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40화>
“야, 너 왜 최유리 놀리냐?”
상소윤의 말에 진유성이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언제 놀렸다고 그러냐?”
“먹을 거 가져다주는 게 놀리는 거야. 걔들은 식단 관리해야 하는 거 몰라?”
상소윤이 드물게 단호한 태도로 말했다.
그녀는 진유성이 나쁜 마음으로 최유리한테 그랬을 거라고는 생각하진 않았다.
상소윤이 본 진유성은 상식이 없고 띨빵했지만, 본성은 착했으니까.
아마 좋은 의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의도가 어땠든 최유리한테 도움이 되는 행동은 아니었다.
진유성이 의아한 듯 반문했다.
“하지만 최유리는 싫은 내색을 한 적이 없었다. 늘 내가 준 것을 먹었고.”
“그거야 쪽팔리니까 빨리 가라고 먹는 거지! 걔는 특례 입학생이잖아.”
체육 특기 특례 입학생들의 훈련비는 일반 학생들의 학비에서 나왔다.
TV 드라마에서 나오는 것처럼 학생들 간의 계급이 갈리는 건 아니지만, 특례 입학생들은 어지간하면 일반 학생들에게 싫은 소리를 못했다.
몇 년 전에 일반 학생과 시비가 붙은 특례 입학생이 학교에서 잘린 뒤부터 더 그런 분위기가 형성됐다고도 하고.
상소윤에게 이야기를 들은 진유성은 실수를 깨닫고는 적잖이 충격 받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오다 주웠다가 뭐냐, 오다 주웠다가? 진짜 개오바.”
“멋지다고 생각했는데…… 무심한 듯 툭…….”
“야이 씨! 그게 멋있냐?!”
상소윤이 시무룩해진 진유성에게 물었다.
“근데 왜 그런 거야?”
“뭐가?”
“최유리한테 왜 먹을 걸 줬냐고.”
“호감을 사려고 그랬다.”
“호감을 사? 왜?”
“마음에 들었으니까.”
“……네 마음에? 걔가?”
“그래.”
“그, 왜?”
“맑고 곧다. 외모도 아름답고.”
그렇게 말한 진유성이 교실로 돌아가려다가 상소윤에게 말했다.
“아무튼 알려 줘서 고맙다.”
“어, 어. 그래.”
상소윤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진유성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쳐다봤다.
* * *
<인류 철학사>는 공부에 흥미가 없는 상소윤이 제법 좋아하는 과목이었다.
과목명만 들으면 딱딱할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재미있는 이야기들로 인류의 행동 양식을 설명했기에, 꼭 옛날이야기를 듣는 기분으로 수업에 집중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전혀 집중이 되지 않았다.
상소윤은 인류 철학사 선생님을 멍하니 쳐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최유리가 마음에 들었다고?’
그럴 수도 있다.
최유리가 전혀 꾸미지 않아서 그렇지 이목구비가 반듯하고 눈썹도 짙다.
옛날 미인상이라고 해야 할까?
게다가 역도 선수라고는 하지만 겉으로 보기엔 몸이 큰 느낌도 없었다.
그냥 좀 어깨가 넓은 느낌?
상소윤도 이번에 인터넷 검색을 하면서 알게 된 것인데, 원래 역도 48킬로그램급과 53킬로그램급은 몸을 크게 불리기보다는 정확한 밸런스로 힘을 쓰는 법이 중요하다고 했다.
인터넷 블로그에 보니 외국 역도 선수들 중에는 엄청나게 예쁜 사람들도 많았다.
‘53킬로그램급이면 53킬로그램이겠지……?’
상소윤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인류 철학사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여성과 남성의 미에 대한 기준도 시대에 따라 계속 바뀌어 왔다는 겁니다. 음, 요즘 아이돌들 인기 많죠? 남자 아이돌 중에서는 누가 제일 인기가 많아요?”
선생의 질문에 학생들이 이런저런 이름을 꺼냈다.
“그 친구들이 그 모습 그대로 원시시대에 태어났다면 미남이었을까요? 아니었을까요?”
“우리 오빠들은 차원이 달라져도 무조건 존잘이에요.”
한 여학생의 단호한 대답에 교실에 웃음이 터졌다.
“차원은 모르겠지만, 원시시대에는 절대 아니었을 겁니다. 당시 미의 기준은 공룡과 맹수들 틈에서 생존할 수 있는 강인한 생존력이었죠. 마른 남자? 늘씬한 여자? 추남추녀죠.”
“아오, 몇천 년만 일찍 태어날걸.”
누군가의 중얼거림을 들은 선생이 웃음기를 머금으며 말을 이었다.
