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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38화 (38/337)

<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38화>

* * *

지난 4일간 진유성은 학교란 게 막연히 상상했던 것과는 다르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가 드라마나 영화에서 본 학교는 매번 사건이 일어나는 곳이었다.

학급비가 없어져 누군가 누명을 쓰고, 친구들 간의 폭력 사태가 벌어진다. 선배들이 학급으로 찾아오고, 학부모가 학교에 나타나기도 한다.

하지만 대정고에서는 이런 일이 없었다.

어떻게 보면 심심한 학교 생활이었다.

‘흠.’

좀 아쉽기는 했지만 그게 지금의 대정고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소리는 아니다.

진유성은 대정고에서의 생활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바라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었던 천마신교의 교주가 끝까지 이루지 못했던 진짜 소망.

평범한 삶.

그것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뭐, 공부는 재미가 없지만.’

그 대신 운동이 재밌다.

처음엔 좀 시시하다고 생각했는데, 돈을 걸고 내기를 하니 쏠쏠한 재미가 있다.

진유성도 양심이 있는지라 학생들과 내기를 할 때면 내공과 의념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내공과 의념을 완전히 봉하면 무림인이라고 하여도 그저 잘 단련된 인간일 뿐이니까.

사실 의념은 의도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게 더 어려웠다.

망치질을 똑같은 방식으로 10년 동안 한 대장장이에게 갑자기 다른 방식으로 하라면 어려운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진유성은 심즉행(心卽行)과 심어행(心於行)의 경지를 넘어서 의념만으로 자연의 기운이 움직이는 경지에 이르렀다.

어렵더라도 의념을 제한하지 않으면 수준이 맞지 않는 것이었다.

우습게도 의념을 제한하면서 몸 쓰는 법에 대해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

그동안 내공과 의념을 숨 쉬듯이 써 와서 미처 몰랐는데, 육체가 가진 힘과 의념의 힘은 별개였다.

그러나 진유성은 지금껏 육체와 의념의 위력을 섞어 발현하고 있었다.

의념-육체-내공의 순으로 힘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의념으로 육체를 움직이고 있었다는 소리였다.

물론 그래 봐야 아주 미세한 차이였지만 분명 오늘의 진유성은 어제의 진유성보다 강해졌다.

‘아직도 올라갈 곳이 있다니. 무(武)와 공(功)은 끝이 없군.’

진유성은 그런 생각을 하며 보고 있던 무협 소설을 집어던졌다.

“에이, 쓰레기 같은 작가 놈.”

아무리 소설이라도 그렇지 일검에 바다가 갈라지는 게 말이 된단 말인가?!

진유성이 투덜거리며 책을 놓고는 거실로 나왔다.

아무래도 기분이 나쁜 게 아이스크림을 먹어야겠다.

거실로 나오니 유혜연과 상림은 없었고, 상소윤이 고데기로 머리를 말고 있었다.

“어, 일어났냐?”

“아까 일어났다.”

“또 아이스크림 먹게?”

“아이크스림 맛있다.”

중원에도 빙과(氷菓)는 있었지만 이 정도로 맛있진 않았다.

‘하긴, 술도 그렇지.’

중원에서 난다 긴다 하는 술들을 마셔 봤지만 대부분이 소주만 못했다.

뭐, 사실 이건 진유성이라서 그럴 수도 있었다.

진유성의 오감은 극도로 예민해서 약간의 이물질만 섞여도 맛을 느끼는 데 방해를 받았다.

그러니 제대로 된 멸균 공법을 거치지 않은 중원의 명주(名酒)와 철저한 공법으로 만드는 화학주를 비교하면, 후자가 더 맛있을 수밖에 없었다.

소주의 술맛 자체도 훌륭했는데, 이건 진유성이 딱 술의 향만 음미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군침이 돌았다.

‘상소윤이 나가면 술 한잔해야겠군.’

그런 생각을 하며 머리를 굽는(?) 걸 빤히 구경하고 있으니, 상소윤이 인상을 팍 쓴다.

“뭘 봐?”

“고소한 냄새가 나서 쳐다보고 있었다.”

“어휴, 또라이.”

상소윤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팔을 쭉 펼쳐 보였다.

“오늘 어때?”

“여전히 박색이군.”

“음, 좋아. 요즘은 그 말 안 들으면 뭔가 허전하더라.”

그렇게 나갈 준비를 끝낸 상소윤이 현관에서 신발을 신다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야, 너 요즘 지종수랑 친하게 지내더라?”

“지종수가 누구냐.”

“너한테 맨날 축구 하자고 하는 애 있잖아.”

