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42화 (42/337)

<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42화>

Quest 9. 오해받는 천마님

UN 산하 기관인 SG는 <평화유지군>으로 분류된다.

게이트의 위험 앞에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군대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세상 모든 것에는 가격표가 붙어 있다.

평화 역시 마찬가지.

그렇다면 게이트 사태 이후 평화의 가격을 적어 놓은 명세서에는 무엇이 쓰여 있을까?

수많은 것들이 있겠지만, 그중 맨 위에 ‘진실’이라는 두 글자가 적혀 있으리라.

공식 명칭 <서울역 2차 비징후 S급 게이트>에 대한 정보가 대중에게 제대로 공개되지 않은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만약 서울역 S급 게이트가 클리어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천만 명의 목숨이 사라졌으리라.

클리어 진척률에 따라 달랐겠지만, S급 게이트의 폭발 반경은 서울의 면적을 가뿐히 넘어서기 때문이었다.

즉, 천만 명의 사람들이 본인들도 모르는 사이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뜻이고, 이 사실이 공개되면 어떤 후폭풍이 있을지는 뻔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불행이라고 해야 할지.

서울역 S급 게이트는 외부에서 게이트 등급이 감지되지 않는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해서 SG 한국본부는 서울역 게이트를 E등급 보스 레이드 게이트로 발표했다.

각성자 전원이 기절한 이유는 게이트 보스가 죽으면서 내뿜은 수면 성분의 공격 탓으로 발표되었다.

대중들은 E등급 보스의 공격에 모든 각성자들-심지어 S급도-이 잠든 것에 의문을 품었지만.

뒤이어 톱아이돌과 톱배우의 열애설이 터지고 의문은 차츰 잊혔다.

그렇게 대한민국은 진실을 지불하고 평화를 구매했다.

반대로 말하자면, 진실을 알고 있는 이들은 평화롭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 * *

SG 서울지부의 한지후 소장은 손에 들린 보고서의 목차를 한동안 노려보았다.

서울역 S급 게이트 사태가 벌어진 지 어느덧 보름이 지났건만, SG는 아직도 사태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한지후 소장의 손에 들린 보고서가 어떻게든 일련 사건을 이해해 보려는 최선의 노력이었다.

사락.

목차를 넘기자 서울역 S급 게이트의 사건이 시간 순서로 나열되어 있었다.

-UN SG 본부장 내한

: 본부장이 독단적으로 갑작스러운 동아시아 방문 일정을 잡았음.

그간 동아시아 방문 일정의 시작은 중국이었으나, 이번엔 별다른 이유 없이 한국에서 시작.

-서울역 사열식 결정

: 사열식을 주도한 것은 SG 내 친 한국 계파.

하지만 누가, 왜, 서울역으로 장소를 결정했는지는 알 수 없음.

자연스럽게 결정됨.

-사열식 진행

: 이 단계의 특이 사항 없음.

-게이트 발생

: GEL 수치가 전혀 감지되지 않았고, 바람과 소음이 발생하는 현실 간섭 현상 진행.

각성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농밀한 기운이 모여들었다고 함. S급 각성자 문수혁과 차정명이 가장 먼저 기운을 감지.

-게이트 참여 인원 선별

: 정확히 각성자를 노려 선별했다는 증언 다수.

-S급 각성자 차정명 피격

: 선별 인원이 게이트로 진입하는 순간, 습격.

정체불명의 습격자는 마도보검을 탈취 후 차정명을 기절시키고, 자취를 감춤.

차정명도 반항할 수 없는 실력자였다고 함.

(이하 게이트 내부)

-관리자 등장

: 이 단계의 특이 사항은 없으나, S등급라는 사실에 놀라 게이트 참여 인원을 정확히 확인하지 못했다는 증언이 있음.

-보스의 신전으로 이동

: 이 단계의 특이 사항 없음.

-보스와 접촉

: 신전 바닥에 보스로 짐작되는 몬스터 사체 발견.

아이언맨 가면을 쓰고 커다란 붉은색 천을 두른 인간형 몬스터와 조우.

S급 각성자 문수혁, 제주도 AA급 보스 도플갱어와 같은 환술 계통으로 판단, 각성자 전원 공격.

이지스의 방패 파손.

각성자 전원 기절.

증언에 따르면 인간형 몬스터가 유명인의 유행어를 사용했다고 함.

-게이트 소멸

: 클리어 메시지를 본 각성자가 없음.

-별첨 서류

[UN SG 본부장 행적]

[SG 한국 본부 의사록]

[제주 AA급 게이트 서류]

[서울역 S급 게이트 전투 과정 복원 보고서]

[인간형 몬스터가 사용한 유행어 관련 조사]

.

.

[S급 각성자 문수혁, 차정명 인터뷰]

수도 없이 읽은 보고서를 다시 한번 꼼꼼히 살핀 한지후 소장이 생각에 잠겼다.

