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80화>
Quest 17. 한국인 천마님
2023년의 3월이 다가왔다.
이 말은 곧, 3.1절 덕분에 하루 연장된 방학이 진짜로 끝났다는 것이었다.
물론 일반 인문계 고등학생, 특히 고3들은 방학에도 학교를 나갔지만 대정고는 아니었다.
그래서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끼리 회포를 푸느라 정신이 없었다.
“흠.”
2학년 3반에서 3학년 1반이 된 진유성은 가만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째 학년이 올라갔는데도 반 친구들은 거의 그대로인 것 같았다.
상소윤도 있고, 지종수도 있고, 고인수, 심도훈, 친하게 지냈던 여자애들도 대부분 그대로였다.
이건 대정고의 특수성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대정고는 한 학년의 총원이 100명도 되지 않으며, 학급도 4개밖에 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어느 정도는 반이 겹칠 수밖에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학생들의 부탁을 받은 학부모의 은근한 로비도 있었다.
보통의 학생들은 학년이 올라가도 친구와 같은 반이 되고 싶어도 방법이 없다.
신앙이 있다면 기도를 하는 거고, 신앙이 없다면 본인의 운을 믿는 수밖에.
하지만 대정고 학생들에게는 신보다, 그리고 운보다 더 믿는 게 있었다.
바로 돈 많고 든든한 부모님이었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지종수가 상소윤과 같은 반이 되고 싶다고 아버지에게 부탁한다.
상소윤은 절친인 정새롬과 같은 반이 되고 싶다고 부탁을 한다.
겸사겸사 불쌍한 진유성과도 같은 반이 되는 게 나을 것 같다고 덧붙이고.
정새롬은 중학교 때부터 친구였던 고인수를 말하고, 고인수는 심도훈, 지종수를 말한다.
이렇게 청탁이 이어지다 보면 자연스럽게 몇 개의 그룹이 형성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보통은 이러한 그룹의 출발은 보통 1학년 때 시작되었다.
그때 친하게 지낸 이들이 그룹을 형성해 2학년으로 올라오고, 3학년으로 올라가는 식이다.
물론 청탁을 안 하는 학생도 있고, 누구와는 같은 반이 되고 싶지 않다고 청탁을 하는 사람도 있다.
대정고의 학년 교감은 이러한 청탁들과 그룹을 적당히 묶어서 학년을 편성하는 것이었다.
놀랍게도 이러한 과정은 모두 공식적인 일이었다.
처음에는 비공식적인 과정이었지만, 모든 청탁을 들어 줄 수 없었기에 학교에서 공식화해 버렸다.
왜냐하면, 본인의 요청이 거절당한 것을 기분 나빠하는 학부모들이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만약 이게 비공식적인 과정이라면 학부모들을 달래야 하는 건 교감의 일이었다.
하지만 학교 내의 공식적인 과정이라면 다른 핑계를 댈 수 있었다.
재계 순위가 더 높은 그룹의 학부모의 부탁이 우선됐다는 식으로.
일견 이런 변명이 더 화를 돋울 것 같지만, 재벌들의 세계에서는 아니었다.
오히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넘어가 버렸다.
그만큼 자본주의의 첨탑에 살고 있는 이들에게 돈의 힘은 위대했다.
대정고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현재는 일반고 학생들과 별반 다를 바 없지만, 그것은 한도 이상의 부를 축적한 집안의 자제들끼리 모여 지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아직 자신들이 얼마나 부자인지 머리로만 알 뿐, 감성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으니까.
개인의 인성 문제겠지만, 그들도 사회에 나가서는 문제를 일으키는 입장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쨌든 이런 이유로 2학년 3반의 학생들 중 3분의 2 이상이 3학년 1반으로 올라오게 된 것이었다.
사실 진유성도 이 청탁에 끼긴 했다.
방학이 끝나갈 때쯤 유혜연이 ‘같은 반이 되고 싶거나, 되기 싫은 친구 있니?’라고 물어본 것이었다.
진유성은 잠시 고민하다가 두 학생의 이름을 꺼냈다.
같은 반이 되고 싶은 이름은 상소윤이었다.
이건 상소윤과 친하고, 상소윤이 편해서라는 이유도 있다.
하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바로, 안전 때문이었다.
두 사람이 같은 반이라면 그 어떤 일이 일어나도 상소윤을 완벽히 보호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상림은 종종 무공 수련하면서 이런 말을 할 때가 있었다.
“그래도 교주님이 소윤이랑 같은 반이니까 걱정은 안 되네요.”
세상이 아무리 흉흉해도 진유성과 반경 30미터 안에 있다면, 그 어떤 위험에서도 안전할 수 있다.
30미터로 설정한 것은 저격 탓이었다.
