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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87화 (87/337)

<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87화>

* * *

진유성이 생각에 잠긴 사이, 아낙키나의 이무기가 각성자들이 있는 곳까지 다가왔다.

입을 쩍 벌리며 울부짖는다.

끄어어어억!

이무기의 기괴한 울부짖음에 각성자들 몇몇이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쓰러졌다.

하지만 이무기는 열대우림과 화산지대의 경계를 넘어오지 못했다.

그저 소리만 지를 뿐이었다.

이 경계를 넘어오면 죽이겠다고 경고하는 것 같기도 했다.

진유성은 이무기에는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

오히려 신경이 쓰이는 건 보스의 신전 안에 있는 이상한 놈이다.

프라하의 올드 캐슬에서 만났던 까만 놈은 제법 강한 놈이었다.

애초에 진유성에게서 도망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강함을 증명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놈의 강함은 진유성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기도 했다.

육신이 없는 모습도 그렇고, 악의를 풀풀 풍기는 영기도 그러했다.

진유성의 눈에 비슷하게 보이던 놈은 한 명 더 있었다.

[이, 이럴 수가!]

[신성을 위한 영성이 어찌하여 사라…….]

서울역 2차 비징후 게이트.

보스를 클리어하자 나타난 이상한 놈.

당시 진유성은 존재 자체를 은폐하는 최고 수준의 은신술을 펼치고 있었다.

존재를 숨기기 위해서는 세상과 연결된 모든 관계를 일시적으로 끊어야 한다.

그것이 생사입멸의 멸(滅)이다.

이 상태에서는 진유성도 외부 환경을 명확히 인식할 수 없다.

잠결에 무의식적으로 느끼는 정도만 알 수 있다.

다만 진유성은 게이트 속 놈의 기운이 올드 캐슬에서 만났던 놈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확신은 없었다.

근거가 없었으니까.

그러나 지금, 보스의 신전에서 느껴지는 존재감을 통해 확실히 알겠다.

둘은 동일인이었다.

‘저놈이 게이트를 만든 놈일까?’

그것까지는 아직 모르겠다.

하지만 상관없다.

이제 확인해 보면 되니까.

진유성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문수혁에게 다가갔다.

문수혁은 말없이 아낙키나의 이무기만 쳐다보고 있었다.

“야.”

“……말씀하시죠.”

“네 검 좀 빌리자.”

“예?”

문수혁이 자신의 손에 들린 검을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아, 왜. 잠깐만 빌릴게.”

“그게 아니라, 이건 제 물건이 아닙니다.”

문수혁이 들고 있는 검은 황제 아놀드 벡이 빌려준 세븐 가디언즈 중 하나였다.

문수혁은 진유성에게 큰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지만, 타인의 물건을 함부로 빌려주는 건 별개였다.

“누구 건데 그래? 내가 잘 쓰고 돌려줄게.”

“이건 황제 아놀드 벡의 물건입니다. 그가 게이트 클리어를 기원하며 빌려준 것입니다.”

“아, 뭐야. 드벡이 거였어?”

“네?”

“나 드벡이랑 친해. 아니, 막 친한 건 아니고, 아무튼 내가 써도 아무 말도 안 할 거야. 걱정 마라.”

“…….”

문수혁은 진유성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한숨과 함께 검을 내밀었다.

진유성의 말을 믿어서가 아니다.

그가 아니라면 눈앞의 보스 몬스터를 누구도 해결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생각해 보면 어차피 그들이 전멸하면 무기도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이 남자에게 빌려주는 게 무기를 돌려줄 확률이 높아지는 일일 수도 있다.

게다가 헬멧 때문에 표정은 보이지 않지만, 목소리 나 몸짓에서 아무런 두려움이 느껴지지 않는다.

검을 빌리는 것도 비장함을 담아 빌리는 게 아니었다.

무슨 옆자리 친구에게 지우개를 빌리는 뉘앙스.

문수혁이 희망을 담아 물었다.

“저 뱀을 죽일 수 있습니까?”

“응? 저거 때문에 빌리는 거 아닌데?”

“그럼……?”

진유성이 피식 웃더니 되물었다.

“저게 그렇게 무섭냐?”

“……무섭지 않으면 이상한 거 아닙니까?”

“왜? 너무 커서?”

진유성이 걸음을 옮기더니 화산 지대와 열대 우림의 경계에 섰다.

