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34화>
* * *
고오오오오!
허공에 모이던 기운이 게이트를 만들어 낸 순간, 진유성은 각성자들을 향해 다가갔다.
본래 사열식이 벌어지는 곳은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됐다.
하지만 모두가 게이트에 시선을 빼앗긴 상태라서 진유성을 제지하는 이는 없었다.
‘저 게이트…….’
진유성이 인상을 찌푸렸다.
본디 ‘기운’이란 놈에는 의도가 없다.
뜨거운 기운, 찬 기운, 어두운 기운이 있을 순 있겠지만, 그건 자연의 일부를 담은 결과이다.
어두운 것이 두렵고, 뜨거운 것이 성급하다는 건 인간들의 해석일 뿐이다.
하지만 저 게이트를 형성하는 기운에서는 ‘악의’가 느껴졌다.
그렇다는 것은…….
게이트가 누군가의 악의로 탄생했거나, 이미 탄생해 있는 것을 부정한 방식으로 이용하고 있거나.
‘뭐, 그럴 거 같진 했지.’
사실 게이트란 기물 자체가 지나치게 이질적이었다.
진유성은 게이트가 완성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게이트가 완성되면 선별 인원을 가리기 위한 빛을 발사하는데, 진유성은 그 빛보다 빠르게 움직일 자신이 있었다.
서울역에서 빛을 피할 수 있다고 확신했었으니까.
그러나 빛이 뿜어지는 순간.
진유성은 자신의 생각이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이 게이트의 빛보다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건 맞다.
하지만 저 게이트는 애당초 선별 인원을 정해 놓았다.
다른 각성자들은 그저 빛이 번쩍한다고 생각했을 뿐이지만, 진유성은 빛이 정확히 47줄기이며, 명확한 목표를 가졌다는 걸 알아차린 것이었다.
이대로는 게이트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 순간, 진유성이 주변으로 기감을 확장시켰다.
‘검.’
검이 필요했다.
그것도 꽤 좋은 걸로.
때마침 미지의 사태 속에서 검을 꺼내 쥐고 있는 각성자가 보였다.
진유성이 한달음에 달려가서 각성자의 손에 들린 검을 빌리려 했다.
정말이었다.
잠깐 쓰고 돌려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각성자는 진유성이 검을 뺏으려는 거라고 오해했는지, 기겁하며 몸을 틀었다.
“흡!”
진유성의 눈이 이채를 발했다.
고만고만한 각성자들 사이에서 제법 강하다 싶었는데, 자신의 초수를 피해 낸 것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진유성은 마음이 급했기 때문에 왼손으로 각성자의 뒤통수를 치고 검을 빼앗았다.
아니, 빌렸다.
검을 쥔 진유성의 눈이 이채를 발했다.
얼추 봤을 때부터 괜찮은 검이란 걸 알고 있었지만,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좋은 검이었다.
100년 가까이 입멸검만 사용해 온 진유성이 괜찮다고 여길 만한 검은 대부분 명검이었다.
검을 쥔 진유성이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검의 감촉을 느끼며 심호흡을 했다.
진유성은 멸마대에서 잡다한 무공을 익혔고, 그 이후에도 살아남기 위해서 이것저것을 배웠다.
유서 깊은 무공도 있었고, 저잣거리에서 배운 무공도 있었다.
하지만 진유성은 무공의 상하를 나누지 않았다.
삼류 무공이라도 상황에 맞게 쓰면 절정 무인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남으로 도망갈 때만 해도 진유성에게는 독문무공이나 진신절기가 없었다.
그러나 해남파 장문인의 배려 이후 숨어든 이름 모를 섬에서 놀라운 기연을 얻게 되었다.
하나의 무공과 한 자루의 검.
입멸공(入滅功).
입멸검(入滅劍).
진유성은 진법 속에서 2년간 입멸공을 익혔고, 중원으로 돌아왔을 때는 비급에 적힌 말을 현실로 만들었다.
-입멸공을 끝까지 익힌다면 넌 무림의 생사입멸(生死入滅)을 관장할 수 있으리라.
입멸공은 전반부 육초식과 후반부 육초식을 합친 십이초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생(生), 사(死), 입(入), 멸(滅)이란 이름이 붙은 네 개의 오의(奧義)로 이루어져 있다.
지그시 감고 있던 진유성의 눈이 떠졌다.
막대한 내공이 진유성의 온몸에서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이윽고…….
진유성이 쥐고 있던 검을 가볍게 휘둘렀다.
입멸공(入滅功).
오의(奧義).
생(生).
힘도 실리지 않은 동작이었다.
나뭇가지도 벨 수 없을 것 같은 느림이었다.
실제로도 그랬다.
첫 번째 오의로는 그 누구도 죽일 수 없었다.
하지만 모든 걸 벨 수 있었다.
게이트가 참여 인원을 선별해 게이트 내부로 초대하는 틈.
진유성은 그 틈을 베었다.
