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104화>
* * *
그 어떤 분야든 사람의 실력을 확인하는 가장 좋은 수단은 기록이다.
한때 메이저 리그에는 홈런을 뻥뻥 치는 홈런왕 스타와 멋진 주루 플레이를 선보이는 유격수 스타들이 엄청난 고평가를 받던 시절이 있었다.
구단들은 앞다퉈 스타를 영입하려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돈이 없던 오클랜드 어슬레틱스는 데이터를 기반으로 하는 세이버 매트릭스를 도입했다.
홈런이 아니라 출루율과 장타율처럼 승리에 도달하는 실존적 통계를 중시한 것이었다.
그들의 판단은 옳았다.
현재는 모든 메이저 리그 구단들이 통계를 중시하고 있었다.
이처럼 기록은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ST-1 구단의 관계자들은 눈앞에 펼쳐진 거짓말 같은 기록에 할 말을 잃었다.
지존천마가 게임 내에서 세우고 있는 기록들이었다.
“챌린저에 완전히 적응한 모습입니다. 현재 113등까지 올라왔습니다.”
“승률은 소폭 하락했지만, 이건 챌린저 게임 판수가 적어서인 것 같습니다. 여전히 플레이는 압도적입니다.”
“평균 KDA(킬과 어시스트를 데스로 나눈 것)가 12가 넘어갑니다.”
“기계처럼 CS를 먹습니다. CS 실수가 100마리당 0.8개뿐입니다.”
“갱에 당해 주는 확률이 11퍼센트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상대 팀은 지존천마에게 갱킹을 시도하지 않습니다.”
“모든 챌린저 중 DPM(Damage Per Minute)이 제일 높습니다.”
“가장 놀라운 건 300게임 이상을 진행하면서 한 번도 쓸데없이 스펠을 쓴 적이 없다는 겁니다.”
“침착함이 말도 안 되는 수준입니다.”
직원들의 보고가 이어졌다.
이 같은 보고들은 팩트에 기반한 지존천마의 압도적인 실력에 대한 찬사였다.
하지만 보고를 받는 와중에도 ST-1 단장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이러한 보고를 받고 기분이 좋으려면 일단 지존천마와 계약을 한 상태여야 한다.
하지만 지존천마는 ST-1 구단과 계약이 된 상태가 아니었다.
계약이 되지 않은 플레이어의 가치가 점차 높아진다는 것은 영입 경쟁이 심화된다는 소리와 같았다.
“김 대리.”
“네, 단장님.”
“혹시 다른 팀 중에 접촉한 사람이 있나 알아봤어?”
“없는 것 같습니다. 은근히 캐 봤는데, 다들 비슷한 말만 합니다. 지존천마가 절대 답장을 주지 않는다고.”
“아, 거참 부끄럼 많은 놈이네.”
김 대리의 말처럼 지존천마는 채팅으로 질문을 보내도 절대 답장을 주지 않았다.
몇십 개의 채팅을 보내도 마찬가지다.
대화 한 번만 하자, 채팅이 싫으면 전화로 하자, 전화번호가 뭐냐, 전화가 싫으면 찾아가겠다, 어디 사냐, 만나는 게 싫으면 이메일 주소라도 알려 달라…….
수많은 구단들이 지존천마에게 러브콜을 보냈지만, 지존천마는 단 한 번도 반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나치게 귀찮게 하면 차단을 박아 버렸다.
그런데, 이 자식 좀 웃기다.
말을 안 할 거면 게임에서도 안 해야 하는데, 막상 게임 안에서는 지존천마가 채팅을 꽤 많이 치는 편에 속했다.
누가 뭘 물어보면 대답도 잘하고, 이상한 말투로 오더하는 것도 좋아했다.
하지만 구단 직원이라는 사실을 밝히는 순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혹시 몸값 올리려는 건가? 랭킹을 더 높이고 접촉하려고?”
“그렇다고 하긴 너무 아무 말도 안 해 주던데요.”
“그럼 프로가 되기 싫나?”
“그런 답조차 없었습니다. 그냥 아무 말도 안 해요. 구단 직원이라고 밝히기만 하면.”
답답해진 ST-1 구단의 단장이 2군 연습생 20명에게 지존천마를 저격하라고 명했다.
여기서 말하는 저격이란 총을 쏘는 게 아니었다.
지존천마와 같은 게임이 잡힐 때까지 무한히 게임을 찾는 걸 뜻했다.
지존천마가 게임을 하는 시간은 대충 정해져 있었다.
오후 6시 언저리부터 새벽 6시 언저리까지.
