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56화 (56/337)

<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56화>

* * *

학교가 끝난 진유성은 상소윤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아빠도 있네?”

시계를 보니 5시밖에 안 됐는데, 벌써 퇴근한 상림이 유혜연과 TV를 보고 있었다.

최근 상림의 퇴근 시간은 점점 빨라져서 오후 4시면 집에 도착해 있는 것 같았다.

이게 다 유혜연의 뱃속에 있는 둘째 덕분이었다.

상소윤의 개쎈이부터 진유성의 상타치까지 거론되었던 아이의 태명은 결국 ‘하마’로 결정되었다.

된소리가 아니긴 했지만, 유혜연이 아이를 가진 뒤부터 끝도 없이 물을 마셔서 붙여 준 태명이었다.

진유성은 아직도 이해를 못하겠는데, 한국에서는 하마가 유독 물을 많이 마시는 동물로 인식된다고 했다.

‘한국엔 하마가 서식하지 않을 것 같은데, 그거참 이상하군.’

진유성이 그런 생각을 하며 인사를 하니, 유혜연이 그를 반기고, 상림은 못 본 척을 했다.

상림은 어제 아침에 있었던 어쩔 수 없었던 불미스러운 사태에 아직도 삐져 있었다.

‘사내자식이 쪼잔해 가지고.’

진유성이 혀를 쯧쯧 차다가 옆에 앉아 있는 유혜연을 보고 마음을 바꿔먹었다.

[상림아.]

[왜요.]

[생각해 보니 내가 경황이 없어 아이가 생긴 걸 축하해 주지 못한 것 같구나.]

[뜬금없이 무슨 소리세요?]

상림의 의아한 눈빛을 보낼 때, 진유성이 덤덤한 목소리로 전음을 보냈다.

[아이의 건강한 탄생을 기념할 겸, 또한 어제 아침에 있었던 사소한 실수에 대해 사과할 겸.]

[겸겸?]

[자동차 수리비는 내가 지불하겠다. 상하이에서 번 돈에서 가져다 써라.]

[……!]

[또한 그동안 나 때문에 들어갔던 생활비나 학비도 충당하여라.]

[……!]

상림이 두 눈을 부릅떴다.

교주님의 입에서 나왔다고는 믿기 힘든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진심이세요?]

[당연하지. 내가 언제 한 입으로 두말하는 거 봤냐?]

[옛날에 태극 같은 거 별로 안 좋아하신다고…….]

[어허.]

진유성이 상림을 슬쩍 노려보다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넉넉하게 가져다가 써라. 괜히 아끼지 말고.]

자애로운 미소와 함께 들려온 전음에 상림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토록 넓은 교주님의 마음도 모르고, 방금 전까지 잔뜩 토라져 있던 자신이 밉다.

[교주님! 죄송합니다!]

[내가 미안하구나. 그냥 운전이란 게 해 보고 싶었다. 내 모습이 어려 보여서 미성년이 된 걸 참지 못하고…….]

자책하는 듯한 진유성의 태도에 상림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사이, 진유성은 상림의 정수리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차피 자신이 고장 낸 자동차의 수리비를 지불하겠다는 건데, 뭐 저리 감동하는지 모르겠다.

아니, 생각해 보니까 좀 괘씸하다.

그동안 상림이 자신을 수리비조차 지불하지 않을 파렴치한으로 보고 있었다는 소리니까.

‘뭐, 오늘은 부드럽게 넘어가 주지.’

어차피 상림을 혼내 줄 시간이야 무궁무진했다.

그렇게 상소윤과 진유성이 자연스럽게 소파에 엉덩이를 들이미는 순간, 유혜연이 상소윤의 등짝을 짝 내리쳤다.

“아! 왜 때려?!”

“어딜 앉아.”

“왜, 같이 티비 볼 거야.”

“내일 시험 아니야?”

