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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88화 (88/337)

<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88화>

연이어 떠오르는 메시지를 본 진유성의 눈이 가늘어졌다.

‘신성의 정원에 입장할 경우 목숨을 보장할 수 없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겁을 먹은 건 아니었다.

진유성이 의아하게 여기는 것은 메시지를 보낸 주체다.

보통의 경우 <경고>는 상대에게 위험을 피할 수 있도록 주의를 주는 행위이다.

즉, 대상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으면 경고를 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프라하에서 만났던 새까만 놈이 자신의 안위를 걱정할 이유는 없다.

그게 이상했다.

게다가 메시지는 입장을 추천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에 반해 보스의 신전 안의 존재는 자신을 초대하는 기색이 여실하다.

‘흠.’

게이트의 메시지를 보내는 존재와 까만 놈이 별개의 존재일 확률이 높아졌다.

진유성은 숨을 들이켰다.

단전에 잠들어 있는 막대한 내공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패스워드는 도면이다.

그 도면을 따라 내공을 흘리기 시작하면…….

[마스터 플레이어의 자격을 증명했습니다.]

[에너지를 반환합니다.]

신전의 문이 열림과 동시에 자격 증명에 필요했던 내공이 되돌아온다.

진유성은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아놀드 벡의 검을 쳐다보았다.

이름은 모르겠지만, 상당히 좋은 검이다.

입멸검만큼은 아니지만, 신검(神劍)이라고 불려도 부족함이 없었다.

이 검이라면 입멸공의 최종오의도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부서져 버렸지만, 차정명에게 빌렸던 검으로도 한 번은 사용할 수 있었으니까.

입멸공의 최종오의를 쓸 수 있다는 것은, 이번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놈이 도망갈 수 없음을 의미했다.

건방진 놈에게 천마신교의 교리를 설파할 준비를 끝낸 진유성이 신전 안으로 향했다.

신전을 통과하는 순간.

쿠쿵-

미묘한 소리와 함께 공기가 변함이 느껴졌다.

공기만 변한 게 아니다.

기운의 흐름이 변했다.

낯선 기운의 흐름이었다.

하지만, 어딘지 익숙했다.

‘뭐지?’

생각을 더듬던 진유성이 눈을 크게 떴다.

새하얀 벽돌로 이루어진 신전 내부가 변하기 시작했다.

벽면이 일렁거리며 끝없이 확장되고, 기운이 요동쳤다.

이윽고.

진유성의 눈앞에 익숙한 광경이 펼쳐졌다.

그립다면 그립고, 지겹다면 지겨운 광경이었다.

천신궁의 뒤뜰.

그곳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익숙한 것이 나타났다.

파지지직.

검은색 빛을 내뿜으며 생겨난 타원형의 게이트.

색깔만 다를 뿐, 그가 천신궁의 뒤뜰에 만들었던 게이트와 똑같은 모양이다.

‘기억이라도 엿본 건가?’

진유성이 설핏 인상을 찌푸리는 순간.

일렁이는 게이트 속에서 누군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리운 풍경인가? 진유성?”

프라하의 올드 캐슬에서 만났던 새까만 놈.

그놈이 진유성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 * *

진유성은 눈앞에 나타난 놈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지난번에 만났을 때와 느낌이 달랐다.

올드 캐슬에서는 온몸에 악의로 빚어낸 영기를 두르고 있었는데, 지금은 아니다.

인간의 느낌은 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악한 느낌도 아니었다.

“야, 까만 놈.”

“내 이름을 록펠러다, 진유성.”

“록펠러?”

어디서 들어 본 이름이라 고개를 갸웃하는데, 록펠러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본래는 내 이름을 듣고 놀라야 하는데…… 이방인이라 그런지 별 감흥이 없나 보군.”

“아, 뭐. 석유왕? 다큐멘터리에서 봤는데? 그게 너냐?”

“그게 나냐고 물어보면 좀 애매하군. 인간들을 부려 석유의 95퍼센트를 독점한 건 나지만.”

록펠러가 만면에 한껏 웃음을 지었다.

분명 이전과 달리 인간적인 면모와 태도였다.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보다 날 왜 불렀나?”

“서울역 2차 비징후 게이트. 거기에 들어왔던 게 너냐?”

“보스 몬스터 린트콕이 있던 게이트를 말하는 거냐?”

“어.”

“이미 나라고 생각했던 거 아닌가?”

“그렇긴 한데 확신이 없잖아?”

“내가 맞다. 그럼 나도 한 가지 물어보지. 그날 게이트 안에 있었나? 어떻게 내 눈을 피할 수 있었지?”

“물어서 뭐해? 내가 너보다 뛰어나니까 안 걸린 거지.”

“흠.”

진유성의 말에 록펠러가 어깨를 으쓱했다.

진유성은 왠지 록펠러가 대화를 즐기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지만 굳이 이놈과 교분을 나누고 싶지 않았다.

