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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69화 (69/337)

<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69화>

Quest 15. 고민하는 천마님

엘비온의 몸에서 흘러나온 기운을 흡수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게이트가 종료되었다.

진유성은 시스템의 이동에 따라 게이트 밖으로 나왔다.

“누, 누구냐!”

난데없이 친구들이 기절해 나타나자, 게이트에 들어오지 못했던 각성자 한 명이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그럴 만한 광경이었다.

밀짚모자를 푹 눌러쓴 남자가 우뚝 서 있고, 21명의 각성자들이 모조리 기절해 있는 건.

밀짚모자를 푹 눌러쓴 진유성이 입을 열었다.

“난 해적왕이다.”

끝까지 콘셉트를 유지한 진유성이 훌쩍 몸을 날렸다.

* * *

공사장을 떠난 진유성은 서울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본래 경신(輕身)공이란 몸을 가볍게 만드는 공부를 뜻했다.

갈댓잎을 타고 강을 건너는 일위도강(一葦渡江)의 경지도.

눈 위를 달려도 발자국이 남지 않는 답설무흔(踏雪無痕)의 경지도.

결국은 몸을 얼마나 가볍게 만들 수 있느냐의 문제였다.

그렇기 때문에 경신공은 순간적인 속도를 높여 줄 뿐, 지구력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고수들이 먼 거리를 다닐 때 말을 타고 다니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순간 속도는 경공이 더 빠르지만, 지구력을 고려하면 말을 타고 다니는 게 더 빨랐으니까.

하지만 진유성은 예외였다.

그는 한 호흡으로 십 리를 나아갔고, 한 줌의 진기로 백 리를 달려갔으며, 일주천의 내공으로 천 리를 주파할 수 있었다.

천안에서 서울도 30분이면 돌파할 수 있었다.

서울에 도착해서 대중교통을 타고 압구정으로 돌아가는 시간이 더 걸릴 정도였다.

진유성은 휙휙 지나가는 풍경 속에서 생각에 잠겼다.

‘게이트는 뭐지?’

그는 그동안은 게이트란 기물에 대해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이상하다는 생각은 있었다.

자연은 무정(無情)한데, 게이트는 친절했으니까.

그래서 자연 현상이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 사실 자체를 크게 받아들이진 않았다.

진유성은 이 세계의 이방인이고, 본래 지구에 살고 있던 이들이 주인이었다.

이방인의 눈에 이상한 문화가 현지인들에게는 당연한 경우도 많았다.

지구는 게이트와 20년 가까이 함께했고, 이제는 다들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게이트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고 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진유성은 게이트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비엔족의 소드 마스터 엘비온 때문이었다.

무인은 무인을 알아보는 법.

엘비온이란 이종족 전사는 순수하고 고결한 마음으로 무예를 갈고닦은 이였다.

그렇지 않으면 검이 그렇게 곧을 수 없었으리라.

하지만 그의 최후는 그가 지닌 무예와 성품에 어울리지 않는 초라한 것이었다.

‘아무리 봐도…….’

엘비온이 자처해서 게이트 안의 보스 몬스터가 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랬다면 마지막 싸움에서 무인답게 죽겠다는 의지를 품었을 리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누가 그를 보스 몬스터로 강제했다는 것인데…….’

시스템 메시지에도 뜨지 않았는가?

[필터 몬스터 엘비온의 금제가 해제됩니다.]

진유성은 시스템이 엘비온을 보스 몬스터가 아닌, 필터 몬스터라고 부른 것에 주목했다.

필터는 채나 망같이 뭔가를 걸러내는 물건이다.

필터 몬스터란 단어 그대로의 어감을 받아들여 보자면, 엘비온은 필터다.

뭔가를 걸러내기 위한 도구.

생각에 잠긴 진유성이 눈을 감았다.

그는 여전히 엄청난 속도로 사람들의 눈을 피해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얼굴은 평온했다.

흔히 높은 무공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선 뛰어난 오성을 타고나야 한다고 알려져 있다.

오성(悟性)이란 사물에 대해 논리적으로 이해하는 지능이다.

하지만 지능이 높다고 높은 경지에 오를 수 있다면, 제갈세가의 무인들이 당대 최고의 무인이었을 것이다.

고절한 무인이 되기 위해서 오성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하나 있다.

직감.

논리성이 부족해도 옳은 답을 추론하는 능력.

희박한 근거 속에서 단 하나의 옳은 길을 찾아내는 능력.

그것이 없었다면 진유성도 입신의 경지에 다다를 수 없었을 것이다.

