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93화>
* * *
사량발천근(四兩撥千斤).
넉 냥의 힘으로 능히 천 근의 무게를 다스린다.
이것은 일점으로 집중된 힘이 효율적으로 쓰였을 때, 무한한 힘을 발휘할 수 있음을 뜻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이는 그저 비유였다.
실제로는 제아무리 고절한 무인이라고 해도 넉 냥의 힘으로 천 근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진유성은 아니었다.
공간을 가득 채운 신력이 엄청난 압력으로 그의 존재를 추방하려고 할 때, 진유성은 희미한 불빛을 느꼈다.
그것은 진유성에게 한 번의 기회를 주었다.
신력의 거대한 압력 속에서도 끝까지 쥐고 있던 한 줌의 내공.
그것을 내지를 기회를.
진유성의 검이 공간을 갈랐다.
입멸공이 아니었다.
그저 내지른 것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진유성이 지금까지 갈고닦은 무(武)와 공(功)이 극한으로 들어 있었다.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진유성의 검이 공간을 가로지르며 록펠러를 향해 똑바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한 냥도 되지 않을 한 줌의 힘.
그것이 온 세상을 짓누르고 있는 신력을 거스르고 있었다.
록펠러는 두 눈을 크게 뜬 채 검의 움직임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추방당하지 않고 존재를 유지하는 것만으로 모든 힘을 다했으니까.
이윽고, 검이 닿았다.
스아아아아-
동시에 안개가 흐르는 소리와 함께 록펠러의 몸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수백 년 전 이미 백과 육을 잃어버린 록펠러였다.
남은 영과 혼이 흩어지고 있었다.
이것은 죽음이 아니었다.
소멸이었다.
록펠러는 조금씩 흩날리는 자신의 몸을 쳐다보다가 진유성을 쳐다보았다.
수백 년간 준비한 신성의 공간에서 그를 기다릴 때만 해도 이런 결과가 나올 줄은 몰랐다.
하지만 어쩐지 담담했다.
중원의 절대자.
인간의 무리(武理)로 신의 영역에 오른 자.
그러면서도 인간이길 고집하는 자.
생각해 보면 진유성은 그들과 정반대의 존재였다.
록펠러의 존재가 흩어지면서 신력의 무한한 압력도 옅어지기 시작했다.
“이제 좀 죽냐? 아, 거 드럽게 끈질기네.”
진유성의 태평한 물음에 록펠러는 호기심이 치밀어 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너는 두렵지 않았는가?]
“뭐가?”
[어디서 연유한 믿음인지는 모르나, 너를 신으로 믿는 자들이 있다.]
“있나 보지?”
[그들이 없었으면 넌 방금 존재를 추방당해 세상에 흔적도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근데?”
[그런데 어찌 이렇게 태연할 수가 있지?]
록펠러의 물음에 진유성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버티면 되는 거 아니야?”
[영원히? 신력의 압박을 버티고 또 버티려 했다는 말인가?]
“언젠가는 끝났겠지.”
[근거가 없는 낙천 아닌가?]
록펠러는 산산이 흩어지는 자신의 몸에는 관심도 없이, 그저 진유성만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진유성은 록펠러가 괘씸해서 말을 안 해 줄까 하다가 입을 열었다.
“야, 너 바보냐? 미래는 현재의 연장선이야.”
[……?]
“미래를 걱정하는 것은 불확실을 더듬는 일이고, 현재에 최선을 다하는 것은 확실을 다지는 일이라고.”
미래란 알 수 없다.
아무리 미래를 대비하고 일을 하더라도 인간의 손을 떠나 진행되는 변수들이 있다.
그에 반해 현재는 어떠한가?
현재 최선을 다하는 것은 변수의 영역이 아니었다.
의지의 영역이지.
진유성은 그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신력의 압박이 영원할 수도 있었고, 결국 진유성은 버티지 못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겁을 먹을 바에는 현재에 최선을 다하겠다.
그러다 보면 기회가 오겠지.
이것이 진유성의 신념이었다.
[하…… 하하하하.]
록펠러가 힘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진유성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치는 아마 모든 인간이 알고 있을 흔하디흔한 것이었다.
대단하고 고절한 깨달음이 아니었다.
고작 그런 마음가짐 따위가 자신이 수백 년 동안 해 온 준비를 물거품으로 만들다니.
실소를 멈출 수가 없었다.
[하하하하하!]
점점 커지는 록펠러의 웃음과 반비례해, 그의 존재감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이제 정말 한 줌밖에 남지 않았다.
[신의 힘을 쥐고 인간의 영역에 발 디딘 자여.]
“뭐.”
[그대는 결국 신이 될 것이다.]
