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64화>
* * *
진유성이 괴도 천마가 되어서 맥주를 훔치고 호텔로 돌아오는 사이.
상소윤은 호텔방에서 깊은 단잠에 취해 있었다.
스카이다이빙을 할 때만 해도 몸이 힘들다는 느낌이 없었다.
하지만 저도 모르는 게 온몸에 힘이 들어갔었는지, 긴장이 풀리자마자 엄청나게 피곤해졌다.
“으음.”
한참 잠에 취해 있던 상소윤이 문득 인상을 썼다.
지이잉, 지이잉.
머리맡에 놔둔 핸드폰이 계속 진동하는 탓이었다.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이리저리 몸을 뒤집던 상소윤이 머리맡을 더듬었다.
그러곤 실눈으로 발신자를 확인했다.
발신자는 상소윤과 가장 친한 친구인 정새롬이었다.
“어, 새롬아.”
잔뜩 잠긴 목소리가 나왔다.
-뭐야? 잤어? 거기 초저녁 아니야?
“어, 그렇긴 한데 몸이 너무 피곤해서…….”
-왜? 스카이다이빙해서?
“응…….”
잠에 취해 대답하던 상소윤이 뒤늦게 이상함을 느꼈다.
정새롬에게 스카이다이빙의 짜릿함에 대해 자랑할 생각이었지만, 아직 말하진 않았었다.
“뭐야, 너 그거 어떻게 알았어?”
조금 또렷해진 상소윤의 목소리에 정새롬이 기가 차다는 듯 답했다.
-그걸 왜 몰라? 니가 대놓고 자랑해 놓고선?
“엥? 내가?”
-내가 그럴 줄 알았다. 너 해킹당했냐? 아니면 누가 장난친 건가?
정새롬이 상소윤에게 전화한 용건이 이것이었다.
상소윤 성격상 그런 유치한 사진과 글을 올릴 리가 없었으니까.
“뭔 소리야?”
-네 인스타그램 확인해 봐. 보고 기절하지나 마라.
전화를 끊은 상소윤은 부랴부랴 인스타그램 어플을 켰다.
자동로그인을 해놔서 최근에 바꾼 비밀번호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한동안 끙끙거리던 상소윤은 간신히 비밀번호를 기억해 내고는 인스타그램에 로그인했다.
그러고는…….
“꺄아아아아악!”
비명을 질렀다.
[세상이 나를 밀어내더라도…… 난 꿋꿋이 버틸 거야……☆]
상소윤은 단번에 범인을 깨달았다.
이 거지 같은 인터넷 소설 감성 글귀는 분명 진유성의 짓이었다.
분노한 상소윤이 슬리퍼를 신고는 호텔 복도로 뛰어나왔다.
유혜연과 상소윤이 묶는 방의 맞은편이 상림과 진유성의 방이었다.
쾅쾅쾅!
상소윤이 거칠게 문을 두드리자, 문이 열리며 진유성이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무슨 일이냐.”
“야 이 미친……!”
소리를 지르려던 상소윤이 멈칫했다.
진유성의 온몸에서 엄청난 맥주 냄새가 난다.
“너 술 마셨냐?”
“아니.”
“거짓말하네!”
상소윤이 문을 확 젖히니, 호텔 거실의 풍경이 보였다.
얼음, 과자, 정체 모를 액체들이 널브러진 걸 보니 술을 마신 게 분명했다.
Prague의 주인인 파벨의 생각처럼 진유성이 450L의 술을 전부 마신 건 아니었다.
저장고에서 마신 건 절반 정도였고, 나머지 절반은 호텔로 가져왔다.
상점에 가서 맥주를 담을 만한 용기를 구입하고, 맥주를 담아 인벤토리에 넣으면 그만이었으니까.
“아빠한테 이를 거야!”
상소윤의 협박에 진유성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라.”
“엄마한테도 이를 거야!”
“음…….”
그건 좀 곤란했다.
상림은 자신에게 뭐라고 할 수 없었지만, 유혜연은 뭐라고 할 수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진유성은 이런 상황에서 언제나 통하는 하나의 방법을 떠올렸다.
“같이 마시자꾸나.”
매수였다.
“뭐?”
“이 맥주는 보통 맥주가 아니다. 체코의 맥주 장인이 한 방울 한 방울 빚어 낸 술이다.”
“…….”
“이 천상의 향기가 느껴지지 않느냐?”
진유성의 말에 상소윤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맥주는 향만 맡으면 별로고, 맥주를 마신 누군가의 몸에서 나는 향은 더 별로였다.
하지만 지금.
호텔 방 안을 가득 채운 맥주의 향은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상소윤이라고 술을 한 번도 마시지 않아 본 건 아니었다.
