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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99화 (99/337)

<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99화>

Quest 20. 게임하는 천마님

지종수가 건들거리며 다가왔다.

“어쩔래, 진유성? 바로 일 대 일 갈까?”

“…….”

“뭐야? 쫄았어? 왜 답이 없어?”

손자병법에는 서른여섯 가지의 계책이 적혀 있고, 여섯 가지의 상황에 맞춰 분류되어 있다.

개중 극도로 불리한 상황에 사용하는 계책은 패전계이다.

패전계(敗戰計).

상황이 불리한 경우 열세를 우세로 바꾸어 패배를 승리로 이끄는 전략.

패전계의 가장 마지막 계책은 주위상(走爲上)이다.

이는 여의치 않으면 피하라는 말로, 전략상 후퇴를 지칭했다.

지금이 딱 주위상의 계를 사용할 때였다.

아직 롤이란 게임에 능숙하지 못하니 싸움은 피하는 것이 옳다.

하지만…….

승리감에 고취되어 콧구멍을 벌렁거리는 지종수의 낯짝을 보고 있으니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다.

‘점혈을 해 볼까?’

격공으로 점혈을 해서 오른팔을 못 쓰게 만든다거나, 중요한 순간에 마혈을 짚어서 몸을 못 쓰게 만들면 이기지 않을까?

싸움에 비겁함은 없다.

이기면 그만이다.

결심을 내린 진유성이 고개를 끄덕이려는 찰나.

심도훈이 오리궁뎅이처럼 내밀고 있는 지종수의 엉덩이를 팡 하고 걷어찼다.

“야! 진유성은 아직 규칙도 모르는데 무슨 일 대 일이야?”

“한 판 했잖아!”

“한 판으로 되겠냐? 열 판도 모자라겠다.”

“흠, 그럼 몇 판 더 해 줄까? 특별히 관대하게?”

지종수가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 앉았다.

운이 좋은 놈이다.

하루 정도 팔을 못 쓰게 만들어 줄 생각이었는데.

그렇게 그들은 다시 게임을 잡기 시작했다.

“고인수.”

“왜?”

“아까 그 녀석들과는 다시 한 판 붙을 수 없는 거냐?”

“전판 상대편들?”

“적을 포함해 아군까지.”

“글쎄. 확률이 너무 낮지. 랜덤 매칭이라서.”

진유성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역시 조금 전의 패배는 되갚아 줄 수 없는 영원한 패배였다.

진유성이 정신을 집중했다.

패배는 잊어버리자.

중요한 것은 패배에서 배움을 얻는 것이다.

진유성이 지난 경기를 머릿속으로 복기하고 있는데, 주머니에 넣어 둔 핸드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유혜연이었다.

“여보세요?”

-유성아, 어디니?

“저 PC방이에요.”

-아, 그래? 친구들이랑 놀고 있니?

“네.”

-그럼 재미있게 놀고, 너무 늦지 않게 들어오렴.

유혜연이 전화를 끊으려는데, 예리한 진유성의 청각에 묘한 소리가 들렸다.

집중해서 들어 보니, 무거운 짐을 나르는 소리였다.

“집에 택배 온 거예요?”

-응. 좀 빨리 왔네.

그러고 보니까 이번 주 내로 아기 용품들과 육아를 위한 가구들이 도착한다고 했었다.

“흠.”

상림은 아직 퇴근 전일 거고, 힘쓰는 일에 상소윤은 있으나 마나일 것 같다.

“제가 집으로 갈게요.”

-아니야. 친구들이랑 놀고 있잖아.

“괜찮아요. 바로 갈게요.”

전화를 끊은 진유성이 게임을 끄자 옆자리에 앉아 있던 고인수가 말했다.

“왜? 어디 가야 해?”

“일이 있어서 집에 가야겠다.”

“그래?”

고인수는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지종수는 아니었다.

지난 몇 개월간 끝없는 패배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다가 드디어 승리를 만끽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진유성이 갑자기 도망을 친다니?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조금 더 승리를 즐겨야 한다.

“왜! 어디 가는데!”

“외숙…….”

외숙모라는 단어를 꺼내려던 진유성이 멈칫했다.

대정고 내에서 진유성과 상소윤은 사촌 관계가 아니었다.

유혜연은 요즘도 종종 사촌이라는 걸 티 내지 말라고 말했다.

“상소윤의 어머니가 불러서.”

“엉? 소윤이 어머니가 널 부른다고?”

“그래.”

지종수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왜? 왜 너를 부르시는데?”

“가구가 왔는데 정리할 사람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왜 그런 상황에서 너를 부르시는데?”

“알 거 없다.”

귀찮아진 진유성이 대충 대답하고는 PC방을 빠져나왔다.

결과적으로 잘된 일이었다.

손자병법의 삽십육계를 실천할 수 있게 됐으니.

‘조금만 기다려라, 지종수.’

진유성이 그렇게 다짐을 하며 집으로 향하는 사이, 지종수의 얼굴은 와락 구겨져 있었다.

