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124화>
* * *
대정고의 수학여행 일정은 굉장히 널널했다.
유명 관광지나 명소, 단체 레저를 즐기긴 했지만, 이런 일정이 있는 건 오전뿐이었다.
점심을 먹고 인원 점검을 한 2시 이후부터는 자유 시간이었다.
관광을 해도 좋고, 한가롭게 숙소에서 쉬어도 좋았다.
간혹 몇 명이 모여서 바닷가에 가긴 했지만, 대부분이 호텔에서 한가롭게 호캉스를 즐기고 있었다.
이는 기회의 문제였다.
대정고 학생 전원은 마음만 먹는다면 다시 이곳에 올 수 있거나, 이미 한껏 하이난을 즐겨 본 이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면서 친구들과 잡담을 떠는 정도로 만족하고 있었다.
고3 수험생활 스트레스를 푼다는 그럴듯한 명목 하에.
진유성, 지종수, 심도훈, 고인수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을 호텔 뒤편에 있는 수영장의 선 베드에 누워서 하릴없이 시간만 죽이고 있었다.
바쁘게 눈을 움직이고 있는 지종수만 빼고.
“…….”
지종수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진유성의 몸을 훑어보고 있었다.
놀랍게도, 몸이 좋았다.
축구를 할 때면 폭발적인 스피드를 보이는 진유성이기에 몸이 나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축구 선수의 스피드와 근육이 꼭 정비례하는 건 아니다.
브라질의 전설이자, 한 시대를 풍미했던 위대한 축구선수 호나우두.
그는 마지막 월드컵에 출전하면서 체중 관리에 실패해서 ‘뚱나우두’라는 별명을 얻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느리거나 축구를 못하는 건 절대 아니었다.
그 육중한 몸을 이끌고도 엄청난 스피드로 상대를 제쳐 버리고, 완벽한 무게 중심 컨트롤을 선보였었다.
지종수는 진유성의 몸이 그와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호리호리한 체형이기에 살집이야 거의 없겠지만, 근육까지 많을 거라고 보지 않았던 것이다.
평소의 진유성은 게으르고, 쓸데없는 짓만 하며, 운동을 별로 안 좋아하니까.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살색(?)의 향연은 어떠한가.
그야말로 심미(審美)의 극치였다.
온몸에 자리 잡은 근육들이 당장 명령만 내려 달라는 듯이 꿈틀거린다.
선 베드에 누운 채 무알콜 칵테일 잔을 잡을 때 온몸의 근육들이 요동을 쳤다.
완벽했다.
“허어…….”
지종수가 열등감과 부러움을 담은 한숨을 내쉬는 순간.
촥-!
진유성이 칵테일을 지종수의 얼굴에 부어 버렸다.
“무, 뭐야!”
“더러운 눈으로 보지 말거라.”
“더, 더러운 눈이라고?”
“말 더듬지 마라.”
사실 진유성이 칵테일을 부어 버린 것은 완전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
지종수가 자신의 몸을 훑어보길래 뭐 하는 놈인가 싶었는데, 갑자기 밸런타인데이의 기억이 떠올랐다.
“이걸 왜 주는 것이냐?”
“왜긴 왜야. 좋아하니까.”
그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고, 저도 모르게 손을 움직여 버렸다.
물론 칵테일을 잡는 순간 신체를 통제하려고 했다면 충분히 통제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어디 건방지게 천신의 몸을 훑어본단 말인가?
중원에서 저랬으면 경을 쳤을 것이었다.
“와, 씨! 너무하네!”
지종수가 소리를 지르다가 혀를 낼름거렸다.
얼굴에 묻은 칵테일이 흘러내리며 입 안으로 들어갔는데, 달짝지근한 게 꽤 맛있었다.
촥!
그 모습이 진유성이 한 번 더 칵테일을 부었다.
이 자식은 좀 더럽다.
칵테일 싸대기 사건 이후로 시간을 보내던 네 사람은 수영장을 빠져나왔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수영장 뒤편의 체육 시설.
2반의 학생들이 삼 대 삼으로 농구 내기를 하자고 연락해왔기 때문이다.
본래 대정고 학생들은 진유성을 낀 채로 내기 스포츠를 하지 않는다.
뭔 짓을 해도 이길 수가 없다는 걸 알아서였다.
그러나 지금은 휴양지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는지라, 다들 마음이 넉넉했다.
어차피 질 걸 알면서도 내기가 성사된 이유가 이것이었다.
“뭘 걸고 하겠느냐?”