‘각성자들은 참여 인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즉, 게이트 안에 미지의 인물이 들어갔을 수도 있다.’

어쩌면 그 수가 한 명이 아니라 많을 수도 있고.

‘반 SG 체제의 각성자들이 게이트를 클리어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럼 대부분의 상황이 설명된다.

우선, 보스는 SG를 전복시키려는 각성자들이 명분을 쌓기 위해 클리어한 것이다.

SG가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는 비징후 게이트를 안전하게 클리어했다는 건 엄청난 명분이다.

아이언맨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이상한 말투를 쓴 건 정체를 숨기기 위해서이리라.

하지만…….

‘이지스의 방패를 왜 부쉈을까?’

이게 이해가 안 갔다.

문수혁이 친SG 계파 인물이라서? 나중에 걸림돌이 될까 봐?

그렇다면 차라리 죽였어야 했다.

죽일 기회는 충분히 있었다.

반대로 후일 문수혁을 포섭할 생각이라면 이지스의 방패를 부수지 말았어야 했다.

굳이 포섭할 인물의 아이템을 부숴 무력을 낮출 이유가 없지 않은가.

이것은 차정명의 마도보검 역시 동일하게 적용되는 이야기…….

“……!”

그 순간, 소름 끼치는 가정을 떠올린 한지후 소장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집단이 한국 내 두 계파의 갈등을 조장하려 했다면?

“이, 이럴 수가!”

모든 아귀가 맞아떨어졌다.

이지스의 방패를 가지고 있는 문수혁은 AAA급 각성자 2명이 덤벼도 이길 수 없었다.

문수혁도 그들을 이길 순 없겠지만, 적어도 안전하게 도망칠 수는 있다.

마도보검을 가진 차정명 역시 마찬가지.

한데, 친SG 계파와 친한국 계파는 AAA급 각성자를 두 명씩만 보유하고 있었다.

이는 말은 곧, 그동안 이어져 온 두 계파의 싸움이 병졸들의 무력과 무관하게, 오직 우두머리의 싸움으로 결정된다는 이야기였다.

이런 상황에서는 한쪽이 한쪽을 흡수해도 온전한 전력을 흡수할 수 있었다.

병졸들이 피를 흘릴 일이 없으니까.

하지만 마도보검과 이지스의 방패가 없어진 현재는 어떨까?

AAA급 각성자 둘이 힘을 합치면 문수혁과 차정명은 패배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AAA급 각성자를 견제하기 위해 AA급이 필요하고, 그들을 견제하기 위해 A급이 필요할 것이다.

끝없이 내려가다 보면 결국 F급 각성자의 손까지 보태는 전면전이 벌어지고 만다.

“……젠장.”

한지후 소장은 자신의 추측이 정확함을 확신했다.

그림이 너무 명확했다.

정체불명의 집단이 두 계파의 싸움을 붙이고 한국 SG 전체의 약화를 노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복잡한 길을 택했다.’

S급 각성자를 습격해 SS급 아이템을 강탈할 정도의 전력이라면 이렇게 복잡하게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그렇다면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정체불명의 집단이 소수정예일 경우.

어쩌면 무력을 담당하는 인원은 두 명밖에 없을지도 몰랐다.

게이트에 숨어들어 보스를 클리어한 각성자와 차정명을 습격해 마도보검을 빼앗은 각성자.

소수의 절대적인 무력은 목표를 파괴할 수 있을지언정 지배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구름 위에서 노닐던 문수혁과 차정명을 땅으로 끌어내려 SG 전체의 약화를 노린 것이리라.

‘무섭도록 치밀한 계획이다.’

생각을 정리한 한지후 소장이 임현상 부소장을 찾았다.

그러곤 자신의 추측을 말해 주었다.

그는 확신했지만, 남이 보기엔 논리적 오류가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임현상 부소장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춘추전국 시대에 하늘이 내린 지혜는 손자병법의 손무였고, 삼국 시대에 하늘이 내린 지혜는 촉한재상 제갈공명이었습니다.”

“갑자기 그 둘은 왜?”

“게이트 시대에 하늘이 내린 지혜가 있다면…… 그건 분명 한지후 소장님일 겁니다.”

“참나, 이 사람이 혀에 기름을 발랐나. 민망하게 왜 이래?”

“기름칠이 된 건 소장님의 영민한 두뇌입니다.”

“자네 덕분에 내가 옳은 길로 가고 있다는 확신이 드는군.”

코 밑을 쓱 문지른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짙은 존경과 신뢰가 담긴 눈빛을 보냈다.

실제로는 망상 폭주였지만.

* * *

진유성이 상림의 집에 온 지도 벌써 몇 달이란 시간이 지났다.

상림은 인정하기 싫었지만, 진유성이 오고 난 이후, 집 안의 분위기가 더 좋아졌다고 느꼈다.