“누구?”

진유성이 기억을 더듬었지만 떠오르는 얼굴이 없었다.

지종수는 그렇게 진유성에게 두 번 농락당했다.

* * *

대정고는 자타공인 대한민국 최고의 엘리트들이 다니는 고등학교였다.

그런 만큼 학교에 대한 자부심이 높았고, 그 자부심을 유지하기 위한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특례 입학은 이러한 자부심을 유지하기 위한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다.

‘대한민국 최고의 스포츠 인재들을 모두 대정고 출신으로 만들자!’라는 어처구니없는 발상으로 시작했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과 권력은 상상을 현실로 바꿀 수 있는 충분한 힘이었다.

각성자들이 등장하고 한동안 새로운 스포츠가 등장할 것이고, 기존의 스포츠들은 사양화될 거라는 추측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전혀 아니었다.

인기 스포츠는 계속해서 큰 인기를 구가했다.

그렇게 대정고가 대한민국 유소년 스포츠계의 헤게모니를 거머쥐자, 자연스럽게 스포츠 지도자들도 학교에 모여들었다.

감독, 혹은 코치로 대정고에 이름을 올리면 올림픽 국대급의 선수를 지도했다는 커리어가 보장되는 셈이었다.

자연스럽게 많은 이들이 대정고의 스포츠 지도자 자리를 탐냈고,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자 그 수준은 점점 올라갔다.

심지어는 국가 대표팀 감독이 은퇴 후 대정고 외부 고문으로 초빙되기도 했다.

한데, 이토록 우수한 지도자들 앞에 골머리를 싸게 만드는 인물이 나타났다.

대정고에 갑자기 전학을 온 2학년 3반의 진유성이었다.

그들이 골머리를 싸매는 이유는 하나.

누가 진유성을 차지할 것인가!

“유성이는 축구를 해야 한다니까요? 축구 선수의 최고 재능이 뭔지 아세요?”

“탈세?”

“아니, 이 사람이! 어디 야구 코치 따위가 그딴 말을 해?”

“따위? 따위?”

“그럼 따위지! 전 세계에 야구 프로 리그가 몇 개나 있다고!”

“그래서 한국 야구가 더 가치 있는 거죠! 야구에서는 한국 프로 리그가 세계에서도 먹어 주는데 축구는 뭡니까? 브라질 뒷골목에서 공 차는 애들만도 못하면서…….”

가만히 듣고 있던 전 탁구 국가 대표 선수이자 현 대정고 탁구부 감독이 물었다.

“아니, 그래서 유성이가 가진 축구 선수로서 최고의 재능은 뭡니까?”

“쉽게 차는 거요! 유성이는 진짜 공을 너무 쉽게 차요. 왠지 알아요? 밸런스가 기가 막히거든. 옆에서 넘어지라고 어깨를 들이밀어도 절대 안 넘어져. 오히려 상대의 힘을 역이용해서 달려간다니까.”

“그 재능이 바로 씨름에서 가장 필요한 재능입니다.”

“어디 사양 스포츠가 끼어듭니까?”

“사양? 사야앙?! 씨름이야말로 고대부터 한민족의 얼과 혼을 담아 온…….”

“아, 난 그런 거 모르겠고. 축구부 입단 제의할 겁니다.”

“그럼 전 야구부 입단 제의합니다.”

“그 친구는 씨름의 미래를 열겁니다.”

“농구의…….”

“골프의…….”

“테니스의…….”

다들 각자의 분야에서 난다 긴다 하는 이들이라 그런지 말싸움에는 끝이 없었다.

역도나 조정 같은 비인기 종목의 지도자들은 입맛만 다시며 언쟁에 끼어들진 않았지만, 그들도 진유성을 탐내긴 마찬가지였다.

모두들 지난 일주일간 진유성의 운동 능력을 직접 확인했거나, 먼발치에서 지켜본 탓이었다.

“아니, 근데 정식 입학생들이 운동부에 들어오는 경우가 있나요? 가업도 이어야 하고. 진유성 학생의 의사를 확인하기도 전에 다들 너무 김칫국을 마시는 거 아닌가요?”

“진유성이는 가업이 없어요. 부모님이 돌아가시며 많은 유산만 물려준 것 같습니다.”

“흠.”

“딱히 하고 싶은 것도 없는 것 같고, 공부도 싫은 것 같으니, 운동이 매력적인 선택지가 되지 않겠어요?”

“그럼 월요일에 직접 물어봅시다. 어떤 운동에 제일 관심이 있는지.”

“내가 처음부터 그러자고 했잖아요. 지금까지 뭐한 건지…….”