그 누구도 진유성의 행위를 보진 못했지만, 만약 본 사람이 있다면 경악을 금치 못했을 것이었다.
그 어떤 각성자도, 그 어떤 과학자도, 게이트 내부로 강제로 진입하는 방법을 찾아내지 못했으니 말이었다.
물론 진유성이 게이트의 입구를 새롭게 연 것은 아니었다.
그저 다른 선별 인원이 지나가는 틈을 벌렸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진유성이 게이트의 틈으로 몸을 날리려는 순간.
프스스스스.
손에 쥐고 있던 검이 가루가 되어 허공에 흩날렸다.
“아.”
좋은 검이라서 버틸 줄 알았는데, 역시 입멸검이 아니면 안 되나 보다.
진유성은 뒤통수를 맞고 기절한 각성자에게 손을 들어 미안함을 표하고는 게이트 안으로 몸을 던졌다.
그렇게 게이트 안으로 들어온 진유성은 곧장 은신술을 사용했다.
모습을 숨긴 채 주변을 둘러보는데,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인창이네?’
서울역 게이트에서 만났던 김인창이었다.
제법 의리가 있는 놈이었기에 마지막 날에 살짝 도움을 주기도 했었다.
반가운 마음이 들긴 했지만, 진유성은 은신술을 풀진 않았다.
교복을 입고 있는 상태에서 얼굴을 드러내면 정체가 발각될 수도 있었으니까.
‘흠, 겉옷을 벗고 헬멧을 쓸까?’
셔츠나 바지에는 학교 표시가 안 되어 있으니 그래도 될 것 같았다.
게이트 밖에서도 인벤토리를 쓸 수 있다는 걸 알고 나서 첫 번째로 넣은 물건이 칠성이라면, 두 번째는 아이언맨 헬멧이었다.
하지만 진유성은 굳이 헬멧을 쓸 필요가 없었다.
저 멀리서 엄청난 기운이 느껴진 탓이었다.
‘몬스터가 저기 있나 보군.’
수비 미션을 수행할 때는 기감을 아무리 확장시켜도 몬스터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느껴졌다.
비정상적인 게이트라서 그런 걸 수도 있고, 미션이 달라서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니면…….
‘강해서일 수도 있겠군.’
만약 이 기운이 단일 개체의 기운이라면 좀 놀라울 정도였다.
뭐가 됐든 몬스터의 위치를 알았으면 됐다.
진유성은 은신술을 유지한 채로 기운이 느껴지는 곳으로 향했다.
* * *
게이트로 들어온 47명의 각성자들은 긴장했지만 겁을 먹진 않았다.
그들 대부분은 무수한 게이트를 클리어한 베테랑이자, 대한민국 각성자 순위 200위 안에 드는 하이 랭커들이었다.
특이한 게이트에 들어왔다고 겁을 먹을 만한 이들이 아니란 뜻이었다.
게다가 그들 옆에는 S급 각성자이자, 대한민국 각성 랭킹 1, 2위를 다투는 문수혁이 있지 않은가.
베테랑 각성자들이 별다른 말도 없이 아이템과 스킬, 룬 가호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그사이, 각성 인원에 포함된 김인창이 문수혁을 슬쩍 쳐다보았다.
‘S급이라…….’
김인창은 서울역에서 각성한 이후, SG 소속이 되어 4번의 게이트 헌팅에 참여했다.
김인창의 레벨이 낮은 관계로 함께 게이트를 공략한 각성자들은 대부분이 C급이나 D급이었다.
하지만 딱 한 번, A급 각성자가 싸우는 모습을 볼 기회가 있었다.
김인창은 그때 알았다.
A급 각성자는 절대 왕후를 이기지 못한다는 걸.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각성 등급으로만 따지면 김인창도 A급이었으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레벨이 부족해 ‘A급 각성 재원’으로 분류된 상태였는데, 이 말은 곧 레벨만 오른다면 A급 각성자가 될 수 있다는 소리였다.
일각에서는 김인창이 얻은 룬 가호와 스킬이 범상치 않은 것으로 보아, 더블 A나 트리플 A급으로 올라설 가능성도 있다고 판단하는 모양이었다.
하이 랭커와 베테랑으로 진행된 서울역 사열식에 김인창이 참가한 이유도 이것 때문이었다.
김인창을 탐내는 친한국 계파와 친SG 계파에서 동시에 그를 사열식에 초대했으니까.
하지만 김인창은 자신이 A급 각성자가 되더라도 절대 왕후를 이길 자신이 없었다.
레벨이 100, 아니 200쯤 더 오른다고 해도 말이었다.
그만큼 왕후가 보여 준 강함은 절대적이었다.
하지만 S급이라면 다르지 않을까?
S급은 인간의 강함을 넘어서야지만 도달할 수 있다고 알려졌으니까.