적과 나눌 교분은 검이면 충분했으니까.

진유성이 검을 드는 순간, 록펠러가 두 손을 흔들었다.

“워워, 성급하게 왜 이래?”

“희한하군. 하는 짓이 인간 같네?”

“이 공간에서는 인간과 다를 바가 없지. 그보다 진유성.”

“뭐, 인마.”

“대화를 좀 나눠 보는 건 어떤가?”

“너랑 내가 할 이야기가 뭐가 있는데?”

“왜 나를 적대하는 거지?”

“이거 완전 또라이 아니야? 프라하에서 먼저 공격한 게 누군데?”

“그 일에 대해서 사과한다면?”

“웃기고 있네.”

록펠러가 자신의 목숨을 노리려 했다는 것과 별개로, 진유성은 록펠러가 근본적으로 사악한 존재라는 걸 알아챘다.

그가 두르고 있던 사이한 악기가 그것을 증명했다.

살기가 골수까지 장악한 살인귀들도 그런 기운을 뿜진 못했다.

진유성은 록펠러가 죽인 인간이 적어도 세 자릿수를 훌쩍 넘기리라는 걸 확신했다.

“야, 까만 놈. 네가 왜 자꾸 나랑 대화를 하려는지 알아?”

“네가 무서워서?”

“잘 아네.”

“그렇지 않다, 중원의 절대자.”

록펠러의 온몸에서 영기가 피어올랐다.

그 모습을 본 진유성은 오늘 처음으로 놀랐다.

록펠러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영기가 심검(心劍)의 기운을 담고 있기 때문이었다.

마음의 검은 결코 쉽사리 경지를 허락하지 않았다.

정명한 마음과 청아한 의지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심검의 기운을 뿜어낸 록펠러가 광기에 휩싸여 소리를 질렀다.

“대화? 대화! 대화라! 이 얼마나 감미로운 단어란 말인가!”

록펠러의 두 눈이 진유성에게 향했다.

그 눈빛 속에 담겨 있는 건 광기에 가까운 열기였다.

“진유성. 넌 개미와 대화할 수 있는가? 나무와 대화할 수 있는가? 없지! 없다고! 대화란 같은 격의 존재들끼리 나눌 수 있는 거란 말이다!”

“…….”

“지난 500년간! 감히 나와 대화를 나눌 존재는 없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대화를 나누지 못할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록펠러가 연극 무대에 오른 배우처럼 쩌렁쩌렁 소리를 쳤다.

사실 록펠러는 진심으로 진유성과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세쌍둥이의 대화는 거울을 보고 떠드는 것과 같았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독립성을 갈구하기에 개개인의 성격과 취향이 다른 것처럼 살아왔다.

셋째는 성격이 급하고, 둘째는 진중하며, 첫째는 음습했다.

하지만 이건 모두 연기였고, 어떻게든 개별적인 자아를 유지하기 위한 발버둥일 뿐이었다.

육신이 있을 때는 이런 발버둥이 중요치 않았다.

하지만 육신이 없어지고 정신체만 남은 지금.

정신체의 독립성이 침탈당하는 순간, 그들은 형태를 유지하지 못했다.

그러니 록펠러에게 진유성은 500년간 홀로 지내 온 무인도에 떠내려온 첫 손님이나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이 밤이 지나면 너 아니면 나는 죽는데 말이야. 너와 나! 우리가 다른 존재라는 게 실감이 나는군!”

록펠러의 광기 어린 목소리에 진유성은 잠시 고민했다.

이놈이 원한다고 대화를 나눌 필요는 없지만, 가만 보니 뭘 물어봐도 대답을 해 줄 것 같다.

진유성이라고 호기심이 없는 건 아니었다.

록펠러가 했던 말 중에는 의미심장한 것들이 꽤 많았다.

[네놈은 상실의 공간에서 무엇을 잃었지?]

[게이트를 건너온 이유가 무엇이냐?]

[날 기억하지 못하나?]

[네놈, 상실의 공간에서 기억을 잃어버렸나?]

적과 대화를 나눠서 안 되는 건, 잘못된 정보에 속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해당이 안 되는 것 같다.

진유성이 검을 거뒀다.

“야. 씨부려 봐.”

“뭐?”

“하고 싶은 말을 해 보라고. 네 인생이나 한번 들어 보자.”

“하하하!”

경쾌한 웃음을 터트린 록펠러가 입을 열었다.

“너와 나는 같은 행성에서 태어난 존재이다.”

“너도 중원 출신이냐?”

“우리는 서역의 마도사였다.”

“우리?”

“나는 본디 세쌍둥이로 태어나서 절대자로서 서역에 군림했다. 하지만 너도 알지 않은가? 절대자의 삶은 무척 지루하지.”

그 말에는 공감이 갔다.

진유성도 세상을 바꾸겠다는 의지가 없었다면 그 고독함과 무료함을 버티지 못했을 것이었다.