“하루 전에 시험 공부한다고 뭐가 되겠습니까, 어머님.”

“이놈의 가시나가. 그래도 하는 척이라도 해야지!”

상소윤이 징징거렸지만, 유혜연의 수비는 강력했다.

그리고 수비의 범위는 진유성에게까지 넓어졌다.

“유성아, 너도 내일 시험인 거 알지?”

“네. 알죠.”

“공부 좀 했어?”

상소윤이 끼어든다.

“에이, 얘가 했겠어? 맨날 쓸데없는 것만 보고 있는데.”

“그래도 유성이는 다큐멘터리라도 보잖아. 저번에 보니까 꽤 유익하던데.”

“내가 진짜로 진유성보다는 시험 잘 볼 자신 있다.”

국지 도발을 시전한 상소윤이 진유성을 슬쩍 살폈지만, 진유성은 별 관심이 없었다.

사실 진유성에게 시험은 전혀 관심이 가지 않는 일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감히 누가 무엄하게 날 시험한단 말인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설령 정답을 알아도 그 정답을 기입하는 순간, 문제의 출제자한테 지는 거다.

“야, 진유성.”

“왜 그러느냐.”

“내기할까? 점수로?”

“귀찮다.”

“질까 봐?”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에이, 질까 봐 그러네.”

“그런 도발에 넘어가는 것 자체가 지는 것이다.”

“뭘 해도 진다는 말이네? 패배자.”

“…….”

진유성은 순간적으로 상소윤에게서 상림의 예전 모습을 보았다.

싸우기 전부터 걸쭉한 입담으로 상대의 평정심을 깨트려 놓던 그 모습.

가끔 보면 같은 편이지만 말이 너무 심하다고 생각했던 그 모습.

아무래도 상소윤은 상림의 능력을 쏙 빼닮은 것 같다.

진유성의 평정심이 깨졌으니까.

그때,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유혜연이 부추겼다.

“그래, 둘이 시험 성적으로 내기하면 되겠네. 한 달 용돈 걸고 어때?”

상림이 고개를 젓는다.

“용돈은 의미가 없을걸? 당신이 안 주면 소윤이가 나한테 와서 매달릴 텐데, 난 그거 못 버텨.”

“아, 그것도 그러네. 그럼 뭘 해야 좋을까?”

“글쎄? 소원 들어주기?”

상림의 제안에 상소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좋네. 무슨 부탁이든 하나 들어주기.”

진유성이 가만히 보니, 상소윤은 이미 부탁할 만한 뭔가를 생각해 놓은 듯했다.

자신이 무조건 이길 거라는 전제하에.

살짝 어이가 없었다.

본래는 타인의 시험 따위에 응시할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이쯤 되니 빼고 싶지 않았다.

“좋다.”

그렇게 내기가 성립되자, 상소윤이 자리에서 후다닥 일어났다.

“난 공부한다!”

그러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유혜연은 딸의 뒷모습을 보며 기꺼운 표정을 지었다.

외동으로 자랄 때보다, 진유성과 함께 지내는 지금이 훨씬 보기 좋았다.

“유성아, 넌 공부 안하니?”

“음. 해 보죠, 뭐.”

진유성도 심드렁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대정고는 일반적인 인문계 고등학교와 교육 과정이 달랐다.

보통의 고등학교는 교육청에서 정해 주는 교육 과정을 따랐지만, 대정고는 아니었다.

그들은 자체적으로 개발한 교육 과정을 통해 인재를 양성하는 학교였다.

이건 시험에서도 마찬가지.

대정고의 시험은 크게 둘로 나뉘었는데, 필수 과목과 자율 주도 과목이었다.

필수 과목은 교육 과정을 대정고 나름대로 해석한 것들이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나름대로’는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뛰어난 인재들이 해내는 것이고.

경제와 역사는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이기에 <경제사>로, 문학과 철학을 분리할 수 없기에 <인문학>으로.