호랑이 옆의 여우처럼 지종수가 어깨를 쫙 펴고는 말한다.
심지어 말투까지 진유성을 따라했다.
옆에 있던 심도훈과 고인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불과 한 시간 전에 칵테일 싸대기를 맞아 놓고선 그저 진유성과 한편이니까 좋단다.
‘저 정도면 사랑이다, 사랑.’
‘그니까.’
심도훈과 고인수가 공통된 심정을 공유하는 사이, 판돈에 대한 줄다리기가 이어졌다.
2반 학생들은 저녁을 걸자고 했지만 지종수는 더 큰 걸 걸자는 입장이었다.
그때, 2반 학생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술 어때.”
“술?”
“나 술 구할 수 있는데.”
“어떻게?”
“삼촌이 지금 하이난에 계시거든.”
“삼촌이 술을 사다 주신다고?”
“삼촌 비서 아저씨랑 친해.”
한국에서라면 대정고 학생들이 술을 구하는 게 어렵지 않다.
돈도 많고 인맥도 많으니까.
하지만 외국은 다르다.
여기선 술을 구하는 게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5박 6일짜리 여행이라 바리바리 짐을 싸 온 캐리어에 담아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 옆에 조용히 서 있던 진유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마음에 든다. 수량은 얼마나 되느냐?”
“몰라. 그건. 그냥 많이 줄게.”
“콜이니라.”
진유성의 말에 지종수도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술이라면 수학여행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니 말이었다.
“지면 너희는 뭐 해 줄 거냐?”
“밥을 사마.”
“비싼 거 가능?”
“아무거나 상관없다.”
“오케이.”
그렇게 삼 대 삼 농구 내기가 시작되었다.
몸을 쓰는 운동을 별로 안 좋아하는 심도훈이 빠지니 진유성, 지종수, 고인수가 한 편이었다.
규칙은 20점 먼저 내기인데, 2반에게는 10점이 먼저 부과되었다.
즉 진유성 팀은 20점을 내야 하고, 2반은 10점만 내면 되는 것이었다.
반코트 경기이기 때문에 3점 슛은 없다.
모든 득점이 1점 처리가 된다.
진유성이 아무리 재빠르다고 해도 3명을 모두 마크할 수는 없으니까, 이길 수도 있다!
그런 생각을 한 건 경기가 시작하고 잠깐뿐이었다.
텅!
지종수와 심도훈이 대충 골대 근처로 던지면 진유성 뛰어 올라서 앨리웁 덩크를 꽂아 버리는 것이다.
진유성의 키가 180대 초반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점프력이었다.
그냥 덩크를 하는 거면 모르겠는데, 공중에 날아오른 공을 잡아서 꽂아 버리다니.
물론 이게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NBA에는 168cm의 키로 덩크 콘테스트에서 두 번이나 우승한 스퍼드 웹이라는 선수도 있었다.
하지만…….
‘진유성은 NBA 선수가 아니잖아!’
5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스코어가 19 대 14였다.
2반 학생들이 4점을 획득했을 때, 진유성은 혼자서 17점을 획득했다.
나머지 2점은 지종수와 고인수가 대충 골대로 던진 게 운 좋게 들어간 것이었고.
“와, 씨. 이게 가능한가?”
“진유성 너 평소에는 덩크 안 했잖아?”
2반 학생의 말에 진유성이 대답했다.
“왼손은 거들 뿐…….”
“미친놈인가?”
“술을 마실 수 있다면 덩크를 하게 되는 병에 걸렸다.”
“진짜 미친놈인가?”
“자, 빨리 끝내도록 하자.”
진유성이 경기 재개 신호를 보내자 2반 학생들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 광경을 NBA 선수들이 보면 뭐라고 할지 궁금하다.
* * *
정윤찬은 대정고에 새로 부임한 보건 선생이다.
놀랍게도 그는 의사 면허까지 가지고 있는 엘리트다.
사실 정윤찬은 외과를 전공했는데, 뒤늦게 자신한테 피에 대한 공포증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동안 공부한 게 억울해서 억지로 레지던트 과정을 수료하고, 전문의가 됐지만…….
덜컥 겁이 났다.
자신이 한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는 수술을 집도할 자신이 없어졌다.
그런 와중에 병원장님의 소개로 어떻게 대정고까지 흘러 들어오게 되었다.
전문의가 보건 선생을 하는 건 어이없는 일이지만, 대정고는 더 어이없었다.
그가 의사로서 벌 수 있는 수익을 거의 그대로 맞춰 준 것이었다.