보통 하루에 12시간 남짓 게임에 접속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저격을 시도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은 아니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밤 8시쯤 연습생 중 한 명이 단장을 급히 불렀다.
마침내 지존천마와 같은 게임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이리 줘 봐.”
단장이 키보드를 잡고는 신중히 생각에 잠겼다.
그동안 지존천마의 채팅 목록을 쭉 살펴봤고, 캐릭터를 파악했다.
지존천마는 자존심이 상당히 강하고, 본인의 실력에 대한 자부심이 있는 플레이어였다.
이상한 말투로 컨셉의 탈을 썼지만, 그 안에 있는 성격까지는 숨기지 못했다.
단장은 어쩌면 지존천마의 말투가 진짜 본인의 말투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약간의 과장은 있겠지만.
‘자극적이고, 극적인 거 좋아하는 애 같은 느낌이야. 어쩌면 나이가 많이 어릴 수도 있을 것 같고.’
단장이 결심을 내렸다.
‘만화처럼 오버해서 접근해 보자.’
지금까지 시도한 정상적인 접근은 모두 까였다.
그러니 어렵게 잡은 기회를 똑같은 방식으로 날릴 수 없었다.
단장이 침착히 키보드를 두드렸다.
[난 ST-1 구단 단장이다. 네가 최고라고 생각하나? 애송이?]
단장이 침을 꿀꺽 삼키며 모니터를 주시하는 사이.
2군 연습생은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단장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 무슨 만화에 나올 것 같은 대사란 말인가.
차마 단장님을 향해 이런 말을 뱉을 순 없지만, 진짜 극혐이다.
그때 지존천마가 반응했다.
[뭐?]
지금까지 지존천마는 대화 상대가 구단 관계자라는 걸 밝히면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단장이 다시 침착하게 말을 골랐다.
[고작 솔로 랭크에서 활약하고 있다고 최고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고작이라고?]
[솔로 랭크는…….]
단장이 단어를 생각하다가 2군 연습생을 휙 하고 쳐다봤다.
“야, 그거 뭐지? 그, 칼 장난.”
“네?”
“아니, 무협지에서 진짜 싸우는 거 말고 칼로 연습하는 거 있잖아. 가짜로 싸우면서.”
“대련이요?”
“그거 말고.”
“비무?”
“어!”
[솔로 랭크는 비무다. 실전은 다른 곳에 있지, 애송이.]
[무슨 헛소리냐.]
[솔로 랭크 1위부터 5위까지가 모인다고 ST-1팀을 이길 수 있을 것 같나?]
사실은 이길 수도 있다.
솔로 유저들이 즐기는 솔로 랭크와 프로들의 팀 게임이 다른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프로들이 늘 이기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100판을 붙으면 프로 팀이 50퍼센트 이상의 승률을 기록할 것은 분명했다.
아마 60퍼센트 이상은 프로들이 이기지 않을까?
팀 단위의 게임과 솔로 랭크는 분명 차이가 있으니 말이었다.
그러니 단장의 말도 거짓은 아니었다.
옆에서 가만히 보고 있던 2군 연습생은 단장의 의도를 깨달았다.
단장님이 미친 게 아니라 지존천마의 컨셉에 맞춰서 말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단장님, 이렇게 쓰면 더 반응할걸요?”
“어떻게?”
“무슨 말 하실 거예요?”
2군 연습생이 키보드를 잡고는 단장이 하고자 하는 말을 들었다.
그러곤 그 내용에 맞춰서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지금껏 네가 겪은 전장은 ‘가짜’였다. 그저 ‘유희’에 불과했다는 거지. ‘진짜’를 경험하고 싶나?]
[‘진짜’라…… 그것이 무엇이지?]
[알고 싶다면 구단으로 찾아와서 테스트를 받아라. 롤의 ‘진짜’가 무엇인지 알려 주지. 애송이.]
[애송이라고 부르지 마라!]
[우물 안 개구리는 늘 자존심만 강하지.]
그 뒤로 지존천마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함께 게임에 들어온 나머지 3명이 이게 무슨 미친 소리인가 싶어서 어이없어할 뿐이었다.
‘젠장. 또 무시당하는 건가?’
단장이 초조해질 때였다.
지존천마의 채팅이 올라왔다.
[본좌가 이루고자 했던 바를 이루면 직접 구단으로 찾아가겠다. 전화번호를 말하여라.]
단장이 키보드를 빼앗아 허겁지겁 전화번호를 치고는 물었다.
[한데, 이루고자 하는 게 뭐지?]
