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43화>
“어우, 맛있겠다.”
“후추 볶음밥은 당신 거예요. 바보도 아니고 누가 고춧가루 대신 후추를 뿌려?”
“당신이 하면 뭔들 맛없겠어? 이야, 벌써 군침 도네.”
식탁에 앉은 상림이 넉살을 떨자 유혜연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사이, 채널 주도권에 대한 결론을 내지 못한 상소윤과 진유성이 서로를 노려보며 식탁에 앉았다.
그렇게 일요일 점심 식사가 시작되었다.
밥을 먹으면서 나누는 이야기의 주제는 다양했다.
상림의 회사 이야기, 유혜연의 친구 딸 이야기, 상소윤과 진유성의 학교 이야기 등등.
한참 이야기를 나누던 중, 문득 상소윤이 진유성을 타박했다.
“넌 대체 학교에서 왜 그러냐?”
“갑자기 무슨 말이냐.”
“왜 맨날 이상한 개그를 치냐고.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말 몰라?”
유혜연이 끼어들었다.
“소윤아, 그럼 다음 시험 볼 때는 가만히라도 있어 봐.”
“응? 무슨 말이야?”
“성적이 중간이라도 가면 좋을 것 같아서 그래. 꼴등이 뭐니, 꼴등이.”
“…….”
예상치 못한 엄마의 기습 공격을 받은 상소윤이 입을 다물자, 진유성이 풋하고 웃었다.
상소윤의 얼굴이 붉어졌다.
“뭐, 뭘 웃어!”
“모름지기 외모는 십 년을 가고, 배움은 백 년을 간다고 했다. 열심히 배워라.”
“웃기고 있네. 네가 내 밑이거든?”
상소윤은 이번 기말고사에는 꼴등을 면할 자신이 있었다.
진유성이 자신의 아래로 내려올 게 분명하니까!
진유성은 머리가 나쁘진 않았지만, 상식이 너무나 부족했다.
게다가 가지고 있는 상식조차 드라마나 영화에서 기인한 것이라 핀트가 어긋나 있는 경우가 많았고.
“아무튼 학교에서 쓸데없는 말장난 좀 하지 마. 드라마 대사도 따라 하지 말고. 아무도 안 웃거든?”
“여자애들이 웃어 준다.”
“그건 어이없어서 웃는 거고!”
“박장대소하던데?”
“예의상이야, 예의상. 어휴, 이 험난한 세상 어떻게 살아가려고 진심과 예의도 구분 못하냐?”
“세상이 험난해서 우리 딸은 꼴등인가?”
“아, 쫌! 엄마!”
가만히 밥을 먹으며 고래들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던 새우 상림이 생각에 잠겼다.
진유성은 원래부터 유쾌한 사람이었다.
지옥 같은 생존대 생활 중에서도 어떻게든 장난을 치고 농담을 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건 중원을 일통한 천마신교의 교주가 돼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문제는 진유성의 농담을 받아 줄 만한 이가 신주청과 상림뿐이라는 것이었다.
신주청과 상림은 진유성을 상관으로 모셨지만, 엄청나게 어려워하진 않았다.
그냥 갈구면 갈굼당하는 정도?
애당초 엄청나게 어려워하는 것도 이상했다.
멸마대에서 십 년 가까이 동고동락했고, 생존대에서 수십 번의 사선을 함께 넘어온 이들의 유대감은 가족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아니었다.
특히 진유성의 무공에 반해 따르기 시작한 마교의 잔당들과 추종자들은 더더욱.
그들은 진유성을 존경했고, 어려워했다.
어느 날, 진유성이 그들에게 뼈 있는 농담을 한 적이 있었다.
재능 있는 제자를 질투해 무공을 가르쳐 주지 않고 있던 마교 출신의 무사에게 ‘이 자식, 고추 떼 버려.’라고 말한 것이었다.
물론 완전한 농담은 아니고, 그 속에는 약간의 비난조도 포함되어 있긴 했다.
문제는, 다음 날 천마신교의 장로들이 진짜로 그 무사의 물건(?)을 잘라 버리려고 했다는 것이다.
진유성이 우연히 알아차리지 않았으면 무사는 고자가 됐을지도 몰랐다.
가장 기억에 남은 게 그때일 뿐이지, 천마신교에서는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그러다 보니 진유성은 점점 상림과 신주청을 제외하면 농담을 하지 않게 되었다.
‘내가 떠나고, 주청이 형님이 죽고 난 이후에는 더 심했을 테지.’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모두가 진유성의 농담을 실없는 농담으로 받아들였다.
진유성에게는 이 상황이 그야말로 천국이었다.
