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135화>
* * *
5박 6일 일정의 수학여행 마지막 날 아침이 밝았다.
‘이상하다.’
‘왜 수학여행에서 혼난 기억밖에 없지?’
몇몇 학생들이 투덜거렸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기분이 나쁜 건 아니었다.
어쨌든 수학여행은 즐거운 행사니까.
그동안은 하루에 1~2개의 단체 일정만 소화하고 자유 시간을 보냈지만, 마지막 날은 아니었다.
아침을 먹고, 관광을 하고, 공항에 가는 것까지 꽤 빡빡한 스케줄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침을 먹고 그들이 향한 곳은 하이난의 대표 관광지인 원숭이섬이었다.
원숭이섬.
약 2,800여 마리의 원숭이가 야생 상태로 서식하고 있는 자연 보호 구역.
번식, 성장, 서열 체계 등 원숭이 사회를 눈앞에서 관찰할 수 있으며, 훈련받은 원숭이로 진행되는 서커스도 볼거리였다.
또한 섬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케이블카를 타고 바다 위를 지나는데, 케이블카에서 보는 수상 가옥도 꽤 장관이었다.
케이블카는 2인 1조로 타는데, 공교롭게도 진유성과 지종수가 같은 조였다.
지난 밤.
지종수는 진유성의 문자 때문에 변절자로 몰렸지만, 결국 무죄를 입증하는 데 성공했다.
하루 종일 심도훈과 붙어 다녔는데, 대체 언제 진유성과 음모를 꾸몄냐는 변론이 통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종수는 무죄를 입증했음에도 억울했다.
진유성은 문자 하나만 보내고 편안한 밤을 보냈는데, 자신은 그 문자를 해명하기 위해서 한 시간 동안 변명해야 했다.
선동은 쉽고, 해명은 어렵다.
케이블카에 올라타며 지종수가 입을 열었다.
“야, 진유성.”
“왜 그러느냐.”
“나한테 왜 그랬어?”
“뭘 말이냐?”
“어제 문자! 일부러 보낸 거지?”
“당연히 일부러 했지. 그럼 실수로 보냈겠느냐?”
진유성의 당당한 태도에 지종수가 어이없어지려는 순간, 진유성이 선심 쓰듯이 입을 열었다.
“가르침을 한 가지 주마. 세상에는 적을 구분하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적?”
“내가 일방적으로 때릴 수 있는 적, 서로가 서로를 때릴 수 있는 적. 나를 일방적으로 때릴 수 있는 적.”
“……?”
“첫 번째 경우에는 끝을 보는 게 아닌 이상 아량을 베푸는 게 좋다. 두 번째 경우에는 공격을 가할 경우 신중한 게 좋다. 세 번째 경우에는 굴욕을 참고 비위를 맞추는 게 좋다.”
지종수도 바보가 아니라서, 진유성이 하는 말의 내용을 대충은 이해했다.
하지만 이 말을 왜 하는지는 모르겠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너에게 나는 마지막 적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니 굴욕을 참고 비위를 맞춰라.”
“야, 이!”
지종수가 분노하는 순간, 케이블카가 원숭이 섬에 도착했다.
진유성은 시끄럽게 구는 지종수의 아혈을 짚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원숭이섬에 발을 디뎠다.
‘흠. 원숭이라.’
진유성은 원숭이와 관련된 재미있는 기억이 하나 떠올랐다.
후아주(?兒酒)라는 술이 있다.
무리를 지어 사는 원숭이들 중에는 먹다 남은 과일을 바위산의 틈들에 숨겨 놓는 부류가 있다.
한데, 원숭이들답게 본인이 숨기고도 어디에 숨겼는지 모를 때가 많다.
이런 과일들이 발효가 되면 술이 되고, 그 술이 바위산을 타고 흘러내리다 보면 어느 한 곳에 고인다.
그게 바로 후아주였다.
중원에는 후아주를 마셨다는 기록이 있긴 하나, 발견하기가 극히 어려워서 설화처럼 여겨지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진유성은 실제로 후아주를 마셔 본 적이 있었다.
생존대가 살기 위해 끝없이 남하하다가 바위산에 숨어든 적이 있었는데, 거기서 우연히 발견했었다.
맛은 그저 그랬다.
이야기 속에서는 천상의 맛이라고 했는데, 그냥 평범한 술이었다.
진유성은 과거를 떠올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정말 섬 전체에 원숭이들 천지였다.
나무에도 있고, 길에도 있고, 울타리가 처진 곳에도 있다.
그 사이 현지 가이드들이 돌아다니며 주머니나 가방에 손을 넣지 말라고 경고했다.
음식을 꺼내는 줄 알고 원숭이들이 달려들 수 있다고.
하지만…….
진유성이 누구던가.
하지 말라는 건 한 번쯤 해 봐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진유성이 주머니에 손을 넣자 원숭이들이 자신을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달려들진 않는다.
본래 짐승들은 인간보다 기감이 예민해서 자신보다 강한 이들을 쉽게 판별한다.
원숭이들이 보기에 진유성은 다가서기 두려운 존재였다.
