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98화>
“안 한다고?”
“어.”
“왜? 어째서? 무엇 때문에?”
지종수가 당황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대정고의 유구한 역사를 우리 대에서 끝내겠다고?”
“역사고 나발이고 재미있자고 내기하는 건데 진유성이 끼면 재미가 있겠냐? 그건 내기가 아니라 기부지.”
사실 지종수만 해도 대정고에서 운동으로는 적수가 별로 없었다.
본인의 관심과 역량이 축구에 집중되어 있긴 했지만, 마음만 먹는다면 농구나 다른 스포츠에서도 발군의 실력을 보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종수가 승패의 향방을 결정지을 정도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냐면, 그건 아니었다.
집단 스포츠에서 일인의 영향력은 어디까지나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진유성은 달랐다.
진유성은 홀로 승패를 결정지을 수 있었다.
당장 축구만 봐도 청소년 대표팀급인 대정고의 특기생들을 농락하고 골을 넣었다.
농구는 몇 번 하지 않았지만, 마음만 먹으면 늘 골을 넣는 듯했다.
손목 힘과 슛의 정확도가 얼마나 뛰어난지, 거리와 무관하게 휙휙 던지면 척척 들어갔다.
프로에서도 버저 비터라고 찬양받을 장면들이 수두룩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대정고 학생들은 운동선수란 직업에 대한 동경이 전혀 없었다.
일류 운동선수들이 돈을 많이 번다고 해도, 대정고 학생들의 부모님이 버는 돈보다는 적었다.
하지만 이건 일류 때의 이야기였다.
초일류가 되어서 전 세계에서 1, 2등을 다투게 된다면?
어지간한 기업을 넘어서는 돈을 벌 수 있다.
작년 스포츠 스타 소득 랭킹 1위가 한 해 동안 2,000억 정도를 벌었다.
사실 이는 세무 신고를 한 금액일 뿐이고, 절세를 위한 비용 처리까지 생각하면 적어도 3,000억은 될 것이었다.
그래서 종종 대정고 학생들이 진유성을 보고 ‘쟤는 왜 운동선수를 안 하냐?’라는 의문을 표했다.
아무리 봐도 비범한 실력이었으니까.
이런 이유로 진유성이 참여한다면 체육 대회의 내기가 성립되지 않는 것이었다.
“아, 그럼 진유성은 축구 안 나가면 되잖아.”
“축구만 문제가 아니라 농구, 야구 전부 안 돼. 구기 종목에 끼면 내기 안 할 거야.”
“그런 게 어디 있어! 그럼 진유성은 체육 대회 참가 못해? 구경만 해?”
“다른 거 하라고 해. 줄다리기나 씨름 같은 거 있잖아. 아니면 게임하든가.”
“……게임?”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몇 년 전부터는 체육 대회에 E-SPORTS를 포함하는 경우도 많았다.
여전히 나이가 있는 선생님들은 컴퓨터 게임이 무슨 스포츠냐고 어이없어했지만, 학생들의 반응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축구나 농구보다 훨씬 더 많은 학생이 관심을 보였다.
대정고도 이에 발맞춰서 몇 년 전부터 E-SPORTS를 체육 대회 종목에 포함시켰다.
친구의 제안에 지종수의 표정이 설핏 바뀌었다.
‘게임?’
그동안 지종수는 진유성을 이기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해 왔다.
그러나 스피드, 밸런스, 파괴력, 통찰력, 집중력, 재력, 경험, 거기에 공부까지.
전부 패배했다.
하지만 게임이라면 어떨까?
진유성은 은근히 기계치의 모습을 보일 때가 많았다.
핸드폰도 딱 유투브나 인터넷을 볼 때만 썼다.
어플이나 추가 기능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지하거나 복잡해 하는 것 같았다.
‘흠.’
문제는 지종수 역시 게임에 엄청난 재능이 있는 건 아니라는 것.
그냥 친구들과 종종 즐기는 평균 실력 정도의 플레이어였다.
그러나 시도해 볼 가치는 있었다.
“좋아. 아주 좋아.”
시시각각 표정을 바꾸던 지종수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뭐가 좋아?”
“아냐. 그럼 구기 종목에는 참가하지 않는 걸로 하지, 뭐.”
이미 게임이란 새로운 주제에 정신이 팔린 지종수가 후다닥 자리를 떠났다.
반으로 돌아온 지종수는 자리에 앉아 무협 소설을 보고 있는 진유성에게 향했다.
“야, 진유성!”
“왜 그러느냐.”
“너 게임 해 본 적 있냐?”
“게임? 윷놀이?”
