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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48화 (48/337)

<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48화>

진유성은 인천 공항에 오기 전부터 적잖이 설레어 하고 있었다.

인천 공항은 드라마에서 무수한 명장면을 탄생시킨 공간이다.

보통은 이런 식이다.

한국을 떠나는 여자를 붙잡기 위해 이런저런 시련을 극복하는 남자.

후에 탑승 수속을 밟는 여자와 도로를 질주하는 남자의 모습이 교차 편집되고.

아슬아슬 공항에 도착한 남자가 여자의 이름을 크게 외치는 순간!

게이트를 통과하기 직전의 여자가 남자를 바라본다.

부딪치는 둘의 눈빛.

드라마의 하이라이트이자, 서로를 향한 뜨거운 사랑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크으!”

장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가슴이 떨려 왔다.

기출 변형도 있다.

탑승 수속을 밟는 여자와 도로를 질주하는 남자의 모습이 교차 편집된 뒤, 인천 공항 상공을 지나가는 비행기의 모습이 나왔다.

그러면 시청자는 ‘헐, 어떡해! 떠나 버렸어!’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속임수다.

늦어 버린 남자가 허탈하게 공항 의자에 주저앉는 순간, 여자가 태연한 표정으로 나타난다.

어안이 벙벙해진 남자가 ‘왜 안 떠났어요?’ 따위의 질문을 던지면, 여자의 대답은 ‘내가 당신을 두고 어떻게 떠나요?’다.

“크으으!”

그야말로 완벽했다.

이보다 완벽히 심금을 울리는 대사는 존재할 수 없었다.

이게 진유성이 한국 드라마를 끊을 수 없는 이유였다.

그런 생각을 하며 들어온 인천 공항은 진유성의 순정(?)을 짓밟아 버렸다.

넓다.

드라마에서는 남자가 공항의 출입문을 열고 뛰어들면 여자를 볼 수 있었는데, 분명 그랬는데…….

그러기엔 너무 넓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지나다니는 사람이 많고, 너무 시끄럽다.

이 소음을 뚫고 여자주인공의 이름을 부르려면, 적어도 일 갑자의 내공으로 사자후를 터트려야 할 것 같다.

“이럴 수가…….”

난데없이 나라 잃는 표정을 지은 진유성을 보고 상림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러십니까?”

“드라마는, 드라마는 전부 거짓이었던 것이냐?”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세요?”

진유성이 상림에게 자신의 실망감을 절절히 설명해 주었다.

“혹시 드라마 주인공들이 일 갑자의 내공으로 사자후를 내지를 수 있고, 독특한 안법을 수련해 사물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럴 리가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십쇼.”

“그럼 이 드라마와 현실의 괴리는 뭐냐고!”

“드라마가 다 그렇죠, 뭐. 어차피 허구의 이야기잖아요. 현실에서 적당히 필요한 것만 가져다 쓰는 거예요, 적당히.”

그 순간, 상림은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생사현관이 타통되고 초절정의 무위에 올라서면서 생긴 예리한 감각이, 생존 본능의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진유성의 두 눈에서 뿜어지는 살기 때문이었다.

“상림아, 나도 순정이 있다.”

“수, 순정이요?”

“네가 그런 식으로 내 순정을 짓밟으면! 그때는 깡패가 되는 거야!”

순간, 진유성의 살기 속에서 날아온 기운이 상림의 아혈과 마혈을 두드렸다.

그 후로 상림은 입도 열 수 없고, 움직일 수도 없는 상태로 진유성의 공격을 감내해야 했다.

하지만 아픈 것보다 걱정이 먼저였다.

인천 국제공항에는 각성 테러를 대비해 PEL 수치를 감지하는 기기가 있다.

GEL 수치가 게이트를 탄생시키는 에너지의 측정 단위라면, PEL 수치는 각성자들의 마력을 측정하는 에너지 단위이다.

해서 상림은 진유성에게 공항에서만큼은 그 어떤 내공도 쓰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고, 내공으로 미세먼지를 거르지도 말라고 했다.

마력과 내공은 다른 것이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한데, 진유성은 마구잡이로 내공을 쓰면서 그를 공격…….

‘엉?’

맞다 보니 뭔가 이상하다.

교주님에게 워낙 많이 맞아 봐서 그 느낌을 잘 안다.

이런 거에 자부심을 느끼는 게 서글프긴 하지만, 눈이 가려진 채로 100명에게 맞아도 진유성의 주먹을 정확히 찾아낼 수 있다.

한데 지금은 손맛(?)이 달랐다.

그 순간, 상림이 깜짝 놀라서 입을 쩍 벌렸다.

‘이거 심검이잖아?’

타격의 형태를 보아하니 검이라기보다는 권이니, 심권이라 표현이 적절하리라.

진유성은 내공을 쓰지 말라는 자신의 부탁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었다.

무의 극에 다다른 자만 쓸 수 있다는 심검을 씀으로써.