“아닌데?”
[부정해도 소용없다. 오늘 그대를 살린 것도 그대를 신으로 믿는 이들이 아니던가?]
“그거 없었어도 내가 이겼다니까?”
[이제 그런 확고한 믿음조차 신의 것으로 보이는군.]
록펠러가 바람 앞의 촛불처럼 희미하고 흔들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가 신이 되지 못한다면, 신의 일부가 되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
없어져 가던 록펠러의 강렬한 존재감을 발휘하더니, 공간 전체에 자신의 영혼과 영성을 뿌렸다.
서역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지배자이자, 게이트를 통과해 신이 되고자 했던 인류 최악의 마도사.
록펠러가 소멸하는 순간이었다.
* * *
쿠쿠쿠궁.
록펠러가 소멸하는 순간, 공간의 붕괴가 완전히 멈췄다.
그 대신 엄청난 것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건…….”
순수한 자연의 기운이었다.
그동안 록펠러가 쌓아 온 것들과 공간 안에 흩어진 것들, 진유성의 몸에서 빠져나갔던 것들이 비처럼 내리고 있었다.
진유성이 기경팔맥을 개방해 흐르는 기운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의념만으로 입멸공의 최종 오의를 전개하느라 텅 비었던 상단전이 충만하게 채워졌다.
신력의 기운에 추방당했던 내공이 표홀함을 머금고 단전과 혈도를 흐르기 시작했다.
록펠러가 타고났으며 갈고닦았고 착취했던 영성이 자연의 기운으로 환원되었다가, 진유성의 몸에 들어왔다.
진유성은 자신의 몸이 붕 떠 있는 느낌을 받았다.
온 우주에 홀로 남은 것 같았다.
오기조원(五?朝元)과 삼화취정(三花聚頂)의 깨달음을 넘어, 등봉조극(登峰造極)의 영역에 도달해 본 진유성으로서도 처음 느껴 보는 아득함이었다.
진유성은 지구에 와서 우주가 빅뱅에 의해 태어났다는 이론을 배웠다.
정확히 빅뱅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그때 엄청난 기운이 전 우주로 흩어지지 않았을까 추측하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
공간에서 흐르고, 부서지고, 터지고, 합치되는 모습을 보아하니 우주 창조의 순간을 목격하는 기분이 들었다.
삼라만상(參羅萬像)의 온 의미를 깨달은 것 같은 고양감이 덮쳐 왔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진유성의 몸에서 시작돼 공간 전체에 흐르던 기운이 서서히 갈무리되었다.
진유성이 눈을 뜨자 숨길 수 없는 깊은 안광이 번뜩였다가, 천천히 사그라졌다.
이는 진유성이 흡수한 모든 기운이 완벽히 갈무리했음을 의미하는 장면이었다.
“……무공은 끝이 없군.”
진유성은 더는 올라갈 곳이 없어 보이던 자신의 무공이 한 단계 상승했음을 깨달았다.
사실 이러한 깨달음은 록펠러가 남긴 것들을 흡수해서 얻은 게 아니었다.
순수한 의념의 힘으로 입멸공의 오의를 사용하는 순간 얻은 것이다.
단지 급박한 상황 속에서 깨달음을 정립할 시간이 없었을 뿐이었다.
본래 깨달음이란 건 한 번 실마리를 놓치면 잘 돌아오지 않는 법인데, 록펠러가 흩뿌려 놓은 거대한 기운을 흡수하면서 운 좋게 다시 잡을 수 있었다.
‘흠…….’
한동안 자신의 몸 상태를 점검하던 진유성은 익숙하면서 이질적인 무언가를 느꼈다.
왜 익숙하냐면, 이건 멀더의 술법으로 타인의 언어를 습득하면 드는 느낌이었다.
원래 알고 있던 언어를 오랫동안 쓰지 않았지만, 입에 붙어서 나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듯했으니까.
다만 이질적이라고 느낀 건 이게 언어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지식이다.
록펠러가 가지고 있던 게이트와 아카샤에 대한 지식들.
그리 선명한 기억도 아니고, 책상에 앉아서 생각하면 줄줄 적을 수 있는 종류도 아니었다.
하지만, 어떤 현상과 마주하면 그것을 이해하기 쉽게 만들어 주었다.
만약 진유성은 록펠러가 사악한 마도비술이나 그의 생애에 대한 기억을 남겼다면 전부 버렸을 터였다.
그러나 록펠러가 남긴 것은 오로지 게이트와 아카샤, 즉 현재 상태와 관련된 기억들이었다.
그 짧은 순간에 진유성의 성향을 정확히 파악한 것이었다.
과연 영리한 놈이다.