[랭킹 1위.]
[곧 샤이나크가 돌아오는데?]
ST-1 선수들은 세계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지금 한국행 비행기에 올라타 있을 것이었다.
이는 몇 시간 뒤면 롤판 최고의 스타 선수 샤이나크가 한국으로 돌아온다는 말이었다.
사람들은 벌써부터 지존천마와 샤이나크의 대결을 기다리고 있었다.
피지컬적인 부분만 놓고 보면 지존천마의 우세였다.
하지만 그 우세함은 정말 미묘했고, 99점과 100점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법이었다.
본래 롤이란 게임은 피지컬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뇌지컬이 훨씬 중요한 게임이었다.
그리고 뇌지컬의 영역에서 최고의 선수로 불리는 것이 바로 샤이나크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이었다.
단장은 대답을 기다렸지만, 지존천마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흠…….”
단장은 이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걸 했다고 생각했다.
남은 건 지존천마가 솔로 랭크 1위를 찍은 다음에 자신을 찾아오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지존천마가 솔로 랭크 1위를 찍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프로 선수들은 경기 일정이 있기 때문에 솔로 랭크에 매진할 수가 없었다.
현재 아마추어들 중에서 지존천마를 이길 사람은 없었다.
* * *
진유성은 프로게이머가 될 생각이 없었다.
물론 축구 프로 선수와 롤 프로 선수 중 뭐가 더 재밌냐고 물어보면 당연히 후자였다.
솔직히 몸으로 하는 스포츠는 너무 쉬웠다.
아마 진유성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해 보는 스포츠라고 해도, 요령만 알게 되면 금방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선수가 될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롤도 직업으로 삼기는 좀 애매했다.
스포츠와 다르게 어려움이 있다.
늘 이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진유성을 위협하는 플레이어들도 있다.
하지만 아마 잠깐일 것이었다.
조금만 더 경험이 쌓이면 롤이란 스포츠에서 진유성은 압도적인 일인자의 자리에 오를 자신이 있었다.
그것을 솔로 랭크 1위로 증명할 생각이었다.
한데…….
‘솔로 랭크가 비무라고?’
진유성도 프로 경기를 몇 번 봤다.
분명 솔로 랭크와는 다른 느낌의 경기였다.
킬도 훨씬 적게 났으며, 팀원 전체가 끊임없이 정보를 공유하다 보니 쉬운 노림수로는 이길 수가 없었다.
하지만 밖에서 보기엔 또 엄청나게 다른 게임인 것 같진 않았다.
“흠.”
진유성이 턱을 쓰다듬다가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1위를 찍으면 ST-1이란 구단을 직접 찾아가 볼 생각이었다.
거기에 정말로 열의를 불태울 무언가가 있다면 몇 년 정도 프로로 활동할 수도 있었고.
그러나 이건 1위를 달성한 뒤의 미래였다.
지금 당장 진유성의 호기심을 이끄는 것은 다른 곳에 있었다.
샤이나크.
세계 1위의 선수.
진유성도 그 이름을 몇 번이나 들어 봤었고, 유튜브에서 하이라이트 영상을 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하이라이트는 잘한 것만 모아 놓은 것이기 때문에 실력을 가늠할 척도는 아니었다.
당장 지종수도 하이라이트를 모아 놓으면 잘하는 것처럼 보일…….
‘아니, 그건 아니겠군.’
아무튼 진유성은 샤이나크의 플레이 영상을 본 적은 없었다.
호기심을 느낀 진유성이 인터넷에 접속해 샤이나크의 영상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오?”
그러곤 감탄했다.
이 자식, 나와 같은 눈으로 게임을 보고 있다.
물론 진유성처럼 찰나의 단위로 반응 속도를 끌어올린 건 아닐 터였다.
그건 무공을 익히지 않으면 불가능했고, 무공을 익혔다 하더라도 어지간한 고수가 아닌 이상 힘들었다.
하지만 포인트를 잘 알고 있다.
중요한 순간에 극한의 집중력을 발휘했다.
마치 본능적으로 상단전을 자극할 줄 아는 것처럼.
“재밌군.”
샤이나크의 영상에 흥이 돋은 진유성이 다음 게임을 잡았다.
원래 남의 영상을 보고 있으면 내가 하고 싶어지는 법이었다.
그렇게 게임이 시작됐다.
그때, 진유성의 눈에 반가운 아이디가 들어왔다.
샤이나크.
그가 적 팀에 있었다.
귀국하자마자 솔로 랭크에 접속한 세계 최고의 선수와 진유성이 만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