수리와 과학을 합치고 더 세밀히 나눠 <자연과학>, <수리과학>, <증명과학> 등등으로 분류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사실 학생들 대다수가 공부에 큰 열의가 없어서 그렇지, 대정고의 커리큘럼 자체는 굉장히 훌륭했다.

이렇듯 필수 과목이 교육 과정을 재해석한 한 단계 위의 커리큘럼이라면, 자율 주도 과목은 학생들의 편의를 위한 커리큘럼이었다.

대정고는 학생이 원하는 수업을 수강할 수 있는데, 그걸 자율 주도 과목이라고 불렀다.

자율 주도 과목에도 시험은 있었지만, 상대 평가가 아닌 절대 평가였다.

출석만 제대로 한다면 대부분 100점을 받기 마련이었다.

그렇기에 결국 성적을 결정짓는 건 필수 7과목의 시험이었다.

* * *

“진유성, 공부 좀 했냐?”

어딘지 자신감 있는 걸음걸이로 다가온 지종수의 물음에 진유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대충 훑어봤다.”

딱 단어 그대로였다.

진유성은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처럼 상단전을 개방한 상태로 태블릿 PC에 저장되어 있는 교과서를 한 번씩 읽었다.

진유성의 대답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지종수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돌아갔다.

그렇게 시험이 시작되었다.

모든 것이 학생의 편의 위주로 돌아가는 대정고는 하루 만에 모든 시험을 봤다.

오전 9시부터 12시까지 3과목.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4과목.

평소보다 학교가 30분 늦게 끝나는 셈이었지만, 학생들은 괜히 시험을 이틀이나 보는 것보다 이것을 좋아했다.

게다가 기말고사가 끝나고 이틀 뒤면 방학이니 말이었다.

‘흠.’

진유성은 시험을 보며 상념에 잠겼다.

따지고 보면 태어나서 타인의 지식을 배우려 공부하는 건 처음인 듯했다.

고려의 왕자일 때 왕실의 학자들에게 학문을 배운 적이 있지만, 그때 배웠던 학문은 지금처럼 실용적인 게 아니었다.

깊이 배운다면 쓸모야 있겠지만, 어딘지 뜬구름 잡는 소리들이 많았다.

그에 반해 한국에서 배우는 것들은 어떠한가.

체계가 있고, 깊이가 있고, 쓸모도 많았다.

심지어, 무공에도 도움이 됐다.

-

[위 그림에서 공의 움직임에 따라 발생하는 역학적 에너지 보존 법칙의 과정으로 옳게 짝지어진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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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학적 에너지 보존 법칙.

어떤 행위를 함에 있어서 발생하는 에너지는 종류를 바꿀 뿐, 계속해서 보존된다는 말이다.

진유성은 교과서에서 이 내용을 읽고 무릎을 탁 쳤다.

위치 에너지가 운동 에너지로 바뀌고, 운동 에너지가 열에너지로 바뀌는 과정을 알게 되니, 내공을 좀 더 효율적으로 쓸 수 있게 됐기 때문이었다.

엄청난 변화는 아니었다.

진유성은 이미 가장 옳은 방향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완성된 무인이었으니까.

하지만 1의 힘으로 10을 내는 것과 1의 힘으로 11을 내는 건 분명 달랐다.

‘음.’

진유성은 그런 생각을 하며 시험 문제를 별 어려움 없이 풀어 나갔다.

* * *

마지막 종소리와 함께 시험이 끝이 났다.

대정고 2학년은 총 97명밖에 되지 않았고, 시험은 모두 태블릿 PC로 진행되었다.

즉, 결과가 금방 나온다는 뜻이었다.

“오늘 안에 여러분의 보호자분들에게 연락이 갈 겁니다.”

“그 거짓말 진짜였어요?”

성적이 부모님에게 전달될 것을 미리 예고했었지만, 거짓말이길 바랐던 학생들이 머리를 움켜쥐었다.

