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153화 (153/337)

<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153화>

Quest 28. 클리셰 천마님

스위스, 취리히.

스위스에서 가장 큰 도시이자 세계 각국의 대표 금융 기관이 자리 잡고 있는 금융 중심지.

이곳에는 에드몽 드 로쉴드라는 민간 은행이 있었다.

에드몽 드 로쉴드는 특별했다.

이곳은 세계 각국 부유층의 자산을 전문적으로 관리하는 곳인데, 여기서 운용하는 자금의 규모는 어마어마해서 가히 취리히 자체를 살 수 있을 정도라고 알려져 있다.

이런 에드몽 드 로쉴드의 최상층에 깊은 어둠이 내리 앉았다.

분명 창밖의 태양은 밝은데도, 빛은 건물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마치 그래서는 안 된다는 듯이.

그 안에는 똑같은 얼굴을 한 두 명의 백인 남자가 있었다.

하위 차원을 통해 중원에 다녀온 첫째와 그를 기다리고 있던 둘째였다.

첫째가 물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지?]

[2개월 정도 흘렀다.]

[셋째가 죽었더군.]

[놀라운 일이지.]

첫째와 둘째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동시에 말을 했지만,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들은 본래 그런 존재였으니까.

[셋째의 죽음보다 중요한 건, 누가 그를 죽였냐는 거다.]

둘째가 물었다.

[중원의 절대자는 존재했나?]

첫째가 고개를 저었다.

[중원의 절대자는 중원에 없었다.]

이는 거짓이 아니었다.

첫째는 대명제국과 천마신교를 통치하고 있는 진유성을 만났지만, 그는 가짜였다.

아니, 가짜라는 표현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그는 가짜지만, 진짜보다 더욱 고강한 힘을 가지고 있을 테니까.

진짜가 남긴 9할의 무에서 탄생한 존재이니까 말이었다.

하지만 어찌 됐든 현존하는 중원의 절대자가 본래의 진유성이 아님은 분명했다.

[아무래도 게이트를 통해 이 세계로 건너온 것 같다.]

[그럼 영성을 훔치고, 셋째를 죽인 인물이 중원의 절대자란 말인가?]

[아마도.]

[하지만 이해할 수 없다. 설령 그자가 이 세계에 넘어왔더라도 우리를 적대할 이유가 뭐가 있지?]

[그건 나 역시 궁금하군.]

이건 첫째 역시 궁금해 하는 부분이었다.

진유성이 어떤 시점에 지구에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이미 지구에 적응했을 확률이 높았다.

고강한 무력을 지닌 이가 적응하지 못했다면, 이미 사고를 쳤을 거니까.

그렇다면 셋째를 죽인 게 불의의 사고는 아니란 말이었다.

의도된 일이다.

왜 진유성은 그들을 적대할까?

하나 첫째는 그 의문을 금세 씻어 냈다.

그에게는 중원의 절대자가 그들을 적대하게 된 이유보다, 적대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했기 때문이다.

[절대자의 자리를 양보할 수 없기 때문일지도.]

[그렇다기엔 너무나 조용하다. 절대자의 자리를 공고하고 싶었다면 이미 각성자들을 휘어잡았을 것이다.]

[그가 게이트 사태의 종결을 원한다면?]

[그 정도 진실에 접근했을까?]

[그것도 그렇군.]

게이트의 기원에 대해서 아는 이는 세상에 두 명뿐이다.

첫째와 둘째.

아카샤는 알고 있겠지만, 아카샤는 ‘존재’로 취급할 수 없다.

아카샤는 세상을 아우르는 의지일 뿐, 활동성을 가진 존재가 아니었다.

아직 그들은 아카샤가 타트바라는 화신을 만들어 냈다는 걸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 진유성이 게이트의 비밀에 근접했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골똘히 고민하던 중, 둘째가 말했다.

[그를 한번 만나 봐야겠군.]

[중원의 절대자를 말인가?]

[그자를 포섭할 수 있다면, 포섭해야겠지.]

[우리의 계획이 누군가를 포섭하고 말고의 성질인가?]

세쌍둥이, 아니 이제는 쌍둥이가 된 첫째와 둘째의 계획은 간단했다.

아카식 레코드를 오염시키고, 아카샤를 침탈해 신이 되는 것이다.

신이 되기 위해 필요한 영성은 벌레처럼 버글거리는 수십억의 인간들에게서 나올 것이고.

이것이 아포칼립스다.

그들이 아포칼립스(Apocalypse : 세상의 종말)를 시작하지 않은 것은 아카식 레코드를 완전히 오염시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중원의 절대자가 원하는 것을 우리가 들어줄 수 있을지도 모르지.]

[이를 테면?]

[중원으로 돌아가고 싶다던가, 아포칼립스 월드의 지배자가 되고 싶다던가.]

