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134화>
여학생들의 방에서 빠져나온 상소윤이 엘리베이터를 통해 6층으로 향하는 사이.
진유성은 자신의 숙소에서 피식 웃고 있었다.
이 자식들이 모여서 뭘 하나 싶었는데, 재밌는 걸 준비하고 있었다.
낚시에 대한 음모는 해안가에 있는 요트 대여장에서 꾸민 거라 듣지 못했었다.
물론 진유성은 마음만 먹으면 이곳에서 수 킬로미터 떨어진 해안가에서의 소리까지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위험 상황일 때나 그렇게 하는 것.
호텔 안에서까지 모든 소리를 듣진 않았다.
개인이 휴식을 취하는 공간이기에, 프라이버시를 존중해 소리를 흘리는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 ‘진유성’이란 이름을 입에 담는 순간, 진유성의 방어 기제가 형성되며 기감이 확장된다.
그래서 지종수의 음모를 파악할 수 있었다.
섯다.
중원에 없는 놀이였지만, 잘 알고 있었다.
타짜란 영화를 봤기 때문이었다.
“흠.”
하지만 역시 지종수는 바보 같다.
운에 맡겨서 대결을 하면 이길 수도 있는 건데, 왜 자꾸 수작을 부리는지 모르겠다.
이러면 참을 수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이것은 진유성의 자기합리화였다.
진유성은 지종수가 정정당당하게 대결을 한다고 해도, 패배가 근처까지 다가오면 내공을 쓸 확률이 매우 높았으니까.
그 순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여니 상소윤이 서 있었다.
“상소윤. 안 그래도 널 찾고 있었다.”
“응? 왜?”
“심심한데 화투 같은 건 안 하느냐? 수학여행의 꽃이라던데?”
“어…… 섯다 할 줄 아냐? 안 그래도 우리 섯다 하려고 했는데.”
“대충. 영화에서 봤다.”
“한판 하실?”
“좋지.”
말이 길어질 필요를 못 느낀 진유성이 선수를 치자, 상소윤이 앞장서더니 물었다.
“로비로 갈까?”
“로비는 왜?”
“거기 ATM기 있잖아.”
“현금 있다.”
진유성은 혹시 몰라서 인벤토리에 현금을 좀 넣어 다니는 편이었다.
잠시 뒤, 진유성은 여학생들의 방으로 들어왔다.
여섯 명의 학생들이 어딘지 자신만만한 태도로 앉아있었다.
지종수가 테이블 아래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말했다.
“잔돈 없을 거니까, 돈을 걸면 칩으로 바꿔 주지.”
“칩?”
지종수가 꺼낸 것은 바둑돌이 담긴 통이었다.
“검은 돌은 만 원, 하얀 돌은 오만 원.”
지종수가 꽤 구체적인 제안을 했지만, 진유성은 순간 바둑돌에 흥미가 동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중원은 놀 거리가 별로 없는 곳이었다.
물론 뱃놀이, 투전, 사냥, 활쏘기 등등 기본적인 유희거리는 있었다.
하지만 썩 재미있는 놀이는 아니었다.
특히 진유성 정도의 무인이 즐길 만할 거리는 더더욱 아니었다.
활을 쏴 봐야 백발백중이며, 사냥을 해 봐야 하품이 나고, 뱃놀이를 할 바에는 등평도수를 하는 게 나았으니까.
그래서 진유성은 중원에서 별다른 유희를 즐기지 못했다.
제일 재밌는 건 상림을 갈구는 것이었지.
그러나 이런 진유성도 꽤 오랫동안 즐긴 취미가 있었다.
바로, 바둑이었다.
바둑이 재밌는 이유는 진유성이 롤에 빠졌던 이유와 비슷했다.
무공의 고하가 승부의 향방을 결정짓지 않으니까.
물론 무공이 드높으면, 기초 체력이 튼튼하고 순간 집중력이 뛰어나서 유리한 부분이 있다.
하지만 고금제일무인이 고금제일국수냐면 그건 당연히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진유성은 50년 정도 바둑을 뒀다.
