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68화>
밀짚모자를 쓴 남자가 갑자기 달려들자, 각성자들이 혼비백산했다.
너무나 빠르다!
남자는 눈 깜짝할 사이에 그들 앞에 당도해 있었다.
각성자들은 일반인들이 보기에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움직이는 이들이다.
한데, 저 밀짚모자의 남자는 각성자들이 보기에도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속도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남자의 모습이 괴기스러운 이유는 따로 있었다.
저렇게 빨리 움직이는데도, 얼굴을 가리고 있는 밀짚모자에 아무런 미동조차 없었다.
물리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인간형 몬스터?!’
‘밀짚모자가 본체인가?’
깜짝 놀란 선두의 김영호가 반사적으로 스킬 사용했다.
반사적인 공격이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가장 자신 있는 스킬이 발동됐다.
[마탄 연환 : 산탄!]
수십 발의 마탄이 밀짚모자를 노리고 쏟아졌다.
크기는 작지만, 적중당하는 순간 상대의 몸속에서 산탄으로 터져 나가는 공격적인 스킬.
속도가 빨라 피하기 까다로운 데다가 적중당하면 큰 데미지를 입을 수밖에 없는 스킬이다.
덕분에 김영호는 BB급 각성자였지만, 공격력만큼은 A급 못지않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느려.”
밀짚모자가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마탄을 피해 냈다.
고개와 어깨를 까닥거리는 것만으로 저 공격을 전부 피할 수 있다는 게 놀라울 지경이었다.
“이럴 수가!”
모두가 깜짝 놀랐다.
김영호는 천성이 가볍고 경박했지만 그 능력만큼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뛰어난 각성자였다.
공격을 막은 거라면 그럴 수 있다.
하지만 피했다고? 저토록 간단하게?
그 순간, 밀짚모자가 거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원한다면 찾아봐라!”
그 순간, 남자와 가까운 곳에 서 있던 각성자들이 풀썩, 풀썩 쓰러지기 시작했다.
“패, 패기?”
외침만으로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각성자들의 모습에 누군가 깜짝 놀라 중얼거렸다.
사실은 탄지공을 날려서 기절시킨 것이었지만.
밀짚모자가 뚜벅뚜벅 걸어가자 주변의 사람들이 우수수 쓰러졌다.
간신히 버티고 있던 마지막 각성자가 물었다.
“너, 넌 누구냐!”
슬쩍 흔들린 밀짚모자 사이로 흉흉한 안광이 빛을 발한다.
남자가 말했다.
“난 해적왕이다.”
마지막 각성자가 쓰러졌다.
* * *
진유성은 만족스러운 놀이를 끝내고는 밀짚모자를 인벤토리에 넣었다.
상하이에서 밀짚모자를 샀을 때부터 꼭 해 보고 싶었던 일이었다.
각성자들이 보스 몬스터를 보물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알고부터는 더더욱 그랬고.
사실 진유성은 오늘의 대사들을 치밀하게 준비했다.
만족스러웠다.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세간에서는 이러한 행동을 코스프레라고 부르겠지만, 진유성에게는 소소한 유희였다.
어차피 클리어할 게이트, 조금이라도 재미있게 클리어하면 좋지 않은가?
“흠.”
그런 생각을 하며 진유성이 기절한 각성자들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검, 활, 방패 등등 많은 아이템이 널브러진 게 보인다.
‘이 자식들이 그렇게 어깃장을 놓고 다닌다고 했지?’
상림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죽을죄까지는 아니더라도 한 번쯤은 호되게 당해 봐야 한다.
원래 명검을 가지고 다니는 망나니 후기지수들은 주인공한테 맴매를 맞고 뺏겨야 제 맛이 아니겠는가?
진유성이 바닥에 떨어진 아이템을 걷어 들였다.
인벤토리 안에 있는 아이템은 힘으로 빼앗을 수가 없다.
하지만 사용하고 있는 아이템은 얼마든지 강탈이 가능했다.
물론 진유성이 이들의 모든 아이템을 빼앗을 생각은 아니었다.
그저 주요 무기 정도만 뺏을 생각이었다.
그렇게 인벤토리에 아이템을 채워 넣던 진유성이 신성의 신전에 시선을 던졌다.
* * *
10분 전.
진유성은 각성자들보다 빠르게 신전에 도착했다.
“쿠어어어어!”
그러곤 단 일격에 보스몬스터 엘비온을 클리어했다.
F급 게이트라 그런지, 보스는 굉장히 약했다.
한데 이번에는 저번과 같은 메시지가 뜨지 않았다.
분명 서울역에서 S급 게이트의 보스 몬스터 린트콕을 클리어했을 때는…….