“왜? 왜? 왜! 어째서 소윤이의 어머니가 진유성을 찾는 거지?!”

“아, 이 새끼 또 시작이네. 아침마다 픽업도 해 주시는데 일손이 필요하면 부를 수도 있지.”

“그래, 집도 가깝다고 하지 않았나?”

“하지만 왜! 왜 굳이 진유성을 부르냔 말이다!”

“아니, 씨. 방금 말했잖아. 집도 가까운데 친하면 부를 수도 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꼭 부를 이유는 없잖아?!”

“부르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잖아, 이 빡대가리야.”

심도훈과 고인수는 처음에는 지종수를 납득시키려고 했지만 지종수에게 논리는 통하지 않았다.

열 받은 심도훈이 입을 열었다.

“어머, 가구가 들어왔네. 우리 사위를 불러야겠다.”

심도훈의 의도를 눈치챈 고인수가 금방 말을 보탰다.

“우리 사위가 운동도 참 잘하고, 힘도 세지. 역시 우리 사위라니까.”

“소윤이는 유성이처럼 든든한 남자한테 시집을 보내야지.”

“든든하기만 한가? 공부도 얼마나 잘하는데?”

“지종수처럼 축구도 못하고, 공부도 못하고, 펀칭 머신도 못하고, 당구도 못하고, 실내 사격도 못하는 놈팡이한테는 어림도 없지.”

“그럼, 그럼.”

심도훈과 고인수의 티키타카에 지종수의 표정이 붉으락푸르락 변하기 시작했다.

“게, 게임은 내가 더 잘해!”

“어른들이 게임 잘하는 걸 참 좋아시하겠다. 그지이?”

고인수가 지종수를 놀리는 사이, 심도훈은 진지하게 생각에 잠겼다.

사실 셋 중 심도훈이 게임을 가장 잘했다.

그냥 잘하는 정도도 아니라, 대한민국에서 상위 0.5퍼센트 안에 들 만큼 잘했다.

돈이 워낙 많으니 구단에 기부금을 내고 프로게이머들에게 게임을 배우기도 하고, 인터넷 방송 같은데 후원을 해서 함께 게임을 하기도 했다.

지종수가 축구를 배우기 위해 영국 구단에 돈을 쓰는 것과 똑같은 일을 심도훈도 했던 것이다.

다만 지종수와 다른 건 심도훈은 이러한 자신의 행동을 남에게 알리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게임 폐인 같잖아.’

축구는 운동으로 취급해 주지만, 게임은 아니었다.

대외적으로 살짝 부끄러운 취미였다.

어쨌든 심도훈은 굉장히 게임을 잘하는 편이었기에, 진유성의 잠재력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 해 보는 게임이라고 했건만 그 적응력이 심상치 않았다.

‘한 달만 지나면 진유성이 더 잘하지 않을까?’

심도훈이 그런 생각을 하며 아직도 망상에 빠져 있는 지종수를 힐끔 쳐다보았다.

지종수가 또다시 패배의 쓴맛을 맛보고 좌절하는 꼬락서니를 보고 싶었다.

* * *

집으로 돌아온 진유성은 유혜연과 함께 가구와 물품들을 날랐다.

가구라고 해도 큰 건 아니었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과 태어난 이후에 필요한 것들을 한 번에 주문해 양이 많은 것뿐이었다.

사실 임신한 것만 아니었다면 유혜연 혼자서도 충분히 나를 수 있었다.

그러나 임신 중에는 조심하는 것이 좋았기에 진유성이 곧장 집으로 온 것이었고.

“유성아 혼자 들기 무거우…….”

진유성이 배송된 가구 중 가장 큰 유아용 침대 앞에 서자, 유혜연이 말리려고 했다.

다른 가구는 혼자서도 나를 수 있는 것들이지만, 유아용 침대는 아니었다.

상당히 크고 상당히 무거웠다.

당장 필요한 것도 아니니 상림이 오면 같이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어디다 놔둘까요?”

그런데, 진유성이 너무나 손쉽게 가구를 들었다.

거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모습이다.

“유성아, 안 무거워?”

“별로 안 무거운데요?”

“그, 그래? 무거워 보이는데?”

“무게중심을 잘 잡으면 돼요.”

“그렇구나.”

역시 공작원 출신이라서 그런지 힘을 쓰는 요령이 뛰어나다.

‘아니, 근데 공작원 출신이 아니지 않나? 김씨일가니까…….’

유혜연은 잠시 혼란이 왔다.

생각해 보니까 처음 유성이를 받아들였던 건, 남편의 모습과 닮은 점이 많기 때문이었다.

서 있는 자세도 그렇고, 등 뒤를 내주지 않는 습관이나 시야를 넓게 잡는 습관들이 그러했다.

한데, 시간이 흐르며 유혜연은 진유성의 비밀을 한 가지 더 알게 되었다.

돈이 엄청나게 많다는 것.

북한에 남겨 둔 돈을 가져올 정도의 지배계층이었다는 것.

그래서 김씨일가라고 생각했는데, 김씨일가라면 훈련을 받았다는 게 이상했다.

