 좋지 않았고, 자연스레 백성들의 민심도 흉흉했다.
결국 진유성은 화전민들에게 속아서 노예상에게 팔렸고, 노예상은 그를 멸마대에 팔아넘겼다.
하지만 노예상이 진유성을 곧장 멸마대에 판 것은 아니었다.
그사이에는 1년이라는 공백이 있었다.
진유성이 노예상의 근거지에서 1년이나 머문 것은, 그가 진유성의 값어치를 아주 비싸게 봤기 때문이었다.
진유성은 보통의 고아들과 달랐다.
제대로 먹지 못해 삐쩍 마르긴 했지만 아이답지 않은 품위가 있었고, 눈에는 총기가 흘렀다.
푼돈이나 받고 팔아넘기기에는 너무 아까운 상품이었다.
그래서 노예상은 진유성을 비싼 값에 팔기 위해서 꽤 오랫동안 데리고 있었다.
그동안 진유성은 노예상에게 붙잡혀 온 아이들과 함께 지냈다.
아이들은 하루만 머물다가 사라지는 이들도 있고, 진유성처럼 몇 개월을 머무는 이들도 있었다.
또한 이제 막 눈을 뗀 갓난아기도 있었고, 진유성보다 몇 살이나 많은 이들도 있었다.
결국 진유성은 일 년 동안 백 명이 넘는 아이들을 돌봤다.
즉, 한 명의 노예상이 백 명이 넘는 아이들을 팔아 치웠다는 것이었다.
당시는 그런 시대였다.
후일 진유성은 이 노예상을 찾아 죽였다.
그리고 인연이 닿았던 아이들은 찾았지만, 단 한 명도 찾을 수가 없었다.
모두 죽었으니까.
그런 시대였다.
진유성이 옛날 생각을 하며 아이의 등을 쓸어 주고 있을 때, 상소윤은 저도 모르게 진유성을 쳐다보고 있었다.
“뭘 그렇게 보는 게냐?”
“아니, 말도 안 되는 광경을 보고 있는 것 같아서. 제주도 목장에 놀러갔는데 유니콘이 있는 거 같아.”
진유성이 피식 웃었다.
피는 못 속인다고, 꼭 제 아빠 같은 말을 한다.
‘좋은 사람들이 많군.’
진유성은 기감을 확장시켜서 바른 보육원 사람들의 행동과 소리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다른 보육원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이곳은 꽤 좋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 같다.
진유성은 이번에 설립한 회사를 통해서 후원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능숙한 진유성과 서툰 상소윤이 아이들과 놀아주는 사이, 식사 준비가 거의 완료되었다.
진유성과 상소윤은 아직 젖병을 떼지 못한 이들에게 이유식을 먹였고, 대학생 봉사자들은 좀 더 나이가 있는 아이들에게 밥을 먹였다.
다만 신생아들은 보다 능숙한 수녀님들이 맡고 있었다.
그 순간, 진유성의 눈에 이상한 장면이 들어왔다.
“윤재야, 넌 자꾸 쪽쪽이를 어디다가 숨기는 거니?”
한 수녀가 신생아에게 밥을 먹이고 있었는데, 자꾸 입에 무는 아기 용품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거기까지는 그럴 수도 있었다.
수녀가 보지 못한 사이에 뱉어 버렸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놀라운 건 진유성의 기감으로도 쪽쪽이가 사라지는 게 감지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인벤토리?’
인벤토리에 물건이 들어가고 나올 때의 느낌.
딱 그 느낌과 함께 쪽쪽이가 사라졌었다.
“상소윤.”
“어?”
“잠깐 아이 좀 안아 줘라.”
“내 팔은 두 개 뿐인데?”
“노력하면 네 개가 될 수 있다.”
진유성은 상소윤의 허벅지와 다리에 아이가 편하도록 올려 두었다.
약간의 빈틈은 내공으로 채워두었다.
맡고 있던 아이를 편하게 만든 진유성은 윤재라는 아이에게 다가갔다.
“왜 그래요?”
“잠깐만.”
진유성은 봉사자의 물음을 뒤로한 채 윤재라는 신생아의 작은 손을 잡았다.
그러자, 느껴졌다.
이 아이가 게이트와 연결된 각성자라는 걸.
원래 각성자가 되는 길은 하나밖에 없었다.
게이트에 선별돼서 몬스터를 잡고, 경험치를 얻는다.
한데 얼마 전에는 2차 각성자라는 게 등장했다.
2차 각성자는 정말 난데없이 각성을 한 이들이었다.
한데…….
아무래도 3차 각성자가 등장한 것 같다.
태어날 때부터 각성을 한 상태로 태어나는 이들.
더는 마도사들이 만든 게이트와 각성자들의 힘이 ‘이종의 기운’이 아니었다.
아카식 레코드에 기록된 역사였다.
이 말은 곧, 인류의 무의식을 관장하는 아카식 레코드가 완전히 오염됐음을 뜻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