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126화>
* * *
해남파 장문인의 호의로 목숨을 부지한 진유성과 생존대는 해남도에 숨어들었다.
해남도에는 수많은 섬이 존재했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섬도 있었고, 사람이 살았지만 더는 살지 않는 섬도 있었고, 어부들이 수확철에만 머무는 섬도 있었다.
물길이 자연스럽게 인도해 주는 섬도 있었고, 해초가 잔뜩 있어서 물길을 모르면 접근할 수 없는 섬도 있었다.
생존대는 최대한 추격이 어려운 섬으로 가고 싶었지만, 문제가 있었다.
해남의 지리를 모른다는 것이었다.
해남은 드넓은 중원의 최남단에 있는 변방 중의 변방.
과거에는 유배지로 많이 쓰였는데, 중원에서 워낙 멀기에 해남으로 유배가 된다는 건 죽을 때까지 돌아올 수 없음을 의미했다.
그러니 생존대원 중에 해남의 지리를 아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생존대원들은 지리도 모른 채, 살기 위해서 정처 없이 남쪽으로 향했다.
그러다가 해남의 끝에 도착했다.
더는 도주로가 없을 때, 추격자들을 급습해 배를 뺏고 바다의 물살에 몸을 맡겼다.
그리곤 계속해서 떠내려갔다.
얼마나 이동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조금밖에 못 간 것 같기도 했고, 엄청나게 멀리 내려온 것 같기도 했다.
계속해서 남쪽으로 떠내려가던 생존대의 눈에 이름 모를 섬이 들어왔다.
푸르른 자연으로 뒤덮인 섬은 사람의 흔적이 전혀 닿지 않은 것 같았다.
생전 처음 보는 기화요초들이 사방 천지에 널려 있었다.
사실 생존대는 원래 그 섬에 들를 계획이 없었다.
물살에 떠내려가 당도한 섬이라면 적들도 충분히 추격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너무나 배가 고팠다.
“배는 아래로 띄워 보내 추적자들을 혼동시킨다.”
“하지만 대주, 여기서 적들과 만나면 뒤가 없습니다.”
“모든 흔적을 지우고 숨어든 다음에 지형지물을 파악해.”
대주의 명령에 생존대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유성은 자신의 계획을 소상히 설명해 주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확신을 가지고 말할 때는 수많은 계책들을 가지고 있을 때였다.
진유성의 목소리에서 확신이 느껴지자, 대원들은 안도했다.
하지만 이건 진유성이 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한 연기였다.
진유성도 더는 방법이 없어서 섬으로 숨어들자 말한 것이었다.
언제나 그랬다.
대원들은 진유성에게 기지와 술책이 있을 거라고 믿었지만,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은 임기응변과 운 덕분이었다.
“절대 흔적을 남겨선 안 된다.”
진유성의 말에 한 줌밖에 되지 않는 생존대원들이 섬 안으로 숨어들었다.
그리곤 놀랐다.
이 섬은 신이 그들에게 내린 축복인 것 같았다.
온갖 나무에 이름 모를 열매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고, 먹을 수 있는 버섯과 섭취 식물들이 넘쳐났다.
그뿐인가?
섬의 남쪽에는 굴곡진 절벽이 있었는데, 파도가 출렁일 때마다 절벽에 물고기들이 수십 마리씩 부딪쳤다.
대부분의 물고기들은 절벽의 굴곡을 타고 다시 바다로 돌아갔지만, 벽호공을 익힌 생존대원들이 절벽에 매달려 손만 뻗으면 물고기 수백 마리를 잡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게다가 섬 전체의 온도 역시 쾌적해 잠자리를 찾기도 편했다.
생존대원들은 물고기를 잡아와 버섯, 나물 등등을 섞어서 배가 터지도록 음식을 먹었다.
도망 생활을 시작한 지 1년이 넘었는데, 처음으로 배부르게 저녁을 먹은 날이었다.
“추격자들만 안 오면 좋겠네.”
“빌어먹을 놈들. 우리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생존대원들은 긴장이 풀린 듯 투덜거리기도 했다.
그동안은 투덜거릴 정신도 없이 도망만 쳤는데 말이었다.
그렇게 모든 것이 평온했다.
하지만 진유성과 신주청은 불안함을 느꼈다.
천상이 내린 것 같은 이 섬에는 이상한 점이 있었다.
바로, 육지 동물이 없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새조차 날아다니지 않았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거라고는 갈매기 같은 바닷새뿐이었는데, 바닷새들도 섬 근처에는 다가오지 않았다.
그저, 섬 주위를 빙빙 돌 뿐이었다.
