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159화>
진유성이 교실로 돌아왔을 때는 1교시 수업 종이 막 울린 이후였다.
수업이 시작하고 들어온 진유성을 보고도 선생님은 별 말이 없었다.
학생들이 진유성이 교무실로 불려 갔다는 이야기를 전해 준 모양이었다.
자리에 앉은 진유성은 수업을 듣는 대신 연기훈이 전해준 봉사 가능 목록을 훑어보았다.
소년원, 보육원, 양로원, 청소년 수련관 등등.
심지어 SG 서울 지부도 있었다.
진유성은 SG 서울 지부는 선택지에서 제외했다.
한번 가 보고 싶은 곳이긴 한데, 그곳에 갔다가는 우산도의 일원들을 만날 수도 있었다.
‘어디로 가지?’
진유성은 남을 도와주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생존대로서 도망 다니는 와중에도 어려운 이들이 있으면 지나치지 않았다.
처음 생존대원들은 그런 진유성에게 불만을 품었지만, 이런 진유성의 행동은 그들을 몇 번이나 살렸다.
천라지망의 샛길을 알려주던 약초꾼도 있었고, 굶주림에 지쳐 가던 그들에게 주먹밥을 내놓았던 화전민도 있었으니까.
오히려 중원을 오시하게 된 이후로는 소소한 도움을 베풀어 본 적이 드문 것 같다.
큰 관점으로 중원을 경영해 민초들이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데 집중했을 뿐이었다.
이것은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진유성은 서울역 2차 게이트를 좌시하지 않았고, 독도 게이트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인데 사람들이 죽도록 내버려 둔다는 건, 그의 가치관에 부합하지 않았으니까.
‘봉사라…….’
한동안 고민하던 진유성은 결국 수업이 끝나 갈 때쯤 한 곳을 골랐다.
* * *
“으아아아!”
3교시가 끝나자 학생들이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디어 기다리던 점심시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야, 진유성. 나가서 먹자.”
상소윤이 정새롬과 같이 다가와서 말했다.
오늘의 점심 메뉴에는 상소윤이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음식인 오이 냉채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서 나가서 먹는 김에 진유성을 꼬드기는 것이었다.
“잠깐만 기다려 봐라.”
진유성이 정신을 집중했다.
후각을 극대화시켜 식당에서 흘러나오는 요리의 냄새를 맡으니, 썩 끌리는 메뉴는 아니었다.
“가자.”
진유성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지종수가 냉큼 끼어들었다.
그렇게 진유성과 상소윤에 정새롬, 지종수가 낀 넷은 대정고 교문을 나섰다.
“너 요즘은 요리 안 하냐?”
상소윤이 대정고 앞의 상가 건물을 가리며 묻자, 진유성이 고개를 저었다.
“안 한다.”
“왜?”
“극의에 이르러 더는 올라갈 곳이 없다. 요리 삼라만상의 이치에 통달한 것이지.”
“헛소리하고 있네.”
“헛소리라니. 상소윤, 생각해 봐라. 내가 해 준 요리보다 맛있는 게 있었더냐?”
진유성의 진지한 말에 상소윤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물론 진유성이 해 준 것보다 더 맛있는 음식은 먹어 봤다.
울산으로 가족 여행을 가서 먹은 대게라든지, 마장동에서 먹은 소고기라든지, 싱싱한 수산물이라든지.
하지만 그건 식재료가 맛있는 거지, 요리로써 맛있는 건 아니었다.
호텔에서 먹은 요리들도 맛있긴 했지만 진유성이 해 준 요리보다 압도적으로 맛있진 않았다.
그냥 요리에 따른 취향 차이인 것 같았다.
“……그러네?”
이렇게 보니까 생각보다 진유성의 요리 실력이 굉장해 보였다.
옆에서 듣고 있던 정새롬이 덩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진유성은 신기하다.
못하는 게 거의 없다.
요리도 잘하고, 축구도 잘하고, 농구도 잘하고, 마술도 잘하고, 심지어 공부도 잘한다.
일단 몸으로 하는 건 다 잘하고, 머리도 좋다.
정새롬이 감탄하듯 입을 열었다.
“생각해 보면 진유성은 못하는 게 없는 것 같아.”
“지금 날 놀리는 게냐!”
“엉?”
“알량한 장기자랑에서 1등을 차지했다고 잘난 척은……!”
“…….”
“…….”
정새롬은 분명 칭찬으로 한 말인데, 진유성이 버럭 했다.
정새롬은 드디어 진유성이 못하는 걸 깨달았다.
쿨하지 못하다.
그것도 전혀.
