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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45화 (45/337)

<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45화>

당연한 얘기지만, 이들의 생각은 우연에서 생긴 오해였다.

그저 진유성이 방문했던 가게를 지종수가 또 고른 것뿐이니까.

하지만 일어날 수 없는 우연은 아니다.

몇 달 전, 아무것도 모르고 홍대에 왔던 진유성은 거리에서 가장 잘 보이는 가게에 들어갔었다.

이것은 지종수도 마찬가지였고.

심도훈과 고인수가 진유성의 재력(?)에 그저 감탄한 것과 달리, 지종수의 마음은 심란해졌다.

‘스피드, 밸런스, 파괴력, 통찰력, 집중력. 거기에 엄청난 재력까지…….’

점점 진유성을 이기는 것에 자신감이 없어지고 있었다.

“재미있구나. 이젠 뭘 할 거지?”

진유성의 물음에 잠시 고민하던 지종수가 입을 열었다.

그가 축구 다음으로 자신하는 스포츠가 하나 있다.

“진유성, 너 당구 좀 치냐?”

“당구? 쳐 본 적 없다.”

“한 번도 없다고?”

“포켓볼은 쳐 봤다.”

한 큐에 포켓볼 15개를 가루로 만들어 난리가 났지만.

“후후…….”

시무룩해져 있던 지종수가 기력을 회복했다.

진유성이 제아무리 뛰어난 반사 신경과 운동 센스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당구는 다르다.

당구는 경험의 스포츠다.

어떤 공을 어떤 식으로 쳐야 하는지는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쳐야만 알 수 있는 법이다.

진유성을 무참히 농락할 생각을 하니 설렜다.

‘진유성! 너의 스피드, 밸런스, 파괴력, 통찰력, 집중력, 재력은 인정한다! 하지만 경험은 내가 우위에 있을 것이다!’

지종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진유성을 자신이 자주 가는 당구장으로 이끌었다.

심도훈과 고인수는 신이 나서 걸어가는 지종수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진유성을 데려오면서 상소윤과 무슨 사이인지 캐낼 거라지 않았냐?”

“그걸 믿냐? 그냥 진유성이랑 놀고 싶었던 거라니까?”

두 사람은 고개를 저으며 지종수의 뒤를 따랐다.

잠시 뒤, 네 사람이 도착한 곳은 홍대와 합정 사이에 있는 <프리미엄 빌리어드 클럽>이었다.

이용 요금이 보통의 당구장과 비교하면 몇 배는 비쌌는데, 그만큼 장비를 철저히 관리해 프로 당구 선수들도 종종 이용하는 곳이었다.

당구장으로선 특이하게 룸 형식이기도 했고.

“어, 손님. 오랜만에 오시네요.”

빌리어드 클럽의 사장이 지종수에게 아는 척을 했다.

인사를 받은 지종수가 진유성을 힐끔 보니, 진유성과 사장은 안면이 없는 듯했다.

‘여긴 진유성의 건물이 아니군.’

만약 그랬다면 억울할 뻔했다.

요즘은 잘 안 왔지만, 중학교 때만 해도 거의 매일 이곳을 방문했었으니까.

“어디 방으로 드릴까요?”

“삼구 대회용 테이블로 주세요.”

지종수의 말에 심도훈이 끼어들었다.

“아, 무슨 대다이야. 나랑 인수는 포켓볼이나 칠래.”

“그래. 너랑 치면 무슨 재미냐?”

지종수의 당구 실력을 알고 있는 심도훈과 고인수가 빠지고, 진유성과 지종수만 대회용 테이블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진유성, 규칙은 알지?”

“그냥 공을 쳐서 공 두 개를 맞추면 되는 거 아니냐. 벽 세 번 이상 맞추면서.”

“어, 뭐. 그렇긴 하지.”

당구는 생각보다 TV에서 자주 나오는 스포츠였고, 진유성도 몇 번 봤었다.