김인창이 그런 상념에 빠져 있는데, 허공에 푸른빛을 띠는 관리자가 나타났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관리자의 등장에 각성자들이 능숙한 태도로 코드 네임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관리자의 코드 네임에는 게이트에 대한 중요한 정보가 들어 있다.
김인창도 알고 있는 기본적인 사실이었다.
예를 들자면, 그가 각성했던 서울역 게이트 관리자의 코드 네임은 .
첫 알파벳은 게이트의 등급을 나타냈다.
두 번째 숫자는 미션의 종류를 지칭했다.
1. 수비, 2. 공격, 3. 레이드 순서였다.
마지막 알파벳은 인원수의 숫자가 반영됐다.
게이트에 참여한 인원수가 많으면 낮은 난이도인 E~F가 나오고, 인원수가 적으면 높은 난이도인 S~A가 떴다.
다만 인원수 대비 난이도는 게이트 사태 초창기에만 의미가 있었고, 이제는 별로 의미가 없었다.
A급 각성자 100명이 있는 것과 일반인 100명이 있는 것도 같은 난이도 취급을 받기 때문이었다.
즉, 참여 인원의 강함이 전혀 반영되지 않는…….
“뭐?!”
김인창이 깜짝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김인창뿐만이 아니었다.
각성자 대부분이 믿을 수 없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고, 당혹스러운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왜냐하면…….
[저는 이번 미션을 진행할 관리자 ‘S-3S’입니다.]
[우선, 게이트 인원에 선별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현재 인원은 48명입니다.]
그들이 들어온 게이트가 전 세계에 단 6번밖에 열리지 않은 S급 게이트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현재까지 S급 게이트의 클리어율은 0퍼센트였다.
베테랑들답게 패닉에 빠지진 않았지만, 다들 당황스러움을 감추진 못했다.
“S급 레이드 미션이라니…….”
“어쩐지 사열식에 참여하기 싫더라니.”
“내일이 적금 만기일인데, 빌어먹을.”
그러나 각성자들은 게이트 등급에 당황한 나머지, 현재 인원에는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다.
* * *
기운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 걸음을 옮기던 진유성은 곧 거대한 석조 건물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언젠간 다큐멘터리에서 보았던 피라미드와 고대 그리스 신전을 합쳐 놓은 듯한 복잡한 모양이었다.
문제는 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
[아직 레이드 미션이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출입문이나 비집고 들어갈 만한 틈이 보이지 않았다.
순백색의 석조 건물은 부수는 것 외에는 진입 방법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주먹으로 쳐 보니, 비정상적인 강도가 느껴졌다.
생각해 보면 지금껏 수행했던 미션들도 일정 시간이 지나야지만 몬스터들이 공격해 왔다.
‘빨리 하고 싶은데.’
진유성은 메시지창을 통해서 이번 미션이 <수비>나 <공격>이 아닌 <레이드> 미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레이드 미션은 다른 미션과 다르게 보스를 죽이는 순간 게이트가 클리어된다고 했다.
최대한 빨리 처리하면 점심시간이 끝나기 전에 학교로 돌아갈 수가 있을 것도 같다.
‘부수자.’
결정을 내린 진유성이 주먹을 쥐고 내기를 끌어올리는데, 메시지가 떠올랐다.
[미션 시작 전, 신성의 정원에 입장하기 위해서는 패스워드가 필요합니다.]
[패스워드를 입력하시겠습니까?]
당연히 알 리가 없지…… 라고 생각하는데,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뭐지?’
건물의 설계도 같은 게 떠올랐다.
정확히는 설계도를 따라서 기운을 흘려 보내는 구조였다.
그리고 복잡한 설계도 속의 건축물은 눈앞의 건축물과 똑같은 모양이었다.
“아!”
진유성은 뒤늦게 이 설계도를 어디서 얻었는지를 떠올렸다.
이태원에서 웬 색목인 여자를 만나서 멀더의 술법을 쓴 적이 있었다.
그런데, 술법을 쓰고 나니 이상한 설계도가 잠깐 떠올랐었다.
그때는 그냥 언어와 관련된 뭔가인 줄 알았는데…….
‘게이트와 관련된 거였나? 이게 패스워드가 맞나?’
우연이라고 생각하기엔 모양이 너무 똑같았다.
진유성은 기억 속 설계도를 따라서 내공을 주입하기 시작했다.
필요한 내공의 양이 상당했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엄두도 내기 힘들 정도의 내공이었다.
내공 주입이 끝나자 쿠쿵 하는 소리와 함께 석조 건물의 돌들이 밀려나기 시작했다.
[마스터 플레이어의 자격을 증명했습니다.]
[에너지를 반환합니다.]
건물에 주입한 내공이 고스란히 돌아옴과 동시에 커다란 출입구가 생겼다.
진유성이 출입구의 문을 열고 들어가기 무섭게.
“쿠어어어어어어!”
후우우웅!
뭔가가 거대한 흉성을 터트리며 진유성을 향해 대검을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