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44화>
* * *
대정고의 수업은 오전 9시에 시작해 오후 4시 30분에 끝났다.
점심시간 1시간 30분을 제외하면 총 6교시 수업을 듣는 셈.
그나마 그중 2개는 학생이 원해서 수강 신청을 한 개인 적성 수업 시간이었다.
일반적인 인문계 고등학생들과 비교하면 굉장히 적은 수업량이었고, 차라리 대학교 학부생의 시간표와 비슷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정고의 학생들이 ‘우리는 공부를 정말 조금하는 편이야’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남들보다 짧다고 해도 하기 싫은 건 하기 싫은 거다.
“끝났다!”
“으어.”
선생님이 나가자 마지막 수업이 끝나길 간절히 기다리던 학생들이 자리에서 후다닥 일어났다.
그사이에서 느긋하게 짐을 챙기고 있는 진유성에게 상소윤이 다가왔다.
“집으로 바로 가냐?”
“아니.”
“뭐하게?”
“놀 거다.”
“누구랑?”
“지존수랑.”
상소윤이 피식 웃었다.
그녀는 진유성이 매일매일 무협소설을 본다는 걸 알고 있었다.
바로 어제만 해도 상소윤과 유혜연이 쇼핑을 가자고 하자, 진유성은 혈랑과 함께 바다에 꼭 가야 한다며 고개를 저었다.
“혈랑이 누군데 같이 바다에 가?”
“이 친구다. 바다에서 최후의 일전을 준비하고 있다.”
진유성이 가리킨 것은 책상에 놓여 있던 무협 소설 표지 속 주인공이었다.
사실 진유성은 그저 쇼핑을 가기 싫어서 아무렇게나 둘러댄 것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상소윤은 진유성이 하는 짓이 퍽 귀엽다고 생각했다.
꼭 백설공주와 함께 일곱 난장이를 만나러 가야 하다고 말하는 어린애 같지 않은가?
“오늘은 지존수랑이냐? 뭔 놈의 이름들이 그렇게 몰개성해?”
“몰개성하다고?”
“어. 완전 구린데.”
그 순간, 상소윤이 흠칫 놀랐다.
언제부터 진유성의 뒤편에 서 있었는지 모를 귀신의 모습 때문이었다.
귀신은, 금방이라도 망령으로 최종 진화할 것처럼 넋을 잃은 지종수였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지종수에게 물었지만 대답은 진유성에게서 나왔다.
“어떻게 친구한테 그렇게 심한 말을 할 수가 있나.”
의아한 표정을 짓던 상소윤이 뒤늦게 사건의 전모를 깨달았다.
‘지존수랑’이 아니라 ‘지종수랑’이었다.
상소윤이 당황했다.
“아니, 종수야. 내가 네 이름이 별로라고 한 게 아니라, 진유성 이 자식이 매일매일 무협소설을 보거든?”
“매일매일…….”
“그래서 막 이상한 이름들을 드립에 쓴단 말이지? 시도 때도 없이.”
“시도 때도 없이…….”
“방금도 얘가 지존수라고 발음해서 내가 헷갈린 거야. 무슨 말인지 알지?”
진유성이 끼어들었다.
“난 그런 적 없다.”
사실은 지존수로 알고 있었지만, 상소윤이 부르는 걸 보니 이름이 지종수였나보다.
부모님이 지어 주신 소중한 이름을 잘못 발음하는 건 실례되는 일이다.
그러니 시치미를 떼야 한다.
“분명히 지종수라고 말했다.”
진유성의 뻔뻔한 반응에 상소윤이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와! 우와! 연기도 더럽게 못하는 게 연기하는 거 봐라?”
“연기 아니다.”
“웃기시네. 너, 지금 내 방에 아이스크림 훔쳐 먹고 아닌 척할 때랑 똑같거든?”
상소윤이 억울함을 표출하며 지종수를 힐끔 쳐다보았다.
상소윤이 이토록 억울해 하는 건, 지종수가 자신을 오랫동안 짝사랑해 왔다는 걸 알고 있는 탓이었다.
몇 번이나 거절해도, 지종수는 어색하게 웃으며 ‘부담 가질 필요 없어.’라고 말했다.
당연히 상소윤의 입장에서는 괜히 미안한 상대일 수밖에 없었다.
근데 진유성 때문에 이름을 욕한 셈이 됐다.
상소윤이 진유성의 목덜미를 잡고 마구 흔들었다.
“네가 그랬잖아!”
“난 그런 적 없다.”
“빨리 인정하라고!”
하지만 지종수가 진짜로 상처를 받은 건 이름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듣기에도 진유성은 지존수라고 발음했으니까.
문제는 상소윤의 말 속에 숨어 있는 내용들 때문이다.
‘매일매일, 시도 때도 없이, 내 방의 아이스크림. 매일매일, 시도 때도 없이, 내 방의 아이스크림. 매일매일, 시도 때도 없이, 내 방의 아이스크림…….’
결국 지종수는 망령으로 최종 진화했다.
* * *
“어어…….”