사실 그는 당구를 보자마자 쉬운 스포츠라고 생각했다.

‘이걸 왜 대회까지 여는 거지?’

프로선수들이 들으면 굉장히 실례될 생각이지만, 진유성의 관점에서는 축구나 농구도 마찬가지긴 했다.

축구는 공을 발로 차서 골대에 넣으면 되는 것.

농구는 공을 손으로 던져서 골대에 넣으면 되는 것.

굳이 내공과 의념을 쓰지 않아도 진유성의 체술은 입신(入神)의 경지였다.

진유성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큐에 초크를 바르던 지종수가 입을 열었다.

“넌 8개 잡아. 난 원래 20개 놓고 치는데, 양심상 25개 놓고 친다.”

친구들끼리 치는 당구는 실력차에 따라서 점수 합의를 보고 시작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진유성은 이런 사실을 전혀 몰랐다.

그가 아는 건 오직 TV에서 봤던 방식뿐이었다.

“당구란 게 40점을 먼저 치면 이기는 스포츠 아니었나?”

“대회 룰로 하자고?”

“난 TV에서 하던 방식밖에 모른다.”

“뭐…… 원한다면.”

지종수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원래는 양심상 치려고 했건만, 진유성이 어쩔 도리가 없다.

지종수는 이렇게 되면 자신이 패배할 확률이 제로라고 생각했다.

“대회식이면 심판도 부른다?”

프리미엄 빌리어드 클럽은 요금을 추가하면 심판을 부탁할 수도 있었다.

이곳에서 아마추어 대회가 자주 열리는 이유도 이 때문이었고.

잠시 뒤, 클럽의 사장이 나타났다.

“사장님이 심판을 보시게요?”

“네. 다른 사람 불러 드려요?”

“아뇨. 그냥…… 사장님이 보기엔 좀 시시한 게임일 거 같아서요.”

그렇게 게임이 시작되었다.

선공을 잡은 것은 지종수였다.

자세를 잡은 지종수가 초구를 쳤다.

딱- 딱-

초구는 늘 정해진 포지션에서 출발하기에, 당구 좀 친다는 이들에게는 어려운 게 아니었다.

중요한 건 초구를 치고 난 다음의 공의 배치.

초구를 가볍게 득점한 지종수가 테이블을 노려보았다.

‘에이, 너무 세게 쳤네.’

오랜만에 치다 보니 힘 조절이 잘 안 돼서 어려운 배치가 떴다.

하지만 지종수는 그 뒤로도 2점이나 더 득점했다.

진유성을 이기겠다는 일념에 집중력이 최고조로 오른 것이 느껴졌다.

“후후…….”

3점을 획득한 지종수가 진유성에게 네 차례라는 듯 시선을 줬다.

지종수가 큐대를 다루는 걸 유심히 지켜보고 있던 진유성이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로 다가갔다.

그러곤 큐대를 잡았다.

중원에는 백일창(百日槍), 천일도(千日刀), 만일검(萬日劍)이란 말이 있다.

이것은 창을 완전히 익히기 위해선 백 일이 걸리고, 도를 완전히 익히기 위해선 천 일이 걸리고, 검을 완전히 익히기 위해선 만 일이 걸린단 뜻이었다.

그만큼 창이란 무기가 가진 요체가 지극히 단순하다는 소리기도 했다.

창술엔 다양한 동작이 있지만, 결국 찌르기에 모든 요체가 담겨 있다.

창이란 것 자체가 먼 거리에서 찌르기 위해 탄생한 병기였으니까.

그렇다면 가장 아름다운 찌르기란 무엇일까?

그 무엇보다 빠른 것?

그 무엇보다 정확한 것?

아니다.

아무리 빠르게 찔러도 창술은 쾌검을 넘어설 수 없다.

아무리 정확하게 찔러도 창술은 암기를 넘어설 수 없다.

창술의 찌르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힘이다.

발바닥과 무릎에서 시작된 힘을 허리, 가슴, 팔로 전달하며 온몸을 내던지는 것.

