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78화>
* * *
처음 진유성이 천신궁 게이트를 넘어 한국에 도착했을 때는 9월 말이었다.
이 말은 곧, 추석이 끝난 이후 한국에 도착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2023년에 맞이하는 설날은 진유성이 처음으로 맞이하는 한국의 대명절이었다.
‘고려에서는 어땠더라?’
무공 경지가 올라 상단전이 열리며 진유성의 오성과 기억력은 비상해졌다.
하지만 고려에 있을 때 그는 그저 힘없는 어린 소년일 뿐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고려에서의 신년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부모님과 함께 폭죽놀이를 보았던 기억이 있을 뿐이었다.
어찌 됐든 그렇게 설 연휴가 시작되었다.
상림은 가족이 없으니 방문할 친가가 없었고, 외동딸인 유혜연의 부모님은 미국에 있었다.
진유성도 자세히는 모르는데 듣기로는 미국에서 꽤 큰 마트를 운영한다고 했었다.
그래서 설 연휴임에도 상림 가족의 구성원 자체는 평소와 똑같았다.
하지만 작년 설과 다른 것도 있었다.
“진유성!”
“네.”
“동그랑땡 먹지 말랬지!”
“소윤이가 먹었는데요.”
“소윤이는 아빠랑 시장 갔잖아!”
“소윤이가 먹고 출발했습니다.”
유혜연이 태연하게 거짓말을 하는 진유성의 모습을 보고 헛웃음을 지었다.
너무 당당해서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상소윤이 집을 나선 것은 30분도 전의 일이고, 동그랑땡을 튀기기 시작한 것은 10분 전의 일인데도 말이다.
‘그래도 뭐…….’
확실히 3인 가족일 때보다 4인 가족일 때가 훨씬 북적북적하고 좋은 것 같다.
처음 진유성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을 때만 해도 그들이 이 정도로까지 가까워질 줄은 몰랐다.
그저 남편의 과거에서 온 진유성을 성인이 될 때까지만 보살펴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는 진유성이 독립하는 걸 상상하기가 힘들었다.
맨날 엉뚱한 짓만 하고 있는 게 물가에 내놓은 아이 같기도 하고.
‘흠, 역시 유성이랑 소윤이랑 결혼을 하는 게 제일 좋을 것 같은데.’
상림이 들었으면 기겁할 생각을 하는 유혜연이었다.
이처럼 진유성이 있다는 게 작년 설날과 올해 설날의 가장 큰 차이점이었다.
진유성에게 단단히 경고한 유혜연이 노릇노릇 튀긴 동그랑땡을 자신의 접시 앞에 놓기 시작했다.
이러면 진유성이 못 빼먹을 거라는 생각에서였지만, 진유성에게 이 정도 난관은 난관도 아니었다.
여차하면 허공섭물로 가져다 먹을 수도 있다.
하지만 유혜연이 단단히 경고했기 때문에 한 번 참기로 했다.
사실 상림은 뱃속에 하마-태명-를 품고 있는 유혜연이 요리하는 걸 불안해했다.
아무리 좋아서 하는 거라지만 요리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유혜연은 딱히 입덧을 하지도 않았고, 몸이 무겁지도 않아서 직접 요리를 하고 싶어 했다.
결국, 합의를 봐 가장 힘든 전은 시장에서 사 오고, 나머지만 하는 것이었다.
한참 콧노래를 부르며 요리를 하던 유혜연이 식탁에 앉아 있는 진유성을 보고는 입을 열었다.
“유성아.”
“네?”
“하마 성이 뭘 거 같아?”
“하마요? 당연히 상 씨 아니에요?”
“……성별을 물어본 거란다.”
“아, 남자아이예요.”
“응?”
진유성의 당연하다는 듯한 대답에 유혜연이 고개를 갸웃했다.
사실 임신 10주가 넘으면 태아의 성별을 알 수 있고, 유혜연은 10주가 진작 넘었다.
하지만 산부인과에서는 태아의 성별을 알려 주지 않았다.
부모가 특정 성별을 원할 경우 실망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상림이나 유혜연은 딸이든 아들이든 별 상관이 없었다.
굳이 따지면 딸은 한 번 키워 봤으니 아들을 보고 싶은 정도?
그런데 진유성이 너무나 당당하게 남자라고 말을 하니 이상했다.
“왜? 왜 남자라고 생각해?”
“음, 느낌이죠. 태명이 하마인데 여자인 건 안 어울리잖아요.”
“그런가?”
“네.”
“그럴 수도 있겠네.”
유혜연은 웃어넘겼지만, 사실 진유성은 진실을 말한 것이었다.
그는 태아의 성별을 진작 파악한 상태였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내공으로 몸을 튼튼하게 만들어 주기도 했다.
본래 내공으로 타인의 몸에 간섭하는 것은 불가능한 행위였다.