생애 첫 패배를 안겨 준 윷놀이를 떠올리는 진유성에게 지종수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런 거 말고. 롤이나 배그 같은 거.”
“뭔지는 아는데, 해 본 적은 없다.”
컴퓨터 게임은 진유성에게 정말 미지의 존재였다.
일단 사람들이 대체 왜 이걸 좋아하는지부터 이해가 안 갔다.
축구나 농구 같은 스포츠도 시시하긴 하지만, 그래도 보통 사람들이 즐기는 이유는 납득할 수 있었다.
직접 몸을 움직이고, 땀을 흘리며, 규칙에 따라 치열하게 겨룬다는 행위 자체는 무(武)와도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스포츠는 아니었다.
키보드와 마우스로 캐릭터들을 조작해서 겨룬다는 행위는 진유성에게 정말 이상한 문물이었다.
물론 인기 게임이 뭐고, 어떤 규칙을 가졌는지 정도는 대충 알고 있었다.
유튜브를 탐험하다 보면 게임 영상들도 많이 나왔으니까.
뜻밖의 반응에 지종수의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진유성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찾은 것만 같았다.
“진유성, 오늘 끝나고 게임 한판 할래?”
“게임? 싫다.”
“너 구기 종목에 참가하면 애들이 내기 안 하겠대. 이스포츠만 허용이라는데?”
“그럼 안 나가면 되지.”
내기는 재밌지만, 재미없는 종목에 참가할 이유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진유성의 반응에 지종수는 당황했다.
지금까지는 뭘 하자고 하면 진유성은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꽤 완강했다.
어쩌면 게임에 자신이 없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지종수가 전가의 보도를 꺼내 들었다.
“내기 콜?”
“한 번도 안 해 봤다니까 무슨 내기야.”
“뭐야, 쫄았냐?”
“귀찮게 굴지 말고 가라.”
“게임 못하냐?”
도발에도 꿈쩍 않는 진유성의 모습에 지종수가 어떻게 할지 고민하는 순간.
교실로 들어오며 진유성과 지종수의 뒷말만 들은 상소윤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무슨 게임이야? 하지 마.”
“왜?”
“왜는 왜야. 쓸데잖아.”
“너도 맨날 운동은 안 하고 쓸데없이 살 빼는 기구만 모으잖아?”
“뭐래? 쓸모 있거든? 효과 완전 좋거든?”
“이 세상에 가만히 있는데 운동시켜 주는 기구는 없다.”
“아, 뭔데 시비야!”
“네가 먼저 시작했다.”
“쓸데없이 게임 같은 걸 한다고 하니까 그렇지! 유튜브도 모자라서 맨날 눈 시뻘게져서 밤새려고.”
“안 한다니까?”
“그래. 하지 마. 어차피 잘하지도 못할 거 같은데.”
“내가? 내가 못하는 게 있다고?”
“너 기계치잖아.”
상소윤의 뼈를 때리는 도발에 진유성의 얼굴에 분노가 서렸다.
분노가 향한 곳은 지종수였다.
“야, 지종수.”
“왜?”
“내기 한판 하자. 학교 끝나고.”
“오, 오케이.”
생각지도 못한 어부지리에 지종수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한데,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왜 내 도발은 안 통하고 소윤이 하는 도발은 통하는 거지?’
기분이 좋지 않다.
원했던 성과를 거뒀음에도 무시를 당한 것 같았다.
* * *
학교가 끝나고 진유성, 지종수, 고인수, 심도훈은 PC방으로 향했다.
진유성은 PC방에 와 보는 게 처음이었지만, 그렇다고 공간 자체가 낯선 것은 아니었다.
드라마나 영화, 예능 프로그램에 종종 PC방의 모습이 나오기 때문이었다.
“근데 무슨 게임 하지?”
“우리 체육 대회 종목이 배그랑 롤이지?”
“어.”
“네 명이니까 배그가 낫겠지?”
“배그는 조작 난이도가 너무 높지 않나?”
“그렇게 따지면 롤이 더 어렵지.”
“야, 진유성. 너 진짜 게임 해 본 적 없어?”
“없다.”
“한 번도.”
“그렇다.”
심도훈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완전 초보랑 같이 게임을 하는 것도 피곤한 일이다.
이것저것을 설명해야 하는 건 기본이고,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재미를 느끼기도 힘들었다.
‘하여튼 지종수 이 자식은…….’
지종수는 딱 한 번이라도 진유성을 이기면 된다고 혈안이 되어 있지만, 그가 보기엔 이런 내기를 하는 것 자체가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진유성, 넌 뭐 하고 싶은 거 있냐?”
“이걸로 하자.”