인성은 최악인 것 같았지만.
“그럼 이제 나가볼까?”
진유성이 텅 비어 버린 공간에서 검을 빼 들었다가 문득 멈췄다.
뒤늦게 깨달았는데, 옷이 멀쩡한 곳이 없었다.
상의는 대부분이 찢기고 날아가 걸레짝이 되었고, 하의도 마찬가지다.
그나마 청바지의 재질이 두꺼워서 덜렁거리며(?) 싸우진 않은 게 다행이었다.
진유성이 인벤토리를 열어 옷을 꺼냈다.
지종수의 초대를 받고 런던에 여행 갔을 때 넣어 놨던 몇 벌이 아직 들어 있었다.
그중 유혜연이 잘 어울리겠다면서 사 준 와이셔츠와 바지를 입고, 보랏빛이 도는 정장 외투를 걸친 진유성이 검을 들었다.
그러곤 모든 신력과 법칙이 빠져나가 아무것도 남지 않은 허무의 공간을 노려보았다.
이미 게이트 공간을 뚫고 들어온 적이 있었기에, 찢고 나가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록펠러의 기억이 처음으로 쓸모가 있었다.
본래 진유성은 독도의 게이트를 클리어하러 들어온 것이었기에, 게이트를 찢고 나가 봐야 독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록펠러의 기억을 통해 게이트들이 연결된 방법을 알게 되었다.
그것을 이용하면 독도가 아닌 다른 곳의 게이트로 나올 수도 있었다.
물론 모든 게이트 내부를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진유성이 움직일 수 있는 곳은 그가 마스터 플레이어의 자격을 증명했던 게이트들.
즉, 보스 레이드 게이트를 클리어했던 곳들이다.
진유성이 노리는 것은 서울역이었다.
2차 비징후 S급 게이트를 클리어하면서 마스터 플레이어의 자격을 증명했으니까.
“흡!”
짧은 기합과 함께 진유성이 검을 휘둘렀다.
허무의 공간이 베였고, 그 틈새로 천천히 걸어 나오니 서울역 앞이었다.
사방이 깜깜한 새벽.
“흐음…….”
진유성이 숨을 크게 들이마시더니 인상을 팍 썼다.
“에이씨.”
일상으로 돌아온 흥취를 느껴 보려고 한 행동이었는데, 미세먼지만 냅다 먹었다.
워낙 치열하게 싸우던 중이라 미세먼지를 차단하는 것도 잊고 있었다.
재빨리 내공을 움직여 필터를 만들고, 호흡기를 지나는 미세먼지를 배출한 진유성은 미친 듯이 울리는 핸드폰을 붙잡았다.
한동안 먹통이 됐던 핸드폰이 지잉, 지잉 거리면서 부재중 전화와 부재중 메시지를 토해 냈다.
[야, 너 어디냐?]
[우와 씨, 외박하냐?]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상소윤의 닦달이었다.
답장을 하려고 보니 시간이 새벽 3시다.
그다음으로 보이는 것들은 유혜연, 상림의 것들이었다.
별다른 내용은 없었다.
그저 왜 집에 안 들어오냐는 내용들.
상소윤이 혹시 몰라 지종수에게 문자를 보냈는지, 지종수의 메시지도 와있었다.
[교주님, 독도 게이트 클리어됐다고 뉴스 나오던데 어디 계십니까?]
[어디세요? 핸드폰 고장 나셨어요?]
[아내한테는 친구 집에서 자고 올 거라고 연락 받았다고 말해 놨어요.]
[새벽에 들어오지 마시고, 아침에 들어오세요.]
[친구 집에서 잔 겁니다.]
[친구가 누군진 알아서 정하세요. 난 몰라.]
[저 먼저 잡니다.]
잔뜩 와있는 상림의 메시지에는 걱정이라고는 하나도 들어 있지 않았다.
뭐, 그럴 만했다.
진유성도 록펠러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누군가 자신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을 거라고 상상도 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생각해 보니까 괘씸하네?’
진유성은 신력의 압박을 버티다가 두 명의 얼굴을 떠올렸다.
떠올렸다기보다는 저절로 떠올랐다.
한 명은 이제는 이름도 까먹은 경산 저수지 게이트 앞에서 만났던 남자.
또 한 명은 원래 이름을 몰랐던 상해에서 만났던 요리사.
아마도 이 두 사람이 자신을 신으로 여기는 이들인 것 같았다.
그런데 요 못생긴 대머리 고자의 얼굴은 떠오르지 않았다.
상림 이 자식은 역시 불경하기 그지없다.
‘내일 좀 혼내 줘야겠군.’
진유성은 결의를 다지며 터벅터벅 서울역을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