망령화된 채 터벅터벅 걷고 있는 지종수를 본 친구들이 수군거렸다.
“좀비냐, 저거?”
“좀비보단 가오나시 같다. 등치도 큰 놈이 저러고 있으니.”
“가오나시는 귀엽기라도 하지.”
“왜 인마, 종수도 귀여워.”
지종수의 두 친구, 심도훈과 고인수는 대화를 나누며 그들의 옆에서 걷고 있는 진유성을 힐끔거렸다.
‘뭔가 좀 뻘줌한데.’
본래 진유성에게 놀자고 한 것은 지종수였으나, 종수는 대화를 할 정신이 아니었다.
결국 심도훈이 입을 열었다.
“야, 유성아.”
“왜 그러느냐.”
진유성의 말투는 처음엔 이상했지만, 요즘은 아무렇지도 않다.
따라 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진유성과 친분을 가진 여자애들 중에는 재밌다고 진유성의 말투를 따라 하다가 입에 아예 붙어 버리기도 했다.
“부모님이 무슨 일을 하시냐?”
“우리 부모님? 예전에 돌아가셨다.”
“어……?”
별생각 없이 물었던 심도훈이 당황했다.
“그, 그렇구나.”
“신경 쓰지 마라. 오래전에 돌아가셔서 아무렇지도 않다.”
진유성은 그렇게 대답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드라마가 늘 현실을 반영하는 건 아니군.’
그가 본 드라마에서 재벌들의 학교는 종종 등장했다.
그리고 늘 돈이 없는 주인공들은 무시를 당했다.
하지만 대정고에서는 딱히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그러나 이것은 진유성이 살짝 착각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대정고는 예체능 특례 입학생 이외에는 모두 일반 학생이었다.
즉, 일 년에 몇천만 원의 학비를 감당할 수 있는 재력을 가지고 있어야만 입학할 수 있다는 소리였다.
돈이 없는 이는 아무도 없다.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진유성의 말을 들은 심도훈의 생각도 그러했고.
‘유산을 관리해 줄 재단만 남은 거구나…….’
진유성의 충격 고백(?)에 망령화되었던 지종수도 사람으로 돌아왔다.
때마침 그들이 부른 콜택시가 대정고 입구에 도착했고, 네 사람은 택시를 타고 홍대로 향했다.
* * *
지종수는 진유성에게 홍대에 간다는 약속을 받아 내고는, 하루 종일 고민했다.
그는 진유성에게 패배했다.
가장 자신하던 축구에서도, 남자로서의 매력 어필에서도.
하지만 진유성을 이길 수 있는 무언가가 하나쯤은 있을 거다.
‘오늘은 너에게 패배를 선사하겠다.’
지종수가 첫 번째로 선택한 것은 바로 펀칭 머신이었다.
홍대입구에 있는 오락실의 펀칭 머신은 운동 좀 한다는 이들 사이에서 제법 유명한 명물이었다.
950점을 넘으면 쓸 만한 상품을 주는데, 어지간한 펀치력으로는 900점을 넘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지종수는 이곳에서 950점을 넘겨 본 적이 있었다.
“후후.”
진유성의 뛰어난 스피드와 신체 밸런스는 인정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토록 아름다운 축구를 할 수 있는 것이리라.
하지만 펀칭 머신은 다르다.
결국, 높은 점수를 결정짓는 건 근육의 폭발적인 파괴력!
호리호리한 진유성 따위가 갖지 못한 짙은 남자의 냄새, 그것이 자신에게는 있었다.
‘반드시 상품을 따내겠다. 그리고 소윤이에게 선물하겠어.’
상소윤에게 선물을 건네면서 진유성보다 강한 남자라는 걸 어필하는 것.
이것이 그가 그린 큰 그림이었…….
콰-앙!
그 순간, 엄청난 소리가 지종수의 고막을 두들겼다.
“오!”
“뭐야?!”
호들갑을 떠는 심도훈과 고인수의 목소리도 들린다.
흠칫 놀란 지종수가 뒤를 돌아보니 펀칭 머신의 점수가 마구 올라가더니, 979점을 찍었다.
지종수가 기록한 최고 점수 951점보다 훨씬 높은 점수였다.
“와, 개쩌네.”
“난 800도 간신히 넘겼는데.”
“아저씨 불러옴. 기달.”
잠시 뒤, 오락실 주인이 선택할 수 있는 상품의 종류가 적힌 판넬을 가지고 나오다가 흠칫 놀랐다.
펀칭 머신 앞에 서 있는 학생의 얼굴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내 조카가 사고를 좀 쳤다고요?”
오락실 주인은 두 달 전쯤의 일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펀칭 머신을 고장 낸 학생이 준 연락처에 연락을 했더니, 조폭들이 찾아왔다.
정말 흉악하고 끔찍하게 생긴 조폭이었다.
“언론이나 어디 외부에 이 소식이 들어가면 사장님 몸이 우리 가게 상품이 되는 겁니다. 아셨죠?”
조폭들은 그렇게 말하고는 수리비를 변상하고는 사라졌다.
