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128화>
진유성의 검에 살기는 없었다.
하지만 소름 끼치도록 날카로운 예기(銳氣)가 담겨 있었다.
진유성에게 사술이나 환술은 통하지 않았다.
이는 멀더가 직접 증명했던 것인데, 진유성의 정신 방벽이 너무나 강해서 인간의 술법으로는 감히 범접할 수 없었다.
아마 눈앞의 여자도 인간이 아닌 듯했다.
상실의 공간.
그곳에서 만났던 미증유의 존재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진유성의 검이 공간을 격하며 날아갔다.
그러자 여자가 마주 손을 휘둘렀다.
갑자기 공간이 늘어나며 진유성과 여자의 거리가 10장이 넘게 벌어졌다.
[그만둬요. 우리는 싸울 이유가 없어요.]
“네가 날 시험했듯, 나도 널 시험하는 것이다.”
[제가 일부러 당신의 과거를 상기시킨 건 아니에요. 그저 전지(全知)의 시험이 당신의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을 재현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시험을 시작한 건 너다.”
[맞아요. 하지만 말했다시피…….]
“네가 뭐하는 놈인진 모르겠으나, 진정 나를 시험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나?”
[당신은 아카샤에 대해서 알고 있지 않나요?]
진유성은 록펠러의 지식을 얻어 아카샤(?k??a)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아카샤.
이 세계를 경영하는 의지.
구체적인 형상을 띄는 건 아니지만, 신이라고 봐도 무방한 존재.
세쌍둥이가 게이트를 만든 것도, 이종의 기운을 배척하는 아카샤의 의지를 우회하기 위함이었다.
그 순간, 여자가 놀라운 사실을 말했다.
[전 아카식 레코드의 관리자이자, 아카샤의 화신(化神)인 타트바입니다.]
“어쩌라고?”
[…….]
“신이 인간을 시험하고 재단할 수 있는 이유는 신이라서가 아니다. 그저, 신이 인간보다 강하기 때문이지.”
진유성의 검에 다시 한 번 의념이 모여들었다.
“그러니 네가 정말 신이라면 내가 내리는 시험을 통과해라. 그 후에 대화란 걸 해 보자고.”
진유성의 변치 않는 의지에 타트바가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을 내쉬는 모양이 꼭 인간처럼 보였다.
상실의 공간 안에서 만난 존재는 인간적인 면모를 전혀 보이지 않았는데 말이었다.
[이곳은 허공무위(虛空無爲). 물질적 변화와 무관한 공간입니다. 당신이 인간임을 갈구하는 이상, 우리의 싸움은 평행선을 달릴 뿐입니다.]
진유성은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다시 한 번 검을 곧게 뻗었을 뿐이었다.
진유성이 짓쳐 들자, 타트바가 다시 한 번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진유성과 타트바 사이에 또다시 10장이 넘는 공간이 생긴다.
진유성은 그 뒤로도 비슷한 행위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타트바는 진유성의 행동을 무의미하다고 보는 듯했다.
[당신이 나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뿐입니다. 인간임을 포기하는 것이죠.]
“인간이 인간임을 포기하라고?”
타트바가 선언했다.
[당신은 인간이 아닙니다.]
[아무리 무공이 고강한들, 인간이 백 년이 넘게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무런 노화도 없이?]
[진실로 인간이 상실의 공간에서 위상(位相)의 수호자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50년 전의 진유성이었다면 타트바의 말이 번뇌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었다.
분명 자신이 인간인지 고민했던 때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확고했다.
그는 인간이었다.
[본래 입멸공을 얻은 순간 그대는 인간의 태를 벗어던졌어야 합니다.]
[입멸공은 인간이 품을 수 있는 힘이 아닙니다.]
[그대가 인간인 채로 입멸공을 품었다는 것 자체가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힘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가 인간인 이상 너에게 닿을 수 없다?”
[그렇습니다. 이곳은 허공무위의 공간이니까요.]
진유성이 피식 웃었다.
록펠러도 그렇고, 타트바란 놈도 그렇고.
다들 스스로의 지식을 지나치게 과신하는 면이 있었다.
게다가 말도 더럽게 많았다.
진유성이 검을 바닥에 꽂아 버린 뒤, 주먹을 쥐었다.
“네가 정말 신이라면 말해 봐라. 삼적천능보란 무공에 대해서.”
[그대가 중원에서 얻은 것을 알 순 없어요. 중원은 차원 위상이 달라, 아카식 레코드에 기록되는 세계가 아닙니다.]