둘째가 말을 이었다.

[그는 지구와 중원을 연결하는 게이트를 완전히 열어버린 자이다. 그 정도로 강력한 이를 굳이 적으로 삼을 필요는 없지.]

둘째의 말에 첫째는 웃어 버리고 싶은 것을 참았다.

둘째는 진유성과의 협상을 대의로 포장하고 있었다.

그들의 계획을 가로막는 방해꾼을 평화롭게 제거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좋은 일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정말 그럴까?

아니다.

둘째는 진유성을 포섭하고 싶은 것이다.

자신을 죽이는 칼로.

셋째가 죽었으니 신좌를 두고 경쟁하는 이는 그들 둘뿐이었다.

사실 첫째는 둘째가 인간 조력자를 또 한 명 데리고 있는 걸 알고 있다.

CSG의 수장, 월성.

인간임에도 강력한 무인이다.

하지만 그뿐이다.

인간이 아무리 강해 봤자 인간일 뿐이다.

첫째와 진유성 같은 돌연변이는 흔한 것이 아니다.

[진유성을 어떻게 만나겠다는 거지?]

[돈의 힘이면 안 되는 게 없지.]

지구 위를 돌아다니는 자본을 4등분할 수 있다면, 그 중 1/4는 첫째가, 또 1/4는 둘째가, 또 1/4는 셋째가 가지고 있다.

실제 민간 자본은 전체 파이의 1/4에 불과하다.

그들은 돈으로 지구의 모든 인구를 전수 조사할 수 있다.

중원의 절대자가 지구에 정착했다면 그가 아프리카 오지에 살진 않을 것이다.

새로운 세계에 왔으면 새로운 문명이 궁금하기 마련이니까.

그러니까 돈의 힘으로 충분히 찾을 수 있다.

이것이 둘째의 판단이었다.

그러나 첫째는 고개를 저었다.

[그거보다 더 확실한 방법이 있다.]

[뭐지?]

[중원의 것을 복사해 온 것이다.]

첫째가 둘째에게 한 자루의 검을 내밀었다.

[중원의 절대자가 백 년이 넘도록 사용하던 애검의 복사품이지.]

[이름은?]

[입멸검.]

[오만한 이름이군.]

[진품은 그 이름에 어울리지.]

둘째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입멸검의 복사품을 받았다.

이건 진유성과의 만남을 주선해 줄 물건이다.

‘그는 내가 중원의 절대자와 만나기를 바라는군.’

둘째는 복제품을 건네주는 첫째를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어쩌면 첫째는 자신이 중원의 절대자와 공멸하기를 바랄 수도 있다.

첫째가 자신에게 모든 정보를 주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다.

첫째 또한 자신이 의도를 숨기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을 거고.

그렇게 첫째와 둘째는 동상이몽 속에서 입멸검을 주고받았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보유한 취리히의 에드몽 드 로쉴드 은행의 최상층에서.

* * *

벤 아일리쉬가 정신을 차리고 처음 본 것은 뭔가를 기대하는 표정의 진유성이었다.

그 표정을 보는 순간 벤 아일리쉬는 공포를 느꼈다.

기절하게 전의 느꼈던 심상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놀드 벡보다 강하다.’

이제 벤 아일리쉬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는 아놀드 벡과도 여러 번 대련을 했다.

심상 속에서 아놀드 벡과 싸우는 것은 벤 아일리쉬의 취미에 가까운 행위였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벤 아일리쉬는 아놀드 벡의 고강함에 감탄했다.

어떤 공격을 해도 아놀드 벡은 전부 막고 반격해 냈다.

그게 심상이든, 실제든.

하지만 언노운 엠페러는 좀 다르다.

공격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결국 벤 아일리쉬는 진유성의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눈을 내리깔았다.

“제가 허튼 의심을 했습니다.”

“뭐?”

“당신의 힘을 인정합니다.”

벤 아일리쉬의 선언에 진유성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는 벤 아일리쉬가 정신을 차리고 다시 한번 덤벼들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왜 무협 소설에 보면 이런 대사가 있지 않은가.

“이건 사술이다! 제대로 싸우면 내가 질 리가 없다!”

주인공이 신위를 발휘하면 꼭 그의 적들은 사술 타령을 해 댔다.

그리곤 승복하지 못하고 한 번 더 달려든다.

그럼 그들을 살려 주려던 주인공이 어쩔 수 없이 죽여 버리고.

‘아, 뭐 내가 이 핏덩이를 죽이려는 건 아니지만.’

아무튼 진유성은 벤 아일리쉬가 승복을 하지 않고 달려들길 기도하고 있었는데…….

이 자식이 기가 팍 죽어 버렸다.

“에라이!”

진유성이 벤 아일리쉬의 뒤통수를 때렸다.

벤 아일리쉬는 피하려고 했지만, 그 현묘한 손놀림을 감히 피하지 못했다.

