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90화>
그와 동시에 진유성의 기운에 대항하듯 록펠러의 온몸에서도 새하얀 영기가 피어올랐다.
고오오오오-!
진유성의 푸른색 무형지기와 록펠러의 새하얀 영기가 충돌했다.
천신궁 뒤뜰의 사초(莎草 : 잔디)가 나부꼈다.
지금, 두 사람은 영역을 장악하며 서로를 견주어 보고 있었다.
진유성의 영역과 록펠러의 영역이 커짐에 따라 풀들이 한쪽으로 눕기 시작했다.
진유성의 영역 안의 풀들은 록펠러를 향해 눕는다.
록펠러의 영역 안의 풀들은 진유성을 향해 눕는다.
두 사람의 기운이 가진 힘에 풀들이 영향을 받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두 사람의 영역이 부딪쳤다.
프스스스-
영역의 교집합에 존재하는 사초들이 요동쳤다.
침범의 경계를 차지하는 자가 기세 싸움에 우위를 점한다는 건 자명한 사실.
균형을 이루는 두 힘에 사초들이 뻣뻣이 고개를 들다가…….
프스스스!
록펠러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진유성의 기운이 록펠러의 기운을 누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기세 싸움을 이긴 진유성의 영역이 점점 커졌다.
뒤이어 천신궁 뒤뜰에 존재하는 모든 사초가 록펠러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록펠러 주변의 좁은 공간의 풀들만이 영역을 지키려는 듯이 으르렁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건 정말…… 대단하군.’
록펠러가 감탄했다.
그가 놀란 것은 진유성이 뿜어내는 기운의 강맹함 때문은 아니었다.
물론 그것도 놀랍지만 그보다 놀라운 건 기세 싸움 도중 진유성이 벌인 행동이었다.
록펠러는 언제나 몸을 지킬 수 있는 최상위 방어 술법을 두르고 있었다.
공격에만 격이 있는 게 아니다.
방어에도 격이 있었다.
상대의 공격이 자신의 신체에 도달하는 순간 발동하는 방어는 하급.
상대의 공격이 상대의 신체에서 시작되는 순간 발동하는 방어는 중급.
그렇다면 상급의 방어술은 무엇일까?
바로 상대의 공격 의사를 읽는 것이다.
공격을 실행에 옮기기도 전에 방어술이 이미 반응을 하는 것이 상급이었다.
여기서 최상급으로 나아간다면 상대의 공격을 무력화하고, 반격까지 할 수 있다.
이러한 방어술은 오히려 공격술보다 난이도가 높은 기술이었다.
아주 복잡하고 치밀한 알고리즘 연산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어떤 방법으로 상대의 공격 의지를 판단할 것인가가 가장 큰 문제였다.
살기를 감지할 수는 있겠지만, 살기만 감지해서는 상대에게 농락당하기 쉬웠다.
경지에 오른 무인들은 살기를 자유자재로 다루었으니까.
그래서 록펠러는 모든 것을 복합적으로 고려하는 방어 술식을 짰다.
신체의 움직임.
근육의 움직임.
눈동자의 움직임.
중추신경계의 전달 작용.
말초신경계의 자극 반응.
세포와 뉴런 하나하나의 반응까지.
모든 것을 고려했다.
그야말로 마음을 읽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이 수백 년간 현대의 과학 기술을 체득한 마도술사가 구현할 수 있는 마도 비술의 극의였다.
그런데…….
이 모든 방어 술식이 진유성 앞에 발가벗겨졌다.
진유성에게서 뿜어지는 심동에 따라 방어 술법이 마구 요동쳤다.
아직 공격이 시작되지도 않았건만 방어 술법이 경고를 보내며 작동하고, 무력화되며, 파훼됐다.
심동이란 행동하려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진유성의 심동은 단순한 마음이 아니라, 가능성이었다.
만약 방어 술법이 작동하지 않았다면 진유성은 실제로 허점을 노려 공격해 왔을 것이다.
방어 술법이 작동했기 때문에 진유성이 공격하지 않은 것이다.
중요한 건 록펠러가 초수에서 큰 손해를 봤다는 사실.
진유성의 영역은 점점 넓어지고, 록펠러의 몸에 걸린 방어 술법은 점차 깨졌다.
‘이것이 무의 극에 오른 자인가.’
록펠러가 감탄했다.
그러나 그의 감탄은 경외나 두려움이 아니었다.
호기심이었다.
왜냐하면, 그에겐 언제든지 진유성을 패퇴시킬 수 있는 방법이 남아 있었으므로.