“중국 4대 미녀란 말 들어 보셨죠? 서시, 초선, 왕소군, 양귀비. 이들의 외모가 어땠을까요? 44사이즈의 늘씬한 미녀?”
스크린에 4대 미녀의 복원 그림이 나오자 학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정한 이목구비에 작은 눈과 짙은 눈썹, 풍만한 몸매.
준수한 외모이긴 했지만, 그들의 기준으로 볼 때, 경국지색(傾國之色)이란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림을 보던 상소윤이 눈을 크게 떴다.
‘닮았다.’
어딘지 최유리와 비슷한 분위기의 외모였다.
“사실 현대인들이 복원한 그림이라서 무의식적으로 현대적인 기준에 맞춘 부분도 있을 겁니다. 사료로 남은 문헌에 따라 추측하자면, 아마 현대 여성들보다 훨씬 더 풍만하고 튼튼한 체형이었을 겁니다.”
상소윤이 진유성을 슬쩍 보자, 진유성이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아직도 문명을 받아들이지 않은 원시 부족에는 이와 같은 미의 기준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과 아주 가까운 곳에도 있죠. 어디일까요?”
“음, 북한이요?”
“맞습니다. 북한에 대한 조사는 완벽히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평양에서 멀면 멀수록 미의 기준이 고대 중국의 그것과 흡사하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 * *
상소윤과 가장 친한 친구인 정새롬이 식판을 들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상소윤이 근처에 앉은 것 같았는데 보이지 않았다.
그때 바로 밑에 있던 여학생이 정새롬의 엉덩이를 탁 때렸다.
“뭐해?”
“어, 뭐야. 너였어?”
정새롬이 상소윤을 발견하지 못한 것은 상소윤이 고개를 푹 처박고 밥을 먹던 탓도 있지만…….
식판에 퍼 놓은 밥의 양이 어마어마해서도 있었다.
평소 상소윤은 입이 짧아서 아주 조금의 밥만 먹는데 말이었다.
“너 밥이 왜 그래?”
“뭐가?”
“너 입 짧잖아.”
“아니, 뭐. 그냥 오늘은 배가 좀 고프네.”
상소윤이 다시 밥을 우걱우걱 퍼먹기 시작했다.
* * *
역도부 감독은 진유성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도 진유성을 탐냈다.
하지만 막상 역도부의 훈련을 같이하고부터는 그 마음이 식었다.
딱 봐도 진유성에게 아무런 열의가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무슨 영문인지, 진유성은 차기 국가대표인 최유리에게 들러붙어 귀찮게 굴었다.
진유성이 최유리를 좋아하는 것 같기도 했는데, 호감을 표현하는 방식이 진짜 이상하다.
‘줍긴 뭘 주워.’
사실 진유성이 최유리를 좋아하든 말든 감독이 알 바 아니지만, 최유리의 멘탈이 흔들리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진유성은 한 학기에 천만 원도 훌쩍 넘는 학비를 내는 대정고의 학생.
최유리는 특례 입학생.
게다가 감독만 알고 있는 거지만, 최유리의 집은 꽤 많이 가난하다.
그런 걱정 속에서 훈련이 시작됐는데, 감독의 걱정은 기우인 듯했다.
최유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최선을 다해서 훈련에 매진했다.
흐뭇한 표정으로 최유리를 쳐다봤던 감독이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아니……?”
평소엔 훈련을 하는 둥 마는 둥 했던 진유성이 완벽한 용상 클린 동작으로 바벨을 들어 올리고 있었는데…….
그 무게가 심상치 않다.
“기, 김 코치.”
“네?”
“저거 몇 킬로야?”
“뭐 말씀, 어?!”
진유성을 보고 깜짝 놀란 코치가 다가가 무게를 확인하고는 감독에게 돌아왔다.
“배, 백삼십 킬로입니다.”
“백삼십?!”
진유성의 키는 180이 조금 넘고, 겉에서 보기에 큰 골격은 아니었다.
하지만 축구나 농구하는 걸 보면 나름대로 웨이트 트레이닝을 한 다부진 몸을 가지고 있을 것으로 추측됐다.
‘대충 77킬로그램이라고 가정하면…….’
남자 용상 77킬로그램급의 세계신기록이 214킬로그램이다.
한데, 아무 훈련도 받지 않은 일반인이 130킬로그램을 들어 올렸다고?
다른 학교의 감독들에게 이 사실을 말했으면 어디서 약을 파냐고 구박받았을 것이다.
아니면 그 학생이 약을 했냐고.
‘아니지. 아무리 약을 해도 저건 안 돼.’
사람들은 역도는 순간적인 힘만 겨룬다고 생각하지만, 스피드와 유연성도 굉장히 중요했다.
