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79화>
* * *
설이 지나고 2월이 되었다.
그사이에도 진유성의 생활은 변함이 없었다.
여전히 TV를 봤고, 인터넷에 빠졌고, 무협 소설을 탐닉했다.
이제 고3이란 게 좀 문제긴 했지만, 진유성을 김유성으로 오해하는 유혜연은 별다른 터치를 하지 않았다.
위쪽에서 힘든(?) 생활을 겪고 왔으니 일 년 정도는 푹 쉬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렇게 진유성은 평범한 고등학생의 방학을 보냈다.
가끔 상림의 무공을 봐주는 것과 일본 야쿠자와 관련된 블랙 마켓에 아이템을 파는 걸 제외하면 말이다.
요즘 진유성이 오매불망 기다리는 것은 상림이 사 주기로 약속한 그의 애마였다.
물론 이 과정에서는 약간의 거래가 있었다.
-내공이나 의념을 조금이라도 사용하는 기색이 보이면 페라리 주문 취소할 겁니다.
진유성은 분명 윷놀이를 하다가 상림에게 약점이 잡혔다.
그리고 상림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잡은 진유성의 약점을 아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논리도 확실했다.
“어찌 교주님이 한 입으로 두말하는 걸 지켜만 보겠습니까! 당장 취소하겠습니다!”
“아니, 꼭 그렇게…….”
“어찌 감히 천마신교주의 권위가 떨어지는 걸 지켜만 본단 말입니까아아!”
이 모든 게 천마신교를 위함이라는 논리로 덤벼들자 진유성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진유성은 한 가지 기지를 발휘했다.
바로, 유혜연의 뱃속에 있는 하마였다.
진유성은 자신이 하마와 유혜연을 건강하게 만들 수 있으며, 아주 안전한 출산을 도울 수 있다고 상림을 꼬드겼다.
사실 태아와 산모를 건강하게 만드는 건 이미 했고, 출산은 어차피 도와줄 생각이었다.
설령 상림이 페라리 주문을 취소하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상림은 한 여자의 남편이자, 뱃속에 있는 하마의 아버지였다.
알면서도 진유성의 꼬드김에 넘어갔다.
생각해 보면 어차피 페라리도 진유성의 거래를 도우면서 얻은 수수료로 사는 것이다.
그렇게 상림과 진유성은 간만에 둘 모두가 만족하는 거래를 끝냈다.
덩달아 집안 분위기도 화기애애해졌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덧 개학이 보름밖에 남지 않은 2월 14일이 다가왔다.
2월 14일은 조금 특별한 날이었다.
여자가 좋아하는 남자에게 초콜릿을 주는 밸런타인 데이였으니까.
* * *
상소윤은 중학교 때부터 밸런타인 데이가 되면 집에서 초콜릿을 만들었다.
물론 초콜릿 자체를 직접 만든 건 아니고, 커다란 초콜릿 덩어리를 녹여서 예쁘게 찍어 내는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도 많은 노력이 들어가기 마련이었다.
사실 상소윤이 초콜릿을 만드는 건 좋아하는 남자애한테 준다거나,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
상소윤은 유혜연을 닮아서 요리하는 걸 굉장히 좋아했고, 자신의 요리를 누군가 먹어 주는 것도 좋아했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엄마를 닮아 요리하는 건 좋아했지만, 엄마의 솜씨까진 닮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소윤아.”
“어때? 아빠?”
“정말 맛있어. 정말 맛있는데, 너 저번에 랍스타 먹고 싶다고 하지 않았니? 우리 랍스타 먹으러 갈까?”
“…….”
“우리 딸 요리가 맛없는 건데, 아니, 맛없는 건 아니고.”
“…….”
“너무 맛없어서 말이 헛, 아니 너무 맛있어서 말이 헛나왔…….”
“아빠, 미워!”
오죽하면 딸을 사무치게 사랑하는 상림조차 본심을 숨기지 못했을 정도였다.
어렸을 때야 아빠가 밉다고 소리를 질렀지만 고등학생이 돼서 확실히 알게 되었다.
대정고에 입학하고 자율 주도 과목으로 요리 수업을 택했는데, 자신이 만든 요리가 더럽게 맛이 없다는 것을.
오죽하면 요리 수업 선생님이 상소윤의 놀라운 능력에 박수를 쳤을 정도였다.
어떻게 똑같은 재료로 똑같은 레시피를 따르는데 이런 맛이 날 수 있냐면서.
이러한 일들을 겪으면서 상소윤은 요리에 대한 로망을 접었다.
내심 요리사가 되고 싶은 마음도 있었는데 그것도 포기했고.
하지만 초콜릿은 좀 달랐다.