“흡!”
록펠러가 숨을 들이켜며 오른발로 바닥을 내리찍었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팽팽했던 영역이 부서졌다.
록펠러를 향해 누워 있던 풀들이 무형지기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다시 바람에 나부끼기 시작했다.
“굉장하군, 진유성.”
“어디서 건방지게 평가를 하고 있어?”
“넌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생각하는가? 일개 인간 따위가 지니기에는 너무나 강대한 힘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진유성이 피식 웃었다.
그 역시 록펠러와 똑같은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었다.
왜 내게 이런 힘이 주어졌을까?
백 년이 넘도록 늙지도, 쇠하지도 않은 내가 정말 인간일까?
분명 그런 생각을 했고, 고민이 지나쳐 심마에 빠진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답을 안다.
과거, 그에게 선택의 순간이 찾아온 적이 있었다.
* * *
신주청의 시신을 거둔 지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진유성은 학의 울음소리 때문에 잠에서 깼다.
분명 천신궁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 지금 그의 눈에 보이는 광경은…….
‘꼭 무릉도원 같군.’
그때 하늘을 날던 거대한 학이 거친 바람을 일으키며 진유성의 눈앞에 내리 앉았다.
“뭐냐?”
날개를 고이 접으며 진유성을 응시하던 학이 물었다.
[등선하겠는가?]
“이렇게 갑자기?”
[예상하고 있지 않았는가. 그대가 원한다면 인간을 벗어날 수 있다는 걸.]
“등선하면 어떻게 되는데?”
[신선이 된다.]
“신선이 되면 좋은 점이 있나?”
[완전히 자유로워진다.]
그 순간, 진유성은 자신의 온몸을 채우고 있던 내공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정확히 말하면 사라지는 게 아니라 흩어지고 있었다.
아마 모든 내공이 흩어지면 그의 육신 역시 사라지리라.
“흡!”
진유성이 주먹을 꽉 움켜쥐는 순간.
흩어지고 있던 내공이 다시 진유성의 몸속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학이 물었다.
[거부하는 건가?]
“그렇다.”
[어째서인가? 그대 정도의 존재가 아직도 집착하는 것이 남아 있단 말인가?]
“있다.”
[그게 무엇인가?]
“알 거 없으니, 꺼져라.”
진유성의 주먹이 권기(拳氣)를 일으키는 순간, 학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학은 진유성의 머리 위를 몇 바퀴 빙빙 돌다가 사라졌다.
깃털과 함께 학이 남긴 말이 진유성의 귓가를 맴돌았다.
[가득 차면 범람하기 마련이다.]
[그대로부터 범람한 것들이 그대와 같으리라고 생각하는가?]
진유성은 잠에서 깼다.
눈을 뜨니 다시 천신궁이었다.
이명처럼 맴도는 학의 울음소리를 곱씹으며 진유성이 중얼거렸다.
“뭐라는 거야, 새대가리 자식이.”
* * *
진유성은 꿈에서 등장한 존재를 완전히 믿고 있진 않았다.
정말 신선이란 존재가 있어서 꿈으로 찾아온 것인지, 그저 개꿈을 꾼 것인지 알 수 없으니까.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이 선택했다는 게 중요했다.
상림이 떠나고, 주혜미와 신주청이 죽고 난 뒤, 진유성은 외로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간을 선택했다.
인간으로 살아가고 싶고, 인간을 사랑하고, 인간으로 살 때가 가장 행복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자신은 분명한 인간이라고 확신했다.
“난 인간이다.”
진유성의 말에 록펠러가 피식 웃었다.
“그러한가? 스스로를 인간이란 한계에 가두었는가?”
록펠러가 오페라 가수처럼 양손을 펼치며 외쳤다.
“그렇다면 넌 나를 이길 수 없다.”
새하얀 영기가 화살촉의 모양을 갖추더니, 진유성을 겨냥했다.
수천 개의 화살촉이 쏘아졌다.
피피피피핏!
진유성이 검을 휘둘렀다.
수없이 분화한 검들이 수천 개의 화살촉을 쳐 내더니, 오히려 그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록펠러의 의도였다.
진유성은 화살촉을 쳐 내려 했겠지만, 영기로 만들어진 화살촉은 물질처럼 쳐낼 수 없었다.
오히려 쳐 내려는 검에 덕지덕지 눌어붙었다.
딱!
록펠러가 손가락을 튕기는 순간, 검에 눌어붙은 영기가 고속 회전을 시작했다.
봉쇄의 영술.
