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74화>
* * *
미국의 엠페러, 아놀드 벡.
멕시코의 소드 마스터, 엔리케 카를로.
중국의 검성(劍聖), 월성.
신의 경지에 접어들었다고 평가받는 전 세계에 단 세 명뿐인 SSS급 각성자들.
이들에게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우선 각자가 각기 다른 각성 단체를 대표했다.
아놀드 벡은 전 세계의 게이트 관리와 각성자 관리의 70퍼센트 이상을 점유한 SG를 대표했다.
엔리케 카를로는 멕시코의 독립 각성 단체인 메히까뜰(Mexicatl)을, 월성은 중국의 독립 각성 단체인 China-SG를 대표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 못지않게 중요한 공통점이 또 하나 있었다.
바로, 세 명의 초인이 사용하는 무기가 검이라는 것이었다.
각성자들이 검을 만병지왕(萬兵之王 : 모든 병기 중 으뜸)으로 인식하는 것에는 이들의 영향이 컸다.
하지만 검이 뛰어난 무기라서 이들이 SSS급에 오른 게 아니었다.
오히려 몬스터와 싸울 때 검은 창이나 도보다 불리했고, 원거리 스킬 위주의 능력자들과 비교해도 특별한 우위에 있지 않았다.
그러니 아놀드 벡, 엔리케 카를로, 월성이 SSS급의 경지에 올라선 것은 오롯이 그들의 재능이었다.
이제 사람들은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셋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
유치한 호기심일 수도 있지만, 당연한 호기심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목숨을 걸고 싸우면 누가 살아남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검의 경지에 있어서는 아놀드 벡이 최고라고.
쐐애애애액!
그런 아놀드 벡의 일검이 진유성의 가슴을 노리고 날아왔다.
* * *
캉!
아놀드 벡과 진유성의 검이 부딪쳤다.
진유성이 들고 있는 검은 보스 몬스터 엘비온의 검.
엘비온이 워낙 거구였던지라 그의 검도 대검이었다.
크기가 너무 커서 진유성이 사용하기엔 조화롭지 않은 것 같았지만 진유성은 무기를 가리는 사람이 아니았다.
그그그그극!
검을 맞댄 상태에서 순간적으로 힘을 준 아놀드 벡이 진유성을 떨쳐 냈다.
“흡!”
그러곤 재차 검을 휘둘렀다.
검이 묘하게 흔들거리더니 분화(分化)하며 진유성의 요혈을 노렸다.
살기는 없지만, 날카로운 공격이었다.
아놀드 벡이 상대의 실력을 가늠할 때 즐겨 사용하는 기술이기도 했다.
그러나…….
눈을 가늘게 뜬 진유성이 팔을 흔들었다.
그러자 아놀드 벡의 것과 똑같이 분화한 검이 공간을 수놓았다.
“……!”
깜짝 놀란 아놀드 벡이 간신히 진유성의 검세를 떨쳐 냈다.
아니, 떨쳐 냈다고 생각했으나 진유성의 검은 집요했다.
분화한 검이 점차 숫자를 늘리더니, 마침내 아놀드 벡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카카카캉!
샛노란 불꽃이 튀었다.
마찬가지로 살기는 없지만 까딱하면 죽을 수도 있는 공격이었다.
‘이럴 수가!’
아놀드 벡은 사람들이 SSS급 각성자들끼리 싸우면 어떻게 될지 궁금해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궁금한 건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어깨에 짊어진 것이 워낙 많아서 그런 일이 벌어지긴 쉽지 않겠지만.
하지만 적어도 검술에서만큼은 세상 그 누구보다 자신이 명백한 우위에 있다고 아놀드 벡은 믿고 있었다.
그는 무인이라기보다는 검사였고, 각성자라기보다는 구도자에 가까웠다.
각성을 하기 전에도 그랬고, 각성을 하고 난 이후에도 그랬다.
그만큼 깊이 검에 몰입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
자신의 일검이 전부 막히고 있었다.
막히는 것을 넘어서 완벽히 간파당했다.
심지어 상대는 자신의 검술을 그대로 카피하고 있었는데, 카피본이 원본을 뛰어넘었다.
분한 마음까지 들었다.
‘젠장!’
물론 아놀드 벡은 자신의 검술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에 수비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분검의 약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르르르르르-!
이를 악문 아놀드 벡의 온몸에서 무형의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실제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건 아니었다.
그의 기세가 모이며 주변의 공기들이 일렁이는 것이었다.
이는 아놀드 벡이 무형의 기운으로 유형의 힘을 행사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중원에서는 이러한 경지를 무형지기(無形之氣)라고 불렀고, 무형지기는 최소한 초절정에는 이르러야 사용할 수 있는 힘이었다.
아놀드 벡의 무형지기가 한 점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는 하나의 검이 되었다.
분검의 약점은 일점돌파.