그때 아놀드 벡이 다가왔다.

“잠깐 나가서 이야기 좀 하시죠.”

진유성은 아놀드 벡과 함께 호숫가로 나왔다.

“쟤가 너희들 중에 두 번째로 강한 놈이냐?”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가 기절한 것은 겁쟁이라서가 아닙니다.”

“알아. 딱 보니까 선천적으로 상단전이 열린 놈 같던데.”

“네?”

“본능이 엄청 발달했다는 소리야.”

진유성은 벤 아일리쉬가 심동을 보내는 게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아놀드 벡조차 심동과 의념의 활용법을 전혀 몰랐는데, 아놀드 벡보다 약한 놈이 심동을 쓰고 있는 현상이 말이었다.

물론 중원이라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심동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무공을 익혔을 수가 있으니까.

하지만 지구에는 무공이 없고, 각성자들은 굉장히 무식한 방법으로 싸운다.

레벨을 올리고, 스탯을 찍고, 좋은 스킬을 얻어서 싸운다.

그러니 벤 아일리쉬가 심동을 다루는 무예를 익혔을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이유는 딱 한 가지.

선천적으로 상단전이 개방되어서 심상화를 잘 시키는 것이었다.

저런 놈들은 둘 중 하나다.

뛰어난 사부 밑에서 무공을 배우면 최고 수준의 고수가 될 수 있고, 어중이떠중이한테 무공을 배우면 주화입마에 걸린다.

심상과 현실의 차이를 명확히 인지하지 못한 채 무공에 몰두하다 보면 기맥이 꼬여 버리기 때문이었다.

‘뭐, 아직은 일류 수준이라 괜찮은 것 같기는 한데.’

아마 드벡이 수준까지 올라오면 좀 위험할 거다.

“제가 저번에 말씀드렸던 것 기억나십니까? 유명해지시라고.”

“어. 그래서 유명해졌잖아?”

“네?”

“지금 구글에서 나 모르는 사람 없을 걸?”

“……그렇게 유명해지라는 건 아니었습니다. 아니, 애당초 바둑은 왜 두신 겁니까?”

“타트바가 시켰어.”

“네?”

“타트바가 최대한 다양하고 많은 일을 하라고 조언했었거든. 내가 또 조언을 무시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진유성이 뻔뻔하게 타트바의 핑계를 대자, 아놀드 벡은 할 말이 없어졌다.

타트바는 그들이 섬기는 어머니의 의지를 품고 태어난 화신이다.

이를 테면 어머니의 딸인 셈이다.

신이 그렇게 조언했다는데 뭐라고 하겠는가.

하지만, 솔직히 못 믿겠다.

“불경한 표정 짓지 마라.”

“……네.”

“근데 그건 왜?”

“각성자 신분을 구했습니다. 브레드 파커. 중국인 이민자 3세로 외모는 동양인이지만 완전한 미국인입니다. 최근 2차 각성을 했지만, 신고를 하지 않았습니다. 샌프란시스코 해변에서 대마초 장사를 하던 인물입니다.”

아놀드 벡은 일부러 진유성의 위장 신분에 마약상이란 흠을 넣어 두었다.

이는 브레드 파커란 인물이 대외적인 기록이 거의 없기 때문이었다.

그가 음지에서 살아온 인물이란 설정이 있다면 대외적인 기록이 없는 게 말이 된다.

“브레드 파커란 인물로 활동을 하라고? 얼굴을 드러내고?”

“선글라스나 마스크 정도는 쓰시죠.”

“스파이더맨 가면을 쓰고 싶은데?”

“안 됩니다.”

“아, 왜!”

“안 됩니다.”

진유성이 투덜거렸지만, 아놀드 벡은 태도를 굽히지 않았다.

“브레드 파커로 캘리포니아에 한 번 가시죠.”

“거긴 왜?”

“각성자로서 유명해질 기회니까요.”

“S급 게이트라도 열리냐?”

“그건 아닙니다. 무슨 게이트가 열릴지는 저도 모르죠. 하지만 적어도 캘리포니아에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건 확실합니다.”

“새로운 세상?”

아놀드 벡이 말했다.

“며칠 뒤부터 캘리포니아는 자유 각성 지대가 됩니다. SG가 게이트를 클리어하는 게 아니라, 각성자들이 자유롭게 클리어하게 될 겁니다.”

“그 말은……?”

진유성이 눈을 크게 뜨자 아놀드 벡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진유성은 통찰력이 깊다.

자유 각성 지대란 단어만 듣고 많은 부분을 추리한 듯했다.

“새로운 정의를 가진 새로…….”

“레이드물이다.”

“네?”

“짐꾼. 답은 F급 짐꾼이다!”

“네?”

“드디어……!”

진유성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드디어 무시받을 수 있다!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