수학여행이 끝난 지 벌써 한 달 가까이 됐는데, 아직도 그날의 기억이 떠오르나 보다.
“소심하긴.”
“난 아주 대범한 사람이다.”
한동안 투덜거리던 진유성을 보며 혀를 차던 지종수가 물었다.
“근데 우리 뭐 먹어?”
“새롬이가 엽떡 가자던데.”
“아, 사거리 엽떡?”
“응. 거기 맛있더라.”
“엽떡이 무엇이냐?”
진유성의 물음에 정새롬이 물었다.
“너 엽떡 안 가 봤어?”
“안 가 봤다.”
“떡볶이집인데.”
“떡볶이. 맛있지.”
“진유성, 너 매운 거 잘 먹냐?”
“당연하다. 난 못하는 게 없다. 아주 운이 없는 경우를 빼면.”
“아니, 매운 걸 잘 먹냐고.”
“당연히 잘 먹는다.”
핸드폰을 보며 걷고 있던 상소윤이 코웃음을 쳤다.
“웃기고 있네. 너 저번에 매운 닭발 먹다가 눈물 쏟지 않았었냐?”
“난 울어 본 적이 없다.”
“피부로 울던데?”
“그런 적 없다.”
“얼굴도 시뻘게져 가지고.”
“그런 적 없다!”
진유성은 부인했지만, 상소윤의 말은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사실이었다.
진유성이 상림의 집에 얹혀 산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유혜연은 가족 외식을 제안했다.
새로운 식구가 들어왔으니 다 같이 밥을 먹자는 것이었다.
그때 유혜연은 진유성에게 매운 걸 잘 먹냐고 물었고, 진유성은 별 생각 없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중원에서도 매운 음식을 즐겼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유명한 매운 닭발 집에 갔는데…….
죽을 뻔했다.
진짜 죽을 뻔했다.
이건 진유성도 손쓸 수 없는 일이었다.
내공으로 술기운을 몰아내 본 적도, 독 기운을 몰아내 본 적도, 몸속에 들어온 혈고(血蠱)를 몰아내 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매운 맛을 몰아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혀를 헥헥거리며 물만 마셨다.
중국에도 매운 요리가 있긴 했다.
대표적으로는 광동의 요리가 매콤하면서도 짭짤한 편이었고, 사천의 요리가 입이 얼얼해질 정도로 매운 편이었다.
하지만 매움의 정도가 달랐다.
중국의 매움이 검기라면 한국의 매움은 검강이다.
중국의 매움이 삼류라면 한국의 매움은 초절정이다.
매움의 정도가 완전히 달랐다.
진유성을 당황스럽게 만든 것은 그 매운 음식을 아무렇지 않게 먹고 있는 유혜연과 상소윤이었다.
심지어 상림도 조금 매워하지만 맛있게 먹고 있었다.
진유성은 저 세 사람이 피독주(독을 중화시켜 주는 기물)를 물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할 정도였다.
사실 중국 요리는 환관들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남성성이 거세된 환관들은 보상 심리로 식도락을 탐닉했는데, 거기서 수많은 자극적인 향신료와 요리들이 탄생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건 지구의 명나라 역사였다.
진유성이 통치한 대명제국에는 이런 역사가 없었다.
천마신교가 대명제국을 흡수하면서 환관이 설칠 자리를 내어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진유성은 그토록 매운 요리를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젠 다르다.’
진유성은 자신이 있었다.
“상소윤, 네가 꿈을 꾼 모양이구나. 난 분명 매운 걸 잘 먹는다.”
“너 자꾸 그러면 매운맛 4단계 시킨다?”
“4단계? 5단계를 시키도록 하지.”
“5단계는 없어.”
“주인장에게 요구하면 있겠지.”
진유성의 자신만만함에 상소윤이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진유성이 매운 걸 먹고 눈물을 쏟는 걸 봤는데 무슨 자신감인지 모르겠다.
“4단계는 너무 매운데…….”
지종수가 중얼거리자, 진유성이 비웃음을 흘렸다.
“남자답지 못하구나, 지종수.”
“…….”
“고작 그 정도도 먹지 못해서 진정한 남자라고 할 수 있겠느냐?”
“……!”
지종수는 진유성의 도발에 걸려들었다.
“내가 4단계가 너무 매운데라고 말했나?”
“그랬다.”
“말이 헛나왔네. 내가 하려던 말은 4단계는 너무 쉬운데였어.”
상소윤과 정새롬이 서로를 쳐다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녀들은 매운 걸 잘 먹기 때문에 상관이 없었다.