“본래 삼적보는 멸마대의 보급 무공이었다. 하지만 삼적보로 소림의 백보신권을 격파하고 나서 이름을 바꿨다.”
삼적천능보(三積天凌步).
세 걸음이 쌓이면 능히 하늘도 내려다보리라.
여기서 말하는 세 걸음은 사전적 의미의 걸음이 아니었다.
고려의 왕자에서 멸마대주로, 멸마대주에서 생존대주로, 천마로, 천신으로.
그는 변해 갔지만, 변함은 사라짐을 의미하지 않았다.
과거의 것들이 누적됨을 의미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인간이었다.
문득 궁금해졌다.
정말 인간으로 하늘을 내려다볼 수 있는지.
눈앞의 존재가 정말 신이라면 하늘이라고 표현해도 괜찮지 않겠는가?
진유성이 진각을 밟았다.
쿵-!
오른발이 바닥을 내딛는 순간.
또다시 그와 타트바 사이의 공간이 확장되었다.
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쿵-!
두 번째 발걸음을 내딛자, 공간의 확장과 진유성의 진격의 속도가 일치했다.
공간이 확장되는 속도만큼 진유성이 나아갔다는 뜻이었다.
쿵-!
마지막 걸음을 내디뎠다.
마침내 진유성이 나아가는 속도가 공간의 확장 속도보다 빨라졌다.
입멸공을 몸에 품을 수 없다고?
우스운 소리.
그의 주먹에 맺혀 있는 기운은 생사입멸을 관장하는 힘이었다.
물론 입멸검으로 사용하는 것처럼 완벽하지 않았다.
투박하지만 그럼에도 진유성은 나아갔다.
그는 완벽함으로 치장한 신이 아니었다.
그저 한 걸음, 한 걸음 아등바등 걸어온 인간이지.
그러니 신이란 허울 좋은 포장지는 그의 노력과 절실함을 모독하는 단어였다.
투-쾅!
진유성의 주먹이 공간을 격하고 타트바를 노렸다.
타트바가 당황해 손을 휘둘렀지만, 소용없었다.
공간이 으깨지며 진유성의 주먹이 타트바를 후려쳤다.
화아아악!
빛이 번져 나갔다.
타트바가 등장하면서 나타났던 빛이 희미해졌다.
빛이 사라지며 나타난 것은 끝도 없이 펼쳐진 거대한 도서관, 아카식 레코드.
아카샤 내의 모든 색(色 : 물질)의 변화를 기록해 놓은 허공록(虛空錄).
그 전체가 흔들리고 있었다.
책장에 꽂힌 책이 금방이라도 바닥에 떨어질 듯 격동했다.
[말도 안 돼!]
타트바가 당황하며 손을 마구 흔들자, 도서관의 진동이 잠잠해졌다.
떨어지던 책도 제자리로 돌아갔다.
[당신은 방금 기록을 혼재시킬 뻔했어요!]
“그게 내 탓이냐? 시험 같은 거 하지 말고 공손하게 인사했으면 이런 일도 없었잖아?”
진유성의 당당한 태도에 타트바는 할 말을 잃었다.
이건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아무리 진유성이 거력을 품고 있긴 하나, 그것은 분명 인간의 형상 아래 숨겨져 있었다.
그런 상태로 허공무위의 근간을 흔들었다는 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타트바는 문득 그런 의심이 들었다.
진유성은 입멸공을 품어서 강해진 게 아니라, 본래 강했던 것이 아닐까?
그사이, 진유성은 고민하고 있었다.
한 방 먹이긴 했으나, 딱히 상대에게 타격이 있는 것 같진 않았다.
좀 더 고분고분하게 만들까, 아니면 대화를 할까.
“근데 왜 이렇게 허약해?”
상실의 공간 안에서 만났던 존재는 강했다.
진유성이 이기긴 했으나, 다시 싸운다면 어떻게 될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타트바라는 존재는 딱히 강한지 모르겠다.
[저는 전지한 존재입니다. 전능한 존재가 아니라.]
“그러니까 아는 건 많지만, 할 수 있는 건 없다?”
[아카식 레코드는 관찰하고 기록할 뿐입니다. 관찰과 기록의 첫 번째 원칙은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는 것이고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일단 입멸검이나 내놔.”
진유성이 정말 타트바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그는 뛰어난 오성을 가지고 있기에 타트바의 말을 근거로 대충 상황을 이해했다.
그가 중원에서 입멸공을 얻었던 시험은 전능의 시험.
오늘 여기서 통과한 시험은 전지의 시험.
