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46화>
Quest 10. 착한 일 하는 천마님
상림은 LF 건설을 운영하면서 자신이 경영자로서 부족하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다른 CEO들이 똑똑한 머리로 회사를 운영하지만 상림은 성실함과 우직함 말고는 내세울 것이 없었다.
물론 그 성실함과 우직함 덕분에 지금의 LF 건설을 이룩할 수 있었지만, 원래 사람은 갖지 못한 것에 대해 아쉬워하는 동물이었다.
그가 한 달에 한 번씩 교수들을 초청해 이사들과 특강을 듣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노인이 되면 아이처럼 행동한다는 말이 있죠. 노인과 아이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강연자의 질문에 상림이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진유성을 보고 있으면 노괴 주제에 아이 같을 때가 있다.
노인과 아이의 공통점은 잘 모르겠지만, 진유성과 아이의 공통점은 무수히 많다.
말이 안 통하고, 막무가내고, 일을 저지르고 나 몰라라 하고,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시끄럽다.
더 하자면 끝도 없다.
그나마 아이는 귀엽기라도 하고, 커가면서 점차 나아질 거란 기대도 있다.
하지만 진유성에게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유성에게는 이 모든 단점을 상쇄시킬 한 가지 장점이 있다.
바로 힘.
장점으로 단점을 상쇄시킨다는 건 보통 ‘좋은 면이 나쁜 면보다 크다.’라는 의미였지만 진유성은 아니다.
말 그대로 단점을 상쇄시켰다.
단점을 지적하는 사람을 주먹으로 분쇄해 버릴 수 있으니까.
빠직.
무의식중에 힘이 들어갔는지 상림이 쥐고 있던 볼펜이 부서졌다.
“엇…….”
생사현관이 타통된 이후로 저도 모르게 힘이 과하게 들어갈 때가 있다.
상림이 볼펜의 잔해를 수습하고 있을 때 강연자가 말을 이었다.
“사회적 관습이 아닌, 자신의 기준으로 세상을 해석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유는 다릅니다. 아이는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고, 노인은 자신이 모든 걸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여기서 우리는 CEO가 가져야 할…….”
* * *
2시간 반짜리 강연이 끝나고, 상림과 LF 건설의 이사들은 회의실에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대부분이 쓸데없는 한담이었지만, 종종 중요한 사안들도 언급이 되었다.
“비징후 게이트에 대한 업계 시선에 온도 차이가 있더군요.”
“이미 자리를 잡은 건설사들은 반기지 않는 분위기고, 신생 건설사들은 반기는 분위기입니다.”
“근데 뭐, 비징후 게이트는 서울역에만 열렸잖아요?”
“앞으로도 그런단 보장은 없죠.”
“두 번 연속 서울역에만 열린 걸 보면 거기 터가 안 좋은 거 아닐까요?”
“흠, 만약 또 서울역에 비징후 게이트가 생기고 폭파된다면 철도 복구공사가 제일 큰 사업이 되겠군요. 우리도 대비해야 하지 않겠어요?”
“국토교통부 쪽에 선을 대 보자고?”
“해 둬서 나쁠 건 없잖아요.”
“그냥 주거 단지에 전념하는 게 좋을 수도 있어요. 외부에서 보는 LF 건설의 아이덴티티는 게이트 폭주 지역 재건이니까.”
이사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상림이 생각에 잠겼다.
상림은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서울역 게이트를 누가 클리어했는지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서울역에 또 게이트가 생겨도 폭파될 확률은 낮다.’
진유성은 압구정에서 서울역 게이트를 감지했다.
이 말인즉슨, 또다시 서울역에 게이트가 생겨도 진유성이 클리어할 거라는 이야기.
말려도 소용이 없다.
진유성은 구할 수 있다면 무고한 이의 죽음을 지켜볼 사람이 아니었다.
그때 장대수 이사가 상림에게 물었다.
“상 대표 생각은 어때?”
장대수 이사는 상림과 함께 LF 건설을 설립한 창업 공신이며, 상림의 친구였다.
공적인 자리에서는 서로 존칭어를 쓰지만, 지금은 한담을 나누는 사적인 자리였다.
한담이 업무적인 이야기로 번지긴 했지만.
장대수 이사의 질문에 상림이 고개를 저었다.
“서울역은 내버려 두자.”
“완전히? 게이트가 터지고 나면 복구 사업을 따낼 수 없을 텐데?”
