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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127화 (127/337)

<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127화>

Quest 24. 조우한 천마님

놀라운 일이었다.

진유성은 자신의 주변을 백팔방위로 나누고, 그것을 다시 삼재로 나누어서 인지하는 고수이다.

인지하는 거리는 상황의 위험 정도에 따라서 다르긴 하다.

하지만 지금처럼 주변에 시야를 가리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을 때는, 꽤 먼 거리까지 인식한다.

그러니 파도밖에 없는 바다 위에서는 어림잡아 1km까지는 인지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눈앞에 홀연히 나타난 섬과의 거리는 1km 이내.

그의 인지 범위를 뚫고 갑자기 나타났다는 것은, 저 섬이 평범한 자연 현상은 아니라는 걸 뜻했다.

‘설마 여기에도 입멸공이 있는 건가? 여긴 이종의 기운을 배척한다고 했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섬을 살폈다.

섬의 외관은 기억 속의 모습과 완전히 일치했다.

놀랍기도 하고, 기묘하기도 했다.

섬을 쳐다보던 진유성이 마음을 정했다.

그는 어떤 상황을 눈앞에 두고 머뭇거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상황에 치이는 것보다는 한 발 빠르게 상황으로 뛰어드는 것을 좋아하기도 했고.

그 순간, 진유성을 향해 거대한 파도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본래 파도가 잔잔한 밤이었는데, 갑자기 나타난 섬 때문에 해류가 급격하게 밀려난 것 같았다.

이는 저 섬이 파도에 영향을 주는 실존하는 무언가란 뜻이었다.

수우우우우-

거대한 파도가 진유성을 덮치는 순간.

훌쩍 몸을 띄운 진유성이 파도의 가장 높은 부분을 발로 밟았다.

쾅!

거대한 파도가 산산이 부서지며 엄청난 물보라가 튀었다.

진유성은 진각의 반탄력을 이용해서 섬으로 쏜살같이 날아갔다.

섬에 도착한 진유성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가 기억하던 모습과 모든 것이 똑같았다.

사방에 온갖 기화요초가 널려 있고, 둥글둥글한 바위와 우거진 숲이 있었다.

그건 지금도 같지만…….

한 가지가 달랐다.

“뭐야, 이건?”

인위적이었다.

나무, 풀, 바위.

섬의 모든 것이 바둑판처럼 딱딱 정렬되어 있었다.

나무의 키와 바위의 간격이 일정하다. 심지어 풀이 자라나 있는 방향까지 똑같았다.

정리 강박증을 앓고 있는 신이 만든 듯한 섬이었다.

“흠.”

호기심을 느낀 진유성이 발로 바위를 밀어 보았다.

그러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역시 인위적이다.

더 힘을 주면 부숴 버릴 수는 있겠지만, 굳이 그럴 이유를 느끼진 못했다.

딱딱 정렬되어 있는 게 좀 징그럽긴 했지만, 진법 같은 건 아니었으니까.

진유성은 곧장 섬의 중앙으로 향했다.

‘이쯤에서 주청이랑 싸웠던 거 같은데.’

주청이는 참 좋은 놈이었다.

처음엔 자신에 대한 경쟁의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나중에는 삶 전체를 온전히 맡겨 왔다.

마지막도 그렇다.

신주청은 본래 30~40년은 더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긴 세월을 홀로 살아갈 자신을 위해 벽을 넘으려다가 소천했다.

그게 너무나 아쉬웠다.

함께 지구로 건너와서 상림과 셋이 지냈으면 참 좋았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걷고 있는데.

고오오오오오-

정돈된 숲 너머로 거대한 기운을 품고 있는 진법이 보였다.

‘여길 들어가면 입멸공을 두 번 얻는 건가?’

그건 별로 의미가 없다.

어차피 입멸공은 인간이 전부 품을 수 없는 힘이다.

입멸공(入滅功)은 인과(因果)를 다루는 힘이다.

세상 만물이 들어서(入)고 소멸하는(滅) 것을 무(武)와 공(功)의 형태로 표현할 뿐이다.

진유성이 게이트를 찢고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아마 진유성과 같은 무공 수위를 지닌 고수가 있다고 하더라도, 게이트를 찢고 들어갈 수는 없을 것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진유성도 자신이 입멸공을 이만큼이나 익힌 게 신기할 정도였다.

그러니 또 한 번 입멸공을 익히는 건 의미가 없었다.

대신 입멸검이 있으면 좋겠다.

입멸검이 있다면 좀 더 자유롭게 입멸공을 사용할 수 있으며, 최종 오의에 한해서는 위력을 배가시킬 수 있다.

입멸공과 입멸검은 한 쌍이니 말이었다.

