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137화>
상소윤이 진유성을 쳐다보고, 진유성이 상소윤을 쳐다보았다.
상소윤의 눈빛에는 ‘그게 누구냐’라는 의문이 깃들어 있었는데.
‘누구지?’
진유성도 모르겠다.
“그게 누구죠?”
진유성의 반문에도 양복을 입은 남자들은 당황하지 않았다.
비서실장을 통해 진유성이 회장님의 성함은 듣지 못했다는 정보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저 식당에서 학생 분께서 회장님께 요리를 만들어 주신 적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어, 아.”
생각이 났다.
죽을 날만 받아 놓고 있던 놈에게 요리를 해 줬고, 카드가 안 돼서 오백만 원만 받았다.
그리곤 풀썩 쓰러지길래 몸에 혼탁하게 쌓여 있는 기운을 조금 가져가 주었고.
그것만으로도 그놈의 수명이 10년은 늘어났을 것이었다.
“근데 그노, 인분이 날 왜요?”
하마터면 그놈이라고 말할 뻔했다.
남들이 보기에 진유성은 고등학생이니 말을 조심해야했다.
“어떤 연유로 찾으시는지 저희는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 좋은 용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비서실장에게 파헤치는 것이 아니라 찾는 것이고, 끌고 오는 게 아니라 모셔 오는 것이라고 언질을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토록 정중한 것이었다.
또한, 학생이 별 관심이 없어 보이면 이 말을 꼭 하라고 전했다.
“김정철 회장님은 JC 그룹의 최고 경영자십니다.”
JC 그룹.
모태를 종합 상사에 둔, 거대 기업이었다.
단순 기업 매출만 따지면 20위권 밖이지만, 이는 그룹의 제조업 비중이 낮기 때문이었다.
영향력만 따지면 재계 순위 5위권 안쪽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이런 JC 그룹이 학생을 만나고 싶어 한다?
평범한 고등학생이라면 벌벌 떨면서 찾아올 것이고, 대정고 학생이라면 부모님한테 전화를 할 것이었다.
그러면 부모님은 제일 좋은 옷을 입혀서 보낼 것이고.
비서실장은 그렇게 생각했고, 그렇게 지시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어쩌라고?
이게 진유성의 생각이었다.
“저는 딱히 용무가 없는데요?”
“회장님이 뵙고 싶어 하십니다.”
“그럼 용무가 있는 분이 와야지. 난 학교도 가야 하고.”
“학교 측에는 미리 말해 두었습니다. 오늘은 등교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안돼요. 오늘은 꼭 학교 가야 돼.”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진유성은 학교에 가서 꼭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바로, 지종수의 앞에서 신발과 가방을 자랑하는 일이었다.
상림은, 상소윤이 보는 앞에서 지종수의 선물들을 진유성에게 건넸다.
“유성아. 이건 네가 써라.”
“제가요?”
“내가 이런 명품 입고 다니면 회사 사람들이 욕해요. 그리고 소윤아. 종수라고 했나?”
“응.”
“그 친구한테는 돈으로 돌려줘야 할 거 같은데…….”
“내가 얼만지 물어볼게.”
공식적으로 지종수의 선물을 차지한 진유성은, 지종수를 놀릴 생각에 월요일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심지어 일요일 내내 유튜브로 런웨이를 보았다.
모델들이 어떤 식으로 걷고, 어떤 식으로 제품을 광고하는지 따라 하기 위함이었다.
그 결과, 진유성의 걸음걸이와 몸짓은 톱 모델과 완전히 똑같아졌다.
지종수 앞에서 ‘2023 S/S 면세점 핫 콜렉션’ 런웨이를 펼칠 준비가 됐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회장이고 그룹이고 관심이 없었다.
진유성의 예상치 못한 반응에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눈동자만 굴렸다.
학생을 찾는 게 문제지, 찾고 나서는 아무 문제가 없을 줄 알았다.
그래서 수학여행을 갔다는 소리를 듣고 돌아오는 월요일에 김정철 회장님은 스케줄을 비워 놓았다.
눈앞의 학생과 만나기 위해.
수학여행을 다녀와서 피곤할 테니 주말은 푹 쉬라는 배려를 겸한 일정이었다.
“저, 학생분.”
“왜요?”
“회장님이 간절히 원하시는데, 한 번만 시간을 내주시면 안 됩니까?”
진유성은 공손히 나오는 남자들을 보며 잠시 고민했다.
회장이란 직함을 내세우거나, 나이를 내세우면 진유성을 절대 설득할 수 없다.
하지만 이렇게 공손히 나온다면 이야기가 좀 달라진다.
“그럼 학교 끝나고요.”