‘처음엔 로열 섹터의 사립고라고 해도 박봉이겠거니 싶었는데…….’
아무튼 이렇게 정윤찬은 대정고의 보건 선생이 되었고, 그의 첫 스케줄은 수학여행에 동행하는 것이었다.
해외여행 중, 누군가가 아플 때를 대비해서였다.
참 좋은 학교였다.
부임하자마자 공짜로 해외 여행도 보내 주고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발코니에서 음료수를 홀짝이던 정윤찬의 눈에 흥미로운 장면이 들어왔다.
텅-!
지난 밤 장기자랑에서 놀라운 마술을 선보였던 진유성이란 학생이 덩크를 하는 광경이었다.
‘뭐야?’
음료수를 내려놓은 정윤찬이 정신을 집중해 진유성을 살폈다.
텅-!
역시 이상했다.
사람의 신체는 중력을 느끼지 못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중력을 거스르는 건 인체 설계에 반하는 행위이고, 그런 행위를 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과정들이 있다.
한데, 진유성은 필요 과정을 지나치게 최소화했다.
없는 건 아니다.
하늘 높이 뛰어오르기 위해서 도움닫기를 하고, 관절과 근육을 이용한 탄력을 만들긴 한다.
하지만 역시 너무 최소화되어 있었다.
정윤찬은 저런 장면을 수련의 시절에 많이 보았다.
세포 과학적으로 인간과 전혀 다르지 않은 각성자들이 어떻게 인외(人外)의 힘을 내는가?
이것은 현대 의학이 아직까지 풀지 못한 숙제였고, 지금 이 순간에도 연구되는 과제였다.
그래서 각성자의 움직임을 담은 의학 자료들은 아주 많았다.
거기서 봤던 움직임과 진유성의 움직임이 거의 흡사했다.
‘각성자 아니야? SG에 신고해야 하나?’
미인가 각성자를 발견하면 SG에 신고를 할 수 있다.
그럼 SG의 미인가 각성자 전담팀이 나와서 각성자가 맞는지를 확인한다.
맞다면 SG에 등록이 돼서 각성자가 되는 거고, 아니라면 해프닝으로 끝이 난다.
그러나 각성자로 확정 짓기에는 애매한 점들도 있다.
각성자들은 주기적으로 경험치를 얻지 않으면 고통을 느낀다고 했다.
이건 각성자와 관련된 대외비였는데, 의사들은 알음알음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당장 정윤찬의 친구 중에도 각성 관련 의학 분야에 종사중인 이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각성자라면 멀쩡히 학교를 다니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럼 2차 각성자?’
올해 초.
알 수 없는 이유로 2차 각성자가 탄생했고, 아직까지 모든 2차 각성자가 SG에 등록되진 않은 상황이긴 했다.
하지만 진유성을 2차 각성자라고 보기도 애매했다.
현재 대한민국은 모든 공항을 이용할 때 ‘인벤토리 목록 공유’를 외쳐야 한다.
미인가 각성자를 색출해 내서 그들이 불법적인 일에 이용되는 걸 막기 위함이었다.
그는 각성자가 아니라서 모르겠지만, 저런 방식으로 대부분의 각성자들을 색출해 낼 수 있다고 했다.
‘그냥 굉장한 신체를 타고난 건가?’
근육 탄성이 우월한 흑인 농구 선수들 중에는 저런 식으로 점프를 하는 이들도 있으니까.
정윤찬은 그 뒤로도 진유성을 관찰했다.
그들의 농구 시합이 끝이 날 때까지.
* * *
4인의 비밀 결사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발소리를 죽이고, 은밀하게 이동했다.
봉투에 담아 놓은 병들이 계단을 내려가다 짤그락거리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야.”
진유성이 입을 열자 지종수가 깜짝 놀라서 손가락을 세웠다.
“쉿!”
그러나 진유성은 손을 휘휘 저었다.
주변에 그들을 주목하고 있는 이가 아무도 없기 때문이었다.
“주접떨지 말고 그냥 가도 된다.”
“선생님들이 보면 어쩔 거야!”
“안 본다.”
진유성이 터벅터벅 걸어서 3층으로 향하자, 지종수, 심도훈, 고인수가 불안한 눈빛으로 따라왔다.
잠시 뒤, 4인의 결사대는 하나의 304호에 도착했다.
가볍게 문을 두드리자, 문이 열렸다.
그 안에는 상소윤과 정새롬을 비롯한 4명의 여학생들이 있었다.
선생님들이 급습할 확률이 적은 여학생들의 방에, 술을 먹기 위한 8명이 모인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