진유성이 가리킨 것은 , 줄여서 롤이라고 부르는 인기 게임이었다.
진유성은 게임에 관심이 없긴 했지만, 그래도 롤은 유튜브에서 웃긴 영상을 몇 번 봤었다.
스포츠 TV에서 대회를 중계해 주기에 본 적이 있었고.
“아이디는 어떻게 만드는 거냐?”
“내 아이디 써. 그거 언제 만들고 있냐.”
“내기는 어떻게 하는 거냐?”
“종수랑 내기는 그냥 끝나고 일 대 일로 해라. 같이 하면서 플레이 좀 익히고.”
“알겠다.”
그렇게 수많은 난관 끝에 마침내 네 명의 친구들이 게임에 접속했다.
넷 중 게임을 제일 잘하는 심도훈이 진유성에게 쉬운 챔피언을 골라 주고, 대충 조작 방법을 알려 주었다.
어차피 말로 설명해 봤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직접 겪어 보는 수밖에 없었다.
“흠, 어렵군.”
심도훈의 말을 대부분 이해하지 못한 채로 게임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진유성은 게임을 못했다.
‘진유성이라고 다 잘하는 건 아니네.’
심도훈은 홍대에서 진유성의 다재다능함을 목격했던 사람이었다.
뭘 해도 다 잘했다.
심지어 당구나 축구로도 지종수를 이겼다.
그래서 어쩌면 게임조차 잘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닌 듯했다.
[서폿 뭐하냐?]
[아, 뭐해! 미쳤냐?]
롤은 다섯 명이서 한 팀을 이루는 게임이었다.
하지만, 진유성의 일행은 네 명.
즉, 그들의 팀에 끼어 있는 한 명은 전혀 모르는 유저란 소리였다.
이 유저는 시작부터 시종일관 진유성을 욕하고 있었다.
사실 처음에 진유성은 유저가 자신을 욕하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욕이 자신을 향한 거라는 것을 눈치채게 되었다.
[건방지구나.]
[날 모욕한 것에 대한 사과를 하도록 하여라.]
[권주를 마다하고 벌주를 택하다니.]
처음엔 그러려니 하던 심도훈은 진유성과 유저간의 설전을 보며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음……?”
본래 키보드로 말다툼을 하다 보면 게임에는 집중할 수가 없고, 챔피언들이 멍하니 서 있기 일쑤다.
그런데 진유성은 열심히 말다툼을 벌이면서도 챔피언이 열심히 움직이고 있었다.
심도훈이 자리에서 슬쩍 일어나 진유성을 쳐다보았다.
그러곤 깜짝 놀랐다.
타자를 치면서 챔피언까지 조작하는 진유성의 손놀림이 어마어마하게 빨랐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챔피언의 움직임도 꽤 좋아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바보같이 움직이던 게임 속 캐릭터들이 조금씩 부드럽게 움직였다.
또한, 게임의 맥락과 전혀 엉뚱하게 움직이던 모습들이 많이 사라졌다.
게임의 맥을 따라가고 있다.
‘와, 이 자식은…….’
심도훈은 진유성이 게임에도 재능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직접 몸을 쓰는 스포츠처럼 단숨에 잘하는 건 아니지만, 조금만 연습하면 금방 잘할 것 같았다.
하지만 지종수는 이런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진유성을 놀리는 데만 집중하고 있었다.
“뭐야? 별로 못하네?”
“…….”
“야! 진유성! 잘 좀 해 봐! 왜 이렇게 못해!”
지종수의 얼굴에는 행복감이 물씬 묻어났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패배를 맛보았던가.
축구, 펀칭 머신, 사격, 당구, 공부 등등…….
지금껏 단 한 번도 진유성을 이긴 적이 없었다.
그러니 지금의 승리는 인생 처음으로 맛보는 달콤한 승리였다.
그사이, 첫 번째 게임은 패배로 막을 내렸다.
[패배]라는 두 글자가 화면을 가득 채우자 진유성은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지금껏 100년을 훌쩍 넘는 세월 동안 살아왔다.
그리고 진유성은 패배한 적이 없었다.
물론 그가 모든 싸움에서 이겼다는 말은 아니었다.
도저히 이기지 못할 상대에게 패배를 맛본 적도 있었고, 쫓겨서 도망을 다닐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미시적인 단계에서의 패배였을 뿐이었다.
결국, 거시적인 단계로 접어들면 진유성은 늘 승리했다.
하지만…….
게임이란 그렇지 않다.
이번 판의 패배는 영원히 기록되는 것이고, 무슨 짓을 해도 지워질 수 없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패배였다.
모니터를 바라보는 진유성의 두 눈이 불타오르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