이무기가 또다시 괴상한 울음소리를 내는 순간, 진유성이 나지막이 말했다.

“크기나 겉모습에 구애받지 마라. 내가 나로서 오롯이 존재하는 게 무와 공이다.”

각성자들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이무기의 거대한 울음소리보다 진유성의 나지막한 중얼거림이 더 또렷하게 들렸으니까.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온전히 담아내는 게 무인이다.”

각성자들은 저 이무기를 죽일 수 없다.

하지만 전력을 다할 줄 알아야 한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공격이 100이라면, 상대가 아무리 거대하고 두려워도 100의 힘으로 공격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래야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

진유성은 그것을 가르쳐 주고 있었다.

진유성이 아놀드 벡의 검을 들었다.

“좋은 검이네.”

그러곤 휘둘렀다.

진유성의 검에서 날아간 강기가 이무기를 난도질하기 시작한다.

끄에에에에엑!

이무기가 듣기 싫은 소리를 지르며 꿈틀거린다.

그러나 놈은 여전히 화산지대와 열대우림의 경계를 넘어오지 못한다.

진유성은 경계에 서서 계속해서 이무기를 공격했다.

다가가서 싸울 수도 있지만, 굳이 그럴 필요를 느끼진 못했다.

어차피 이놈은 몸풀기였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이무기가 쓰러졌다.

진유성은 이무기가 죽는 순간 엄청난 양의 경험치를 획득했고, 엄청난 레벨을 올렸다.

하지만 그의 레벨은 다시 1로 돌아갔다.

[알 수 없는 오류로 스탯이 정상적으로 분배되지 않았습니다.]

[스탯이 ??에 의해 ??로 소실되었습니다.]

[사용자의 레벨이 1로 돌아갑니다.]

[최초 레벨업 각성자 보호 시스템이 종료됩니다.]

레벨업을 통해 얻은 스탯을 모두 내공으로 치환하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이무기의 사체 너머로 보이는 보스의 신전에서 끔찍한 악기가 폭사되었다.

스멀거리는 악기가 칠흑처럼 새까만 창을 변하더니 진유성의 가슴팍을 향해 날아왔다.

쐐애애애액!

진유성은 검을 들어 가볍게 창을 쳐 냈다.

창이 산산이 부서지며 새까만 영기가 휘날렸다.

“초대하는 거냐?”

아무래도 오늘은 놈도 도망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진유성이 훌쩍 몸을 날렸다.

아낙키나의 이무기가 만들어 놓은 길을 따라서.

* * *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이무기가 쓰러지는 순간.

99명의 각성자들은 동시에 떠오른 시스템 메시지를 보았다.

[게이트 내의 보스 몬스터가 제거되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게이트 클리어에 성공하셨습니다.]

다들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본래 레이드 미션은 신전에 들어가서 보스를 잡아야 클리어됐다.

게다가 관리자도 분명 보스의 신전을 언급했었다.

[보스의 신전은 화산 지대와 열대 우림을 통과하면 나오는 신성의 정원에 있습니다.]

관리자가 아무 이유 없이 신전의 위치를 알려 줄 리 없었다.

위치를 알려 줬다는 것은 반드시 그 안으로 가서 보스를 잡으라는 소리였다.

그런데 갑자기 클리어라니?

각성자들은 다들 의아해 할 수밖에 없었다.

“젠장, 뭐가 어떻게 된 거지?”

“S급 게이트는 다른 건가?”

그들은 여전히 긴장을 풀지 않았다.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일이 그들의 예상을 빗나갔다.

평소에 보던 게이트 내의 풍경이 아니었고, 보스 게이트임에도 보스가 아닌 일반 몬스터들이 공격을 해 왔다.

그러니 클리어 메시지가 떴음에도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때, 환한 빛이 각성자들의 몸을 휘감기 시작했다.

“어!”

가장 먼저 빛에 휩싸인 각성자가 소리를 질렀다.

이 빛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게이트 밖으로의 이동.

‘진짜? 진짜로?’

이윽고 그들의 눈에 들어온 풍경은 출렁이는 바다에 둘러싸인 독도였다.

“크, 클리어다!”

“씨발!”

“진짜 클리어야!”

뒤늦게 각성자들이 행복한 비명을 내질렀다.