진유성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고오오오오-

진유성이 근접하자 거대한 기운을 품은 진법이 울부짖었다.

하지만 진유성은 망설임 없이 진법 안으로 들어섰다.

가장 먼저 삼재(三才)가 흐려졌다.

천지인의 분간이 어려워졌다.

다음으로 백팔방위가 뒤섞였다.

이제 진유성은 세상을 백팔방위로 나누고 삼재로 구분 짓지 못하게 되었다.

어디가 앞이고, 어디가 위인지 모를 상황이다.

그러나 진유성의 가슴 속에는 뚜렷한 확신이 있었다.

나는 나로서 완성되니 주변이 어떻게 변하더라도 소용없다는 그런 확신이.

그 확신이 확고한 자아를 만들어 냈고, 확고한 자아는 의지를 만들어 냈다.

진유성은 거대한 기류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으며 똑바로 나아갔다.

잠시 뒤.

과거에도 그랬던 것처럼 오감이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누군가 걸어오기 시작했다.

“또 나랑 싸워야 하냐?”

과거에는 또 다른 나와 싸우는 데 칠주야(七晝夜 : 일곱 번의 낮과 밤)가 걸렸다.

수학여행을 와서 일주일이나 사라진다면 사람들이 걱정할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자신은 그때보다 훨씬 고강한 고수였다.

아마 지금의 싸움은 순식간에 결판이 날 것이었다.

초수에서 유불리가 판가름 나고, 차수에서 궁지에 몰릴 것이며, 후수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그게 자신이든, 짭유성이든.

‘아마 삼적천능보(三積天凌步)로 초수를 펼치겠지? 아닌가? 내가 삼적천능보를 펼칠 줄 알고 받아치려나?’

진유성이 머릿속으로 또 다른 자신과의 싸움을 그리고 있을 때.

진법 안에서 걸어오던 이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뭐야?”

진유성이 고개를 갸웃했다.

또 다른 내가 나타날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등장했다.

아주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멸마대주! 이놈!”

무림맹주였다.

난데없는 무림맹주의 출현에 진유성은 의아함을 느꼈지만…….

가슴 속에서 그보다 훨씬 뜨거운 감정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그것은 분노였다.

“제 아무리 사냥개라고 한들! 주인을 무는 게 말이 되느냐!”

무림맹주가 일갈하는 순간, 어두컴컴한 주변에서 횃불이 화르륵 치솟아 올랐다.

진유성의 눈에 보인 것은 수백의 정도맹원들과 오랏줄에 묶인 멸마대원들이었다.

마교주가 난데없이 주화입마로 사망하고 멸마대는 존재 의의를 잃었다.

마교주의 암살을 위해 키운 사냥개의 이빨이 쓸모가 없어졌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 이빨이 너무나도 날카롭다는 것에 있었다.

정도맹주는 불안함을 느꼈다.

지금은 사냥개들의 그의 말을 잘 듣고 있지만, 만약 저 이빨이 자신을 향한다면?

멸마대주가 야망을 품는다면?

저 이빨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그런 걱정을 하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멸마대를 향한 폐기 처분 명령이 내려졌다.

진유성은 토사구팽을 눈치 채고 멸마대원들과 함께 도망치려 했지만, 세뇌를 당한 멸마대원들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신주청과 상림을 비롯한 소수의 인원만이 진유성의 말을 믿어주었다.

그렇게 도망을 친 것이 생존대였고.

생존대의 몸부림은 정도맹주에게 자신의 생각이 옳았다는 확신을 갖게 하였다.

게다가 멸마대주 진유성은 지닌 바 무공을 숨기고 있었다.

본래는 죽어도 열 번은 더 죽었어야 했는데, 귀신 같이 포위망을 뚫고 도망쳤다.

스무 명도 되지 않는 인원을 죽이기 위해서 수천 명이 동원됐으나, 오히려 정도맹의 피해만 가중되고 있었다.

정도맹주는 한 가지 함정을 팠다.

멸마대의 교육을 맡은 이들의 보고서에 따르면 멸마대주에게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고 했다.

바로, 연민이었다.

그는 불의를 참지 못하고, 낙오자들을 버리는 걸 견디지 못하고, 무고한 희생자가 발생하는 것을 싫어했다.

그러니 멸마대원들을 미끼로 생존대를 낚으려는 함정을 판 것이었다.

생존대를 포위했다는 보고를 받은 무림맹주는 직접 몸을 움직였다.

“네놈이 순순히 무릎을 꿇는다면 멸마대원들은 죽지 않을 것이다! 도망자들도 살려 준다고 맹주의 이름을 걸고 약조하마!”

“…….”

“하나, 순순히 투항하지 않는다면……!”

무림맹주가 검을 휘둘렀다.

“컥!”