수학여행을 가서 잠시 일탈을 즐긴 적이 있고, 친구들과 모여서 몰래 술을 마신 적도 있다.
애초에 대정고 학생들은 돈이 너무 많아서 어른들이 일일이 컨트롤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상소윤은 그동안 술이 맛있다고 여긴 적이 없었기에 술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향기는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상소윤의 눈동자가 흔들리자 진유성이 재빨리 얼음 컵에 맥주를 담아 주었다.
“한 모금 마시고 고민해도 좋다. 난 절대 외삼촌과 외숙모에게 말하지 않겠다.”
“진짜?”
“물론이다. 한 모금 마시고도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면 외숙모에게 고자질해도 좋다.”
하지만 진유성은 알고 있었다.
설령 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도, 상소윤은 이 술을 마시는 순간 자신을 고자질할 수 없었다.
한배를 탄 뒤 고자질을 하려면 스스로 배신자라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으니까.
‘후후, 순진하군.’
진유성의 거듭된 권유에 상소윤이 맥주를 받아 한 모금 마셨다.
상소윤의 두 눈이 커졌다.
‘맛있다.’
엄청나게 맛있다.
본래 맥주는 쓴 맛만 나는 술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달랐다.
고소하면서도 달짝지근하고, 그러면서도 혀끝에 약간의 신맛이 맴도는 게 감칠맛까지 있었다.
“맛있지?”
“뭐, 조금…….”
“여기 앉아라.”
상소윤이 못 이기는 척 자리에 앉았다.
시계를 힐끔 보니 이제 7시 반밖에 안 됐다.
상림과 유혜연이 10시가 넘어서 돌아올 거라고 했으니, 2시간 정도 술을 마신 뒤, 방으로 돌아가 샤워를 하고 양치를 하면 될 것 같았다.
상소윤은 어느새 자신이 진유성을 왜 찾아왔는지를 잊어버린 상태였다.
진유성이 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대의 눈동자에, 치얼스.”
“치얼스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상소윤이 혀를 쯧쯧 차며 맥주잔을 부딪쳐 주었다.
그렇게 술판이 시작되었다.
상림은 중원에서 손꼽히는 말술이었다.
오죽하면 무도(武道)로는 진유성을 이길 수 없지만, 주도(酒道)로는 이길 수 있다는 말을 공공연하게 하고 다닐 정도였겠는가.
사실 상림의 이런 발언은 위험한 것이었다.
천마신교 내에는 진유성을 신으로 추종하는 이들이 무척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유성과 상림의 인연이 워낙 깊은 데다가, 상림이 술을 너무나도 잘 마셨기에 다들 그러려니 했다.
상소윤은 그런 상림의 주량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것 같았다.
진유성과 함께 쉬지 않고 맥주를 마시는데 얼굴만 조금 붉어졌을 뿐, 취한 기색이 전혀 안 보였다.
“진짜 맛있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두 사람은 주거니 받거니 연신 맥주를 비웠다.
안주도 별로 먹지 않았다.
가끔씩 얼음을 깨먹을 뿐이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진유성이 문득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가?”
“화장실.”
고개를 끄덕인 상소윤이 슬쩍 시계를 보니 9시가 되기 직전이었다.
‘엄마, 아빠가 10시 넘어서 들어온다고 했으니까 10시 반쯤 오시려나?’
한 30분 정도는 더 마실 수 있을 것 같다.
그때, 방문이 열렸다.
상소윤은 진유성이 갑자기 왜 문을 열었나 싶어서 시선을 돌렸는데.
“……!”
거기엔 상림과 유혜연이 있었다.
눈이 마주친 유혜연의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상소윤.”
평소보다 훨씬 낮은 톤의 목소리에 상소윤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맹수 한 마리가 자신을 고요히 노려보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어, 엄마.”
엄마는 평소에 화를 내지 않지만, 화를 내면 진짜 무섭다.
“1분 줄 테니까, 설명해 봐.”
상소윤이 허겁지겁 진유성의 악행(?)에 대해서 고하기 시작했다.
자신은 진유성의 마수(?)에 엉겁결에 휩쓸렸을 뿐, 결백하다는 고해성사였다.
“아니, 내가 진짜로! 안 마시려고 했는데, 진유성이 마시자고, 마시자고!”
“그래?”
“어, 그게 나는 또 진유성이 혼자 마시다가 무슨 사고를 칠지 몰라서! 진짜로 옆에만 있으려고 했는데, 나도 모르게 호기심에…….”
유혜연이 고개를 주억거리자 상소윤의 얼굴에 약간의 희망이 묻어났다.
하지만 그것은 희망이란 이름의 헛됨이었다.