“그래서 게이트를 열었다.”

“흠…….”

“너의 시대와 우리의 시대는 백 년 정도의 차이가 있다.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나?”

고개를 저으려던 진유성의 머릿속에 번뜩 떠오르는 광경이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100여 년 전, 세쌍둥이가 게이트를 열기 위해 마력을 퍼부은 적이 있고, 문이 절반쯤 열렸다고 합니다.”

게이트에 관심이 생겨 불렀던 멀더와의 첫 만남.

거기서 세쌍둥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와우.”

“왜 그러지?”

“아니, 내 기억력에 스스로 놀라는 중이었어. 근데 너희가 게이트를 연 거 맞아?”

“왜? 기록에는 절반만 열었다고 나왔나?”

“어어.”

“아니다. 확실히 열었다. 그리고 상실의 공간에 접어들었지.”

뭔가를 회상하듯 자신의 손과 몸을 내려다보던 록펠러가 말을 이었다.

“거기서 우리는 육신을 잃었다.”

“몸?”

“몸만 잃었으면 좋겠지만, 영혼백육의 절반인 백과 육을 잃었지.”

“뭐야? 귀신 맞네?”

“귀신? 흐흐, 귀신이라면 귀신이겠지.”

록펠러가 진유성을 쳐다봤다.

“중원의 절대자. 넌 상실의 공간에서 뭘 잃었지?”

“내가 왜 잃었을 거라고 생각하지?”

“공간의 법칙이 그러하니까. 상실의 공간은 우주적인 존재의 영역이다. 그자가 신인지는 모르겠지만, 놀라운 존재임에는 틀림없지 않은가?”

“난 안 잃었는데?”

“뭐?”

“싸워서 이겼으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아무것도 잃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는 무(武)의 9할을 잃고, ‘--’의 1할을 잃었으니까.

본래 상실의 공간에서는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야만 통과할 수가 있었다.

눈앞의 록펠러란 놈이 육신을 잃은 것처럼.

그러니 아마 ‘--’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가장 소중한 것이었으리라.

즉, 그는 무의 9할을 내주고 ‘--’의 9할을 지킨 셈이었다.

여전히 자신이 잃은 것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싸워서 이겼다고? 이기니 그냥 통과시켜 주던가?”

“어. 그냥 보내 줬지.”

“웃기는군. 그놈은 싸워 이길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또한, 상실의 공간에서는 반드시 뭔가를 잃어야 한다.”

“그거야 네 기준에서지.”

진유성의 반박에 록펠러가 피식 웃었다.

“뭐, 그렇다고 치지. 어차피 오늘이 지나면 네 기억은 나에게 흡수될 테니까.”

“아, 그래. 설명하기도 귀찮다. 그래서 뭐? 몸을 잃고 나서 어떻게 됐는데?”

“재밌군. 아주 재밌어.”

“뭐가?”

“그동안은 이야기 속 악당이 주인공을 함정에 빠트린 다음에 구구절절 계획을 설명하는 게 늘 우스웠는데…… 왠지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이유가 뭔데?”

“어차피 끝이니까. 악당이 죽든, 주인공이 죽든. 그러니 견딜 수가 없는 거지. 완벽한 계획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계획이지만, 아무도 모르면 완벽하다는 평가도 받을 수 없잖나?”

진유성은 이 재수없는 수다쟁이를 한 대 쥐어박을까 하다가 참았다.

그사이에도 록펠러의 말은 이어졌다.

“백과 육을 잃어버린 우리는 망령이 되었다. 여전히 막대한 힘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지구의 아카샤(????: ?k??a) 때문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는 없었지.”

“아카샤?”

“마도사가 아닌 존재에게 설명하긴 어렵군. 그냥 지구란 행성의 방위 시스템이라고 생각해라.”

“음…… 꾸러기 수비대 같은 거냐?”

“그렇게 역동적이진 않아. 의지만 있을 뿐, 행동하진 않으니까.”

“뭐야, 너도 그 만화 봤냐?”

“안 봤다. 제목만으로 대충 유추한 거지.”

비죽 웃은 록펠러가 말을 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소멸의 위험에 놓였다. 한데, 놀랍게도 누군가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주었지.”

“누가?”

그 순간, 록펠러가 놀라운 말을 꺼냈다.

“바로 너다. 진유성. 네가 연 게이트 덕분에 우리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뭐?”

“지구의 아카샤는 너무나 견고해서 우리의 힘만으로는 침탈할 수 없었지만 네가 샛길을 만들어 주었지.”

“…….”

“천신궁의 게이트. 우린 그걸 통해서 하위 차원에서 끌어온 에너지로 지구에 게이트를 만들었다.”

록펠러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아직도 모르겠나, 진유성? 이 세계를 좀먹고 있는 게이트. 그것의 기원이 바로 너라는 걸.”

록펠러가 만면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이것이 내가 너와 간절히 대화를 나누고 싶었던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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