인력을 극한으로 증가시켜 중력을 끌어들이는 마도술.
진유성의 손에 들린 검으로 중력이 쏟아지더니 수천 톤의 부하가 걸렸다.
하지만…….
프스스스.
진유성의 검에서 심검이 피어올랐다.
자연의 법칙마저 왜곡하는 마도술도 의념을 극한으로 압축한 심검 앞에서는 맥을 추리지 못했다.
파칭!
봉쇄의 영술이 깨어지며 영기가 산산조각 났다.
그 틈으로 진유성의 검이 날아들었다.
심동과 무심동을 오가는 서른여섯 번의 속임수가 록펠러의 방어술을 무력화하더니.
푸욱!
심장을 꿰뚫었다.
하지만 진유성은 이것이 끝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프라하에서 경험하기도 했고, 록펠러의 입을 통해 직접 듣기도 했다.
이놈은 백과 육을 잃은 망령과 다름없다.
영혼체를 직접 소멸시키지 않는 한 끝난 게 아니다.
그리고 오늘은 보내 줄 생각이 없다.
입멸공 최종오의, 멸(滅).
그것으로 싸움을 끝낼 생각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진유성은 록펠러의 심장을 찌른 상태에서 심검이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요동치는 것은 자신의 심검이 아니었다.
록펠러의 온몸에서 피어오르는 심검과도 같은 기운.
그것이 요동치고 있었다.
그 속에서 록펠러가 광소를 터트렸다.
“크크크크!”
심장을 찔렀음에도 피가 흐르지 않았다.
피 대신 새하얀 영기가 울컥울컥 흘러나오며 공간을 채우기 시작했다.
모든 영기가 육신을 빠져나왔을 때, 록펠러가 광기에 젖어 소리쳤다.
[아직도 모르겠나, 진유성?]
[이곳이 왜 천신궁의 형태를 하고 있는지?]
천신궁의 것과 색만 다를 뿐, 완전히 동일한 모습을 가진 게이트.
그것이 커지기 시작했다.
새하얀 타원형의 게이트가 스멀스멀 확장되더니 빠른 속도로 공간을 잠식했다.
진유성은 록펠러의 심장에 박힌 검을 뽑았다.
그러곤 확장되는 게이트를 두 동강 내어 버렸다.
하지만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칼에 베인 물처럼 스르륵 갈라지더니, 아무런 흔적도 없이 다시 합쳐졌으니까.
고오오오오오-
게이트가 확장되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너무 빠르게 커지다 보니 게이트가 커지는 것인지, 세상이 작아지는 것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게이트가 뒤뜰의 크기를 넘어서고, 천신궁의 크기를 넘어서더니, 결국 자금성 전체를 집어삼켰다.
속도가 또 한 번 가속됐다.
땅을 집어삼키고, 하늘을 집어삼키고, 이내 세상을 집어삼켰다.
그리고, 그 안에는 진유성도 있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부지불식간에 게이트 안으로 들어온 진유성은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어지간하면 놀라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여긴…….”
익숙한 곳이었다.
우주처럼 새까만 공간 안에 별들이 떠 있고, 발밑으로 은하수가 흐른다.
앞뒤와 좌우의 구분이 없고, 상하와 정반의 개념이 없다.
이곳에는 정해진 것이 없다.
서 있다고 인식하기에 서 있을 뿐, 누워 있다고 인식하면 눕게 된다.
여긴 그런 곳이다.
이곳은…….
[날 죽이면 그대는 영겁토록 이면의 공간에 갇히게 된다. 나와 함께 죽을 생각인가?]
이면의 공간.
혹은.
[이곳은 상실의 공간.]
[그대를 구성하는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야만 통과할 수 있다.]
상실의 공간.
천신궁 게이트 안에서 경험했던 상실의 공간과 똑같은 곳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진유성의 눈앞에 서 있는 존재일 뿐.
천신궁 게이트 안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미증유의 존재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
진유성의 눈앞에 서 있는 건 록펠러였다.
록펠러가 공간을 소개하듯 두 손을 활짝 펼쳤다.
[이곳은 신성의 공간이다.]
[너라면 느낄 수 있겠지.]
새하얀 영기를 뿜어내는 록펠러를 중심으로 공간의 법칙이 흘렀다.
그의 의지에 따라 은하수가 약동하고, 중력이 설정되며, 상하좌우가 반전했다.
놀랍게도, 진유성도 그 법칙을 거스를 수 없었다.
[인간의 길을 택한 중원의 절대자여, 이 안에서는 내가 신이다.]
록펠러가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