[필터 몬스터가 사망했습니다.]
[현재까지 필터링 진척도는 33퍼센트입니다.]
[마스터 플레이어에게 필터링이 완료된 에너지에 대한 흡수가 진행됩니다.]
이런 메시지가 떠올랐었는데 말이었다.
이후에는 엄청난 양의 기운이 쏟아졌었는데, 이번엔 그런 기운도 없다.
내심 기대했는데 서운하다.
‘뭐가 다른 거지?’
조금 전에는 각성자들이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져서 깊게 생각하지 못했다.
진유성이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한 가지 차이점을 깨달았다.
입장 방법이 달랐다.
[미션 시작 전, 신성의 정원에 입장하기 위해서는 패스워드가 필요합니다.]
[패스워드를 입력하시겠습니까?]
서울역에서는 분명 이런 메시지가 떠올랐었다.
내공을 주입하자 쿠쿵 하는 소리와 함께 석조 건물의 돌들이 밀려났고.
[마스터 플레이어의 자격을 증명했습니다.]
[에너지를 반환합니다.]
건물에 주입한 내공이 고스란히 돌아옴과 동시에 커다란 출입구가 생겼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니었다.
보스의 신전에 도착하자마자 문이 열렸고, 곧장 보스 몬스터가 달려들었다.
몬스터의 느낌도 뭔가 달랐다.
서울역에서 만났던 린트콕은 살아 있는 생명체의 느낌이 있었다.
하지만 오늘 만난 보스 몬스터는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고 시체가 움직였다는 뜻은 아니지만, 큰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잠시 생각하던 진유성이 순백의 석조 건물에 손을 올렸다.
그러곤 서울역에서 그랬던 것처럼 내공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그으으으으-
단전에서 일순한 막대한 내공이 머릿속의 도면을 따라 도도하게 흘렀다.
본래는 이 과정에서 진유성도 버겁다고 느낄 만큼 많은 양의 내공이 필요했다.
하지만 서울역에서 기운을 흡수하고, 프라하의 올드 캐슬에서 까만 놈이 쥐고 있던 기운을 흡수한 이후.
진유성의 내공은 비약적으로 회복되었다.
이제는 중원에서 가졌던 진신 내력의 4할 언저리까지 따라온 것 같았다.
물론 매일매일 미세먼지를 거르고, 쓸데없는 데 내공을 쓰기 때문에 소진되지만, 이렇게 한 번씩 게이트를 돌아 주면 괜찮았다.
그렇게 진유성의 내공이 석조 건물 내부를 완전히 채운 순간.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마스터 플레이어의 자격을 증명했습니다.]
[에너지를 반환합니다.]
석조 건물 내부를 가득 채웠던 내공이 차곡차곡 되돌아왔다.
여기까진 똑같았다.
하지만 다음 메시지가 달랐다.
[필터 몬스터 엘비온의 필터링을 시작하시겠습니까?]
[현재까지 필터링 진척도는 7퍼센트입니다.]
잠깐 고민하던 진유성이 긍정의 심상을 보냈다.
“한번 해 봐.”
[필터링을 시작하겠습니다.]
[필터 몬스터 엘비온의 금제가 해제됩니다.]
그 순간이었다.
순백의 석조 건물 전체가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표현이 아니었다.
정말로 벽돌이 일렁거렸다.
놀랍게도…….
그 일렁임 속에서 수많은 보스 몬스터의 모습이 보였다.
잔상 같기도 하고, 그림자 같기도 한 모습.
그 속의 엘비온은 울부짖고 있었다.
-크아아아아아!
-쿠워어어어어어!
-아아아아아아!
-크르르르륵!
똑같이 생긴 수십, 수백 마리의 몬스터가 울부짖는 모습은 진유성조차 흠칫 놀라게 만들었다.
무서움에 놀란 게 아니었다.
뭔지 모를 끔찍함에 놀란 것이었다.
엘비온은 고통 받고 있었다.
일렁거림이 건물 전체로 퍼져 나갔다.
고요한 수면 위에 물방울이 떨어지면 어떤 모습일가?
물방울이 떨어진 곳을 중심으로 파동이 퍼지며 수면이 일렁거릴 것이다.
그렇다면 그 장면을 반대로 재생하면 어떨까?
파동이 끝에서 안쪽으로 몰려오며 물방울 하나를 토해 내는 것처럼 보일 것이었다.
지금의 신전이 그랬다.
하단부에서부터 시작된 일렁거림이 신전의 최상단으로 향하자, 점차 파동이 격렬해진다.
파동의 합치점이 진동한다.
그러다가…….