신주청, 상림, 멀더가 있을 때는 즐기는 수준이었고, 친우들이 모두 죽고 나서는 식음을 전폐하고 바둑만 둔 적도 있었다.
너무 고독했기 때문이었다.
수 싸움에 열중하는 순간은 그 고독함이 사라졌고.
그 결과, 진유성은 20년 만에 바둑의 최강자로 불리던 제갈세가주와 송백세가주를 모두 꺾었다.
다음으로 대명제국에 존재한다는 모든 은거기인을 초대했다.
그래서 바둑을 뒀는데, 모두 제갈세가주나 송백세가주보다 못했다.
공식적으로 대명제국에서 바둑을 가장 잘 두는 이가 진유성이었단 말이었다.
한국에 와서는 재미있는 유희거리가 많아서 바둑에 시선도 두지 않고 있었는데…….
바둑돌을 마주하고 있으니 갑자기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
“흐음.”
진유성이 손을 뻗어서 바둑돌을 만져 보았다.
미끈미끈하다.
돌이나 나무, 때론 철을 깎아 만들던 중원의 바둑돌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촉감이었다.
“이건 뭘로 만든 것이냐?”
“뭐? 바둑돌?”
“그래.”
“몰라? 플라스틱 같은 거 아닌가?”
“아닐걸? 돌 아니야?”
“바둑의 규칙은 그대로냐?”
“그대로? 뭘 기준으로 그대로야?”
지종수가 고개를 갸웃했지만, 상소윤은 질문을 바로 이해했다.
한국과 북한의 바둑 규칙이 그대로냐는 질문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북한이라는 단어 대신, 상소윤은 중국이라는 단어를 꺼냈다.
공식적으로 진유성은 어린 시절을 중국에서 보낸 것으로 되어 있다.
“당연히 그대로지, 멍청아. 중국이랑 한국이랑 다르겠냐?”
“그렇군.”
생각해 보니까 좀 이상하다.
진유성은 한국에 온 초창기에 TV를 정말 많이 봤었는데, 바둑을 두는 모습은 보지 못했던 것 같다.
‘바둑이 인기가 없는 세계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정새롬이 충격적인 말을 꺼냈다.
“근데 바둑은 알파고 이후로 TV에서 잘 안 보이더라.”
“알파고 때문 아니야? 알파고가 무슨 프로들 두는 인터넷 대국에서 100연승인가 했다던데.”
“아, 진짜?”
“어. 이제 인간이 인공지능한테 범접할 수 없다던데?”
실제로는 60연승이지만, 고인수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이제는 인간이 기계들끼리의 기보를 두고 공부를 하는 시대가 왔다.
그리고 이 말이 진유성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기계가 인간을 이겼다고? 바둑으로?”
“어.”
“어찌 그럴 수가 있지? 기계에게도 기풍이 있나? 인간에게 심리전을 걸 수가 있다고?”
“몰라. 직접 찾아봐. 근데 너 바둑 두냐?”
“옛날에 좀 두었다.”
진유성은 한국에 도착한지 7개월밖에 되지 않았다.
7개월 만에 현대 사회에 이만큼 적응한 건 대단한 일이었지만, 과거의 사건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그렇기 때문에 인공지능 바둑에 대한 이야기는 난생 처음 들어 보는 이야기였다.
‘인공지능이라고?’
호기심을 느낀 진유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
“숙소로 가야겠다.”
그러자 지종수가 말했다.
“쫄았냐? 돈 잃을까 봐?”
“…….”
지종수를 쳐다보던 진유성이 자리에 앉았다.
기록이 어디 도망가는 것도 아니고 바둑에 대해서는 나중에 찾아봐도 된다.
감히 천신을 도발한 지종수를 혼쭐내 준 뒤에.
“100만 원을 걸지.”
진유성이 지갑에서 100만 원을 꺼내고는 검은 바둑돌 50개와 흰 바둑돌 10개를 챙겼다.