오히려 진유성이 매운 걸 먹고 질질 짜는 걸 보고 싶기도 했다.
그렇게 되면 1년 정도 신나게 놀릴 수 있을 거니까.
그렇게 그들은 점심시간에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 * *
“아저씨, 여기 4단계보다 더 매운 거 없어요?”
압구정에서 엽떡을 운영하는 사장님이 피식 웃었다.
이런 요구를 한두 번 받아 본 게 아니다.
매운 걸 앞에 두고 쓸데없는 데 자존심을 세우는 이들이 있다.
아니면 먼저 물을 마시는 사람이 음식 값을 내는 내기를 한다든지.
“있긴 한데, 먹으면 죽을걸? 10단계는 되는 거 같은데?”
“상관없어요.”
“진짜로?”
“네.”
“오케이.”
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멕시코에서 들여온 세상에서 가장 매운 향신료에 캡사이신을 섞으면 그야말로 죽어난다.
“그건 너무 매울 거니까, 일단 안 매운 걸로 배부터 채우는 게 낫지 않을까?”
고객의 요구를 만족시킴과 동시에 장사 수완까지 발휘하는 사장이었다.
사장님의 말을 들은 학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적당히 매운 떡볶이와 오뎅, 튀김 등을 시켜서 일단 배를 채웠다.
한데…….
“으음.”
진유성이 매워하는 게 보인다.
아주 조금 매운 떡볶이였는데, 벌써부터 매워하는 걸 보고는 상소윤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야, 엄청 매운 거 먹으면 너 구급차에 실려 가는 거 아니야?”
“방정맞게 굴지 마라.”
“아니, 걱정돼서 그렇지. 혓바닥 날아갈까 봐.”
“조용해라.”
상소윤에게 면박을 준 진유성이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상소윤, 이번 주 금요일에 무엇을 하느냐?”
“금요일? 학교 가겠지.”
“학교를 빼 줄 수 있다면?”
“뭔 소리야?”
진유성이 담임에게 들었던 봉사 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아무래도 혼자 가는 건 심심할 것 같으니 상소윤을 끌어들일 생각이었다.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지종수가 부들거리더니,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금요일 안 돼!”
“뭐?”
“목요일이나 월요일에 가. 나도!”
“무슨 소리냐?”
“금요일은 안 된단 말이야!”
지종수는 금요일에 출석만 하고 조퇴를 할 예정이었다.
아버지의 회사에서 중요한 행사가 있는데, 억지로 끌려가야 했다.
그러나 진유성은 고개를 저었다.
“날짜는 내가 정하는 게 아니다.”
담임에게 가고 싶은 곳을 말했더니 금요일이란 날짜가 나온 것이었다.
상소윤이 뭔가를 생각하더니 정새롬에게 물었다.
“새롬아, 너도 갈래?”
“싫어. 귀찮아.”
정새롬의 대답을 들은 상소윤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꼬리를 흐렸다.
“아, 나도 귀찮은데…….”
“내가 미국에 다녀오면서 선물을 사 온 걸 알고 있느냐?”
“뭐?”
“봉사 활동을 따라오면 주마.”
“뭐 사 왔는데?”
“비밀이다. 오면 알려 주지.”
“에이 씨. 간다, 가.”
그렇게 상소윤이 고개를 끄덕이자, 지종수는 절망에 빠졌다.
‘진유성과 소윤이가 둘이서? 봉사 활동을?’
지종수의 머릿속에 수많은 망상이 펼쳐졌다.
참고로 지종수의 망상은 상소윤과 진유성의 손자까지 이어졌다.
그때, 그들이 시켰던 떡볶이가 나왔다.
“진짜 매우니까, 하나씩 먹어라. 얘들아.”
“네.”
사장의 신신당부를 뒤로하고, 네 사람의 앞에 떡볶이가 놓여졌다.
냄새와 비주얼만 봐도 매운 향이 확 풍겼다.
매운 걸 좋아하는 상소윤과 정새롬이 봐도 살짝 긴장이 되는 정도였다.
“먼저 물을 마시는 사람이 지는 걸로?”
“좋다.”
“지는 사람이 다 사는 거다?”
“이것만 사는 게 아니라, 매점에서 아이스크림까지 사는 걸로 하지.”
적극적인 진유성의 태도에 모두가 고개를 갸웃했다.
1단계 매운 맛도 허덕이며 먹던 진유성이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이러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들로서는 나쁜 일이 아니었다.
돈 많은 진유성이 기부하겠다는데, 말릴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먹자.”
그렇게 네 사람이 하나씩 떡볶이를 입에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