“알겠습니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전화번호 좀 알 수 있을까요?”
진유성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전화번호를 건넸다.
남자들이 인사를 하고는 우르르 자리를 떴다.
남자들이 사라지자마자 상소윤이 입을 열었다.
“야, 뭐야? 뭐야?”
“뭐가 말이냐.”
“아니, JC 그룹이 왜 널 찾아? 너 뭐 나쁜 짓했냐?”
상소윤의 머릿속에 진유성이 와이어를 타고 JC 그룹 본사에 침투해 기밀을 빼오는 그림이 그려졌다.
진유성은 상소윤이 불경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차마 상소윤을 때릴 수는 없었다.
대신 상림을 때려야겠다.
진유성은 마음속으로 상림의 이마에 한 대를 적립해 놓고는 대답했다.
“저번에 장사를 한 적이 있다.”
“장사? 요리로?”
“그래. 대중들이 내 요리를 어떻게 먹는지가 궁금해서. 그때 웬 노인네가 왔었는데, 그 사람이 JC 그룹 회장이었나 보다.”
“야! 왜 혼자 장사해! 나랑 동업하자니까?”
“싫다.”
“왜!”
“요리사는 나의 길이 아니다.”
“그럼 뭐 할 건데.”
“아직 모른다. 하지만 요리로 장사는 안 할 거다.”
진유성은 요리에 더는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오다가다 지인들에게 호의를 베풀 수는 있겠지만 말이었다.
“야, 근데 얼마 받고 팔았냐?”
“천만 원을 불렀는데, 카드가 안돼서 오백만 원만 받았다.”
“……진심?”
“내가 왜 이런 걸로 거짓말을 하겠느냐?”
“미친놈인가? 혹시 너한테 돈 돌려받으려고 찾는 거 아니야?”
“그랬을 거면 저 놈들이 받았겠지.”
진유성이 대정고 입구 쪽에 주차된 차를 가리켰다.
꽤 좋아 보이는 차 안에는 4명의 남자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한데 대화 내용이 좀 이상하다.
“저 친구도 재벌가 자제인가?”
“그러지 않을까요? 태도도 당당하고 JC 그룹이란 이름에도 반응이 없던데.”
“아무리 재벌가 자제라고 해도 VVVIP가 떨어진 적이 있나?”
“없죠. 애당초 트리플 VIP는 대통령급인데.”
“그럼 뭘까?”
거리도 멀고, 차 안에서 나누는 대화였다.
하지만 진유성이 못 들을 거리는 아니었다.
진유성은 남자들의 대화를 들으며 의문을 품었다.
‘날 요리 때문에 부른 게 아닌 건가?’
하나의 그룹을 일구었다는 건, 이성적이라는 소리다.
단순히 맛있는 요리를 먹었다고 이렇게까지 자신을 찾을 이유는 없었다.
게다가 지난번에 확인한 바로는, 김정철이란 놈은 음한 선천진기를 가지고 태어난 놈이었다.
음기가 나쁘고 양기가 착하고 이런 건 없지만, 음기를 가진 이들은 대체로 냉철하고 냉정하다.
감성보다는 이성으로 행동한다는 소리였다.
그러니 고작 요리 때문에 자신을 이렇게까지 찾을 이유는 없었다.
‘그냥 따라가 볼 걸 그랬나?’
갑자기 호기심이 든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저 멀리, 차에서 내리는 지종수가 보였다.
“뭐 해?”
진유성이 갑자기 멈춰 서자, 상소윤이 뒤를 돌아보았다.
지종수가 보인다.
상소윤은 다시 진유성을 보았다.
“아, 씨. 난 몰라.”
그리고는 상소윤이 후다닥 3학년 본관으로 뛰어간다.
상소윤이 도망가는 이유는 진유성이 입고 온 신발과 가방에 있었다.
저것은 지종수가 상소윤의 아버지에게 선물을 해 준 것이었다.
근데 그걸 진유성이 홀라당 입고 왔다?
아무리 공식적으로 준 것이고, 돈으로 돌려줄 거라고는 하지만, 상소윤이 생각하기에는 좀 이상했다.
그래서 아침부터 입고 오지 말라고 그렇게 말을 했는데, 진유성한테 씨알도 안 먹혔다.
그렇게 상소윤이 도망친 사이, 진유성은 당당히 서 있었다.
지종수가 자신을 발견할 때까지.
스마트폰을 보며 걷던 지종수가 뒤늦게 진유성을 발견했다.
둘 사이의 거리는 약 100미터 정도.
거리도 적절했다.
진유성이 당당하게 지종수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저벅, 저벅.
톱 레벨의 모델은 두 가지를 동시에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흐트러짐 없이, 리드미컬하게.