용상 클린 동작의 랙 포지션은 어지간한 유연성으로는 꿈도 못 꿀 자세니까.
한데, 진유성은 그야말로 완벽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렇다는 건 힘과 유연성을 타고났고, 힘쓰는 법을 본능처럼 안다는 뜻이었다.
“김 코치, 무게 좀 더 올려 봐.”
“더요? 위험할 텐데요?”
“아냐. 저 표정 봐. 저게 온 힘을 다한 표정이야?”
“얼마나 올릴까요?”
“십…… 아니, 이십 올려 봐.”
감독의 말에 진유성에게 달려간 코치가 바벨에 15킬로그램을 추가했다.
다른 생각에 깊이 빠진 것 같은 진유성이 어렵지 않게 150킬로그램을 들어 올렸다.
이제 감독과 코치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장면을 믿을지 말지를 고민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안 믿겠는가?
순간적으로 각성자인가 하는 의문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건 말도 안 된다.
요즘 고등학생들의 희망 직업 1순위가 각성자다.
각성자가 되는 순간 동네방네 떠들고 다녔을 것이다.
그냥, 이 자식은 타고난 거다.
‘유리가 53킬로그램 국가대표가 되고, 진유성이 77킬로그램에서 대표가 된다면…….’
감독의 머릿속에 구체적인 장밋빛 미래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 * *
수업이 끝나고 학생들이 하교하는 시간, 진유성은 역도부 체육관으로 향했다.
상소윤에게는 먼저 집에 가라고 말을 해 둔 상태였다.
체육관에 들어서자 진유성이 들어왔는지도 모르는 최유리가 열심히 훈련을 하고 있는 게 보였다.
‘역도라…… 나름 괜찮은 운동이야.’
처음에는 단순하다고 생각했었는데, 해 보니 꼭 그렇지도 않다.
내공이 없는 상태에서 힘의 집중을 위한 훈련으로는 쓸만했지만, 진유성은 더 이상 역도 훈련에 참여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가 알고 싶었던 것은 일반적인 이들이 어떤 방식으로 훈련을 하는지였으니까.
진유성은 최유리가 훈련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체육관에는 최유리 혼자뿐이었는데, 이는 최유리가 다른 이들보다 1~2시간 정도 더 훈련을 하기 때문이었다.
다른 학생들은 대정고에서 배치한 스포츠 선수 전문 관리사들에게 마사지를 받고 있었다.
‘선천진기에 어울리는 훌륭한 정신력이군.’
신체를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훈련과 가만히 있어도 되는 마사지.
둘 중 뭐가 더 편할지는 말할 필요도 없고, 어차피 둘 다 훈련 과정이라면 후자를 택하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최유리는 집에서 요가로 마무리 운동을 대신하며, 남들보다 단 한 시간이라도 더 훈련에 매진한다고 들었다.
진유성이 이런 구체적인 이야기들을 알게 된 것은 역도부 감독 때문이었다.
최유리에게 역도를 배우고 싶다니 감독이 구구절절 그녀가 지닌 금메달에 대한 열정을 설명해 줬다.
그러고는 말했다.
“자네가 뺏는 시간이, 이토록 열심히 훈련하는 선수의 시간이란 것만 알아 두게.”
진유성은 어깨만 으쓱했다.
오늘 이 시간은 분명 최유리에게 도움이 될 테니까.
하지만 약간 긴장이 된다.
생각해 보면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이래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진유성이 헛기침을 했다.
“큼큼.”
하지만 이를 앙다물며 데드리프트를 하고 있던 최유리는 그의 헛기침을 못 들은 듯했다.
결국 진유성이 최유리에게 다가갔다.
훈련도 중요하지만, 지금부터 자신이 해 줄 말이 더 중요했다.
최유리에게 제대로 힘쓰는 법을 알려 줄 생각이었으니까.
사실 진유성이 훈련에 참여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처럼 이례적인 인물은 경험해 봐야지 평범한 이들의 고충을 알 수 있는 법이었다.
‘아, 근데 뭐라고 말문을 열지? 내가 해 봤는데, 음, 해 봤는데…….’
고민을 하고 있는데, 인기척을 느낀 최유리가 갑자기 뒤를 돌아보았다.
“어?”
예상치 못한 인물의 모습에 당황한 최유리가 눈만 깜빡였다.
진유성이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I saw the sun…….”
“응?”
“아니, 이게 아니라. 내가 해 봤는데…….”
“해를 봤다고? 태양?”
“…….”
망했다.
마지막 수업이 영어 프리 토킹 시간이어서 잠시 헷갈렸다.
멀더가 알려 준 Magic으로 learn한 language는 switching이 hard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