인간이 태어나고 살아가면서 쌓는 선천진기는 독립적이다.
그렇기에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지고 내공으로 간섭하려고 해도, 타인의 기운에 반발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태아는 아직 태어나기 전이기 때문에 작은 도움을 줄 수 있었다.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 어릴 적부터 잔병치레 안 하고 건강한 정도?
본래 아기들은 면역력이 약하기 마련인데, 하마는 태어날 때부터 어지간한 병은 가볍게 이겨 낼 것이다.
‘상림이한테 생색내는 걸 깜빡했군.’
진유성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쯤 상림과 상소윤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유혜연이 부엌에 서 있는 걸 본 상림이 한달음에 달려왔다.
“여보, 계속 요리하고 있었어?”
“쉬엄쉬엄했어요.”
“이제 그만하고 앉아서 쉬어.”
“다 했어요. 이것만 담으면 돼.”
유혜연이 마지막으로 동그랑땡을 건져 내며 웃었다.
* * *
밥을 먹고 난 이후 네 명의 식구들이 거실에 둥그렇게 모여들었다.
시장에서 우연히 발견해 사 온 명절 놀이를 하기 위해서였다.
바로, 윷놀이였다.
주먹과 가위로 편을 정했는데, 상림-유혜연, 상소윤-진유성으로 편이 갈라졌다.
진유성과 같은 편이 된 상소윤이 의심쩍은 표정으로 물었다.
“너 윷놀이 해 본 적 있냐?”
“당연히 있다.”
고려나 명나라에도 윷놀이가 있었다.
사실 고려와 현대의 윷놀이 규칙은 좀 달랐는데, 윷놀이는 예능 프로그램에 종종 나왔기 때문에 확실히 규칙을 알고 있었다.
“그래? 잘해?”
“확률 놀이에 잘하고 말고가 어디 있냐? 누가 꼴등 아니랄까 봐.”
“야! 꼴등은 지종수거든!”
“97명 중 96등으로 정정해 주마.”
진유성과 상소윤이 평소처럼 투닥거리는 사이 유혜연이 말했다.
“근데 뭐라도 걸고 해야 재밌지 않을까?”
“돈! 10만 원 빵!”
“소윤이 너 또 다 잃으면 아빠한테 용돈 달라고 하려 그러지?”
“에이, 자존심이 있지. 이거 져도 절대 용돈으로 충당 안 할게. 진짜! 레알!”
“정말로?”
“무조건.”
“콜.”
“어떻게, 단판으로 갈까? 아니면 삼판이선승으로? 엄마 맘대로 해.”
“단판으로 하자.”
“말은? 3개? 4개?”
“4개.”
모녀의 대화라기엔 조금 삭막한 것 같은 딜이 오가고, 내기가 성사되었다.
무려 인당 10만 원, 총 40만 원이 걸린 윷놀이 판이었다.
가장 먼저 윷을 잡은 건 유혜연이었다.
“낙! 낙!”
낙을 바라는 상소윤의 바람과 다르게 유혜연은 모를 던졌고, 다시 한번 기회를 잡아 윷을 던졌다.
그러곤 마지막엔 걸을 던졌다.
모, 윷, 걸이 연속을 나와 굉장히 유리한 출발이었다.
“와, 씨. 사기 아니야?”
투덜거린 상소윤이 윷을 던지니 도가 나왔다.
“으악!”
상소윤이 망했다고 난리를 피우는 사이 이번엔 상림이 윷을 잡았다.
그러곤 진유성에게 전음을 보냈다.
-교주님, 내공 쓰기 없습니다.
-야! 나를 뭘로 보고.
-의념도 안 돼요.
-알았다니까?
-내공이나 의념을 조금이라도 사용하는 기색이 보이면 페라리 주문 취소할 겁니다.
상림의 무공은 진유성과 비교하면 태양 앞 반딧불이었으나, 따지고 보면 그도 고수였다.
진유성의 내공과 의념 사용의 유무 정도는 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진유성도 이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그리고 저희 둘은 허리 높이 이상 던지는 걸로 어떻습니까?
-마음대로 해라.
진유성의 심드렁한 대답을 들은 상림이 정신을 완전히 집중했다.
생각해 보면 중원에서부터 지금껏 단 한 번도 진유성을 이겨 본 적이 없었다.
아무리 사소한 내기를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윷놀이만큼은 다르리라.
이 대 이 게임이기도 했고, 내공 사용이 없다면 충분히 이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오늘은 이긴다!’
신검합일 수준으로 집중력을 끌어올린 상림이 윷을 던졌다.
단순히 던진 게 아니었다.
윷의 무게를 확인하고, 신체를 완벽히 절제해서 던진 것이었다.
그런데 개가 나왔다.
아쉬운 결과였지만, 상림은 내심 웃고 있었다.