누군간 이러한 감각을 두고 그저 운이라고 말했다.

그저 결과가 좋았기 때문에 감이 좋았다고 착각하는 거라고.

하지만 진유성은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직감이 운의 영역에 있었다면 그토록 그의 목숨을 구하진 않았을 테니까.

이런 진유성의 오성과 직감이 번뜩이기 시작했다.

‘필터링.’

필터링이란 무엇을 걸러내는 행위였다.

진유성도 필터를 쓰고 있었다.

공기에서 미세먼지를 걸러내 맑은 산소만 추출하는 내공 필터를.

그렇다면 게이트의 필터는 무엇에서 무엇을 걸러내 무엇을 추출할까?

모든 걸 알 수는 없다.

그러기에는 단서가 너무 부족하다.

하지만 적어도 진유성은 최종 추출물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마스터 플레이어에게 필터링이 완료된 에너지에 대한 흡수가 진행됩니다.]

에너지.

에너지가 추출됐다.

진유성은 이러한 에너지를 내공으로 바꿀 수 있다.

즉, 여기서 말하는 에너지가 자연의 기운과 가까운 순수한 것이란 뜻이었다.

본래 지구상의 기운들은 내공으로 치환할 수가 없었다.

처음엔 오해했지만, 속초에서 알게 되었다.

이건 환경 오염의 문제가 아니었다.

원래부터 그랬다.

그래서 이 세계에 무공이나 술법이 전혀 발달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니 필터링을 통해 추출된 에너지는 자연적인 과정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었다.

진유성의 직감이 번뜩인다.

‘혹 게이트는 에너지를 만들어 내는 도구인가?’

게이트란 커다란 플라스크.

보스 몬스터란 거름종이.

이 두 가지 요소가 에너지를 걸러 낸다면?

그렇다면 원료는 무엇일까?

또 그 에너지는 어디에 사용되는 것일까?

진유성은 한참을 고민했다.

그러나 이 이상을 추측하기에는 정보가 너무 적었다.

‘더는 모르겠군.’

워낙 오랫동안 사용을 안 했더니 머리에 녹이 슨 듯했다.

옛날 같으면 더 많은 것들을 알아냈을 텐데.

“쳇.”

진유성이 아쉬움에 혀를 찼다.

뭔가 개운치 못하다.

그러나 진유성의 이런 아쉬움은 어이없는 것이었다.

세상 그 어떤 사람이 와도 진유성만큼 추론할 수는 없었을 것이니까.

생각을 멈춘 진유성이 눈을 뜨며, 상단전을 자극하던 내공을 거둬들였다.

눈을 뜨니 보이는 것은 겨울 산의 풍경이었다.

사람들을 피해 인적이 드문 곳으로 달려왔더니 어느덧 구룡산에 도착해 있었다.

구룡산에서는 강남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높고 낮은 건물들을 따라 북쪽으로 시선을 쭉 올리면 한강이 있었다.

한강과 가까운 곳에는 진유성의 집이 있다.

상림, 유혜연, 상소윤과 함께 사는.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진유성은 자신에게 많은 것을 주었던 중원을 사랑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에게 더 큰 의미를 주는 곳은 중원이 아니었다.

고려가 아닌 한국.

남경이 아닌 서울.

이 세계가 더 좋았다.

어쩌면 진유성이 게이트에 대해 신경 쓰는 이유도 이 풍경 때문일지도 몰랐다.

지금의 일상을 깨고 싶지 않았으니까.

백여 년의 외로움과 고독 이후 찾은 행복을 잃고 싶지 않으니까.

진유성이 문득 인벤토리에서 칠성(七星)을 꺼냈다.

주혜미가 자신을 기억해 달라며 주었던, 일곱 가지 진귀한 보석을 엮어 만든 팔찌.

가만히 칠성을 바라보던 진유성이 그것을 손목에 채웠다.

그동안은 일부러 차고 다니지 않았다.

딱히 엄청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다.

그냥, 조금 무거웠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괜찮을 것 같았다.

진유성은 구룡산을 내려와 매봉역으로 향했다.

여기서부터는 CCTV와 사람이 너무 많아서 경공을 쓰고 다닐 수 없었다.

매봉에서 압구정으로 향하는 지하철에 올라탄 진유성은 수서역까지 간 다음에야 깨달았다.

자신이 지하철을 반대 방향으로 탔다는 사실을.

수서역에서 내려서 다시 반대 방향의 지하철을 타려 했지만…….

어느덧 퇴근 시간이었다.

