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95화>
* * *
연기훈은 대정고 3학년 1반을 맡고 있는 담임 선생님이었다.
이런 연기훈에게는 몇 가지 특이점이 있었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대정고 출신이라는 점이었다.
이 말은 곧, 연기훈의 집안이 아주 오래전부터 부자였다는 것을 의미했다.
대정고에 다닐 만큼 부유한 집안의 자제가 학교에서 선생을 하고 있는 게 이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는 연기훈의 위치와 성향 때문이었다.
연기훈은 4남 2녀 중 막내였다.
회사를 물려받기에는 큰형과의 나이 차이가 17살이나 났다.
또한 그는 성향 자체가 한량이었다.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을 벌기보다는 적게 일을 해서 적게 버는 게 적성에 더 맞았다.
엄밀히 말하면 적게 일을 할 필요도 없었다.
회사고 유산이고 전혀 관심이 없는 막냇동생이 기특한 형들이 많은 품위 유지비를 지원해 주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평생을 한량으로 살던 연기훈이 대정고에 선생으로 들어온 것은 어머니의 권유였다.
어머니는 막내아들이 평생동안 놀고먹는 걸 보고 싶지 않았고, 무슨 일이라도 하길 바랐다.
그래서 여차저차 하다가 대정고에 영어 선생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실력이 없는데 빽으로 밀어 넣은 건 아니었다.
연기훈은 한국보다 미국에서 더 오래 살았고, 영어만큼은 네이티브 스피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들어온 대정고.
처음에는 시큰둥했다.
대정고 출신이기 때문에 학교의 시스템 자체는 낯설지 않았지만, 애들을 가르치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연기훈은 점차 보람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자신은 이곳에서 아주 특별한 존재였으니까.
대정고의 수많은 선생들 중 유일무이하게 학생들을 ‘훈계’할 수 있는 선생이었으니까.
연기훈은 대정고 선배이자, IMF이후 단 한 번도 재계순위 15위권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집안의 자제였다.
본래 대정고의 선생들은 학부모들의 등쌀이 무서워서 최대한 몸을 사리는데, 연기훈은 그런 거 없었다.
잘못을 한 학생이 있으면 데려다가 벌을 줬고, 혼을 냈고, 부모님한테도 거침없이 전화를 했다.
학생이 부모님한테 쪼르르 달려가서 고자질을 한다?
연기훈도 큰형한테 쪼르르 달려가서 고자질을 했다.
연기훈의 집안보다 재계 순위가 높은 학생이 와도 상관없었다.
그는 교사로서의 일을 한 것뿐이니까, 오히려 우리 자식 좀 엄하게 다뤄 달라고 부탁을 받기도 했다.
이러다 보니까 연기훈은 대정고 내의 교권을 지키는 히어로가 되었다.
온갖 빌런들이 판치는 대정고 내에서 유일하게 빌런과 대적할 수 있는 존재.
매일매일 동료 선생들의 SOS가 들어왔고, 연기훈은 당당히 출동했다.
재미도 있고, 보람도 있는 일이었다.
시간이 흘러 어느새 연기훈이 교편을 잡은 지도 6년째가 되었다.
그런 연기훈의 앞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생명체가 나타났다.
어떻게 보면 사상 최악의 빌런인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평범한 학생인 것 같기도 했다.
온갖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벌이고 다니는데, 특별히 악의를 갖고 하는 건 아니다.
그냥 재미있어서 하는 거다.
태생이 자연재해이자, 면학 분위기를 해치기 위해 태어난 존재.
연기훈은 놈에게 사상 최악의 빌런이란 호칭을 붙여 주었다.
빌런의 이름은 진유성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연기훈이 진유성과 진학 면담이 예정된 날이었다.
* * *
“앉아.”
연기훈이 친절하게 의자를 밀어 주자 진유성이 냉큼 앉았다.
연기훈은 그 모습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본래 빌런과 히어로의 싸움에서는 기세가 중요하다.
연기훈은 어제 점심에 있었던 일을 입에 담았다.
“진유성.”
“네?”
“매점 자판기를 고장 냈더라?”
“그랬더라고요.”
역시 비범한 말투였다.
그랬다고 당당히 대답하는 것도 아니고, 아니라고 부정하는 것도 아니었다.
제3자가 벌인 일인 양 스리슬쩍 넘어갔다.
평범한 대정고 교사였다면 더는 추궁할 수 없었겠지만, 자신은 아니었다.
빌런들이 넘치는 이 학교에서 유일한 교권의 수호자가 아니던가.