‘4개의 윷를 조종할 수는 없다.’
방금 던져 봄으로써 확실하게 느꼈다.
허리 높이 이상으로 던질 경우 내공 없이는 윷을 조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건 진유성의 체술이 입신의 경지에 도달했더라도 마찬가지일 터.
드디어 진유성의 차례였다.
“야! 무조건 모! 모 던져!”
피식 웃은 진유성이 상림과 다르게 대충 허공으로 윷을 던졌다.
대충 던졌지만, 상림보다 훨씬 높았다.
탁.
“오예!”
상소윤이 소리를 질렀다.
정말로 모가 나온 것이었다.
진유성이 다시 윷을 잡았다.
이번에도 모가 나왔다.
뭔가 이상함을 느낀 상림이 단전에 꿈틀거리는 내공을 끌어올렸다.
그러곤 최대한 기감을 집중했다.
하지만…….
분명 진유성은 내공도, 의념도 사용하고 있지 않았다.
‘뭐야? 우연인가?’
상림이 그렇게 생각할 때, 마침 진유성이 던진 윷에서 도가 나왔다.
그 뒤로 이어진 대결은 치열했다.
두 팀의 말들이 엎치락뒤치락하며 승부의 향방을 예상할 수 없게 만들었다.
하지만…….
사실 그 모든 것은 진유성의 계획이었다.
상림이 자신의 내공이나 의념을 감지할 수 있는 건 맞았다.
만약 진유성이 허공에 던진 윷을 내공이나 의념으로 조종하려 들었다면, 상림이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림을 속일 수 있는 방법은 있었다.
바로 던지기 직전에 정말 극소량의 내공을 윷에 주입하는 것이었다.
워낙 극소량이라서 상림은커녕 자신도 웬만하면 감지할 수가 없었다.
본래 인간의 모든 행위에는 알게 모르게 기가 움직이기 마련이다.
사람이 숨을 쉬기만 해도 기가 생동했고, 소리를 질러도 기가 흔들린다.
그러니 옆에서 상소윤이 소리를 지르고, 자신이 큰 동작으로 윷을 던지면, 죽었다 깨어나도 상림은 감지할 수 없었다.
진유성은 이 극소량의 내공을 이용해서 상림을 농락하고 있던 것이었다.
‘또 속냐, 상림아.’
석가모니는 사람을 열반(涅槃)에 이르게 하는 네 가지 즐거움이 있다고 했다.
벗어남의 즐거움.
떨쳐버림의 즐거움.
고요함의 즐거움.
깨달음의 즐거움.
이 네 가지 즐거움이야말로 인생을 살아가면서 반드시 누려야 하는 것이며, 이것을 누리기 위해 노력하면 열반의 경지에 들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석가모니는 틀렸다.
인생에는 한 가지의 즐거움이 더 있다.
바로 상림을 놀리는 즐거움이다.
10만 원은 그에게 큰돈이 아니지만, 상림을 농락했다는 점에서 더할 나위 없이 기뻤다.
‘이제 슬슬 끝내야겠군.’
엎치락뒤치락하는 느낌을 의도하던 진유성이 그렇게 마음을 먹었다.
상림 팀의 말들이 결승선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최소 21칸은 이동해야 했다.
그에 반해 자신의 말은 10칸만 이동하면 된다.
게임은 이미 끝났다고 봐야 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모, 모, 모.
“뭐, 뭐야!”
“여보!”
유혜연이 갑자기 3연 모를 던진 것이었다.
진유성이 깜짝 놀라서 유혜연을 쳐다보는데, 유혜연이 다시 한 번 윷을 던졌다.
그리고…….
“이거 사기야!”
상소윤의 비명 속에서 또다시 모가 나왔다.
진유성은 당황했다.
이대로라면 인생의 즐거움 중 하나를 잃게 된다.
남은 방법은 유혜연의 마지막 윷이 백도가 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면 적어도 한 번의 기회는 얻을 수 있었다.
결국 진유성은 직접 손을 썼다.
상림이 느낄 수 없을 수준으로 미미한 탄지공을 날려서 윷을 조정한 것인데…….
-잡았다! 요놈!
상림이 벌컥 전음을 보냈다.
승리 직전에 진유성이 무슨 수를 쓸 수도 있다고 예상하고, 두 눈을 부릅뜨고 있던 상림에게 걸리고 말았다.
상림의 무공 경지가 진유성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올라온 탓이었다.
-아니 교주님! 남자가 이래도 됩니까?!
-어떻게 비겁하게 이럴 수가 있어요!
-속하는 정말 실망했습니다!
상림의 전음 폭탄 속에서 진유성이 세상을 다 잃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허어, 내가 호랑이 새끼를 키웠구나…….”
진유성의 회한 속에서 민족 대명절 설이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