그 사이에서 상소윤은 조금 기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잘 본 거 같아.’

느낌이 좋았다.

그동안 시험을 볼 때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짙은 어둠 속을 더듬고 있는 것 같았다.

한데, 이번에는 희미하지만 분명한 촛불이 보였다.

상소윤이 진유성을 힐끔 쳐다보았다.

진유성은 시험 시간마다 대충 아는 문제들만 풀고 다른 짓을 하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내기는 자신이 이긴 듯했다.

“흐흐.”

* * *

상림은 전형적인 무인의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위기나 기회에 강했다.

위기 속에서 건곤일척의 승부를 걸고 불가능해 보이는 기회를 어렵사리 잡음으로써, 밑바닥에서 시작한 을 이만큼 키워 온 것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평범한 일상 속의 회사 경영은 썩 잘하는 편이 아니었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처음으로 외부 임원을 고용했는데, 결과가 제법 만족스러웠다.

그동안 미뤄 놓은 일들 때문에 야근을 하고 있는데, 보고서에 적힌 숫자들이 상림의 눈을 즐겁게 만들어 주었다.

‘일을 잘하시네.’

외부 임원을 고용할 때 진유성이 큰 도움을 주었다.

상하이로 출발하던 금요일.

진유성은 학교가 끝나자마자 LF 건설로 와서 슬쩍 임원들의 선천진기를 읽어 주었다.

상림이 원하는 것은 야망이 있으면서 노력하는 인재였고, 진유성은 3명을 꼽아 주었다.

“이 세 명이 제일 야망 있고, 성실한 거 같은데? 노력파인지까지는 모르겠다.”

진유성은 선천진기는 말 그대로 느낌일 뿐이라며 맹신하지 말라고 했지만, 상림은 진유성이 꼽아 준 셋 중에서 두 명을 채용했다.

다행히 그 둘이 면접을 잘 보기도 했다.

‘가만 보면 교주님도 도움이 많이 된단 말이지.’

일단 대머리 고자에서 탈피한 것만 해도 돈으로 갚을 수 없는 일이다.

뿐만 아니다.

진유성이 상소윤과 함께 학교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상림은 딸 걱정을 거의 안 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흉흉한 세상이라지만, 세상이 교주님보다 흉흉할 것 같진 않았으니까.

진유성에게 자동차 수리비를 받아 마음이 관대해진 상림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문자 메시지가 날아왔다.

[대정고 성적 관리처에서 안내드립니다.]

미리 예고되었던 성적에 관한 메시지인 것 같았다.

상림에게 날아온 문자는 두 개였다.

하나는 상소윤의 것.

또 하나는 진유성의 것.

상림은 먼저 진유성의 성적을 확인했다.

그러곤 깜짝 놀랐다.

“어?”

상림은 진유성이 머리가 얼마나 좋은지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시험을 잘 볼 것 같다고 짐작하고 있었는데.

97명 중 9등이었다.

무려 전교 9등.

첫 시험이라는 걸 고려하면 실로 엄청난 성적이었다.

“소윤이가 지겠는데?”

상림이 재빨리 상소윤의 성적을 확인했다.

분명 아까 딸과 전화 통화를 했었다.

오늘 야근해서 늦게 들어가니, 집에 일찍 들어가서 엄마랑 있으라고.

그리고 넌지시 시험을 잘 봤냐고 물어봤을 때.

“나, 좀 잘 본 거 같아.”

“느낌이 좋아.”

이렇게 답했었다.

그런데…….

상소윤 [96/97]

뒤에서 2등이었다.

어쩌면 가장 흉흉한 건 세상도 아니고, 교주님도 아니고, 딸의 성적일지도 몰랐다.

“미안하다…….”

오늘도 못난 DNA를 물려줘서 미안한 상림이었다.

참고로 97명 중 97등은 지종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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