시중품을 사서 멜팅한 다음에 예쁘게 찍어 내면 사람들이 맛있게 먹어 준다.
이런저런 감상평도 들려주기까지 했고.
게다가 상소윤은 요리에는 재능이 없었지만, 요리를 보기 좋게 만드는 것에는 재능이 있었다.
한마디로 밸런타인 데이는 상소윤이 요리 혼을 불태울 수 있는 유일한 날이었다.
올해도 마찬가지였다.
상소윤이 주방에서 초콜릿 요리에 몰두하고 있자 어디선가 진유성이 쓱 나타났다.
그러곤 보글보글 끓고 있는 초콜릿을 바라보며 물었다.
“달콤한 냄새가 나는구나. 이 액체는 무엇이냐?”
“어제 사극 봤냐?”
“허어, 무엄하도다. 짐이 묻지 않느냐?”
“네가 내 인생의 짐이다.”
상소윤이 대답을 하지 않자 진유성이 숟가락으로 멜팅 중인 초콜릿을 푹 찔러서 한입 야무지게 떠먹었다.
“야!”
상소윤이 기겁을 하며 등짝을 때렸지만 끝까지 숟가락을 쪽쪽 빨아먹는 걸 멈추지 않았다.
그러곤 만족스럽게 말했다.
“맛이 있구나.”
“미쳤냐, 진짜?”
“오늘 저녁 수라는 이걸로 내오도록 하여라.”
진유성이 휘적휘적 2층으로 올라가자 상소윤이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며 빽 소리를 질렀다.
“너는 안 줄 거야!”
* * *
영국의 훌리건 스카우터들에게 질려서 한국으로 돌아온 지종수는 평소보다 훨씬 빡센 방학을 보냈다.
이제는 회사를 물려받기 위해 공부를 하지 않아야겠냐는 아버지의 압박 때문이었다.
지난 시험에 지종수가 전교 꼴등을 했다는 사실을 안 뒤부터 압박이 더 심해진 것 같았다.
평소에 아빠 말을 잘 안 듣는 지종수도 이번에는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게 몸에 맞지도 않는 공부를 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던 지종수는 문득 같은 반 친구의 연락을 받았다.
한세희라는 여학생이었는데, 학교에서는 제법 살갑게 대해도 방학 중에 연락할 만큼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무슨 일이야?”
수화기 너머의 한세희가 조금 부끄러운 기색으로 말했다.
초콜릿을 주고 싶다고.
지금 만나면 좋겠다고.
그 순간, 지종수의 머리에서 종이 울렸다.
오늘은 밸런타인 데이였다.
“이럴 수가……!”
태어나서 처음 겪는 일이었지만 전화를 끊은 지종수의 얼굴은 묘했다.
기쁘면서도 기쁘지 않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상소윤이 가득 차 있으니까.
오랫동안 방안을 서성거리던 지종수는 결심을 내렸다.
한세희의 마음은 너무나 고맙지만 아무래도 그녀의 마음은 거절해야 할 것 같았다.
미안하면서, 조금 슬펐다.
한세희가 어떤 마음으로 초콜릿을 준비했는지 아주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또 다른 여학생에게서 똑같은 용건의 전화가 걸려온 것이었다.
“하아…….”
전화를 끊은 지종수가 한숨을 푹 내쉬며 주섬주섬 옷을 입었다.
그러곤 ‘인기인의 슬픈 숙명’ 따위의 말을 중얼거리며 집을 나섰다.
* * *
대정고 인근의 카페에 도착한 지종수가 초조하게 커피를 마셨다.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좀 돌려 봤는데, 어떤 식으로 거절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역시 이런 경우에는 진심을 전하는 게 맞으리라.
그렇게 다리를 달달 떨며 커피를 마시는 지종수의 앞에 한세희가 나타났다.
“빨리 왔네?”
한세희의 손에는 포장된 초콜릿이 바리바리 들려 있었다.
그것을 보며 지종수가 입술을 깨물며 입을 열었다.
“미안해, 세희야.”
“응?”
“난 그냥 우리가 친구라고 생각해.”
“…….”
“미안하고 슬프지만, 너의 마음은 받아줄 수 없어.”
잠시 침묵이 흘렀다.
지종수를 가만히 쳐다보던 한세희가 초콜릿 무더기에서 뭔가를 꺼내 지종수에게 건넸다.
개중 가장 작은 상자였다.
지종수는 순간 왈칵했다.
마음을 받아 주지 못하면, 이 작은 정성이라도 받아 달라는, 한세희의 작은 초콜릿 상자가 가진 은유에 완전히…….
“이건 네 거.”
“응?”
“나머지는 전달해 줬으면 좋겠는데.”
“전…… 달?”
한세희가 웃음을 참는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말했다.