뭔가를 토해 냈다.
“크르르…….”
엘비온이었다.
보스 몬스터가 나타나자 신전 벽면에서 일렁거리던 엘비온의 모습들이 사라졌다.
꼭 수많은 엘비온이 합쳐져 하나로 나타난 것처럼.
“크르르르르.”
높은 석조 건물의 천장에서 떨어졌음에도, 엘비온은 균형을 잃지 않았다.
조금 비틀거리긴 했지만, 두 발로 땅을 딛고 곧게 섰다.
‘이족 보행이군.’
늑대와 호랑이, 그리고 인간을 묘하게 섞어 놓은 듯한 외양을 가진 놈이 으르렁거렸다.
가만히 엘비온을 쳐다보던 진유성이 입을 열었다.
“야.”
엘비온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진유성을 쳐다보았다.
진유성은 그 시선에서 두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하나는 아까와 달리 엘비온의 신체에 생명력이 가득하다는 것.
또 하나는 놈에게 이성이 느껴진다는 것.
“너, 외계인이냐?”
“크르르르.”
말이 통하지 않는다.
놈이 무슨 의사를 전달하려는 것 같지만,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다.
어쩌면 소리를 내는 기관 자체가 다른 것 같기도 했다.
진유성이 멀더의 술법을 써볼까 고민하는 순간.
엘비온이 거대한 검을 꺼내 들었다.
스릉.
그러곤 진유성을 겨눴다.
살기도, 투기도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강한 기세와 굳은 의지가 느껴졌다.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비엔족의 소드 마스터 엘비온]
소드 마스터.
엘비온은 그 평가에 어울리는 실력을 가지고 있다.
검을 들고 있는 자세만 봐도 알 수 있다.
2M가 훌쩍 넘는 거구임에도 불구하고, 온몸의 균형이 완벽하게 검극에 쏠려 있다.
순수한 검술로 싸워야 한다면 상림도 엘비온보다 한수 아래다.
문제는 엘비온의 의지이다.
엘비온의 의지는 진유성을 이기는데 있지 않았다.
“나한테 부탁하는 거냐?”
엘비온은 본능적으로 진유성이 자신을 아득히 뛰어넘는 고수임을 느꼈다.
그리고 검에 목숨을 바쳤던 인생의 마지막을 검과 함께 마무리하려고 했다.
평생을 염원했던 고절한 검술로.
엘비온과 진유성의 시선이 한참을 부딪쳤다.
마침내.
스릉.
진유성이 검을 빼 들었다.
조금 전, 각성자들 중 한 명에게 빼앗아 온 검이었다.
입멸검과 비교하면 하잘것없지만, 보통의 명검만큼은 기능했다.
“크르르르.”
엘비온이 심호흡을 깊게 했다.
신검합일.
놈의 호흡이 검의 기세와 일치하는 순간, 심동보다 빠른 행동이 시작되었다.
엘비온이 달려든다.
필생의 일격이라고 불러도 좋을 기세였다.
두 손으로 움켜쥔 엘비온의 검이 허공을 격해 진유성의 목을 노리는 순간.
진유성이 움직였다.
검이 공간을 잘라 냈다.
검이 먼저고, 소리가 뒤를 따랐다.
츠르르르륵-!
공기의 파열음과 함께 엘비온의 가슴팍에서 피보라가 터졌다.
푸화악!
피가 흩뿌려진다.
엘비온의 피는 붉었다.
잠시 자신의 가슴팍을 내려다보던 엘비온이 비틀거렸다.
하지만 끝내 쓰러지진 않았다.
엘비온은 쓰러지는 대신 자신의 검을 진유성에게 건네며, 입을 열었다.
진유성은 놈의 말을 알아듣진 못했다.
하지만 엘비온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었다.
검을 받은 진유성이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엘비온의 심장을 찔렀다.
푸욱!
[필터 몬스터가 사망했습니다.]
[현재까지 필터링 진척도는 7퍼센트입니다.]
[마스터 플레이어에게 필터링이 완료된 에너지에 대한 흡수가 진행됩니다.]
사망했다는 메시지가 떴지만, 엘비온은 아직 죽지 않았다.
숨을 헐떡이며 진유성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눈빛으로 허공을 가리켰다.
잠시 고민하던 진유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흡수하마.”
만족한 것일까.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엘비온의 거구가 쓰러졌다.
이윽고 엘비온의 온몸에서 흘러나온 기운이 신전 내부를 가득 채웠다.
기운이 진유성을 향해 쏟아진다.
진유성은 엘비온의 검을 갈무리했다.
그러곤 신전에 충만해진 기운을 단전으로 흡수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