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67화>
* * *
“F급 보스 레이드?”
“네. 이거 대외비예요. 포털 사이트에 있는 게이트 현황에도 안 나오는.”
“왜 대외비야?”
“각성자들이 뒷돈을 주고 클리어 권한을 산 거 같더라고요.”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진유성이 되물었다.
“그런 걸 내가 홀라당 먹어도 되나? 좀 미안한데?”
그동안 진유성이 참여한 게이트들은 클리어가 불가능했거나, 추잡한 탐욕이 얽혀 있는 게이트뿐이었다.
그러니 지금처럼 남이 돈을 주고 산 게이트를 클리어하는 건 좀 애매했다.
진유성의 말에 상림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교주님.”
“엉?”
“왜 저는 배려 안 해 주세요?”
“뭐가?”
“생판 모르는 각성자들은 배려해 주면서! 왜 나는 안 해 줘!”
“너에겐 모발과 정력을 준 것만으로 충분하다, 대머리 고자.”
“…….”
“아니면? 내가 깡패처럼 네 모발과 정력을 납치하기라도 하랴?”
진유성의 협박에 상림이 투덜거렸다.
하지만 사실 상림은 진유성의 가치관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진유성은 의외로 도덕심이 강한 타입이다.
가까운 사람들을 습관처럼 갈구지만, 그건 그냥 장난일 뿐이다.
진유성의 성향을 모르는 게 아닌 상림이 천안 F급 보스 레이드 게이트 소식을 가져온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괜찮아요. 어차피 이 자식들은 한번 제대로 혼나야 해요.”
“엉?”
“사회적으로 많은 물의를 빚어 온 놈들이거든요.”
각성자들 중에는 본인이 일반인들과 다르다고 굳게 믿는 이들이 있다.
이런 믿음은 선민사상으로 진화하기 마련이고, 선민사상은 늘 문제를 불러일으키기 마련이다.
음주 운전을 하고도 ‘난 각성자니까 사고 따위 내지 않는다.’라며 카메라 앞에 눈을 부라리거나.
돈 좀 번다고 일반인들에게 갑질하기도 했다.
SG는 각성자들끼리의 단체 활동을 지양했지만, 그렇다고 개인적인 친분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끼리끼리 논다고, 다 비슷한 놈들이었다.
“흠.”
이야기를 듣고 있던 진유성이 말했다.
“약간 소설 속에 나오는 후기지수 같은 놈들인가?”
“그렇죠. 맨날 깝죽거리고 선민의식 가진 젊은 고수들. 딱 그런 놈들이에요.”
“나도 한번 그런 놈들을 혼내줘 보고 싶었다.”
진유성이 중원에서 도망 다닐 때, 그를 뒤쫓는 건 후기지수 따위가 아니었다. 최소 불혹을 넘은 일대제자들이었지.
그래서 그는 눈앞에서 목숨을 내놓고 거들먹거리는 후기지수를 본 적이 없었다.
한국의 무협소설에는 맨날 나오는데도 말이다.
“재밌겠다.”
그렇게 진유성은 천안행을 결정했다.
어차피 천안까지 오가며 게이트를 클리어해 봤자 몇 시간 걸리지 않을 것이다.
“상림아 천안까지 얼마나 걸리냐?”
“차로요?”
“뛰어서.”
“경산까지 경공으로 두 시간 정도 걸렸던가요?”
“그쯤?”
서울에서 경산까지가 300킬로미터이고, 천안까지가 100킬로미터 정도 됐다.
단순 계산으로는 40분 정도 걸릴 듯했다.
“가깝네.”
“참, 교주님. 저번에 서울역에서 말투 바꿨다고 하셨죠?”
“빠끄!”
“이번에도 아시죠?”
“이번엔 다른 말투를 연구해 봐야겠군.”
진유성이 기대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 *
게이트 사태가 안정화 단계에 접어든 이후, 사람들이 가장 아쉬워하는 부분은 클리어 타임이었다.
수비 미션과 공격 미션의 게이트는 클리어하는 데 무조건 일주일이란 시간이 필요하다.
중요한 건, 이 일주일이란 시간 동안 외부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현재까지 S급 게이트의 클리어율은 0퍼센트였다.
참고로 최근에 열렸던 서울역의 비징후 게이트는 S급으로 분류되지 않았다.
당시 서울역 게이트는 외부에서 등급이 측정되지 않는 이상한 게이트였던 탓이다.
게이트에 참가한 각성자들은 분명 관리자가 라고 말했다고 했지만, 곧이곧대로 믿기는 힘들었다.
S급이 그렇게 쉽게 클리어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아무래도 게이트 시스템에 오류가 발생한 것 같다는 게 SG 내부의 주된 여론이었다.