‘이런 또라이 교주 놈이…….’

그래, 이 정도면 그냥 맞아 주자.

사실 엄청 아픈 것도 아니었다.

심검이 진정한 효용을 보이기 위해서는 내가기공과 함께 운용해야 했는데, 진유성은 그저 의념만 사용하고 있었으니까.

그 순간, 진유성의 심검이 뚝 끊겼다.

상림은 자신의 아혈과 마혈이 풀렸다는 걸 깨닫고는 의아한 듯 물었다.

“왜 이것밖에 안 때리세요? 아직 한참 남았는데?”

“흥이 깨졌다.”

“갑자기 왜요?”

“꼭 네가 맞을 걸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

기다린 게 아니라, 맞는 걸 예상하고 있던 거다. 맞을 준비를 하고 있던 거고.

“아닌데요.”

“그럼 더 맞을래?”

“아뇨.”

“들어가자. 이제 탑승 수속이란 걸 해야 하지?”

“네. 캐리어에 소주 같은 거 안 가져오셨죠?”

“……? 가져오면 안 돼?”

“아니, 제가 몇 번이나 말씀드렸잖아요.”

“못 들었다. 네 말은 보통 한 귀로 듣고 흘려서.”

“술은 가서 사 드시고, 얼른 버려요.”

“인벤토리에 넣으면 안 되나?”

“시원하지가 않잖아요.”

“아, 그렇지.”

상림의 말에 진유성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캐리어에서 소주 5병을 꺼내 버렸다.

상림은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소주를 버리고 진행한 탑승 수속은 별다른 문제가 없이 끝이 났다.

진유성의 신분 세탁이 완벽하다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긴장했던 상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근데 상림아.]

[네?]

[여권 사진을 보니까 내가 아닌 것 같던데?]

정확히는 진유성과 많이 닮았지만, 자세히 본다면 미묘하게 다른 사람이었다.

[아, 그거는 전문가가 사진을 섞어서 그래요.]

신분을 세탁하는 방식은 다양하지만, 그중 가장 안전한 것은 자연스럽게 서류 기록에 녹아드는 것.

상림이 고용한 브로커는 진유성의 얼굴을 본래 신분 주인의 전산상의 사진에 조금씩 섞었다.

원래 인상이란 게 눈코입만 같아도 비슷해 보이는 법이니까.

[운전면허증을 딸 때쯤이면 본래 사진을 써도 되지 않을까요?]

[운전면허가 언제부터 가능한데?]

[내년 생일이 지나면 딸 수 있습니다.]

[10개월 정도 남았군.]

진유성의 서류상의 생일은 9월 4일.

이제 1년도 남지 않은 셈이었다.

[그때까지 사 주기로 한 말을 준비하도록 하여라.]

[…….]

상림은 자신이 경솔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진유성에게 서른 살부터 면허를 딸 수 있다고 거짓말을 했어야 했다.

‘아니, 아니지.’

대정고의 부잣집 자제들은 19살 생일이 지나면 대부분 차를 몰고 다닌다.

어차피 진유성도 알았을 문제였다.

‘에이 씨. 이번 거래를 성사시키면 페라리 한 대 살 돈은 나오겠지, 뭐.’

상림도 진유성의 인벤토리에 정확히 뭐가 얼마나 있는지 몰랐다.

일전에 리스트를 공유 받은 적이 있었는데, 처음 들어 보는 아이템이나 스킬이 엄청나게 많았다.

SG에서 공식적으로 운영하는 각성자 마켓에 들어가면 대충 시세를 알 수 있겠지만, 괜히 의심스러운 흔적만 남기는 것 같아서 조심했다.

그때 상하이행 비행기의 탑승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들렸다.

상림은 진유성과 함께 비행기에 올라탔다.

* * *

게이트 사태 초반 중국은 국가의 존속이 위태로울 정도의 심각한 위험에 처했다.

인구에 비례한 많은 각성자들이 탄생했지만, 그보다는 지킬 땅이 훨씬 넓은 게 문제였다.

이에 중국은 UN SG본부에 국가 생존을 위한 지원을 요청했고, UN은 요청을 받아들여 중국을 구제했다.

몇몇 국가는 중국에게 과한 지원을 하는 UN을 비난했지만, 사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중국이 망해 버리면 세계 실물 경제에 막대한 타격이 온다.

안 그래도 게이트 사태 때문에 어디로 튈지 모르는 세계 경제였는데, 중국의 패망이라는 불안요소를 만들 수는 없었다.

그렇게 SG는 중국을 구제했다.

하지만 어이없게도 중국은 위기를 극복하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SG를 탈퇴했다.

그러곤 SG의 노하우를 응용한 China-SG, 속칭 CSG를 창설했다.

세계가 중국을 배은망덕하다고 비난했지만, 중국 정치인들은 실리적인 선택이라고 자평했다.