얼마 전에 본 전쟁 관련 다큐멘터리에 저격수 이야기가 나왔는데, 꽤 인상 깊었다.
목표물을 죽이기 위해 몇 날 며칠 잠복하다가 탄속 1km/s가 넘는 대인저격총으로 갑자기 저격한다면?
겪어 본 적이 없어서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진유성도 30미터 밖에서는 막아 내는 건 쉽지 않을 것 같았다.
30미터 밖이라면 확실의 영역이 아니라 확률의 영역이 되는 것이다.
물론 저격수가 총을 발포하는 순간까지 살기를 컨트롤할 수 있다는 어려운 조건이 붙긴 하지만.
사실 이게 말도 안 되는 가정이라는 건 진유성도 알았다.
세상에 어떤 저격수가 쓸데없이 평범한 여고생을 노리겠는가.
하지만 어쨌든 30미터 안에만 있다면 상소윤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위협으로부터 안전했다.
그래서 진유성이 상소윤과 같은 반이 되려는 것이었다.
매일 갈구고 놀리는 것과 별개로 진유성은 상림, 유혜연, 상소윤이 행복한 것이 좋았다.
‘뭐, 게이트가 열릴 수도 있고.’
얼마 전 케임브리지 대학에 비징후 게이트가 열려서 여러 명이 죽었다지 않았는가.
한국이라고 그런 일이 안 일어난다는 보장은 없었다.
‘아놀드 벡은 잘 있으려나?’
잘 있어야 한다.
아놀드 벡은 나중에 입대 시기가 다가오면 자신의 든든한 빽이 되어 줘야 했으니까.
‘그때가 되면 아놀드 빽이라고 불러야겠군.’
그가 같은 반으로 선택한 게 상소윤이라면, 같은 반이 되고 싶지 않은 이는 지종수였다.
보름쯤 전에 있었던 밸런타인 데이 사건 탓이었다.
물론 나중에 지종수에게 상황의 앞뒤를 들었고, 초콜릿을 만들어 준 게 두 명의 같은 반 학생이라는 것도 들었다.
살짝 미심쩍어서 초콜릿을 준 당사자들과 통화를 하기도 했다.
지종수에 대한 오해는 완전히 풀린 것이었다.
이성적으로는.
하지만 뭔가 꺼림칙하다.
이성으로는 아니라는 걸 알지만, 감성이 지종수를 거부한다.
카페에서 눈에 핏발을 새우고 질투를 줄기줄기 뿜어내던 그 모습은 뭔가 위험했다.
그래서 지종수를 같은 반에서 빼 달라고 말한 것이었다.
사실 지종수의 질투는 ‘상소윤의 초콜릿’ 때문에 생긴 것이지만, 진유성은 지종수가 상소윤을 좋아하는 걸 몰랐다.
정보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진유성은 마음만 먹는다면 정말 별의별 소리를 다 들을 수 있었으니까.
그런 진유성이 그 사실을 모른다는 건, 그가 지종수의 사생활에 아무런 관심이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진유성의 부탁에도 지종수가 3학년 1반에 편성된 것은, 지종수 아버지가 상림보다 재계에서 더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탓이었다.
이 말은 즉, 지종수는 진유성을 선택했다.
진유성만 선택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같은 반이 되고 싶은 리스트 중 진유성이 있었다.
물론 이유는 있었다.
‘진유성! 소윤이와 어떤 관계인지 반드시 파헤치고 말겠어! 내 두 눈으로 똑똑히!’
연적(?)을 눈앞에 두고 감시하겠다는 의지였다.
하지만 지종수와 가장 친한 심도훈, 고인수는 진짜 이유를 알고 있었다.
“종수 이 자식, 그냥 진유성이랑 같은 반이 되고 싶은 거 같지?”
“백퍼지.”
얄궂은 사랑의 작대기였다.
* * *
“여러분 안녕하세요. 저는 연기훈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1년간 3-1반을 담당할 담임 선생님의 소개와 함께 3학년 생활이 시작되었다.
오늘 오전엔 수업이 없었다.
아직 학생들의 자율 주도 과목이 정해지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학교라면 어이없는 일이겠지만, 모든 것이 학생의 편의에 맞춰진 대정고에서는 가능한 일이었다.
일단 3학년 담임은 학생들을 한 명 한 명 면담하면서 자율 주도로 진학을 택할 건지, 자율 학습을 택한 건지를 정해야 했다.
진학을 택한다는 건 대학에 가겠다는 말이었다.
재벌이 아무리 돈이 많아도 수능 성적을 살 수는 없었다.
아니, 어쩌면 재계 순위 3위 안의 재벌가는 살 수 있을지도 몰랐지만 리스크가 너무나 거대했다.