‘하긴 꼭 김씨일가만 북한의 지배계층은 아니잖아? 군인 집안이었을 수도 있고.’

혹시 군인 집안의 서자로 태어나서 철저하게 훈련을 받았던 게 아닐까?

어떻게든 아버지의 눈에 띄기 위해 지옥 같은 훈련을 견뎌 냈지만, 토사구팽이 예정되어 있었다던가?

유혜연의 상상의 나래가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진유성은 자신과 관련된 유혜연의 머릿속 소설이 업데이트된다는 것도 모른 채, 가구 배치를 전부 끝냈다.

“또 뭐 할 거 있나요?”

“으응? 아니야. 고생 많았어.”

“고생은요.”

그때, 현관문이 열리며 상소윤이 집안으로 들어왔다.

“엄마, 나 왔어.”

진유성은 몇 분 전부터 상소윤이 다가오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제는 모른 척하는 게 더 익숙했다.

“왔냐?”

“어, 뭐야. 진유성 집에 있었네? 너 피씨방 갔잖아?”

“금방 왔다.”

유혜연이 진유성의 엉덩이를 툭툭 두드렸다.

“유성이가 가구 나르는 거 도와주겠다고 바로 왔어.”

“게임 안 하고?”

“한 판 했다.”

그렇게 유쾌한 한 판은 아니었지만.

상소윤은 진유성의 말을 듣고 조금 놀랐다.

지금은 즐기지 않지만, 상소윤도 게임을 했던 때가 있었다.

그래서 잘 알았다.

게임이란 안 하면 안 했지, 딱 한 판만 하는 게 제일 어려웠다.

한데 진유성은 엄마를 도와줄 일이 생기니까 곧장 집으로 온 것이었다.

“뭐야, 괜찮네.”

“뭐가 괜찮다는 소리냐?”

상소윤이 다가와서 진유성의 엉덩이를 툭툭 두드리려고 하자, 진유성이 인상을 팍 썼다.

“건방지구나.”

“아, 왜. 칭찬해 주는 거야.”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느냐. 박색한 것의 손이 닿으면 박색해진다고.”

“웃기고 있네.”

상소윤이 다시 한 번 진유성의 엉덩이를 두드리려고 하자, 진유성이 가벼운 몸놀림으로 피해 냈다.

두 사람의 투닥거림을 흐뭇하게 보고 있던 유혜연이 박수를 짝 쳤다.

“다들 저녁 안 먹었지? 자장면에 탕수육 시켜 먹을까?”

“진유성이 부먹을 포기한다면.”

“내 누누이 말하지 않았느냐. 당초육(糖醋肉)은 본래 양념을 부어서 먹는 음식이라고. 찍어 먹는 음식이 아니다.”

“당초육이 아니라 탕수육이잖아.”

“탕수육의 원형이 당초육이다.”

“내 원형은 엄마지만, 엄마랑 나는 다르잖아? 그치?”

“훗, 그걸 비유라고 하는 게냐? 역시 꼴등답군.”

“꼴등 아니라고!”

“아무튼 난 부어서 먹겠다.”

“그럼 나 안 먹어.”

“먹지 마라.”

“우리 엄마가 시켜 주는 건데?”

“내 돈으로 시켜 먹겠다.”

최근 진유성과 상소윤은 부먹이냐 찍먹이냐를 두고 논쟁을 벌였다.

사실 진유성의 입장에서는 논쟁할 거리도 안 됐다.

그는 명나라에서부터 탕수육의 원형인 당초육을 즐겼고, 당초육에는 언제나 소스가 부어져서 나왔다.

황실 요리사들이 잘못 만들었을 리 없으니, 그에게 찍먹은 사도일 뿐이었다.

진유성과 상소윤의 논쟁이 거세지자, 유혜연이 해결책을 찾았다.

“탕수육 2인분을 따로 포장해 달라고 하자. 그럼 됐지?”

하지만 일견 현명해 보였던 유혜연의 해결책은 미봉책이었다.

막상 음식이 배달되자 탕수육이 함께 배달된 것이었다.

1인분씩 나눠 달라는 말이 전달되지 않은 것인지, 깜빡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 순간, 진유성의 손이 번개같이 움직였다.

“야!”

진유성의 노림수를 알아차린 상소윤이 소리를 지르며 손을 뻗었지만, 금나수로 진유성을 이길 사람은 중원에도 없었다.

진유성은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포장을 벗기고 탕수육 소스를 부어 버렸다.

그러곤 승리자의 기색으로 상소윤을 쳐다보았다.

이미 엎질러진 소스를 어떻게 할 거냐는 눈빛으로.

하지만…….

“진유성.”

스산한 유혜연의 목소리에 진유성이 흠칫 놀랐다.

“같이 먹는 음식에 누가 그렇게 소스를 부으랬니?”

“…….”

“응? 대답해 볼래?”

진유성이 몰랐던 사실은 유혜연이 찍먹파라는 것이었다.

모녀의 식성은 닮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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