진유성과 신주청은 대원들에게 휴식을 명하고는 섬의 중앙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외곽의 지형은 간단해서 파악이 쉬웠으나, 정글처럼 우거진 섬의 내부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
“이만한 크기의 육지 동물이 없을 수가 있나?”
“나도 잘 모르겠군. 섬에 오는 건 처음이라.”
“고려는 섬이 아닌가?”
“무식한 놈아. 고려는 섬이 아니야.”
진유성과 신주청은 적당한 긴장 상태를 유지하며 섬의 내부로 향했다.
그런 그들의 앞에…….
고오오오오-
엄청난 기운을 품은 거대한 진법이 나타났다.
놀랍게도 진법 주변에는 인간의 해골로 보이는 것들이 널려 있었다.
육지 동물이 전무한 섬에 해골이 있다는 건, 진법 때문일 수밖에 없었다.
“역시 우리만 왔던 건 아니군.”
“저건 뭐지?”
진법은 묘했다.
사기와 정기가 정확히 반씩 섞여서 꿈틀거리고 있었으며, 생과 사의 냄새가 동시에 풍겼다.
게다가 거대한 기운을 품고 있는데, 접근하지 않으면 아무런 기운도 느낄 수가 없었다.
한눈에 봐도 위험해 보였다.
하지만 저 기운을 흡수할 수만 있다면 엄청난 기연을 얻은 것과도 같았다.
진유성과 신주청은 그 뒤로 누가 진법에 들어갈지를 정하는 싸움을 벌였다.
“제가 졌습니다…… 대주님.”
승자는 진유성이었다.
신주청은 그 순간부터 진유성의 그릇을 인정하고, 진심을 다해 모시기 시작했다.
싸움을 끝낸 진유성과 신주청은 대원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대원들은 진유성과 신주청이 싸웠다는 걸 눈치 챈 듯했지만, 모르는 척을 해 줬다.
대주와 부대주의 확실한 서열 정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모두가 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한 사람은 아니었다.
눈치도 없고 생각도 없는 상림만이 말을 걸었을 뿐이었다.
“두 사람, 싸웠어요? 누가 이겼어요?”
딱!
“아! 왜 때려!”
다음날, 진유성은 하루 종일 휴식을 취하고 배가 터질 때까지 음식을 먹었다.
그리곤 그날 밤, 이름 모를 진법 앞에 섰다.
기연이라는 건 하루아침에 얻을 수도 있는 거고, 십년이 걸려 얻지 못할 수도 있는 거다.
시시각각 추격자들이 몰려들고 있을 건데, 시간을 끌 이유가 없었다.
고오오오오오-
진유성은 온몸의 힘을 뺐다.
그리곤 진법이 흐름에 몸을 맡겼다.
진법의 안은 모든 것이 희미했다.
빛과 소리가 희미하게 와닿았으며, 온몸의 피부가 몸에서 떨어져 나와 붕 떠 있는 것 같았다.
정신을 꽉 붙잡고 있지 않으면 의식조차 희미해질 것 같았다.
이 거대한 흐름을 견디지 못하면 진법에 동화되어서, 앞서 보았던 해골과 다를 바가 없어질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진법은 견디는 게 쉽지 않았다.
차라리 죽음의 위험이 있다면 이를 악물고 견디겠는데, 너무나 평온했다.
너무나 따뜻하고, 너무나 안락해서 영원히 눈을 감고 싶었다.
그러나…….
진유성은 두 눈을 부릅떴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아직 그는 해야 하는 일들이 많았다.
자신을 믿고 따라와 준 생존대원들을 살려야 하며, 정도맹에게 복수해야 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그들을 대신해서 죽은 화전민 모녀처럼, 무고한 이들이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었다.
진유성은 아직도 화전민 모녀가 그들을 왜 끝까지 숨겨 주었는지 모르겠다.
그저 그들의 위치를 고하기만 했어도 죽지는 않았을 텐데.
그러니 아직 죽을 수 없었다.
고오오오오오-
그 순간, 청각이 돌아왔다.
시각이 돌아왔고, 촉각이 돌아왔다.
오감이 원래대로 돌아온 순간.
천지사방이 기운으로 거세게 몰아치는 와중에 누군가 자신을 향해 똑바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진유성은 검을 빼 들었다.
그리곤 다가오는 이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휘몰아치는 기운에 가려서 제대로 보이진 않았다.
잠시 뒤.
천천히 걸어오던 이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뭐냐?”
진유성이 입을 여는 순간, 상대방이 검을 빼 들었다.