“방학이라서 전달해 줄 방법이 없어서. 유성이 집도 모르고.”
“……진유성?”
“너는 좀 친하지 않아? 그래서 집도 알 것 같아서.”
“…….”
“네가 오해한 건 비밀로 할게.”
한세희가 겨우 웃음을 참는 모습을 보고 지종수의 머릿속에서 뎅- 뎅- 울리던 종이 와장창 부서졌다.
방년 19세, 지종수.
여기에 잠들다.
사인은 수치사였다.
* * *
진유성은 집이 어디냐고 집요하게 묻는 지종수의 전화를 받고 상림의 집을 나섰다.
진유성이 상림의 집에 사는 것은 비밀이었다.
상림의 집에 사는 게 알려지면 상소윤과 함께 사는 것도 알려질 것이기 때문이다.
사촌이라는 걸 밝히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닐 텐데, 이상하게도 유혜연은 진유성에게 여러 번 신신당부했다.
“유성아, 학교에서는 절대 사촌이라는 걸 밝히면 안 돼. 알았지?”
끝까지 이유는 알려 주지 않았지만, 진유성은 유혜연을 믿는 편이었다.
상림이 그나마 사람 구실을 하고 사는 것도 아내를 잘 만나서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진유성은 알지 못했다.
이것이 유혜연이 그리고 있는 아주 큰 그림의 일부라는 걸.
어쨌든 진유성이 지종수를 만나러 친히 카페까지 왕림한 이유도 이것이었다.
몰래 챙긴 상소윤이 만든 초콜릿을 쪽쪽 빨아먹으며 지종수가 알려 준 카페에 도착한 진유성이 고개를 갸웃했다.
지종수가 앉아 있는 테이블에 수북하게 쌓여 있는 초콜릿 박스 때문이었다.
밸런타인 데이는 좋아하는 남자에게 초콜릿 선물을 주는 날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지종수가 저 많은 선물을 받은 것일까?
믿기진 않지만 일단 증거가 명백했다.
뭐, 못생긴 배우들이 TV에 나와서 잘생겼다고 찬사를 받는 걸 보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진유성이 보기에 지종수는 못생기지도 잘생기지도 않았지만, 다른 사람 눈에는 잘생겼을지도 모르니까.
‘설마 자랑하려고 부른 건가?’
지종수의 평소 행실을 보면 왠지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진유성은 어딘지 조금 얼이 빠진 것 같이 보이는 지종수에게 다가가 의자에 앉았다.
“왜 불렀느냐.”
“어, 왔냐?”
눈이 퀭한 지종수가 진유성을 잠시 쳐다보다가 초콜릿 박스들을 쓱 밀었다.
“네 거야.”
“내 거라고?”
“어. 다 네 거야.”
진유성이 흠칫 놀랐다.
밸런타인 데이는 분명 좋아하는 남자에게 초콜릿을 주는 날이라고 들었다.
한데…….
지종수가 자신에게 초콜릿을 주고 있었다.
‘그렇다는 건?’
진유성은 소름이 돋아서 저도 모르게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버렸다.
그러곤 미심쩍은 표정으로 물었다.
“이걸 왜 주는 것이냐?”
“왜긴 왜야. 좋아하니까.”
“……!”
진유성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세상엔 남자가 남자를 좋아하는 일도 있고, 그것을 존중해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일단 그는 아니었다.
“필요 없다.”
“마음 쓴 거잖아.”
“필요 없다!”
“와, 이 자식. 나쁜 놈이네?”
지독한 수치심에 자신이 전후 사정을 설명하지 않았다는 것도 모른 채, 지종수가 혀를 쯧쯧 찼다.
지종수의 눈에는 잔뜩 경계하고 있는 진유성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진유성이 처음부터 쪽쪽 빨고 있었던 초콜릿만 눈에 들어왔다.
‘서, 설마?’
지종수가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과 그걸 지켜보는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 초콜릿, 누가 준 거냐?”
“이거? 상소윤이 만든 거다.”
정확히 말하면 상소윤이 준 건 아니고 몰래 훔쳐 온 거였지만.
그 순간, 머릿속에서 무언가 뚝 하고 끊어진 지종수가 광분했다.
“으아아아아아!”
지종수의 눈에서 질투의 빛이 줄기줄기 새어 나왔다.
그것을 본 진유성이 흠칫 놀라서 카페에서 나와 버렸다.
지종수가 카페 안에서 ‘초콜릿 가져가!’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까, 깜짝이야.”
무공을 익힌 뒤로 이런 공포를 느낀 건 처음이었다.
금단의 영역에 발을 들인 이의 광기가 저토록 무섭다는 사실을 진유성은 처음으로 깨닫고 있었다.
진유성과 지종수의 오해 속에서 방학이 끝나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