어쨌든 지금까지 S급 게이트의 클리어율은 0퍼센트.
그렇다고 인류가 S급 게이트를 클리어할 역량이 없냐면, 그건 아니다.
황제라 불리는 아놀드 벡을 필두로 3명의 SSS급 각성자들이 모인다면?
그 뒤를 SS급 각성자들이 받쳐 주고, S급 각성자들이 전투 서포터를 자처한다면?
사상자야 발생하겠지만, 분명 S급 게이트를 클리어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지금껏 S급 게이트가 클리어되지 않은 건, 타이밍이 어긋나서였다.
2년 전, 스위스 취리히에 S급 게이트가 열렸을 때.
아놀드 벡을 위시한 고위 각성자들은 피렌체에 열린 A급 게이트를 클리어하기 위해 이탈리아에 있었다.
그들은 페렌체 A급 게이트를 단 한 명의 사망자도 없이 클리어하고도 기뻐하지 못했다.
게이트를 클리어하자마자 들은 첫 번째 소식이, 취리히에서 S급 게이트가 폭주했다는 소식이었으니까.
아놀드 벡이 피렌체의 노을 아래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찍힌 사진은 아주 유명했다.
아놀드 벡처럼 사명감을 가진 각성자들만 게이트 클리어 타임이 길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돈을 위해 게이트를 클리어하는 각성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는 더 많은 게이트에 들어가야 하는데, 시간 비용이 일주일이나 들어간다는 건 아쉬운 일이다.
그래서 F급 보스 레이드는 최고의 돈벌이였다.
난이도는 낮고, 클리어 타임은 빠르고, 보상은 많았다.
괜히 각성자들이 보스 몬스터를 보물 상자라고 부르는 게 아니었다.
위험도가 낮은 E, F등급의 보스 레이드 게이트가 뒷돈에 거래되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물론 대중들에게는 극비였지만.
이 같은 이유로 천안의 F급 게이트를 두고 각성자 집단 사이에서 힘겨루기가 벌어졌다.
힘겨루기 끝에 클리어 권한을 따낸 것은 BB급 각성자 김영호와 그의 친구들이었다.
* * *
SG는 각성자들이 집단을 이루는 걸 경계하지만, 자기들끼리 알음알음 친목회를 만드는 것까지는 막을 방도가 없었다.
그들이 정치적인 활동을 시작하면 해산시킬 명분이 있지만, 그 전에는 명분이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김영호와 그의 친구들이 만든 EG 크루는 명분을 제공하지 않았다.
그들은 정치적인 활동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저 뭉쳐 다니면서 각성자임을 과시하고, 부자들과 어울리고, 유흥을 즐길 뿐이었으니까.
천안 F급 게이트의 클리어권을 따낸 게, EG 크루 최초의 대외활동이었다.
클리어권을 따낸 이유도 간단했다.
워낙 흥청망청 놀다 보니 돈이 떨어졌다.
그래서 부자 친구들에게 돈을 빌려서 클리어권을 따내고, 크게 한탕해서 이자까지 쳐서 갚기로 했다.
보스를 잡으면 그 정도 돈은 나오니까.
“야야, 보니까 F급 보스한테서 S급 아이템 나온 적 있더라?”
“진짜? 언제?”
“재작년에.”
“씨바, 우리도 그래야 하는데.”
“S급 하나보다 쓸 만한 A급 서너 개가 더 비싸게 팔릴걸?”
“그래. 바로 현금화하려면 너무 비싸도 곤란하다고.”
김영호를 필두로 스무 명이 조금 넘는 각성자들이 시끄럽게 떠들었다.
그들은 그렇게 천안 외곽에 있는 공사 현장으로 향했다.
밖에서는 건설 현장처럼 보였지만, 막상 안으로 들어오자 공사에 필요한 기계와 설비들은 없었다.
이 공사 현장은 가짜였다.
게이트가 열린다는 걸 대중들에게 숨기기 위한 눈속임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천안 사람들이 게이트 현황에 나오지 않은 게이트가 열렸다는 걸 알아차릴 수도 있었다.
물론 게이트가 도심지에 예고되면 이런 눈속임을 쓸 수 없었다.
재수 없으면 일반인이 게이트에 선별될 수도 있으니, 유동인구가 없는 외곽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김영호와 친구들이 드럼통 불을 붙여 놓고 잡담을 떨고 있는데, 문득 이질감이 들기 시작했다.
다들 이질감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게이트가 열리려는 것이다.
“나 보스 레이드 처음인데.”
“별거 없어 F급은.”
“우리 다 선별되겠지?”
“당연하지. 최소 선별인원에 딱 맞춰 왔으니까.”
게이트는 선별 인원을 무작위로 뽑지만, 무조건 22명은 선별했다.