함께 소리를 지르던 문수혁이 뒤늦게 정신을 다잡았다.

“인원 파악!”

문수혁의 목소리에 각성자들이 SG의 수칙에 따른 인원 파악을 시작했다.

숫자가 점점 늘어났다.

그러나 숫자가 10을 넘으면서부터 각성자들은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이름을 ‘진유성’이라고 밝힌 이가 보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SG 수칙상 인원 파악 중에는 아무런 목소리도 낼 수 없었다.

마침내 인원수가 99에 이르고, 사망자가 없음을 확인한 사람들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어디 간 거지?”

“아직 아무도 없는데, 벌써 몸을 숨긴 건가?”

각성자들은 진유성이 독도의 어딘가에 몸을 숨겼다고 생각하고 말을 건넸다.

하지만 그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각성자들의 핸드폰이 터지기 시작했다.

게이트가 발생한 지역은 한동안 일반적인 송신탑으로 통신을 할 수 없었다.

게이트에서 뿜어지는 에너지가 송신탑의 전파를 방해하기 때문인데, 이 에너지를 무시하기 위해서는 특수 송신탑을 설치해야 했다.

이미 대한민국의 송신탑은 90퍼센트 이상이 특수 송신탑으로 교체된 상황이었다.

하지만 독도는 10퍼센트에 속하는 지역이었다.

그 누구도 독도에 게이트가 발생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핸드폰이 터진다는 건 정말로 게이트가 완전히 사라졌음을 의미했다.

각성자들이 전화기를 들어 주변 사람들에게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죽지 않았다는 반가운 소식을 알리기 위해.

“클리어했다고!”

“아, 엄마! 보이스 피싱 아니야!”

잠시 뒤.

독도를 향해 수많은 배와 몇 대의 헬리콥터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들이 각성자들의 연락을 받고 출발한 건 아니었다.

SG의 위성 카메라를 통해 독도 게이트가 사라진 걸 확인한 순간 이미 출발했다.

그렇지 않다면 강릉에서 구축함으로도 3시간은 족히 걸리는 독도에 벌써 당도할 수가 없었다.

배의 위쪽에서 날아오는 헬리콥터 정도가 연락을 받고 출발한 이들인 것 같았다.

배와 헬리콥터는 속도의 차이가 있으니까.

두두두두-

헬리콥터의 프로펠러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각성자들이 나란히 독도의 해안가에 섰다.

“근데 어떻게 게이트를 클리어했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하지?”

“진유성에 대한 이야기는 밝혀야겠지. 자세한 건 비밀로 해도.”

“일본 놈들이 꼬투리 잡는 거 아니야? 게이트가 S급 아니었다고?”

“뭔 소리야. 처음 언론에 발표한 게 그놈들이었는데.”

“아, 맞다. 그랬지.”

“근데 진유성은 대체 어디로 간 거지?”

각성자들은 진유성이 사라진 것에 아쉬움을 느꼈지만, 그보다는 기쁨이 더 컸다.

진유성의 신변에 위험이 닥친다는 건 상상할 수 없으니까 걱정도 안 됐다.

잠시 후, 독도에 기자와 군인, SG 직원들이 상륙했다.

수많은 카메라 앞에서 각성자들은 약속을 지켰다.

유치하다면 유치한 일이었지만, 게이트에 들어가기 전에 약속했으니까.

그 약속이란…….

울릉도 동남쪽

뱃길 따라 이백 리

외로운 섬 하나

새들의 고향

<독도는 우리 땅>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사망자 한 명 없이 S급 게이트를 클리어한 팀 우산도의 모습이 전 세계로 생중계되고 있었다.

* * *

각성자들이 게이트 밖으로 보내지는 순간.

진유성은 보스의 신전에 당도해 있었다.

보스의 신전은 익히 알던 것과 다른 점이 없었다.

순백색의 거대한 석조 건물은 늘 보던 것이다.

모든 것이 특이했던 S급 게이트의 최종장이라고 생각하니, 일견 평범해 보이기도 했다.

다만 다른 점도 있었다.

시스템 메시지였다.

[신성의 정원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마스터 플레이어의 자격을 증명해 신성의 정원에 입장하시겠습니까?]

[주의 : 신성의 정원에 입장할 경우 당신의 목숨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주의 : 당신의 목숨을 노리는 존재가 있습니다.]

[주의 : 입장을 추천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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