지옥철에 올라탄 진유성은 30분 만에 생각을 고쳐먹었다.

이 세계는 좀 별로였다.

아무래도 중원이 더 살기 좋은 곳인 것 같았다.

* * *

“다녀왔습니다.”

진유성이 들어오자, 소파에 앉아 귤을 먹고 있던 유혜연이 일어나 다가왔다.

“왔어? 밥은?”

“먹었어요.”

그에 반해 상소윤은 소파에 앉아 손만 까닥거렸다.

“왔냐?”

“어허, 어른한테 건방지구나.”

“어른? 누가? 너?”

“너가 아니라 오라버니라고 불러야지.”

“와, 씨. 오랜만에 들어 보네. 까먹고 있었는데.”

“유성아, 손 씻고 와서 귤 먹어. 완전 달다.”

이제 진유성과 상소윤의 투닥거림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유혜연이었다.

진유성이 화장실에 손을 씻고 나오자, 드라마를 보고 있던 두 모녀는 ‘어머, 어머’를 남발하고 있었다.

드라마에 충격적인 내용이 나온 모양인지, 연신 호들갑이었다.

호기심을 느낀 진유성도 소파에 앉아 귤을 까먹으며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다.

이번에 시작한 드라마인지, 진유성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진유성은 곧 드라마에 빠져들었다.

“어머.”

“어머.”

“어허.”

역시 드라마는 재밌다.

게다가 한국 드라마는 굉장히 현실적이었다.

배우들 대부분이 평범하거나, 못생겨서 몰입하기가 훨씬 쉬웠다.

꼭 현실에서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한참 드라마에 빠져 있는데, 유혜연이 진유성을 힐끔 쳐다보더니 물었다.

“유성아, 그거 뭐야?”

“네?”

“손목에 그거.”

“아, 팔찌예요. 옛날에 받은.”

“외숙모는 처음 보는데?”

“그동안은 안 차고 다녔어요.”

“근데 갑자기 왜?”

“그냥요.”

유혜연이 가만히 살펴보니 팔찌에 박힌 보석이 조금 귀한 게 아니었다.

유혜연은 부잣집 사모님답지 않게 검소하고 청렴한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보는 눈이 없는 건 아니었다.

상림과 부부 동반 모임에만 나가도 수십 가지의 비싼 보석들을 봤다.

상림도 아내가 기죽으면 안 된다고 종종 비싼 것들을 선물하고.

그런데, 진유성의 손목에 있는 것이 지금까지 본 보석들 중 가장 귀해 보였다.

게다가 그런 것이 무려 일곱 가지나 엮여 있었다.

“과연…….”

“네?”

“어, 아니야.”

유혜연이 고개를 주억거리는 사이, 상소윤도 팔찌를 힐끔 보았다.

예전에는 그냥 좀 괜찮은 보석인 줄만 알았는데, 진유성의 정체를 알고 보니 왠지 다르게 보였다.

‘주혜미라고 했었지?’

누군진 모르겠지만, 부잣집 딸일 것이다.

‘예쁘려나? 아니, 근데 진유성은 눈깔이 삐었지 않나?’

드라마에 빠져 있던 진유성이 자꾸 자신을 힐끔거리는 상소윤을 쳐다봤다.

“왜 그러느냐.”

“뭘?”

“왜 자꾸 힐끔거리냐고.”

“못생겨서.”

“어허.”

“야, 근데 지종수가 너 전화 안 받는다고 징징거리던데?”

“음? 아, 잠깐 꺼 놓았었다.”

게이트에 들어가면 모든 전자 기기들이 자동으로 꺼졌다.

게이트에 나와서 켠다는 걸 깜빡했다.

핸드폰을 켜니 부재중 전화가 다섯 통이나 와 있었다.

지종수에게 4건, 상소윤에게 1건.

옆에서 진유성의 핸드폰 화면을 쳐다보던 상소윤이 말했다.

“지종수가 너 영국으로 부를 거라던데? 자기 지금 영국에 있다고.”

“영국? 영국은 갑자기 왜?”

“몰라. 이유는 말 안 해 줬는데 네가 좀 필요하대.”

진유성이 어이없다는 듯 대꾸했다.

“내가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사람이냐? 웃기는 놈이군.”

“그래? 비행기 표부터 호텔, 관광비까지 모든 비용을 풀로 부담하겠다던데?”

“비용을?”

그렇다면 이야기가 좀 달랐다.

진유성이 핸드폰을 들어 지종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몇 번 가지도 않았는데 바로 전화가 연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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