상대로 하여금 도저히 맞설 수 없게 만드는 압도적인 찌르기.

바로 이렇게.

따?악?!

진유성이 공을 때리는 순간, 지종수가 깜짝 놀랄 만큼 큰 소리가 터져 나왔다.

쓰리 쿠션의 규칙은 간단하다.

수구가 제1 적구와 제2 적구를 맞추기 전에 3번이상의 쿠션을 맞추는 것.

그래 3번 이상이다.

하지만…….

진유성의 수구는 제1적구를 맞추고 미친 듯이 테이블을 돌아다녔다.

퉁, 퉁, 퉁, 퉁, 퉁.

마침내 수구가 테이블 네 바퀴(16쿠션)를 돌았을 때.

딱.

제2적구에 부딪쳤다.

득점 인정이었다.

“…….”

“…….”

심판을 보던 빌리어드 클럽의 사장과 지종수가 말을 잃었다.

그들도 눈이 있다.

진유성은 정확한 목적성을 가지고 공을 친 게 아니었다.

대충 방향만 잡고 친 거다.

존나 세게.

존나 세게 치니까, 존나 많이 움직인다.

그러다 보면 득점이 된다.

‘내, 내가 알고 있는 당구가 부정당한 느낌이야.’

당황했던 지종수가 간신히 정신을 붙잡았다.

‘아냐. 이건 운이야. 계속 저럴 수는 없어!’

안 맞을 공은 다섯 바퀴를 돌든, 열 바퀴를 돌든 안 맞는다.

하지만 지종수의 생각은 반만 맞았다.

그의 생각처럼 진유성이 친 공이 매번 득점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지종수보다는 많이 득점했다.

게다가 득점 빈도도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경험이 쌓이니 갈수록 수구가 움직이는 방향이 정확해지는 것이었다.

비슷한 방향으로 날아간 공은 설령 맞지 않더라도, 다섯 바퀴쯤 돌면 맞게 되어 있다.

차곡차곡 쌓이던 진유성의 점수가 40점에 도달했다.

이번에도 지종수의 패배였다.

“이, 이럴 수가…….”

지종수가 절망하는 사이, 빌리어드 클럽의 사장은 크게 놀라고 있었다.

사실 공을 저렇게 돌리는 것 자체는 엄청난 일이 아니었다.

프로 선수들도 마음먹고 공을 강하게 치면 저 정도는 돌릴 수 있었다.

그러지 않는 건, 그럴 바에는 정교하게 치는 게 더 득점 확률이 높아서였다.

저렇게 공을 쳐서는 포지셔닝(다음 공을 배치하는 기술)을 할 수가 없었다.

사장이 진짜 놀란 것은 진유성의 꾸준함이었다.

계속해서 엄청난 힘으로 공을 쳤음에도 단 한 번도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았고, 체력적으로 힘든 기색도 전혀 없었다.

스트로크 하나만 놓고 보면 전 세계 그 어떤 선수보다 뛰어났다.

그야말로 완벽한 자세였다.

‘저 친구가 정교함까지 갖춘다면…….’

그야말로 괴물의 탄생이었다.

결국, 빌리어드 클럽의 사장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학생, 혹시 프로 지망해 볼 생각 없어요?”

“프로?”

“이런 말이 어떻게 들리지 모르겠지만, 학생은 세계 당구계를 제패할 수 있어요. 진심으로.”

잔뜩 흥분한 사장의 목소리가 주저리주저리 들렸다.

그 목소리를 들으며 지종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완패였다.

* * *

해가 빨리 떨어지는 겨울이라 그런지 어느덧 하늘이 깜깜해졌다.

네 명이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노래방이었다.

노래방에 들어가자마자 마이크를 잡은 지종수가 열창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진유성을 이기겠다는 마음이 아니었다. 그저 슬픈 마음을 노래로 토로하는 것이었다.