‘분화한 검의 축이 되는 곳을 단숨에 찌른다!’
“흡!”
타이밍을 재던 아놀드 벡이 벼락처럼 검을 찔렀다.
검봉(劍鋒 : 칼의 뾰족한 끝)이 태산과 같은 기운을 품고 진유성에게 나아갔다.
하지만…….
“큭!”
진유성 역시 똑같은 자세를 취하며 검을 찔러 왔다.
칵!
두 개의 검봉이 맞물린다.
검의 끝을 마주한 두 사람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낭패한 기색을 보이는 건 아놀드 벡이었다.
이대로 힘을 유지했다가는 서로의 검이 부러질 수 있지만, 먼저 거두는 쪽이 수 싸움에 손해를 볼 게 자명했다.
아놀드 벡은 더 밀어붙이는 것으로 결심을 내렸다.
검끼리 비교하자면 상대방이 더 무거울지 몰라도, 신장을 비교하면 자신이 더 컸다.
같은 자세로 같은 곳을 찌르고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은 미묘하게 위에서 아래를 찌르는 형세.
그에 반해 상대는 미묘하게 아래에서 위를 찌르는 형세이다.
미묘하지만, 미묘하지 않은 차이였다.
그들 정도의 고수에게는.
아놀드 벡이 짧게 호흡을 들이켜며 힘을 주려는 순간.
퍼억!
진유성의 발차기가 아놀드 벡의 가슴팍을 걷어찼다.
“큭!”
숨을 들이켜는 찰나의 순간을 쪼개서 들어온 공격이었다.
놀랍도록 정밀하고 세밀했다.
진유성의 발차기에 아놀드 벡이 뒤로 나뒹굴었다.
그는 공격당하는 순간 몸을 뒤로 날리며 대부분의 힘을 흘렸지만, 수 싸움에 밀렸다는 건 변하지 않았다.
아놀드 벡이 황급히 자세를 고쳐 잡을 때, 진유성이 뚱한 목소리로 말했다.
“야, 뒤질래?”
“……?”
“네가 그렇게 싸움을 잘해? 옥상으로 따라오고 싶어?”
“무슨…….”
“제대로 안 해? 건방지게 싸움도 못하는 놈이.”
Rooftop의 의미를 모르는 아놀드 벡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헬멧 속의 남자가 말하는 바는 명확했다.
잠시 멍하니 쳐다보던 아놀드 벡의 자세가 확연히 바뀌었다.
방금 전까지는 왼발을 주축으로 오른손으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오른발을 주축으로 왼손에 검을 들었다.
아놀드 벡이 실제로 왼손잡이라는 건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였다.
그는 일상생활에서도 오른손을 썼기 때문이다.
아놀드 벡은 선천적인 왼손잡이였지만, 후천적인 교육으로 오른손을 쓰게 된 양손잡이였다.
하지만 무예는 후천적인 교육보다 선천적인 감각이 중요한 분야.
아놀드 벡은 우검(右劍)을 쓸 때보다 좌검(左劍)을 쓸 때 훨씬 강했다.
이 사실을 숨긴 이유는 간단했다.
그는 자신이 얻은 거대한 힘이 신의 뜻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언젠간 이 힘이 인류를 위해 쓰일 날이 있을 거라고 굳게 믿었다.
그리고 그날, 자신이 상대할 적은 몬스터뿐만이 아닐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온 세상을 상대로 한 수를 숨겨 온 것이었다.
물론, 아놀드 벡이 단 한 번도 좌검을 쓰지 않은 건 아니었다.
A급 이상의 게이트에서는 급할 때 양손을 전부 사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각성자들은 아놀드 벡이 양수가 능수능란하다고 생각할 뿐, 그의 주력이 좌수검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정체를 알 수 없는 다스베이더 헬멧의 남자가 단숨에 사실을 꿰뚫어 본 것이었다.
아놀드 벡이 물었다.
“당신은 대체 누구시오?”
“I AM YOUR FATHER.”
“그 말에 의미가 있는 거요? 아니면 그저 가면을 쓰고 하는 말인 거요?”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말장난 같았지만 저 남자가 온몸에서 풍기는 기운은 도저히 장난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무시무시한 존재감과 엄청난 압박감.
그래도 검을 왼손에 든 이후부터 조금이나마 기세를 해소할 수 있을 것 같다.
“만약 내가 당신을 이긴다면, 헬멧 뒤의 얼굴을 볼 수 있겠소?”
“음, 그래.”
“정말이오?”
“정말이긴 한데, 의미 없을걸?”
질 자신이 없다는 소리였다.
그렇다고 진유성이 아놀드 벡을 무시하는 건 아니다.
사실 진유성은 아놀드 벡의 고절한 경지에 감탄한 상태였다.
체계적인 무공을 익히지 않았음에도 이만한 경지에 올랐다는 것은 그가 천재라는 걸 의미했다.