그래서 지금껏 채우지 못한 드립에 대한 욕망을 채우고 있다는 게, 상림이 내린 결론이었다.
상림이 그런 생각을 하며 진유성을 힐끔 쳐다보았다.
갑자기 인상을 쓰는 모습을 보아하니, 또 쓸데없는 드립을 떠올리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상림의 추측은 완전히 틀린 것이었다.
밥을 먹던 진유성이 인상을 쓴 것은 갑자기 묘한 위화감을 느껴서였다.
‘뭐지?’
진유성이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무공이 일정 수준 이상에 오른 고수들은 모든 감각이 예민해졌다.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미각.
오감의 영역이 확장되며 평범한 인간들은 결코 느낄 수 없는 정보들을 알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마냥 좋은 일이 아니다.
잠을 자려고 하는데 벌레가 기는 소리가 들리고, 침낭이 지나치게 거칠게 느껴지고, 모포에서 악취를 맡는다면?
잠을 잘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무공의 고수들은 필연적으로 정보를 흘리는 공부를 하게 된다.
이것은 잊어버리는 게 아니라, 필요하지 않은 정보를 거르는 방법을 뜻했다.
하지만…….
여기에 살수들의 위험이 도사렸다.
무공의 고수들이 흘려보내는 정보들은, 생존 본능과 위험 의식을 자극하지 않는 쓸데없는 것들이었다.
뛰어난 살수들은 그 쓸데없는 정보 사이에 자신의 기척을 감췄다.
바람이 부는 소리에 기척을 감추고, 벌레가 기는 소리에 맞춰 조금씩 움직였다.
주변에서 나는 냄새에 체취를 묻고, 사물의 색감 속에 신체의 선을 동화시킨다.
그러면 암기가 심장을 관통할 때까지 고수의 위기 의식과 생존 본능은 고요히 잠들어 있다.
이것이 무공의 고수를 죽이는 살법(殺法)이었다.
그리고 이 분야의 최고봉은 진유성이 죽인 천라멸문의 문주였고.
진유성이 천라멸문의 문주를 떠올린 것은, 문득 그때와 같은 위화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평온한 주말 오후를 보내는 상림의 집 안에, 누군가 있었다.
진유성이 흘려버린 쓸데없는 정보들 사이에서 무언가가 몸을 감추고 있었다.
‘어디지? 어디 있는 거냐.’
문득 진유성은 자신이 초조함을 느끼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 이 순간.
일상의 평온을 깨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이었다.
상림, 유혜연, 상소윤과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하는 시간이 행복하기 때문이었다.
진유성의 내공이 혈도를 일주천하자 잠들어 있는 오감이 깨어났다.
2층 화장실의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천둥처럼 들리고, 창밖을 스치는 겨울바람이 폭풍의 소리처럼 고막을 때렸다.
그 순간.
-두근.
누군가의 심장 박동도 함께 들려왔다.
귀식대법을 펼친 듯 작디작은 소리지만, 분명 들렸다.
‘동쪽.’
방향은 분명히 잡혔다.
심장이 박동하는 소리는 동쪽에서 들려왔다.
하지만 아직도 기척을 느낄 수가 없었다.
상대는 굉장한 고수였다.
-두근.
그때 다시 소리가 들렸다.
-두근, 두근, 두근.
의식을 집중하니 계속해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진유성이 묘한 표정으로 동쪽을 쳐다보았다.
거기엔 유혜연이 뭐가 그리 웃긴지 웃음을 터트리며 상소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두근, 두근.
작디작은 그 소리는…….
유혜연의 배에서 울리고 있었다.
진유성이 상림에게 전음을 보냈다.
[상림아.]
[네?]
[아무래도 아기가 생긴 것 같다.]
[아기? 무슨 아기요?]
진유성이 무슨 드립을 칠지 경계하던 상림은 이어진 말에 깜짝 놀랐다.
[유혜연의 배에서 태아의 심장 박동이 들리기 시작했다.]
* * *
상림은 일요일에 문을 연 산부인과를 찾아내 유혜연과 함께 병원을 다녀왔다.
진유성의 말은 정확했다.
유혜연의 뱃속에는 상소윤의 동생이 자리 잡고 있었다.
진유성이 입학하기 전에 함께 갔던 속초의 펜션.
거기서 생긴 펜션문 베이비였다.
* * *
“동생이라니…….”
한바탕 소동이 지나가고, 진유성의 침대에 걸터앉은 상소윤이 중얼거렸다.
상소윤을 힐끔 본 진유성이 물었다.
“싫은 거냐?”