인구가 많은 중국은 대각성자 시대에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이후, 중국은 SG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그럭저럭 대륙을 지키고 있었다.

국민들을 게이트 안전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키면서 생겨난 인구 과밀집, 빈부격차, 실업률 상승 등의 부작용을 애써 외면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이런 CSG로서도 아쉬워하는 부분이 있었다.

UN의 SG 본부에서 운영하는 <각성 마켓>이었다.

각성 마켓은 각성자들이 마정석이나 아이템, 스킬 따위를 거래하는 사이트였다.

SG에서 사활을 걸고 관리를 하는 터라 허위 매물이나 사기 같은 문제가 일절 발생하지 않는 높은 신뢰도를 가진.

각성 마켓의 중요성은 각성자들의 경제적인 만족감과 성취감을 채워 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인간의 생산성은 창의력과 노력에 의해 결정된다.

그리고 창의력과 노력은 합당한 보상이 없을 때는 발휘되지 않는 놈이다.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는 공산주의의 농부와 작물을 팔아치운 만큼 돈을 버는 자본주의의 농부가 큰 생산성 차이를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었고.

각성자의 무력 생산성 역시 마찬가지였다.

무력을 통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확신이 있어야만, 각성자들도 창의력과 노력을 발휘해 무력 생산성을 높였다.

한데 SG에서 탈퇴한 탓에 각성 마켓을 사용할 수 없는 CSG 소속의 각성자들은 경제적 만족감이 낮았다.

아이템과 스킬은 결국 각성자들 간에 거래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자연스럽게 각성자들의 성장 폭도 낮아졌다.

아직까지는 중국이 각성 강국이었지만, 내부적인 지표에 따르면 10년 후에는 안전을 장담할 수 없었다.

사태의 위험성을 파악한 CSG는 새로운 목표를 세웠다.

SG의 각성 마켓을 뛰어넘는 새로운 마켓을 만드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각성 상품들이 필요했다.

CSG는 삼합회를 움직였다.

삼합회가 양으로 음으로 각성 관련 상품을 무차별적으로 사들이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 * *

진유성과 상림은 서로의 외양을 쳐다보았다.

얼굴의 절반 이상을 가리는 마스크에 모자를 푹 눌러쓰니 보이는 건 눈밖에 없었다.

“상림아, 눈썹을 밀어 버리는 건 어때?”

“교주님 눈썹이요?”

“아니, 네 눈썹.”

“아, 싫어요.”

“싫으면 시집가.”

상림은 ‘극혐’이란 단어를 얼굴로 표현하는 최적의 표정을 짓기 위해 노력했다.

진유성이 주먹을 쓱 들어 올렸다.

“표정 안 풀어?”

“넵.”

두 사람이 이 같은 차림을 하고 있는 건 정체를 숨기기 위해서였다.

정확히는 이제 곧 삼합회 산하의 즉매회(卽賣會)와 접촉할 예정이었으니까.

상하이에 도착하자마자 즉매회와 접촉하는 것은 시간적인 여유가 없어서였다.

진유성이 가지고 있는 마정석과 아이템의 리스트를 공유하고, 그것의 가치를 매기고, 현금을 준비하는데도 시간이 들었다.

관광이야 일을 끝낸 다음에 하면 그만이었다.

한동안 마스크와 모자를 매만지던 상림이 입을 열었다.

“여기 무협 소설에 나오는 것처럼 역용술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니까. 아니면 멀더한테 좀 배워 둘걸.”

“아, 그러네요. 서역의 마도술에는 쓸데없는 기술들이 많았죠.”

“멀더가 들으면 지하에서 운다.”

“행성이 다르니 여기 지하에는 없을걸요?”

한국의 무협 소설에는 역용술에 대한 묘사가 많았다.

대부분 설명을 보면 근골을 움직여 얼굴상을 다르게 만든다는 식의 기술이었다.

하지만 진유성과 상림이 있던 중원에는 그런 기술이 없었다.

인피면구도 소설에 나오는 것처럼 감쪽같은 기물이 아니었다.

누가 봐도 본래 얼굴을 숨겼구나 하는 걸 아는 정도?

인피면구는 얼굴을 감추고 활동할 때 쓴다기보다는, 서로 얼굴을 몰라야 하는 점조직의 구성원들이 접선할 때 많이 사용했다.

상림이 문득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이 아는 선에선 역용술 같은 기술이 없었지만, 게이트 안에서 신 같은 놈도 이긴 교주님이라면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질문에 대한 진유성의 대답은 간단했다.

“야. 뼈의 위치를 움직이면 탈골이야, 탈골. 생각해 봐? 내가 네 엄지손가락을 옆으로 움직이면 어떻게 되겠어?”

“……부러지겠죠?”

“그치? 무슨 내공이 도라에몽도 아니고 뼈를 어떻게 마음대로 움직이냐? 인간의 신체와 관절 가동 범위는 정해진 것인데.”

듣고 보니 굉장히 맞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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