수리비를 받은 건 다행이지만,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았던 끔찍한 기억이었다.
특히나 담이 작고 소심한 오락실 주인으로서는 더욱더.
그 순간, 펀칭 머신 앞에 서 있던 진유성이 입을 열었다.
“상품은 뭐가 있죠?”
상품이란 단어에 오락실 주인이 흠칫했다.
입조심 안 하면 사장님 몸이 우리 가게 상품이 된다던 조폭의 목소리가 오버랩됐다.
‘왜 찾아온 거지? 난 정말 아무 곳에도 말하지 않았는데!’
오락실 주인이 조심스러운 태도로 진유성에게 말했다.
“저…… 도련님.”
“도련님?”
“아, 제가 호칭을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서…….”
진유성은 그제야 자신이 눈앞의 오락실 주인을 만난 적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 상림이 왈패인 척해서 입단속을 시켰다고 했지.’
생각해 보면 그 당시에는 자신이 세상에 대해 너무 무지했다.
내공만 쓰지 않으면 될 거라고 생각하고 의념을 제어하지 않아서 펀칭 머신을 고장 냈으니 말이었다.
그에 반해 오늘은 내공과 의념을 제어하고 순수한 육체의 힘만 이용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진유성이 물었다.
“그래서 상품이 뭡니까.”
“어, 여기 있습니다.”
판넬을 받은 진유성이 인상을 찌푸렸다.
딱히 갖고 싶은 게 없다.
“다른 상품은 없나요.”
“다, 다른 상품이요?”
상품이란 단어에 흠칫 놀란 오락실 주인은 자신의 가방에 들어 있는 게 떠올랐다.
아들을 주려고 산 것이지만, 그거라도 내줘야 할 것 같았다.
정말로 다른 상품에 관심을 갖기 전에.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지종수와 진유성을 비롯한 넷은 오락실을 빠져나왔다.
진유성의 손에 들린 건 제법 비싼 최신 버전의 무선 이어폰이었다.
참고로 오늘 지종수가 기록한 점수는 898점이었다.
* * *
지종수의 본래 계획은 오늘 하루 동안 진유성에게 최대한 많은 패배를 맛보여 주는 것이었다.
펀칭 머신에서는 패배했지만, 아직도 많은 계획들이 남아 있었다.
다음은 방탈출 카페였다.
‘진유성. 너의 스피드, 밸런스, 파괴력은 인정한다. 하지만 날카로운 통찰력은 내가 우위에 있을 것이다.’
그들은 진유성-고인수, 지종수-심도훈으로 팀을 나눠서 누가 더 빨리 패닉룸을 탈출하는지 겨뤘다.
대결의 승자는 진유성의 팀이었다.
그것도 아주 가뿐했다.
주어진 60분의 탈출 시간이 무색하게 진유성과 고인수는 20분 만에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밖으로 나왔다.
“와, 씨! 진유성 개똑똑하던데? 이걸 어떻게 맞췄지?”
“너무 쉽구나.”
고인수의 감탄에 진유성이 어깨를 으쓱했다.
한데, 방탈출 카페의 사장도 진유성을 아는 듯했다.
“어, 그, 음…… 재밌게 놀았니?”
오락실 사장처럼 굽실거리진 않았지만, 진유성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심지어 돈도 받지 않았다.
‘뭐지?’
다음으로 네 사람이 향한 곳은 실내 사격장이었다.
‘진유성. 너의 스피드, 밸런스, 파괴력, 통찰력은 인정한다. 하지만 집중력은 내가 우위에 있을 것이다!’
사격이란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는 행위.
진유성처럼 산만한 놈은 결코 날 이길 수 없다! 라고 생각한 게 불과 몇 분 전이었지만.
딱! 딱! 딱!
숨도 쉬지 않고 사격총의 방아쇠를 당기며 모든 표적물을 맞춰 내는 진유성의 스나이핑에 할 말을 잃었다.
진유성은 만점을 기록했다.
최단 시간, 최고 점수였다.
선물을 주기 위해 다가오던 사장이 진유성의 얼굴을 보며 흠칫 놀랐다.
‘또?’
실내 사격장의 사장은 진유성에게 쭈뼛쭈뼛 다가와서 이런저런 선물을 안겨 주었다.
태도는 당당했지만, 애당초 줘야 하는 선물보다 훨씬 많이 주고 있었다.
또한 이번에도 돈을 받지 않았고.
“아……!”
“그거였나?”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지종수, 심도훈, 고인수는 뒤늦게 상황을 이해했다.
그들도 저런 태도를 보이는 가게의 사장들과 만난 적이 있었다.
가급적 잘 대해 주려 하고, 이용료를 받지 않으며, 뭐라도 하나 챙겨 주려는 모습.
아버지의 건물에 들어온 세입자 사장님들의 모습이 딱 이러했다.
지종수, 심도훈, 고인수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이용한 곳은 지종수가 선택한 가게들이었다.
진유성이 가자고 해서 들어온 게 아니란 말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설마, 홍대의 대부분이 이놈의 것인가?’
사실이라면 그야말로 엄청난 재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