“응? 아니? 싫을 게 뭐가 있어.”
“복잡한 표정이라서.”
“그냥 좀 놀란 거야.”
“걱정하지 마라. 넌 좋은 형이 될 거니까.”
“뒤질래? 무슨 형이야.”
“아직 태아의 성별을 모르잖아.”
“내 성별은 알잖아!”
한동안 투닥거리던 상소윤이 진유성을 힐끔 쳐다보더니 물었다.
“근데 너 실연의 상처는 다 나았냐?”
“괜찮다.”
“진짜?”
“어.”
진유성은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는 매순간 행동에 최선을 다했지만, 지나간 일에는 미련을 두지 않는 성격이었으니까.
그때 상소윤이 침대에서 일어나더니 팔을 양쪽으로 펼치고는 물었다.
“야, 나 좀 변한 거 없냐?”
“음…… 좀 덜 박색해졌구나.”
“뭐? 진짜?”
“그래.”
“왜?”
“동생이 생긴 날이라서 가산점을 줘보았다.”
진유성을 쳐다보던 상소윤의 눈이 사납게 가늘어졌다.
진유성은 그 모습을 보며, 인터넷 소설에서 자주 나오던 작대기 두 개를 붙여 놓은 이모티콘과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 * *
돌아온 월요일.
상소윤과 함께 등교한 진유성은 조회 시간에 담임 선생에게 하나의 공지를 들었다.
“다들 기말고사가 2주 앞으로 다가온 거 알죠?”
돈이 많건 적건 시험이란 반갑지 못한 손님인 듯, 학생들 사이에서 앓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엔 특별히 이사장님의 지시로 여러분의 성적이 부모님의 핸드폰으로 직접 전송될 거예요.”
앓는 목소리가 더 커졌다.
특히 지금까지 아버지의 비서와 작당해 성적을 위조해 오던 몇몇 학생들은 나라를 잃은 표정을 짓기도 했다.
잠시 뒤, 조회가 끝나고 담임선생이 교실을 나섰다.
‘흠.’
진유성은 공부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관심을 갖는 과목이 한 가지 있긴 했다.
바로 자연 과학이었다.
진유성은 중원을 지배하는 지배자로서 어쩔 수 없이 행하는 책무들이 몇 가지 있었다.
그 안에는 비가 오지 않으면 백성들을 대신해서 기우제를 지내고, 지진이 오면 하늘을 달래기 위해 제사를 지내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한국에 와서 여러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전부 쓸모없는 짓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어차피 전부 자연 현상이 만들어 낸 산물이니까.
호기심이 있다 보니 과학 시간에는 제법 집중을 하기도 했다.
‘뭐, 대충 보면 되겠지.’
진유성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를 노려보는 하나의 시선이 있었다.
바로 친구들과 뒷자리에 모여 있는 지종수였다.
지종수가 진유성을 노려보건 말건, 그의 친구들은 신나게 오늘의 계획을 짜고 있었다.
“공부는 내일부터 우리 집에 모여서 같이하자.”
“그럼 오늘은?”
“노는 거지.”
“PC방이나 갈까?”
“PC방 지겨운데 홍대 어때?”
“오키, 콜.”
자기들끼리 결론을 내린 친구들이 지종수에게 시선을 줬다.
“종수, 너도 콜?”
“아무래도 의심스러워.”
“뭐가?”
“어떻게 하루도 안 빠지고 소윤이와 같이 등교하는 거지?”
“아, 이 새끼…… 또 병 도졌네.”
“지종수 버리고 가자.”
“진유성이랑 놀라고 해.”
그 순간, 지종수가 허벅지를 짝하고 내리쳤다.
“그래! 진유성이랑 홍대에 같이 가자.”
“갑자기?”
“놀다 보면 마음이 풀어질 거란 말이지. 그때 소윤이와 무슨 관계인지 파헤치는 거야.”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지종수의 친구 중 한 명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종수야,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려고 그렇게 바보 같냐.”
“바보 아니거든.”
“바보 애니고둔?”
“따라 하지 마.”
“때래 해지 마아.”
“아 씨.”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지종수가 진유성에게 향했다.
그러곤 몇 마디를 나누다가 자리로 돌아왔다.
친구들이 궁금한 듯이 물었다.
“뭐라고 했냐?”
“오늘 홍대에 가자고.”
“진유성은 뭐래?”
“알겠대. 바보 같은 자식, 내 계획도 모르고.”
그렇게 말하는 지종수의 표정은 왠지 밝아 보였다.
친구들은 지종수의 얼굴을 보며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이 자식…… 어쩌면 그냥 진유성이랑 놀고 싶었던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