사실은 지갑에서 꺼내는 척 인벤토리에서 꺼낸 것이었지만.
진유성이 100만 원을 걸자 연합군이 시선을 교환했다.
진유성이 많아 봐야 50만 원 정도만 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통이 컸다.
그들이 아무리 팀을 먹었다고 해도 판돈 자체에서 밀려 버리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모두가 앞다퉈서 100만 원어치를 교환했다.
진유성은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었다.
본래는 어느 정도 어울려 줄 생각이었는데, 마음이 바뀌었다.
빨리 숙소로 올라가고 싶어졌다.
잠시 뒤, 선수를 잡는 가위 바위 보가 시작되었다.
당연히 가위 바위 보에서 이긴 건 진유성이었다.
“아니, 진유성은 맨날 가위바위보 이기는 거 같아.”
“실력이다.”
“가위바위보에 실력이 어딨어?”
“내 안에 있다.”
패를 잡은 진유성이 내공을 움직였다.
진유성은 도박사들의 기술을 알지 못한다.
그들이 어떻게 패를 조종하고, 어떤 패를 누구한테 주는지 방법을 모른다.
물론 연구를 하면 알 수는 있겠지만, 이런 건 경험의 문제였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위에 프린트 된 그림을 읽고 외우면 된다.
시각장애인들이 점자를 읽듯이, 진유성의 압도적인 감각으로 어떤 그림이 인쇄되어 있는지를 읽는 것이었다.
패도 고작 20장밖에 되지 않기에, 외우기도 쉬웠다.
진유성은 패를 섞으며 원하는 대로 배치했다.
그리곤 입을 열었다.
“싸늘하다. 비수가 날아와 가슴에 꽂힌다.”
진유성이 이 주접을 떨 것을 예상하지 못한 연합군이 아니다.
그들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지종수에 밑에서 한 장. 상소윤에게 밑에서 한 장…….”
밑에서 준다는 진유성의 말에 모두가 눈을 크게 떴지만, 알 수가 없었다.
손이 휙휙 움직이는 게 너무 빨랐다.
진유성의 주접에 반응하지 않기로 굳게 다짐했건만, 실패다.
“야! 너 진짜 밑에서 주는 거 아니지?”
“아니다.”
그렇게 모두에게 패가 들어갔다.
연합군들의 수신호가 바쁘게 오갔다.
현재 게임에 참여한 이들은 진유성, 지종수, 상소윤, 심도훈, 정새롬, 총 다섯이었다.
‘9끗.’
‘나도 8끗.’
‘난 망했음.’
‘나도 망함.’
정새롬만 9끗이었다.
그 순간, 진유성이 바둑돌을 전부 내밀었다.
“100만 원.”
모두의 시선이 정새롬에게 쏠렸다.
당황한 정새롬이 죽었다.
9끗이면 강한 패지만, 올인을 할 자신은 없었다.
정새롬이 죽자 다른 이들도 모두 죽었다.
“너 뭐야?”
상소윤의 물음에 진유성이 패를 보여 주었다.
8끗이었다.
“아!”
진유성을 이길 수 있었지만, 쫄았던 정새롬이 입술을 깨물었다.
“아수라 발발타…….”
진유성이 다시 주접을 떨면서 패를 나눠 주고는 이번에도 100만 원을 한 번에 걸었다.
상소윤이 자신의 패를 쳐다보았다.
9끗.
이길 수도 있는 패다.
하지만 끗에 100만 원을 어떻게 한 번에 태워?
9끗인 상소윤이 죽자, 모두가 또 죽었다.
그러자 진유성이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자신의 패를 보여 주었다.
3끗.
처참하게 낮은 패였다.
“멍청이들.”
진유성의 도발에 모두가 부들거리는 사이 승리한 진유성이 다시 패를 잡았다.
패를 분배하자 바쁘게 수신호가 오간다.
‘나 땡.’
‘나도 땡.’
지종수와 심도훈이 땡을 잡았다는 신호를 보내자, 정새롬과 상소윤이 죽었다.
“10만 원.”