“그러더라고요? 네가 고장 낸 게 아니란 소리야?”
“아뇨. 고장 낼 의사가 없었다는 거죠.”
“근데 왜 고장이 났는데?”
“자판기가 제 돈을 먹어서요.”
“그럼 매점 아저씨한테 말을 했어야지.”
“고쳐 보려고 했습니다.”
“네가? 어떻게?”
“돈을 다시 빼려고 했죠.”
“꼬챙이 같은 걸 쓴 건가?”
“그건 아닙니다만, 방법은 비밀입니다.”
진유성의 뻔뻔한 대답에 연기훈이 눈을 떴다.
과연 비범한 놈이다.
“그래, 뭐. 수리비를 보냈다고 하니까 이건 없는 일로 하자. 하지만 다음부터는 자판기가 고장 나면 매점 아저씨한테 전달해. 알겠지?”
“네.”
기세를 잡았다고 생각한 연기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햇빛이 들어오는 창문을 등지고는 입을 열었다.
“유성아.”
“네.”
“어른이 된다는 건, 그리고 나이를 먹는다는 건 결코 쉬운…… 왜 웃어?”
“……안 웃었습니다.”
“웃었잖아!”
진유성은 분명 간신히 웃음을 참았다.
연기훈이 더 추궁하려는데 진유성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안 웃었습니다. 말씀하시죠.”
“…….”
연기훈은 묘하게 말려드는 걸 느끼며 다시 말했다.
“어른이 된다는 건 결코 쉬운 게 아니야.”
“네.”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한다는 거지. 내가 어떤 행동을 하면 어떻게 돌아올지 생각을 해야 한다는 거야.”
“네.”
“근데 신입생 반에는 왜 잠입했니?”
“잠입은 아니었습니다. 그냥 가서 앉아 있었죠.”
“왜?”
“영화에서 보니까 고참들이 신병인 척하더라고요. 재밌어 보여서.”
“여기가 군대야?!”
그 순간, 진유성이 연기훈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물었다.
“선생님, 군대 다녀오셨습니까?”
“…….”
연기훈은 말문이 턱 막혔다.
안 갔다.
큰형한테 사흘 밤낮으로 울고불고 난리를 쳐서 간신히 뺐다.
지나고 보면 그냥 한 번 다녀와도 괜찮았을 거 같은데, 20대 때는 진짜 너무 가기가 싫었다.
연기훈이 대답을 못하자 진유성이 추궁했다.
“다녀오셨냐고요.”
“아니…….”
“그럼 다음번에 같이 잠입하실래요? 꽤 재밌었습니다.”
“…….”
정말 상상도 못할 빌드업이다.
이 화제가 이렇게 연결하려면 대체 머릿속에 뭐가 들어야 하는 걸까?
연기훈은 도저히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성아.”
“네.”
“진학 이야기하자.”
“그러시죠.”
“대학 갈 거니?”
“준비는 해 보겠습니다. 결과적으로 안 가더라도.”
“그런 가벼운 마음으로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을…….”
말을 잇던 연기훈이 학생기록부를 확인하고는 깜짝 놀랐다.
9등.
지난 기말고사 진유성의 성적이었다.
대정고에서 9등이라는 건 정말 전국 단위에서 최상위 성적이라는 소리였다.
대정고에는 공부를 안 하는 학생들이 과반을 넘지만, 나머지는 정말 열심히 공부하는 아이들이었다.
좋은 성적을 얻어야만 가업을 이을 수 있는 학생들은 상상도 못할 압박감에 시달리며 공부했다.
그들이 한 달 과외비에 쓰는 돈이 대기업 임원들의 월급을 뛰어넘었다.
“…….”
연기훈은 또다시 할 말을 잃었다.
이제 이 면담을 빨리 끝내고 싶어졌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진유성을 갱생시켜 보려고 했는데, 안 된다.
이 자식은 대정고 역사상 최악의 빌런이다.
“그래, 유성아. 넌 꿈이 뭐니?”
“세계 평화요.”
“좋은 꿈을 꾸고 있구나…….”
연기훈이 자리에 털썩 앉더니 손을 휘휘 저었다.
그만 가 보라는 소리였다.
어깨를 으쓱한 진유성이 꾸벅 인사하고는 면담실을 빠져나왔다.
* * *
“흠.”
진유성은 담임 선생이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다는 걸 알았지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납득하기 힘든 일일 테니까.
하지만 현재 진유성의 목표는 정말로 세계 평화였다.
록펠러를 만난 이후, 그는 이 세계의 몇 가지 비밀을 알게 되었다.