끼끼기-
진유성이 나무의 원숭이에게 다가가니, 원숭이가 도망쳤다.
어미 원숭이도 다가와서 새끼를 품에 안고 뒷걸음질을 쳤다.
그 모습에 상소윤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야, 너 원숭이 때렸냐?”
“무슨 야만적인 소리냐. 난 말 못하는 짐승을 때리지 않는다.”
“그럼 사람은?”
“잘 안 때린다.”
“때리긴 때리나 보네?”
“짐승 같은 놈들은 때려 줄 때도 있지.”
“짐승은 안 때린다며?”
“어……?”
생각해 보니까 좀 모순이 있었던 것 같다.
진유성이 상소윤에게 손을 휘휘 저었다.
“저리 가라. 친구들이 찾는다.”
상소윤을 보낸 진유성은 다시 한번 원숭이에게 다가갔다.
진유성이 원숭이에게 다가가는 이유는 원숭이가 귀엽거나, 셀카를 찍기 위함이 아니었다.
호기심이 들어서였다.
멀더의 술법은 상대의 무의식에 새겨진 언어를 습득한다.
그러니 동물의 언어도 습득할 수 있을지가 궁금해졌다.
대부분의 동물은 안 될 것 같긴 한데, 원숭이는 유인원에다가 집단 사회를 구성하고 있다.
최소한의 언어 정도는 있지 않을까?
진유성이 그런 생각을 하며 나무 위에서 두려운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원숭이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진유성이 내공을 일주천한 것만으로도 두려움에 질려서 움직이질 못한다.
딱히 위협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았는데도 말이었다.
“흠.”
원숭이의 눈을 쳐다보던 진유성이 언어습득의 술법을 펼쳤다.
* * *
상소윤은 어깨에 올라간 원숭이를 쓰다듬으며 셀카봉을 들었다.
원숭이는 상소윤이 준 땅콩이 마음에 들었는지 얌전했다.
“얘네, 우리 말 알아듣는 거 같지 않아?”
“어느 정도는 알아듣지 않을까? 서커스도 한다던데.”
“원숭이들이 남자한테는 안 달려드는데 아이랑 여자들한테는 잘 달려든다잖아.”
“한 2~3살 지능 정도는 되지 않을까?”
상소윤과 친구들이 그런 이야기를 나누며 삼삼오오 떠들고 있는 순간, 정새롬이 상소윤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아, 왜 찔러.”
“야, 저거 진유성 아니야?”
“뭐? 어디?”
상소윤이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이상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웬 남자를 중심으로 원숭이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그냥 모여 있는 게 아니라 꼭 대장 앞에 정렬을 하는 것처럼 공손히 손을 모으고 있기도 했다.
“진유성 맞지?”
“옷이 맞는 거 같은데.”
뒷모습만 보이는데다가, 머리 위에 원숭이 한 마리가 올라가 있어서 잘 보이지 않았다.
한데, 진유성이 맞는 것 같다.
“동물들이 잘 따르네.”
“원래 바보랑 동물은 쉽게 친해진다잖아.”
상소윤의 말에 정새롬이 픽 웃더니 말했다.
“꼴등이 할 말은 아닐걸? 진유성이 몇 등인데.”
“꼴등 아니거든!”
상소윤이 투덜거리며 진유성에게 다가가니, 주변에 도열해 있던 원숭이들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
“진유성?”
진유성이 뒤를 돌아본다.
그리곤 입을 열었다.
“우끼기?”
“……미쳤냐?”
“어, 음. 아니다. 잠깐 헷갈렸다.”
“뭐가 헷갈려?”
“네가 생긴 게 원숭이 같아서.”
“뒤질?”
“주머니에 있는 땅콩을 내놓는다면 유혈 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하는 군.”
“누가?”
“얘가.”
진유성이 자신의 머리 위에 올라간 원숭이를 가리켰다.
“원숭이 말도 배웠냐?”
“생각보다 단어가 많다. 문장은 없지만. 아무튼 땅콩을 내놓아라.”
“이거 원숭이들 보는 앞에서 꺼내지 말라고 했는데.”
“괜찮다.”
진유성의 말에 상소윤이 주머니 안에 있는 땅콩을 꺼냈다.
본래 주머니에 손만 넣어도 달려드는 원숭이들인데, 이상하게 얌전했다.
원숭이한테 건네자, 원숭이가 맛있게 먹는다.
“얘네가 너무 맛있게 먹으니까, 나도 좀 배고픈 거 같아.”
“끼기.”
“뭐?”
“원숭이 성대모사를 연습하고 있었다.”
“근데 좀 비슷하다. 진짜 원숭이가 말하는 거 같아.”
멀더의 술법은 이게 문제였다.
‘나도 배고프다’란 말을 하려고 했는데, 언어가 섞였다.
앞으로 멀더의 술법은 동물을 상대로는 쓰지 말아야할 것 같았다.
* * *
원숭이 섬을 관광한 이후 점심을 먹은 대정고 학생들은 대관 버스를 타고 공항으로 향했다.
공항에 도착하니 12시가 막 넘은 시점이었다.
비행기 출발 시간은 17시이니, 무려 5시간이나 일찍 공항에 도착한 셈이었다.