만약 중원의 천년무공에 담긴 정수를 고스란히 배울 수 있었다면?
굉장한 고수가 됐을 것이다.
어쩌면 신주청에 버금가는 고수가 됐을지도 몰랐다.
신주청은 진유성이 알기로 자신을 제외하고는 가장 강한 무인이었다.
다만 아놀드 벡이란 놈은 모든 것을 혼자서 독학한 모양인지, 무예가 너무 정직했다.
심동과 행동의 속도는 다르나, 그 방향이 같아서는 비슷한 수준의 고수를 상대할 수 없었다.
사실 진유성은 아놀드 벡에게서 그립고, 아쉬웠던 모습을 보고 있었다.
“소인이 천신의 옷자락을 베어 낸다면, 한 가지 부탁을 간청드리고 싶사옵니다.”
상해의 상일문주(桑鎰門主).
그가 썼던 검술과 굉장히 비슷했으니까.
물론 상일문주는 아놀드 벡처럼 모르고 직선적인 검술을 쓰는 건 아니었다.
그는 알면서도 직선적인 검술을 썼다.
그러나 어쨌든 두 사람의 느낌이 굉장히 흡사했다.
검술뿐만 아니라, 사람의 느낌까지.
‘생긴 건 다르지만.’
검으로 바닥을 툭툭 치던 진유성이 입을 열었다.
“야.”
“말하시오.”
아놀드 벡이 아까보다 훨씬 정중해진 말투로 답했다.
“너 착한 놈이냐?”
“그걸 어떻게 본인이 판단하겠소.”
“꿈이 뭐야.”
“……꿈?”
“어, 막 이루고 싶은 소망 같은 건 있을 거 아니야. 십 년 후의 너를 그려 봐.”
“내 소망은 게이트 사태가 끝나는 것이오.”
“왜? 너 정도면 각성자들 중에 손꼽힐 거 같은데? 너 몇 위냐?”
아놀드 벡은 어쩌면 눈앞의 남자가 정말로 자신을 모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I am your father’ 같은 말들은 전부 말장난에 불과하리라.
자신에 대해 모르는데 어떻게 의미심장한 말을 건네겠는가.
‘아니, 속단하지 말자.’
이토록 고강한 자가 경박스러울 리 없다.
그는 경박스러운 흉내를 내는 걸 수도 있다.
“상관없소. 게이트 사태가 끝나도.”
“왜?”
“개인의 영달과 인류의 번성 중 후자를 택하는 건 당연한 거니까.”
“흠.”
진유성은 아놀드 벡의 목소리에서 진심을 읽었다.
애당초 상일문주와 비슷한 느낌을 줄 때부터 나쁜 놈처럼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확인할 절차가 필요했다.
비인부전(非人不傳).
사람이 되기 전에는 전하지 말라.
그가 아놀드 벡에게 대단한 걸 알려 주려는 건 아니지만, 어찌 됐든 깨달음의 단초는 될 터였다.
“야, 잘 봐.”
캉!
진유성이 엘비온의 거검을 바닥에 내리꽂았다.
그러곤 주먹을 말아 쥐었다.
아놀드 벡은 진유성이 검을 버렸음에도 상관하지 않았다.
인정해야 했다.
이자는 자신보다 고수였다.
“원래 무예는 맞으면서 배우는 거다. 알지?”
그렇게 말한 진유성이 바람처럼 움직였다.
“이건 심동과 행동이 속도를 달리하는 경우다.”
진유성이 주먹이 날아오는 순간, 화들짝 놀란 아놀드 벡이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진유성의 주먹은 날아오지 않았다.
진유성에게서 날아온 것은 심동뿐이었다.
아놀드 벡은 고수였기 때문에 그 심동에 반응한 것이었다.
그 순간 진유성의 주먹이 아놀드 벡의 복부를 가격했다.
퍼억!
“큽!”
“한 번 더 보여 줄까?”
이번엔 진유성의 손이 그의 뒤통수를 노렸다.
아놀드 벡은 앞서와 마찬가지로 본능적으로 반응했지만, 본능은 이번에도 그를 배신했다.
간신히 피해 낸 곳에 훨씬 느리게 손이 날아와 뒤통수를 때린 것이었다.
빡!
“한 번 더!”
진유성의 손이 이마를 때리기 위해 날아왔다.
아놀드 벡이 이를 얼굴을 굳히며 본능을 통제했다.
공격에 반응하려는 마음을 억지로 붙잡은 것이었다.
하지만…….
찰싹!
이번에는 심동과 행동이 일치했다.
“이런 식으로 속이는 거지. 느낌 오냐?”
“……!”
주춤주춤 물러난 아놀드 벡이 이마를 매만졌다.
방금 그는 세 번 죽었다.
이게 실전이었으면 말이다.
검을 교환할 때까지만 해도 아놀드 벡은 자신이 눈앞의 남자보다 약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약한 게 아니었다.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