게이트가 펑펑 터지던 때에는 복구 사업을 할 인력이 부족해 발을 동동 굴렀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역마다 게이트 폭주 시 복구 사업을 진행할 예비 순위들이 정해져 있다.
강남과 압구정 일대는 상림의 LF 건설이 0순위 업체였지만, 서울역은 아니다.
서울역 인근에는 LF 건설이 예비 5순위 밖이었다.
“메인스트림은 못 따내더라도 외곽 쪽은 미리 로비를 해 놔야 할 거 같은데.”
장대수 이사는 말에 상림이 다시 한번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냥 놔두고, 우린 지방 쪽에 집중하고.”
“왜? 판단 근거가 뭔데?”
“그냥, 감.”
진유성에 대해 말할 수 없으니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우리가 서울역에 게이트가 터지길 바라는 것 같잖아 꼭. 많은 사람이 고통 받을 텐데.”
“허, 참. 사업한다는 사람이…….”
장대수 이사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더는 말하지 않았다.
대표가 저리 단호하니 그로서도 방법이 없었다.
“아, 참. 우리 임원 면접이 언제였죠? 연기됐었잖아요.”
상림의 물음에 이사 중 한 명이 대답했다.
“이번 주 금요일 저녁입니다.”
“알겠어요. 자자, 그럼 들어가서 일들 합시다.”
상림은 진유성에게 임원 면접을 도와 달라고 부탁했던 걸 떠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중세 귀족들이 흥겨운 파티를 벌일 것 같은 고성(Old Castle)의 최상층의 풍경은 아름다웠다.
서쪽으로는 뉘엿뉘엿 넘어가는 노을에 물든 너른 평원이 보였고, 동쪽으로는 유유자적 흐르는 강물이 있었다.
아무리 감성이 메마른 사람이라도 미소를 지을 것 같은 고즈넉하고 평화로운 공간이었다.
칠흑보다 어두운 어둠이 몰려들기 전까지는.
고오오오오-
아득한 어둠이 따뜻한 노을빛과 선선한 바람이 잠식했다.
기분 좋게 흔들거리던 촛불이 하나둘 불길하게 꺼졌다.
마침내 고성의 최상층에는 짙고 짙은 어둠만이 가득했다.
그 속에 똑같은 얼굴을 한 세 명의 백인 남성이 있었다.
[단서는?]
[없다.]
[아무 단서가 없을 리 없다.]
[없다. 레벨이 오른 흔적도 없고, 스킬이나 아이템을 사용한 흔적도 없다.]
[필터 몬스터 린트콕과 싸운 게 아닌가? 전투가 벌어졌다면 아무 흔적도 남지 않았을 리가 없다.]
[하지만 없었다.]
세 명이 입을 다물었다.
누카 종족 불세출의 영웅인 린트콕은 강했다.
그들이 직접 패퇴시켜 게이트에 종속시켜 놓았지만, 그렇다고 그 강함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생전의 린트콕보다 게이트의 사역마가 된 지금의 린트콕이 무력적인 측면에서는 더욱 강했다.
그런 린트콕과 싸웠는데 아무런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고?
그건 그들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미지의 인물이 필터링된 영성을 훔쳐 갔다는 것이다.]
[어떻게 영성을 훔칠 수 있던 거지?]
[패스워드를 알고 있었다.]
[패스워드를 알아도 인간은 조건을 만족시킬 수 없다.]
[단정 짓지 마라. 중원의 절대자도 인간이었다.]
[혹, 신적인 존재가 나타난 게 아닌가?]
[지구에는 신적인 존재가 없다. 이건 이미 확인된 사실이다.]
어떤 식으로 추론해도 결론을 내릴 수 없었던 셋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서울역 게이트에 직접 들어갔던 세 번째 남자에게 물었다.
[록펠러, 게이트 안에 미지의 존재가 없었다고 확신할 수 있나?]
[확신한다.]
록펠러는 게이트에 들어갔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는 게이트에 선별된 각성자들이 린트콕에게 모두 죽었을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게이트에 입장했다.
하지만 죽어 있던 건 린트콕이었고, 각성자들은 게이트 밖으로 송환되기 직전이었다.
[이, 이럴 수가!]
[신성을 위한 영성이 어찌하여 사라졌단 말이냐.]
그는 짧은 순간에 각성자들을 훑었지만, 그들은 모두 평범한 인간이었다.