선두에 있던 멸마대원 중 한 명의 목이 떨어졌다.

“멸마대원들은 개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무림 맹주의 일갈에 진유성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는 뒤를 돌아보는 게 두려웠다.

생존대원들이 제발 그들을 대신해서 죽어달라고 부탁할까봐.

배가 고팠다.

힘이 없었다.

며칠째 먹은 게 없어서 속에서 신물만 올라왔다.

그러나 진유성은 강한 척을 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 말을 내가 믿을 것 같냐! 못생긴 자식아!”

“천박한지고! 정도맹주의 직위를 걸고 약조한다지 않는가!”

“너도 무인이라면 생사투에 모든 걸 거는 건 어때? 내가 이긴다면 멸마대원들과 생존대원들을 보내 줘라!”

“허튼소리 하지 말고 순순히 무릎을 꿇어라!”

진유성이 이를 악물었다.

상식적으로는 투항한다고 하더라도 멸마대원과 생존대원들이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눈앞에서 모두가 죽는 걸 지켜보는 것도 괴로웠다.

그 순간이었다.

진유성의 온몸에 알 수 없는 힘이 샘솟았다.

깨달음을 얻은 것인가?

기연을 얻은 것인가?

진유성은 자신의 온몸을 가득 채운 힘이 세상을 재단할 정도로 거대하다는 걸 느꼈다.

여기 모인 모든 이들을 죽일 수 있고, 멸마대원들을 살릴 수 있다.

하지만…….

왜 그래야 하지?

자신을 향해 살려 달라고 울부짖는 멸마대원들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제발 함께 도망치자고 했지만, 그들은 오히려 위에다가 보고를 했다.

멸마대주가 음모를 꾸미고 있다.

그런데 내가 저들을 왜 살려 줘야 하지?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이 고강한 힘을 뿜어내는 것만으로 모두를 죽이고, 무림의 절대자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왜 참아야 하지?

진유성이 마침내 손을 휘둘렀다.

투화하학!

진유성의 손에서 뿜어져 나간 기운이 정도맹원들을 향해 세차게 날아갔다.

“크아아악!”

정도맹원들의 뒤로 나동그라졌다.

하지만…….

죽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오라가 풀린 멸마대원들이 어리둥절한 사이 진유성이 소리를 질렀다.

“모두 이쪽으로 도망쳐라!”

진유성이 소리를 지르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정도맹의 무인들이 들고 있던 횃불이 하나 둘씩 꺼지더니, 사방이 어둠에 갇혔다.

어둠 속에서 빛이 번지더니, 온 세상을 환한 빛으로 뒤덮었다.

그렇게 웬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인간처럼 생겼으나, 도저히 인간처럼 느껴지지는 않는 존재가.

[그대의 의지는 정녕 놀랍군요.]

진유성이 눈을 깜빡였다.

주변을 둘러보니, 그를 포위하고 있던 정도맹이 보이지 않는다.

그의 뒤에 서있던 생존대도 보이지 않고, 무릎 꿇고 있던 멸마대도 보이지 않았다.

뒤늦게 상황이 파악되었다.

이곳은 하이난의 남쪽에 있는 이를 모를 섬이었다.

그의 앞에 닥쳐 왔던 상황은 모두 환상이었던 것 같았다.

실제로 진유성은 멸마대원을 놔두고 생존대와 함께 도망을 쳤다.

투항을 한다고 해도 결국 모두가 죽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날의 기억은 늘 마음 한편에 남아 있었다.

그때 힘이 있었다면.

모두를 구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런 후회와 함께.

그 순간 정체 모를 여자가 입을 열었다.

[자격이 증명되었습니다.]

“날 시험한 거냐?”

[입멸공은 그대가 무한한 극복이 가능한지에 대한 전능(全能)의 시험이었습니다.]

[이곳은 아카샤의 공간, 아카식 레코드.]

[이곳의 시험은 전지(全知)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대는 자격을 증명하였습니다.]

전지전능(全知全能).

모든 걸 알고, 모든 걸 행한다.

이는 신을 수식할 때만 쓰이는 말이었다.

눈앞의 정체 모를 여자는 신을 입에 담고 있었다.

하지만 진유성에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네가 무엇인데 내 과거의 단편을 시험대로 올리지?”

[저는 이 세계를 관장하는 아카샤의…….]

“날 시험할 수 있는 건, 나 스스로밖에 없다.”

진유성이 아놀드 벡의 검을 빼들었다.

그리곤 여자에게 곧게 겨눴다.

[저는 당신과 적대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같은 목적을 공유…….]

“그건 차차 생각해 보자고.”

진유성의 검에서 입멸공의 기운이 피어올랐다.

“이번에 내가 널 시험해 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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