전보다 시끌벅적했고, 활기차기도 했다.

진유성과 상소윤은 시도 때도 없이 싸웠지만, 요즘엔 그러려니 했다.

어차피 둘 다 뒤끝도 없고, 싸웠다는 사실조차 금방 잊어버렸으니까.

무엇보다 고무적인 건 진유성 덕분에 약간의 탈모와 약간의 자신감 하락에서 벗어났다는 점이었다.

정말 아주 약간이었다.

진유성이 종종 쓰는 그 끔찍한 단어, 대머리나 고자 수준은 절대 아니었다!

아무튼 진유성의 진짜 정체가 상림의 상관이자 천마신교의 교주라는 것과 무관하게.

상림, 유혜연, 상소윤, 진유성은 4인 가족의 형태에 익숙해져 갔다.

* * *

진유성은 간만에 옛날 꿈을 꿨다.

생존대를 꾸려 도망 다닐 당시의 꿈이었는데, 개중 가장 기억하기 싫은 사건이 꿈으로 나왔다.

‘천라멸문…….’

천라멸문(天羅滅門)은 중원에서 가장 거대한 살수 단체이자, 이름 그대로 하늘의 그물조차 멸문시킬 힘이 있다는 광오한 집단이었다.

정도맹주는 이를 악물고 도망치는 생존대를 죽이기 위해 천라멸문을 고용했다.

그들의 손에 생존대의 절반 이상이 죽었다.

물론 진유성의 손에 천라멸문도 절반 이상 죽었지만.

다 지난 일이긴 했지만, 가끔 꿈에 나올 때마다 기분이 좋지 않고 뒤숭숭했다.

침대에 걸터앉아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데, 아래층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유혜연의 기척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일요일이었다.

일요일 점심은 아무리 바빠도 온 가족이 모여 느긋하게 먹어야 한다는 게 유혜연이 세운 규칙이었다.

‘좀 도와줘야겠군.’

진유성은 그런 생각을 하며 1층으로 내려갔다.

마침 씻고 나온 상소윤이 부엌으로 향하고 있었고, 아침부터 세차를 하고 온 상림도 집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렇게 우연히 동시에 부엌에 모인 셋이 팔을 걷어붙여 유혜연이 요리하는 걸 돕기 시작했다.

뒤숭숭한 꿈자리를 지우기 좋은 시간이었다.

상림이 고춧가루인 줄 알고 후추를 뿌리고, 상소윤이 물엿인 줄 알고 식용유를 뿌리고, 진유성이 자꾸 동그랑땡을 훔쳐 먹기 전까지는.

“전부 소파에 앉아서 TV나 봐!”

결국, 열 받은 유혜연의 축객령에 세 사람은 소파 앞에 모여 TV를 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엔 TV 채널이 문제였다.

“야! 일요일 오후는 음악방송이지!”

“무슨 소리냐. 일요일 오후는 신비한 TV 서프라이즈다.”

“아, 무슨 아재냐?”

“허어, 음율 같지도 않은 가락이나 즐기는 주제에.”

“아, 리모컨 내놔!”

진유성과 상소윤이 여느 때처럼 쓸데없는 이유로 싸우기 시작하자 상림은 슬그머니 소파에서 엉덩이를 뗐다.

아무래도 주차장으로 잠시 피신해야 할 듯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림의 도망 시도는 무위로 돌아갔다.

상소윤과 진유성이 동시에 상림을 쳐다보며 물은 탓이었다.

“아빠가 정해.”

“외삼촌이 정하시죠.”

“…….”

상림이 침을 꿀꺽 삼켰다.

한쪽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 한쪽은 내 눈에 뭘 넣을 수 있는 교주님.

지난 몇 달간 수도 없이 고민했지만, 언제나 결론은 나지 않았다.

그 순간, 상림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래, 일요일은 가족의 날.

‘오늘만큼은 딸에게 든든한 아빠가 되고 싶다!’

굳게 결심한 상림이 입을 열려는 순간, 진유성의 전음이 날아왔다.

[서프라이즈를 보는 강인한 풍성충으로 살겠느냐, 음악 방송 따위를 보는 대머리 고자로 살겠느냐.]

“……!”

[선택해라. 선택의 결과를 감당하는 건 너의 몫이지만.]

음악 방송을 선택하면 더 이상 내공의 탁기를 걸러 주지 않겠다는 경고였다.

생사현관을 타통했지만, 상림은 아직 진유성의 도움 없이 내공의 정순함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비겁하다. 너무나 비겁하다.

하지만…….

비겁하다고 외치기에는 너무나 많은 모발이었다.

그 순간, 부엌에서 음식을 준비하고 있던 유혜연이 상림에게 구원의 동아줄을 내려 주었다.

“다 됐으니까 밥 먹자, 얘들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상림이 식탁으로 냉큼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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