그 순간, 진유성이 판돈을 확 낮췄다.
“98만 원.”
“나도 98만 원.”
이때다 싶어서 지종수와 심도훈이 있는 돈을 다 털었다.
둘 중 누가 이길지는 몰랐다.
수신호가 너무 많으면 복잡하기 때문에 몇 땡인지에 대한 수신호는 정하지 않았으니까.
“후후후.”
진유성이 웃는 순간, 갑자기 모두가 불안해졌다.
왜 100만 원씩 걸다가 갑자기 10만 원만 걸었을까?
판돈을 98만 원으로 맞춘 진유성이 패를 내밀었다.
10(장) 두 개가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장땡이었다.
* * *
단 3게임 만에 심도훈과 지종수가 탈락하자, 게임은 확 기울었다.
그 뒤로도 진유성은 상대가 가진 모든 돈에 맞춰서 판돈을 걸었고, 상소윤과 정새롬은 연신 죽기만 했다.
두 사람은 신중하게 반전을 노렸지만, 반전은 없었다.
모든 돈을 잃고는 패배자가 되었다.
그 순간이었다.
모든 돈을 챙긴 진유성이 패배자들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100만 원씩을 돌려주었다.
“이걸 왜……?”
“난 처음부터 돈을 따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저 추억을 쌓고 싶었을 뿐이지.”
모두가 ‘이건 또 무슨 개수작이지’하는 눈빛을 보냈지만, 진유성은 정말로 돈을 돌려줬다.
“난 숙소로 올라가마.”
그리곤 자리에서 일어나서 방을 빠져나갔다.
진유성이 사라지자 찜찜한 침묵이 맴돌았다.
“아, 뭔가 좀 그런데.”
“그니까. 진유성도 우리가 편먹은 거 눈치 챈 거 같던데.”
“우리도 돈을 돌려줄 생각이긴 했는데…… 오해하면 어쩌지?”
학생들이 한두 명씩 그런 말을 하다가 지종수를 쳐다보았다.
“아, 종수. 네가 괜히 하자고 해서.”
“그니까.”
“카톡이라도 보내 볼까?”
지종수의 얼굴도 괜히 찜찜해졌다.
요트비를 낸 뒤 섯다를 기획하긴 했으나, 생각해 보니까 진유성 입장에서는 서운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자신의 돈을 털어먹기 위해서 모두 음모를 꾸몄다는 게 티가 났을 거니까.
그 순간이었다.
지종수의 핸드폰이 지잉 울렸다.
지종수가 핸드폰을 보며 반색했다.
“진유성한테 카톡 왔다.”
“뭐래?”
“뭐라고?”
학생들이 모여들자, 지종수가 메시지를 터치했다.
그러자…….
[미안하다. 아무리 요트비 때문이라고 해도, 차마 얘들의 돈을 가져올 수가 없었다.]
[네가 패를 알려줬다는 이야기는 끝까지 하지 않으마. 이 메시지도 보고 지워라.]
지종수가 화들짝 놀라서 주변을 돌아보니.
“…….”
“……요트비 준다고 할 때는 내기라며 거절하더니.”
모두가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쩐지 이상하다 싶었다.
진유성이 꼭 그들의 패를 알고 있는 것처럼 대처했으니까.
“……지종수.”
“아, 아니야! 절대 아니야!”
그때 호텔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장난을 친 진유성이 돌아왔다고 생각한 지종수가 후다닥 문을 열었다.
“야! 사기 도박……!”
그러나 진유성이 아니었다.
“사기 도박?”
그들의 담임 연기훈이었다.
연기훈에 눈에 보인 것은 학생들이 수북히 들고 있는 만 원, 오만 원짜리와 화투패였다.
얼추 봐도 판돈이 몇백만 원이다.
“야 이 미친놈들아! 내가 카드 칠 거면 십만 원이하로 하라고 했지!”
숙소에서 3층의 소리를 듣고 있던 진유성이 머리를 긁적였다.
이번에 연기훈이 찾아온 건, 진유성이 계획한 일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