“소윤아.”
“응? 응.”
“다 좋은데, 왜 유성이는 안 보일까?”
“어? 이 자식, 화장실에 숨었어!”
상소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화장실로 향했다.
하지만, 거기엔 아무도 없었다.
당황한 상소윤이 방문을 전부 열고, 옷장, 침대 밑까지 뒤졌음에도 진유성은 없었다.
상소윤이 하는 일을 침착하게 지켜보고 있던 유혜연이 오른손을 들었다.
그러곤 상소윤의 등짝을 내리쳤다.
짝!
“억!”
“이놈의 가시나가! 혼자 술을 마셔?!”
“어, 억울해!”
“뭐가 억울해!”
“여보! 진정, 진정해!”
상림이 유혜연을 말렸음에도 상소윤은 등짝을 열 대는 더 얻어맞아야 했다.
그때, 다시금 호텔 방문이 열리며 진유성이 들어왔다.
순진무구한 얼굴이었다.
“어? 다들 여기서 뭐하세요?”
“진유성, 너 어디 있었어.”
유혜연의 날선 물음에 진유성이 고개를 갸웃했다.
“저 블타바강 주변에서 달리기 좀 하고 왔는데요? 몸이 찌뿌둥해서.”
아닌 게 아니라, 진유성의 몸에는 제법 땀이 배어 있었다.
이 추운 날씨에 이 정도 땀을 흘리려면 대충 뛰어서는 안 된다.
그 가증스러운 모습에 상소윤이 소리를 질렀다.
“지, 진유성!”
“뭐야, 이 술 냄새는. 상소윤, 술을 마신 게냐?”
“야이 씨!”
“쯧쯧, 공부도 못하는 게 술이나 마시고.”
“엄마! 얘한테 맥주 냄새날 거야! 맡아 보라니까?!”
상소윤의 항변에 유혜연이 진유성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진유성에게는 아무런 술 냄새도 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진유성은 상림과 유혜연이 예상보다 빠르게 호텔로 들어오는 기척을 읽었다.
그래서 재빨리 밖으로 튀어 나가서 내공으로 모든 술기운은 배출했다.
그뿐만 아니라, 혈도를 자극해 온몸에서 땀이 흐르게 만들었다.
실로 완벽한 연기였다.
진유성의 능력을 알고 있는 상림만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교주님.]
[왜?]
[진짜 조깅하다 오신 겁니까?]
[그래.]
[진짜로요?]
[진짜라니까?]
상림은 의심스러웠지만, 진유성이 딱 잡아떼니 할 말이 없었다.
결국, 억울함이 극에 달한 상소윤이 소리를 질렀다.
“경찰! 경찰 불러! CCTV 확인해 보면 될 거 아니야!”
“이놈의 가시나가 뭘 잘했다고!”
짝!
결국 상소윤은 맞지 않아도 될 등짝을 몇 대 더 맞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상소윤은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를 되짚었다.
‘인스타그램!’
그래, 생각해 보면 인스타그램에 대해서 따지려고 이 방에 찾아왔었다.
그러다가 술 냄새를 맡았고, 진유성의 마수에 넘어가 버렸다.
그 순간이었다.
가증스럽게 땀을 닦으며 탄산수를 들이켜던 진유성이 상소윤에게 다가왔다.
그러곤 탄산수를 흔들며 귓속말을 건넸다.
“그대의 인스타그램에, 치얼스.”
“……!”
한 소녀의 울분으로 가득 찬 프라하의 둘째 날이 저물고 있었다.
* * *
즐거운 시간은 빠르게 흐르는 법.
며칠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열흘이 지나서, 한국으로 돌아갈 시간이 다가왔다.
‘아쉽군.’
생각해 보면 진유성의 길고 긴 삶 속에서 휴가를 위해 여행을 온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드넓은 중원을 좁다고 돌아다녔지만, 늘 목적이 있었다.
누군가를 포섭하거나, 누군가와 싸운다든가, 누군가로부터 도망가든가.
항상 지형지물을 파악해서 적들과 싸워야 했고, 필요에 따라서는 산에 불을 놓은 적도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주변의 풍경이 아무리 천혜의 절경이라 해도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아무런 목적 따윈 없이 순수한 여유를 즐기기 위해 찾아왔으니까.
자신을 추종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오롯이 인간적인 관계를 맺은 이들과 함께했으니까.
기회가 된다면 이런 여행을 또 경험하고 싶었다.
‘뭐, 상소윤이 조금 삐지긴 했지만…….’
풀어 줄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진유성은 공항으로 향하는 리무진의 차창 너머 프라하의 풍경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았다.
이 세계가 점점 더 좋아지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