합치면 신을 수식하는 전지전능(全知全能)이 된다.
그러니 이곳은 신과 관련이 있는 공간이리라.
눈앞의 놈은 전지, 혹은 아카샤와 관련된 뭔가였고.
하지만 진유성은 관심이 없었다.
신이고 나발이고 입멸검만 얻어서 나가면 소기의 성과를 달성하는 셈이었다.
신체를 기반으로 입멸공을 쓴다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입멸공을 견디지 못한 검이 부서지는 것처럼, 육신이 부서질 수도 있었다.
그러자 타트바가 눈을 크게 떴다.
[당신에게 입멸검이 없나요?]
“없지. 상실의 공간에 놓고 왔는데.”
[그게 무슨……? 당신이 상실의 공간에서 지킨 것은 무(武)가 아니었나요?]
“아닌데? 그건 9할을 놓고 왔지.”
[마, 말도 안 돼!]
“아니, 이 자식 어이없네. 전지(全知)라면 모든 걸 알아야 하는 거 아니야?”
사기꾼이 아닌지 의심이 간다.
[당신의 고향과 상실의 공간은 위상이 달라요. 제가 기록하는 공간이 아닙니다.]
“아까부터 위상, 위상 그러는데 그게 대체 뭐야?”
타트바란 놈은 상실의 공간에 기거하는 미증유의 존재를 ‘위상의 수호자’라고 불렀다.
너무 낯선 단어라서 듣고도 딱히 짐작되는 게 없었다.
진유성이 묻건 말건, 타트바는 혼란스러워할 뿐이었다.
기다리는 게 지겨워진 진유성이 입멸검을 직접 뒤져 볼까 생각하는데, 타트바가 입을 열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진실을 보여 드리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겁니다.]
그러며 손을 들다가 멈칫했다.
[환상을 보는 데 동의하세요?]
무슨 개인 정보 동의라도 구하는 듯한 타트바의 태도에 진유성이 피식 웃었다.
한 대 맞았다고 좀 고분고분해진 것 같기도 했다.
별 타격이 없는 줄 알았는데, 의외로 타격이 있는 건지도 몰랐다.
“무슨 환상인데?”
[이 세계의 진실에 대한 환상입니다.]
“돈 내야 하는 거 아니지?”
[아닙니다.]
“드루와.”
[…….]
타트바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손을 휘둘렀다.
그러곤 경악했다.
[어떻게?!]
“아, 되나 안 되나 심심해서 해 봤어. 다시 해.”
진유성은 타트바가 보여 주는 환상을 거부해 보았고, 그건 성공했다.
신화적인 존재의 힘을 거부할 수 있다는 걸 재차 확인한 셈이었다.
타트바는 당황스러워하는 것 같았지만, 이내 다시 손을 휘둘렀다.
이번엔 거부하지 않았다.
진유성의 눈앞에 타트바가 보여 주려는 진실이 피어올랐다.
* * *
진유성의 고향인 중원.
현재 살고 있는 지구.
이 두 곳은 본래 동일한 행성의 쌍둥이 차원이었다.
남극과 북극을 통해 어렵지 않게 오갈 수 있었으며, 발전의 정도도 비슷했다.
만약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면, 두 차원의 주민들은 계속해서 교류를 했을 것이다.
문제는 두 차원의 위상(位相)이 같았기 때문에, 같은 에너지를 공유한다는 것.
문명이 발전하고 인구가 많아질 수록 서로에게 악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그래서 전지전능한 존재는 두 세계에게 독립성을 부여하기로 결정했다.
일란성 쌍둥이도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아가면 다른 인간이 되는 것처럼, 세계도 마찬가지였다.
두 세계를 분리하고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위상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세계의 위상을 변화시킨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나 같은 신 아래에서 탄생한 세계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그래서 세계를 창조한 존재는 죽음을 선택했다.
자신의 몸을 반으로 나눠서 중원에는 전능을 남겼고, 지구에는 전지를 남겼다.
중원에서 무공과 마도술이 발달한 이유가 이것이었고, 지구에서 문명과 과학이 발달한 이유도 이것이었다.
동시에, 두 차원의 위상이 침범하는 일이 없도록 상실의 공간을 만들었다.
두 세계를 오갈 수 있는 존재가 나타나더라도 가장 소중한 무언가를 남기고 가야 했다.
함부로 세계를 건너뛸 수 없도록.
소중한 것을 위해 본래의 세계로 되돌아가도록.
애초에 상실의 공간은 건너뛰는 건 어렵고, 포기하는 게 쉽도록 설계된 장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