즉, 주변에 사람을 모두 물리고 22명의 각성자들이 서 있다면 그들이 전부 선별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각성자들의 승급 기준에도 22명이서 게이트를 클리어할 수 있는지를 평가하는 항목이 포함되어 있었다.
22명의 D급 각성자들이 모이면 D급 게이트를 클리어할 수 있어야 했다.
EG 크루의 평균 등급은 C에서 DDD급 사이였다.
F급 게이트를 클리어하기에는 충분한 전력이었다.
제아무리 뒷돈을 썼다고 해도 게이트를 클리어할 역량이 없으면 SG에서 허가를 내줬을 리가 없다.
그 순간이었다.
공사장 중앙에 게이트가 생겨남과 동시에 밝은 빛이 번쩍했다.
게이트 참여인원을 선별하는 단계였다.
그들은 최소인원을 맞춰 왔기 때문에 단 한 명도 빠짐없이 게이트에 진입…….
“어라?”
각성자 한 명이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을 제외한 모든 친구들이 게이트에 들어가고, 혼자 남아 버렸다.
“씨바, 숫자를 잘못 셌나?”
덩그러니 놓인 각성자가 영문을 알 수 없어 고개만 갸웃했다.
하지만 그들은 인원을 잘못 센 게 아니었다.
건방진 후기지수들을 혼내 줄 생각에 신이 난 누군가에게 한 자리를 빼앗겼을 뿐.
* * *
[반갑습니다. 여러분.]
[저는 이번 미션을 진행할 관리자 ‘F-3A’입니다.]
[우선, 게이트 인원에 선별되심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현재 인원은 22명입니다.]
관리자의 등장에 김영호를 비롯한 각성자들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무리 가벼운 마음으로 게이트에 들어왔다고 하더라도, 전투 직전까지 방만한 건 아니었다.
정해놓은 포메이션과 수신호를 체크했고, 무기 상태와 룬 가호, 스킬의 상태를 체크했다.
중요한 건 포메이션과 각자 역할에 맞게 스킬을 설정해 놓는 것이다.
한데…….
“야, 뭐야.”
“왜?”
“황기호 어디 갔어! 안 보이는데?”
“뭐?”
김영호가 놀라서 인원수를 체크했는데, 정말로 21명이었다.
“야, 관리자가 몇 명이라고 했냐?”
“몰라. 확인 안 했는데.”
“나도.”
“22명 아니었어?”
“나도 22명이라고 한 거 같은데?”
“21명을 잘못 들은 거 아니야?”
“최소 선별 인원에 딱 맞춰서 왔잖아? 왜?”
각성자들이 잠시 혼란스러워했지만, 혼란은 금방 진정되었다.
그들은 21명이서 진입했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렇지 않으면 설명이 되지 않는다.
“황기호 이 새끼, 졸았나?”
“존다고 선별이 안 되냐?”
“그거야 모르지. 지금까지 게이트 앞에서 잠든 각성자는 없을 테니까.”
만약 오늘의 게이트가 C급이나 D급이었다면 이토록 태연하진 않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F급이다.
F급 게이트는 어그로가 먹혔다.
즉, 숙달된 각성자들에게는 클리어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는 것이었다.
보스는 어그로가 좀 빨리 풀리는 편이지만, 그렇다고 어려울 것도 없다.
EG 크루원들은 게이트에 참여하지 않은 황기호에게 돈을 배분해 줄까 말까로 언쟁을 벌이며 보스의 신전으로 향했다.
이제 조금 있으면 새하얀 석조 건물의 보스 신전이 나오고, 그 안에서 전투가 벌어질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게이트 내의 보스 몬스터가 제거되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게이트 클리어에 성공하셨습니다.]
보스 몬스터 클리어 메시지가 뜬 것이었다!
“뭐, 뭐야!”
“누가 잡았어?!”
“황기호 아니야?”
“황기호 혼자 보스를 어떻게 잡아!”
당황한 각성자들이 헐레벌떡 달리기 시작했다.
특히 당황한 건 김영호였다.
그는 부자들에게 돈을 빌려서 게이트 클리어권을 샀다.
한데, 다른 사람이 보스를 클리어했다면?
빚만 잔뜩 지게 되는 것이었다.
“보물! 내 보물!”
급하게 소리를 지르며 보스의 신전으로 달려간 각성자들 눈에 이상한 광경이 보였다.
활짝 열린 신전 문 앞에 밀짚모자를 뒤집어쓴 남자가 서 있는 것이었다.
각성자들이 주춤거리는 사이, 남자에게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물? 원한다면 주도록 하지.”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소리와 함께 남자가 달려들었다.
“그곳에 이 세상 전부를 두고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