수능 성적을 돈 주고 샀다는 사실이 나중에라도 들통나면, 한국 국민 정서상 엄청난 후폭풍이 몰아닥칠 터였다.
그렇기 때문에 제아무리 돈이 많아도 좋은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수능을 치러야 했다.
명문대는 기부 입학도 최소한의 기준선이 낮지 않았으니까.
그게 아니라면 돈을 써서 해외로 유학을 가는 수밖에 없었고.
즉, 대정고의 3학년은 대학에 진학할 학생과 진학하지 않을-혹은 유학을 갈-학생을 나누는 것에서부터 시작했다.
자습이 진행되는 와중에 학생들이 한 명씩 상담실로 방문하기 시작했다.
상담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학생들 중 70퍼센트 이상의 진로가 이미 부모님의 가업을 잇는 걸로 결정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나머지 30퍼센트에 속하는 상소윤이 진유성에게 다가오더니 물었다.
“야.”
“왜 그러느냐?”
“너 대학 갈 거야?”
“음…….”
진유성이 상소윤의 질문에 잠시 고민했다.
잘 모르겠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대학에 한 번쯤은 가 보고 싶긴 한데, 특별히 배우고 싶은 건 없었으니까.
“잘 모르겠다.”
“그래도 오늘 결정해야 할걸?”
“너는 어떻게 할 것이냐?”
“음, 일단 대학은 가야 하지 않을까? 대학에 가서 뒤늦게 적성을 찾는 경우도 있다니까.”
자신 없는 듯한 상소윤의 말투에 진유성이 슬쩍 웃음을 지었다.
미래에 대한 불안함을 가지고 있는 모습을 보니 확실히 어리다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진유성도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긴 했다.
하지만 진유성이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것은 미래가 불확실의 영역이라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완벽하게 확실의 영역이라서 그랬다.
입신의 경지에 오른 무공과 오성 덕분에 그는 웬만한 것은 배우자마자 능숙하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능숙하다는 것은 업으로 삼을 만한 이유가 못 된다.
‘난 뭘 하고 싶지?’
잘 모르겠다.
그가 드라마나 영화를 좋아하는 것은 콘텐츠 자체가 재밌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타인의 삶을 엿볼 수 있어서였다.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다 보니 천마신교주로 고정되어 버린 자신이 갖지 못한 수많은 삶이 거기 있으니까.
진유성은 그런 생각을 하다가 피식 웃었다.
진짜로 모르겠다.
공자는 논어에서 50살을 지천명(知天命)이라 하여 하늘의 명을 깨닫는 나이라고 말했다.
60살은 이순(耳順)이라 하여 남의 말을 듣기만 하여도 이해하는 나이라고 했다.
70살은 종심(從心)이라 하여 마음 가는 대로 행하여도 법도가 바로 서는 나이라고 칭했다.
하지만 종심도 훌쩍 넘긴 그는 아직도 스스로의 마음을 잘 몰랐다.
자신이 아둔한 것인지, 인간이란 원래 이런 것인지 잘 모르겠다.
“뭐냐? 왜 웃냐?”
진유성의 웃음을 본 상소윤이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게?”
“대학은 나중에 고민해 보고 일단 수능부터 준비해야겠군.”
대학에 갈지 안 갈지는 나중에 결정하고 일단 선택지를 넓히는 게 맞는 것 같다.
못하는 것과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건 다르니까.
사실 준비라고 해도 별거 없었다.
수능을 대정고 기말고사처럼 하루 만에 뚝딱 높은 점수를 낼 수는 없겠지만, 마음만 먹으면 보름이면 되지 않을까?
“음, 오케이.”
진유성의 말을 들은 상소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갑자기 다가와서 물어본 것치고는 싱거운 반응이었다.
진유성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문득 인상을 찌푸렸다.
갑자기 주변이 시끌시끌해지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대정고는 아직 조용했고, 대정고 주변의 압구정이 소란스러워졌다.
그 소란은 점차 대정고로 번지기 시작했다.
핸드폰을 보고 있던 학생들을 중심으로.
“뭐야 이거.”
“뭐가?”
“뉴스 봐 봐.”
심도훈이 지종수에게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포털 사이트에 도배된 하나의 뉴스 때문이었다.
뉴스 내용은 게이트와 관련된 것이었다.
사실 게이트 예고 자체는 별로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위치와 등급이 심상치 않았다.
또한, 한국에 열릴 게이트를 경고한 단체도 심상치 않았다.
[SG 일본 지부, 긴급 기자 회견.]
[한국의 S급 보스 레이드 게이트 탄생 예고.]
[게이트 발생 예정 지역은 독도.]
대한민국 독도에 S급 게이트가 예고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