이것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수많은 디자이너의 러브콜을 받는 톱 모델이 된다.
아마 지금 진유성의 모습을 본 디자이너가 있다면 당장 쇼에 세우고 싶어서 난리가 났을 것이었다.
진유성의 워킹은 그만큼 완벽했으니까.
지종수는 그 워킹을 홀린 듯이 보고 있었다.
진유성이 갑자기 걸어오기 시작하는데, 이상하게 멋있었다.
뭔가 온몸에서 아우라가 뿜어지는 것 같았다.
마침내 진유성이 지종수의 앞으로 다가왔다.
“진…….”
이름을 부르려는데, 진유성이 갑자기 포즈를 잡았다.
오른쪽 어깨를 살짝 내려 몸의 모든 선을 아래로 향하게 하며, 시선도 아래로 내리깔았다.
신발을 포인트에 둔 모델의 자세였다.
지종수는 뭔가에 홀린 것처럼 시선을 내리다가…….
진유성의 신발을 보았다.
“……!”
그가 소윤이 아버지에게 선물한 신발이 거기 있었다.
“그걸……!”
그걸 네가 왜 신고 있냐고 말하려는데, 포즈를 끝낸 진유성이 휙 돌았다.
그리곤 다시 당당한 걸음걸이로 멀어졌다.
진유성의 등 뒤에 매달린 가방이 경쾌하게 흔들렸다.
그가 소윤이 아버지에게 선물했던 가방이었다.
“야!”
지종수가 후다닥 뛰어갔지만, 거리를 좁힐 수 없었다.
더 빠르게 진유성이 본관 건물로 향했으니까.
“뭐야, 방금?”
“런웨이?”
“쇼에서 본 것보다 더 잘하던데?”
“그니까.”
등교 시간이다 보니 주변에는 많은 학생들이 있었다.
그들은 진유성이 신고 있는 신발과 메고 있는 가방에 얽힌 이야기를 알지 못했다.
그러니 진유성의 런웨이만 감상했을 뿐이었다.
“저 오빠가 3학년 진유성이지?”
“어.”
“와, 진짜 특이하다. 저기서 왜 런웨이를 하지?”
“같은 반이었으면 재밌을 거 같은데.”
“저 오빠 볼 때마다 느끼는 게, 잘생긴 등신 같아.”
* * *
학교가 끝나는 시간에 맞춰서 진유성에게 문자가 날아왔다.
-교정 내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부지가 워낙 넓은 대정고에는 교사와 학부모들의 차를 댈 수 있는 주차장이 있었다.
거기서 기다리고 있겠다는 소리였다.
“야! 축구나 하자!”
잔뜩 뿔이 난 지종수가 진유성에게 다가왔다.
화가 났지만 축구를 하자는 게 아니었다.
축구를 하면서 화를 풀려는 것이었다.
지종수는 생긴 것과 다르게 꽤 신사답게 축구를 하는 편이었는데, 오늘은 진유성에게 온갖 태클과 몸싸움을 퍼부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진유성은 산뜻하게 고개를 젓고는 교실을 나갔다.
그도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김정철이란 놈이 자신을 왜 찾는지.
주차장으로 향하자, 양복을 입은 남자가 다가왔다.
“회장님께서 이리로 오신다는데, 천마신교란 식당으로 모셔도 되겠습니까?”
“온다고요?”
“예.”
“그럼 저야 편하죠.”
진유성은 남자들과 함께 천마신교로 향했다.
요리에 한참 열의가 있을 때는 천마신교란 현판을 상가 밖에 붙여 놓았었는데, 이제는 아니었다.
현판은 가게 안에 있었다.
사실 이제 가게라고 부르기도 좀 애매했다.
그냥 진유성와 친구들이 가끔 들려서 노는 아지트 같은 개념에 더 가까웠다.
저번에는 상소윤이 정새롬 생일 파티를 한다고 빌려 달라고도 했었고.
진유성이 건물 안으로 들어갔지만, 남자들은 따라오지 않았다.
그들은 밖에 서 있겠다고 했다.
잠시 뒤, 상가의 문이 열리며 김정철 회장이 불쑥 나타났다.
건강을 완전히 회복한 듯, 걸음걸이가 똑발랐다.
“잘 지냈나?”
김정철 회장이 진유성에게 다가오더니 악수를 건넸다.
꽤 살가운 태도였다.
좀 이상했다.
물론 진유성이 김정철 회장의 건강을 회복시켜 주긴 했다.
하지만 김정철 회장의 입장에서는 그저 우연으로 치부할 확률이 더 높았다.
요리가 맛있었다는 걸로 이 정도의 태도를 보이는 건,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어쩐 일로 보자고 하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