두 사람의 자세는 똑같았다.
왜냐하면, 진유성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 자신과 똑같은 모습을 한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또 다른 진유성이 입을 열었다.
[생사입멸을 관장하려는가.]
“뭐라는 거야?”
[네가 무한히 극복할 수 있음을 증명해라.]
그 순간, 진법 안에 나온 놈이 달려들었다.
이내 진유성은 자신과 똑같은 모습을 한 상대가 그저 외양만 똑같은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힘도, 무공도, 지혜도, 계략도.
모든 게 똑같다.
생각하는 바가 완전히 같다.
하단세를 노리는 척 상단세를 후려치는 습관부터, 빈틈을 유발해 살을 주고 뼈를 취하려는 마음까지 똑같았다.
진유성은 놈과 쉬지 않고 싸웠다.
이상하게 진법 안에서는 배가 고프지도 않았고, 피로하지도 않았다.
쉬지 않고 싸울 수 있다는 게 마음에 들었다.
그들은 칠 주야를 싸웠음에도 결판을 내지 못했다.
“어이, 짭유성.”
[자격을 증명해라.]
“그 말밖에 못하나?”
[무한히 극복할 수 있음을 증명하라.]
본래 사람은 자신과 똑같은 존재를 만나면 혐오를 느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진유성은 그러지 않았다.
어차피 나는 나로서 완성되는데, 나와 같은 존재가 있다고 해서 내가 달라지는 건 아니니까.
“끝가지 똑같은 말이네. 정이 들어서 아쉬운데.”
진유성이 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검을 양손으로 붙잡았다.
진유성은 그동안 자신보다 강한 상대들을 무수히 많이 죽여 왔다.
당시에는 그저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알겠다.
그에게는 남들보다 굳건한 의지가 있었다.
무공에서 ‘의념’이라고 부르는 힘은 실존하지만 실존하지 않는다.
그것을 제대로 다루는 이가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진유성은 지금껏 본능적으로 의념을 다루어 왔던 것 같았다.
“고생했다.”
진유성의 말이 끝나는 순간.
그의 검에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검의 형태를 한 무언가가 검을 뒤덮었다.
프스스스스.
진유성의 검에서 뿜어져 나온 검기가 사방천지를 뒤덮고, 그사이로 직선이 곧게 나아갔다.
끝이었다.
진유성의 검이 자신과 똑같이 생긴 존재를 베어 냈다.
처음으로 심검을 구현한 날이었다.
진유성이 자신의 자격을 증명하는 순간.
온 세상을 휘몰아치던 기운들이 잠잠해졌다.
그리곤 길이 열렸다.
오솔길처럼 보이는 무언가를 따라서 진유성이 발걸음을 옮겼다.
한 자루의 검.
한 채의 건물.
하나의 동굴.
진유성의 눈에 들어온 것들이었다.
* * *
촤아아악.
밤이라 검은색을 띤 파도가 절벽에 부딪쳤다가, 포말과 함께 산산이 부서진다.
하이난의 최남단에 서서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던 진유성이 머리를 긁적였다.
호텔에서 이곳까지 달려오다 보니 옛날 생각이 났다.
생각해 보면 신기했다.
본래 사람은 과거의 일을 쉽게 생각하곤 한다.
아무리 힘든 일이었어도 돌이켜 보면 할 만했다고 평가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진유성은 아니었다.
자신이 멸마대부터 입멸공을 얻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해 보면 그야말로 생사일로였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 하나의 길밖에 없었다.
딱 한 번이라도 다른 선택을 했다면 죽었을 것 같기도 했다.
“흠.”
그런 생각을 하던 진유성이 훌쩍 몸을 날렸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바다에 빠졌겠지만, 진유성은 수면 위에 사뿐히 내려섰다.
어둠이 내려앉은 밤바다인 데다, 주변에는 어떤 시선도 없었다.
마음을 정한 진유성이 등평도수(登萍渡水)로 바다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남쪽으로, 또 남쪽으로.
하지만 아무리 달려도 입멸공이 잠들어 있었던 섬은 보이지가 않았다.
섬에 들어갈 때는 몰라도, 섬에서 나올 때는 육지와의 거리를 쟀었다.
딱 이 정도 거리였던 것 같은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바다 위에는 오직 파도뿐이었다.
‘역시 다른 세계라서 그런가?’
지구와 중원이 비슷하지만 다르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럴 것 같기도 했다.
진유성이 그런 생각을 하며 마지막으로 안력을 돋우는 순간이었다.
분명 방금 전까지는 파도뿐이었던 바다 위에…….
섬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