지종수가 미친 듯이, 쉬지 않고 이별 노래를 부르는 사이 고인수가 지종수에게 물었다.

“넌 안 부르냐?”

“별로 부르고 싶지 않다.”

“왜?”

“좋아하는 노래가 없다.”

진유성이 듣기에 한국은 중원과 비교하면 모든 것이 발전해 있었지만, 노래만큼은 예외였다.

진유성이 듣기에 요즘 나오는 노래는 진짜 이상했다.

모름지기 노래란 심금을 울리는 맛이 있어야 하는데 흥만 돋우니 진유성에게 맞을 리가 없었다.

“좋아하는 노래가 없다고?”

“그래.”

“에이, 하나도 없을 리가 있나. 진짜 단 한 곡도 좋아하는 노래가 없어?”

“그렇게까지 말하면 없는 건 아니지만…….”

진유성도 좋아하는 한국 노래가 있긴 했다.

하지만 언젠가 집에서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자, 상소윤이 인상을 팍 쓰며 비난했다.

어디 가서 절대 그런 노래 부르지 말라고 신신당부도 했고.

“부르면 안 된다.”

“왜?”

“상소윤이 어디 가서 절대 부르지 말라고 했다.”

그 순간, 지종수의 노랫소리가 거짓말처럼 뚝 끊겼다.

지종수의 머릿속이 빙글빙글 돌더니 한 가지 장면을 떠올렸다.

겨울 바닷가에 나란히 앉아 있는 진유성과 상소윤.

그때 진유성이 기타를 치면서 달콤한 노래를 부르고…….

“유성아.”

“응?”

“이 노래는 너와 나만의 것으로 남겨 둘 수 있을까?”

“우리 둘만의 것으로?”

“다른 사람한테는 불러 주지 않았으면 해.”

뜨겁게 부딪치는 두 사람의 눈빛.

그 순간 진유성이…….

“안 돼!”

버럭 소리를 지른 지종수가 진유성에게 마이크를 내밀었다.

“불러!”

“음…….”

“부르라고! 제발, 불러 줘!”

지종수의 이글거리는 눈동자를 본 진유성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게까지 자신의 노래가 듣고 싶나 의아했다.

“알겠다.”

진유성이 노래방 리모컨으로 노래를 찾았다.

그가 이 노래를 좋아하는 건, 가사가 마음을 울려서였다.

태어나서 이토록 공감 가는 가사를 본 적이 없었고, 이처럼 슬픈 가사를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그런 생각까지 했다.

이 가수가 나와 비슷한 삶을 산 사람이 아닐까.

중원이 아닌 다른 세상의 절대자가 부른 노래가 아닐까.

그사이, 진유성이 부를 노래의 제목을 확인한 세 명의 표정이 묘해졌다.

‘잘못 고른 거 아니야?’

그러나 아니었다.

진유성의 열창이 시작되었다.

정말이지 슬픈 노래였다.

백 년을 넘게 살아온 진유성은 그와 같은 시대를 공유했던 이들의 죽음을 수없이 경험했다.

그들의 자식과 손자가 자신의 옆을 채웠지만, 정의 깊이가 달랐다.

이 노래는 그런 외로운 마음을 너무나 잘 대변했다.

진유성이 부르고 있는 노래는.

<한오백년>이었다.

한 많은 이 세상 야속한 님아

정을 두고 몸만 가니 눈물이 나네

아무렴 그렇지 그렇구말구

한오백년 사자는데 웬 성화요

‘같이 한 오백 년 살았으면…….’

진유성은 문득 과거의 친우들을 떠올리며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내공으로 눈물샘을 자극하자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진유성은 재빨리 셀카를 찍고는 인스타그램에 글을 올렸다.

[ㄱI억 ㄴr니…… 우리의 추억…… ]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심도훈과 고인수는 쩍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고…….

지종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상소윤의 노래 취향을 알았으니, 공략할 자신이 있었다.

그렇게 피어나는 오해 속에서 홍대에서의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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