록펠러가 모든 걸 설명해 준 건 아니지만, 대부분의 힌트를 줬다.
나머지는 진유성이 추측할 수 있는 범위였다.
게이트 사태는 그와 같은 세계에서 태어난 세쌍둥이 마도사들이 만든 작품이다.
그들이 게이트를 만든 이유는 간단했다.
아카샤를 속이고 영성을 착취하기 위해서.
아마 게이트는 아카샤가 관장하는 공간이 아니라 독립된 공간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서 죽은 각성자들의 영성을 세쌍둥이가 흡수할 수 있었다.
처음엔 이상함을 느꼈다.
본래 인간의 영성이란 그리 쉽게 착취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건 가능과 불가능의 영역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장점과 단점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사실 진유성도 영성을 흡수할 수는 있다.
기운에 대한 압도적인 구속력을 타고 났기 때문에, 원한다면 타인의 선천진기를 흡수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건 멍청한 짓이다.
타인의 진기를 흡수해 내공을 불리는 행위를 흡정대법(吸精大法)이라고 부르고, 무림인 대다수가 이를 끔찍하게 여기는 이유는 행위에 있지 않았다.
결과에 있었다.
흡정대법을 연마한 이들은 백이면 백 광인이 됐다.
타인의 원기(元氣)에는 타인의 영혼백육이 묻어났다.
내공을 늘리겠다고 그것을 마구잡이로 흡수하는 순간, 자아가 침범당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마도사들처럼 백과 육을 잃은 자들이라면 더욱 크게 영향을 받으리라.
하지만 이제는 부작용을 피할 방법을 알게 되었다.
필터 몬스터.
진유성은 천안의 게이트를 클리어한 이후, 게이트에 대해 추리했었다.
게이트는 커다란 플라스크.
보스 몬스터는 거름종이.
결과물은 에너지.
다만 무엇이 원료가 되고, 무엇을 걸러내, 어디에 쓰이는지는 알지 못했다.
추리를 이어 갈 실마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확실히 알 수 있다.
인간의 영성을 게이트란 플라스크에 넣고, 필터 몬스터로 자아를 침범하는 것들을 걸러 냈다.
아마 필터 몬스터들은 커다란 영성 받이가 되어서 자아가 망가질 때까지 영성을 담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죽여서 순수한 기운을 세쌍둥이 마도사들이 흡수하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서울역 2차 게이트에서 만났던 린트콕은 이성이 없었고, 천안의 게이트에서 만났던 엘비온은 이성이 남아 있었다.
이는 아마 담고 있는 영성의 양에 따라 갈리는 문제인 것 같았다.
[필터 몬스터가 사망했습니다.]
[현재까지 필터링 진척도는 33퍼센트입니다.]
린트콕의 진척도는 33퍼센트.
[필터 몬스터 엘비온의 필터링을 시작하시겠습니까?]
[현재까지 필터링 진척도는 7퍼센트입니다.]
엘비온의 진척도는 7퍼센트.
린트콕은 자아가 33퍼센트나 침범을 당해 이성을 잃은 것이고, 엘비온은 7퍼센트만 침범당했기에 이성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진유성의 손에 명예로운 죽음을 택한 것이었다.
필터 몬스터가 어디서 불려와 어떤 식으로 게이트에 묶이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정말이지 사악한 일이었다.
그리고 못지않게 진유성을 기분 나쁘게 하는 것은 마도사들이 게이트를 만드는 것에 자신을 이용했다는 것이었다.
“천신궁의 게이트. 우린 그걸 통해서 하위 차원에서 끌어온 에너지로 지구에 게이트를 만들었다.”
“아직도 모르겠나, 진유성? 이 세계를 좀먹고 있는 게이트. 그것의 기원이 바로 너라는 걸.”
노벨상을 만든 노벨은 다이너마이트를 개발할 당시, 이게 광산 인부들의 생명을 구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하지만 실제로 다이너마이트는 전쟁에 더 많이 쓰였고, 많은 사람을 죽였다.
에에 노벨은 죄책감을 받았다고 들었다.
하지만 진유성은 노벨과 달리 죄책감을 느끼진 않았다.
살인자가 칼로 사람을 찔렀다고, 그 칼을 만든 사람이 죄책감을 느끼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좌시할 일도 아니었다.
이들의 행동은 지극히 악했다.
진유성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을 그저 귀찮다고 하지 않는 타입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는 세쌍둥이, 이제는 쌍둥이가 된 마도사들의 야욕을 분쇄할 작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