탑승 절차를 밟는 시간을 생각해도 4시간 정도가 붕 떠 버린 상황.
하지만 이건 의도된 일이었다.
대정고의 마지막 일정은 면세점 쇼핑이었다.
각 반의 담임들이 버스 안에서 학생들에게 쇼핑 시 주의할 사항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주의 사항은 딱 하나였다.
“학교 이름 꺼내지 말란 이야기 들었지?”
쇼핑할 때 괜히 대정고란 단어를 꺼내지 말라는 것.
학생들이 무지막지한 돈을 써 댈 것이 분명한데, 외부에 알려지면 괜히 대정고 이미지만 안 좋아진다.
그 뒤로 대정고 학생들은 출국 절차를 밟은 다음에 면세점으로 들어섰다.
삼삼오오 모여서 쇼핑을 하는 이들도 있었고, 혼자서 쇼핑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진유성은 후자의 부류였다.
진유성이 쇼윈도에 전시된 물건들을 보며 서성거리고 있는데, 지나가던 지종수, 심도훈, 고인수가 이 진유성을 발견했다.
“여기서 뭐 하냐, 진유성?”
“가게에서 뭘 하겠나? 물건을 보고 있지.”
“아니, 그러니까 여기서 왜 보고 있냐고. 이거 여자 브랜드인데?”
“내 물건을 사는 게 아니다. 유, 소윤이 어머니의 물건을 사는 거다.”
유혜연이라고 말할 뻔 했던 진유성이 부드럽게 말을 돌렸다.
진유성은 면세점에서 딱히 살 것이 없었다.
그가 보고 있는 것은 유혜연의 물건이었다.
진유성의 말에 깜짝 놀란 것은 지종수였다.
“소윤이 어머니 걸 산다고?”
“그렇다.”
“왜?”
“왜긴. 밥도 자주 얻어먹고, 집에도 자주 놀러 가니까.”
‘자주’가 아니라 ‘매일’이지만, 거기까지 말할 순 없었다.
“그, 그럼 나도! 나도 살래.”
“그걸 왜 나한테 허락을 받냐?”
진유성은 이제 지종수가 상소윤에게 마음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더럽게 맛없는 상소윤의 요리를 먹고 맛있다고 할 때 처음으로 의심을 했고, 그 뒤로 확신을 얻게 되었다.
“너 소윤이 어머니 취향 알아?”
“잘 모른다. 그냥 너무 화려하지 않은 걸 좋아하는 정도만 안다.”
그렇게 말한 진유성이 물건을 구경하자 심도훈, 고인수가 어깨를 으쓱했다.
“둘이 쇼핑해라.”
그리곤 사라졌다.
진유성은 그 뒤로 지종수와 함께 면세점을 돌아다녔다.
지종수는 무조건 진유성이 고르는 것보다 더 좋고 비싼 것들을 찾아 헤맸다.
진유성은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소윤이 아버지 거는 안 사냐?”
“너는?”
“난 이제부터 살 거다.”
“그럼 나도 사야지!”
“내가 소윤이 아버지의 취향은 정확히 알고 있다.”
“그래?”
“그래. 일단 이걸 사는 게 좋을 것 같군.”
진유성이 비싸 보이는 가방을 가리키자, 지종수가 멈칫하더니 물었다.
“너 설마 선물을 중간에서 낚아챌 생각은 아니지?”
“무슨 바보 같은 소리냐. 선물들은 상소윤을 통해 전달해야지. 설마 나한테 전달을 부탁하려고 했느냐?”
“아, 그치. 소윤이한테 줘야지.”
잠깐 의심의 시선을 보내던 지종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유성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지종수의 어깨를 토닥였다.
“친우 아버님께 선물을 하겠다는 그 마음이 갸륵하구나. 내가 좀 도와주마.”
“정말?”
“그래. 내가 상소윤 어머니의 취향은 모르지만, 아버지의 취향은 아주 아주 정확히 알고 있다.”
“어…… 뭔데?”
“일단 상소윤 아버지는 비싼 걸 좋아한다. 비싸고 희귀한 것들.”
진유성은 그 뒤로 이런저런 물건들을 가리켰다.
“이걸 사면 소윤이 아버지께 많은 점수를 딸 수 있을 거다.”
진유성이 지종수가 비싼 물건들을 두고 고민할 때마다 은근히 부채질을 했다.
“소윤이 아버지가 실망하겠군. 이건 그분이 제일 좋아하는 브랜드인데.”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지종수는 자신이 생각보다 많은 물건을 샀다는 걸 깨닫고는 화들짝 놀랐다.
하지만 이미 쓴 돈이 아깝진 않았다.
이걸 받고 상소윤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좋아한다면 그거면 된 거다.
“야, 이미 예산 초과야. 그만 사야겠다.”
“그렇군.”
“그, 도와줘서 고맙다. 진유성.”
“아니다.”
진유성이 온화하게 웃었다.
고마운 건 오히려 진유성이었다.
이제 이 물건들은 그의 것이니까.
그렇게, 돈 한 푼 들이지 않은 즐거운 쇼핑을 마지막으로 수학여행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