개중 가장 강한 인간이라고 해 봐야 고작해야 S급으로 분류되는 각성자뿐이었고.
[숨어 있던 건 아닌가?]
[불쾌하군. 우리 앞에 모습을 숨기는 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
하나의 생명체는 영혼백육(靈魂魄肉)으로 이루어져 있다.
육(肉)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선 선을 숨기고, 백(魄)을 숨기기 위해선 호흡을 지워야 했다.
하지만 존재를 지우기 위해선 영혼을 감춰야 했다.
영과 혼을 감지할 수 있는 그들 앞에서 숨는다는 행위는 무의미했다.
다시 한번 길게 침묵하던 셋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마음에 걸린다. 난 중원의 절대자를 확인하고 오겠다.]
[무엇을 확인하겠다는 거지?]
[혹시라도 그자가 게이트를 넘어온 것이 아닐까 걱정된다.]
[조심해라.]
[…….]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인간을 뛰어넘은 그들에게 ‘조심’이라는 단어는 낯선 것이었다.
하지만 중원의 절대자와 마주할 때는 그들로서도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 셋은 중원의 절대자와 싸웠던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놀랍게도 셋이 힘을 합쳤음에도 그들은 중원의 절대자와 동수를 이루었다.
도저히 인간이라고 믿기지 않는 강함이었다.
[그자의 이름이 뭐였지?]
[진유성이었다.]
[네가 진유성은 만나고 올 동안 우리는 페이즈 2를 준비하고 있겠다.]
[좋다.]
그 말을 끝으로 칠흑 같은 어둠이 서서히 물러나기 시작했다.
어둠이 사라진 곳에 다시 따스한 노을이 묻어났고, 선선한 바람이 스며들었다.
그리고 불길하게 꺼졌던 촛불에 일제히 불이 붙었다.
체코 프라하의 올드 캐슬은 다시 고즈넉한 아름다움을 되찾았다.
* * *
음식이 잔뜩 놓인, 금방이라도 만찬이 벌어질 것 같은 테이블 위에 네 사람이 앉아 있었다.
진지한 기색으로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넷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상소윤이었다.
“까꿍이 어때? 된소리가 들어가야지 건강하게 자란다며.”
“음, 나쁘지 않네. 여보는?”
“나는 땅땅이.”
“에이, 아빠. 땅땅이가 뭐야. 땅딸막하면 어쩌려고.”
“그 땅땅이가 아니라 단단하다는 뜻이야!”
“별로야. 까꿍이가 훨씬 낫다.”
그들이 음식을 눈앞에 두고 식사 대신 대화를 나누는 건, 유혜연의 태중에 있는 아이의 태명을 짓기 위해서였다.
한국에서는 태명을 된소리로 지어야 건강하게 출산한다는 인식이 있는 관계로 모두들 거센소리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개쎈이 어때, 개쎈이.”
“소윤아, 엄마한테 개쎄게 맞아볼래?”
“헐, 엄마도 그런 말 써?”
“네가 먼저 했잖아.”
한동안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오던 중, 유혜연이 진유성에게 물었다.
“유성아, 너는 생각해 둔 거 없니?”
“음, 있긴 있어요.”
“뭔데?”
“재밌게 본 만화책에 나오는 캐릭터인데, 완전 강한 캐릭터거든요. 이름도 된소리고.”
“뭔데?”
“타치.”
“타치?”
“네. 상타치.”
“…….”
유혜연이 처음으로 진유성의 등을 짝하고 내리쳤다.
한동안 이런저런 태명 후보들이 거론됐지만, 결정은 유보되었다.
유혜연의 마음에 드는 이름이 하나도 없는 탓이었다.
결국, 결론을 내리지 못한 그들은 음식이 식기 전에 부랴부랴 식사를 시작했다.
한참 밥을 먹던 중 상림이 갑자기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유성아.”
“네?”
“너 여권 없지?”
“여권이요? 없죠.”
가만히 듣고 있던 상소윤이 물었다.
“여권은 왜?”
“유성이랑 잠깐 중국에 다녀오려고.”
상림은 제법 오랫동안 진유성이 게이트에서 얻은 아이템과 마정석을 판매해 줄 브로커를 찾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적당한 곳과 접촉할 수 있었는데, 바로 중국의 삼합회의 하부 조직이 운영하는 블랙 마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