그렇게 영양가 없는 논의를 마친 이들은 돌아올 월요일을 손꼽아 기다리게 되었다.

* * *

월요일에 상소윤과 함께 등교한 진유성은 자신을 목이 빠져라 기다리던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특기 체육 본관 건물로 향했다.

진유성을 기다리던 이들은 각기 다른 8개의 체육 종목에서 나온 8명의 감독들이었다.

그들은 진유성이 얼마나 축복받은 신체를 가지고 있는지를 설명하고는 똑같은 제안을 했다.

당장 진로를 결정하라는 건 아니지만, 체육부에 들어와서 함께 훈련해 볼 생각이 없느냐는.

그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진유성은 문득 옛날 생각이 떠올라서 피식 웃었다.

과거, 멸마대에서도 이런 적이 있었다.

정도맹의 멸마대원들은 1년간 인피면구를 쓰고 정체를 숨긴 교관-구대문파의 장로-들에게 무공을 배웠다.

검, 도, 창, 궁, 암기, 독 등등.

수많은 무공의 기초를 배운 것이었다.

그렇게 1년이 지난 어느 날.

모든 멸마대원들이 각자의 성명절기로 삼을 무공을 골라야 하는 선택의 순간이 찾아왔다.

그날 밤, 진유성의 숙소로 숨어든 교관들도 지금처럼 딱 8명이었다.

과거를 생각하며 진유성이 미소를 지어 보이자 감독들의 마음에 희망이 피어올랐다.

“진유성 학생, 혹시 생각하고 있는 종목이 있나요?”

“어, 네. 하나 있긴 해요.”

“축구죠?”

“아뇨?”

“농구, 맞죠! 저번에 보니까 점심시간에 슬램덩크를 내리꽂던데!”

“왼손은 거들 뿐…….”

진유성은 정말로 관심을 가진 종목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종목 자체에는 관심이 없다.

만에 하나 진유성이 운동 선수가 된다면, 그건 열심히 운동을 하고 있는 이들에게 반칙과도 같은 존재가 아니겠는가.

내공과 의념을 자제한다고 해도, 진유성은 일반인과 몸을 쓰는 경지 자체가 달랐다.

진유성이 관심을 가지는 건 종목 자체가 아니라, 그 종목에서 훈련을 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뭔데? 무슨 종목에 관심이 가는데?”

“역도요.”

“……역도?”

상림과 함께 입학 절차를 위해 찾았던 대정고.

그날 진유성은 자신의 이상형을 발견했다.

아담한 키에 떡 벌어진 어깨.

굵은 허벅지, 단단한 몸매.

절세가인이라도 불러도 좋을 아름다운 외모.

곧고 정명한 선천진기까지.

진유성은 며칠간 자신의 마음을 뒤흔든 여인을 찾아 헤맸지만, 이상하게도 학교 안에서는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지난 금요일.

강원도 전지 훈련을 끝내고 돌아온 역도부 버스 안에 타고 있는 그날의 여인을 발견했다.

프로 스포츠 선수 따위엔 전혀 관심이 없는 진유성이 역도부를 선택한 것에는 이러한 배경이 있었다.

* * *

컴퓨터 앞에 앉은 진유성은 상소윤의 도움으로 가입한 인스타그램에 로그인을 했다.

그러곤 끙끙거리며 누군가의 인스타그램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SNS가 뭔지 알지만, 사용해 본 적이 없는 터라 꽤 어려웠다.

하지만 유튜브와 인터넷에 검색을 하고 나니 어느 정도 감을 잡았다.

그렇게 20분 뒤.

마침내 진유성은 찾아 헤매던 님의 인스타그램을 발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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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정 고등학교 2학년 역도부.

53kg급 대표 선수.

최유리.

-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역기를 들어 올리는 모습도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흠.”

진유성은 상림과 나눴단 대화를 상기했다.

“제가 요즘 애들 마음을 어떻게 알겠냐마는 SNS로 호감을 표현하는 것 같더라구요.”

“SNS라고……?”

“네. 막 의미심장한 댓글 같은 거 달아서 설레게 하고 그러던데요.”

진유성이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의미심장이란 명제가 꽤 어려웠던 탓이다.

‘아니, 쉽게 생각하자.’

결국 의미심장(意味深長)이란 말이나 글의 뜻이 매우 깊음을 의미했다.

깊이 있는 진심을 전달하면 되리라.

고민을 끝낸 진유성이 최유리의 인스타그램에 댓글을 달았다.

-당신은 곧고 맑은 기운을 가지고 있습니다. 함께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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