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31화>
* * *
진유성은 단 한 번도 자신이 약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화전민들에게 붙잡혀 노예상에게 팔려 갈 때도 그랬다.
비록 몸은 약할지언정 정신은 누구보다 강하다.
그렇게 믿고 살았고, 결국은 중원을 일통한 지배자가 되었다.
하지만…….
‘난 나약하다.’
지금처럼 자신의 약함을 통감해 본 적이 없었다.
저 앞에서 두 명의 강자가 손을 흔들었다.
“유성아, 거기서 뭐해. 이리 와.”
“돼지, 빨리 와.”
“소윤아, 밖에서까지 돼지가 뭐니, 돼지가.”
“진유성이 또 내 아이스크림 먹었단 말이야. 이젠 화도 안 나는 내 모습이 낯설어.”
“아이구, 우리 딸. 유성이 덕분에 군것질 안 해서 살 빠진 거였구나?”
“나 살 빠졌어?”
“완전.”
“대박.”
저들은 어찌 아직도 끊임없는 대화를 나눌 기력이 있단 말인가.
약 5시간 전.
TV를 보며 평온한 주말을 보내고 있던 진유성은 유혜연의 손에 이끌려 밖으로 나왔다.
월요일부터 등교를 해야 하니 교복을 사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자 함께 TV를 보고 있던 상소윤이 심심하다며 따라 나왔다.
“나도 갈래.”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상소윤을 말렸어야 했는데.
교복 자체는 금방 샀다.
어차피 교복은 디자인이 정해진 옷이라서 사이즈만 맞추면 그만이니까.
‘제법 멋지군.’
진유성은 거울에 비춘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 세계의 옷은 재질도 좋고 색감도 예쁘다.
“우리 유성이 너무 멋진데? 완전 잘 어울린다.”
“뭐, 괜찮네.”
유혜연과 상소윤의 반응에 교복 전문점 판매원이 맞장구를 쳤다.
“사실 대정고 교복이 채도가 낮은 울트라마린(군청색)이라서 완벽히 소화하는 사람이 별로 없거든요. 근데 아드님은…… 어휴, 너무 멋지다.”
“품은 좀 줄이는 게 낫겠죠?”
“많이들 그렇게 입으시죠. 대정고 교복은 슈트 디자인으로 나와서 핏이 딱 떨어져야 예쁘거든요. 바로 수선 넣어 드릴까요?”
“그렇게 해 주세요.”
문제는 다음이었다.
유혜연이 교복의 품을 수선하는 동안 백화점에 가자고 했을 때, 따라가지 말았어야 했다.
아니면 ‘유성이는 입을 만한 옷이 별로 없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고개를 저었어야 했다.
아니면, 처음 와본 백화점이 신기했어도 신기한 티를 내지 말았어야 했다.
그랬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피곤하다.’
물론 육체의 활기를 끊임없이 제공하는 내공 덕분에 몸이 피곤하진 않았다.
하지만 정신적으로 피곤했다.
오히려 몸은 멀쩡하니 더 피곤한 것 같기도 하다.
그때 해탈한 진유성 마네킹에 이런저런 옷을 대보던 유혜연이 반가운 이야기를 꺼냈다.
“유성이 옷은 이 정도면 되겠는데?”
“벌써? 별로 안 샀잖아.”
“디자인도 유행이 있잖아. 너무 몰아서 사면 별로야.”
“하긴.”
마침내 쇼핑의 끝을 알리는 유혜연과 상소윤의 대화에 진유성의 얼굴이 밝아졌다.
아주 잠깐.
“그럼 이제 아빠 옷을 사볼까?”
“아빠는 옷 많지 않아?”
“다음 주에 임원 면접 본다는데 입을 만한 옷이 없는 거 같더라고. 네 아빠가 또 정장은 싫어하잖니?”
진유성이 황급히 말했다.
“외숙모, 저 먼저 들어가 볼게요.”
“응? 피곤해?”
“조금요.”
“그래도 처음으로 셋이 나왔는데 저녁은 같이 먹고 들어가야지. 외삼촌 옷은 금방 살 거야. 조금만 기다려 봐.”
유혜연의 부드러운 미소에 진유성은 별수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한 건 정확히 1시간 뒤였다.
* * *
집으로 돌아온 진유성은 유혜연이 사 준 옷들을 옷장에 차곡차곡 집어넣었다.
살 때도 많다고 생각했는데, 옷걸이에 걸어 놓으니 정말 많다.
“결국, 이걸 샀군.”
진유성이 내복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서랍에 집어넣었다.
추위를 타지 않으니 내복 같은 거 필요 없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도 유혜연이 박박 우겨서 샀다.
추위를 타지 않는 거랑 감기에 걸리는 건 별개라면서.
유혜연은 참 걱정이 많았다.
늦게 들어오면 늦었다고 걱정을 하고, 날이 추우면 감기 걸린다고 걱정을 한다.
그래서 좋은 사람이기도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할 때쯤 옷 정리가 끝이 났고, 진유성은 곧장 컴퓨터를 켰다.
오늘은 드라마나 유튜브를 보려는 게 아니라, 그보다 중요한 일이 있었다.
“흠.”
포털 사이트에 접속한 진유성은 능숙하게 로그인하고 <지식iN>을 클릭했다.
이용해 본 적은 없지만 이곳이 궁금한 질문을 올리면 사람들이 답을 해 주는 게시판이란 걸 알고 있었다.
‘내 정체가 너무 드러나면 안 되니까…….’
잠깐 고민하던 진유성이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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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좌는 타 차원에서 온 지존이다.
어쩌다 보니 학교를 가게 됐는데, 학교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 잘 모르겠다.
본좌가 학교에서 꼭 해야 하는 일을 아는 자는 고해 보아라.
-
‘중원’이 아니라 ‘타 차원’이라고 썼고, 교주가 아니라 본좌라고 썼다.
말투까지 바꿨으니, 이 정도면 완벽한 보안이었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진유성은 이어서 유료 등록 중 가장 비싼 <프리미엄 질문 등록>을 선택했다.
어차피 돈은 몰래 연동시켜 놓은 상림의 카드에서 빠져나갈 것이다.
프리미엄 등록을 해서 그런지 댓글이 우수수 달리기 시작했다.
└뭐냐, 이 컨셉충은.
└장난 한 끗에 12만 원을 태워?
└와, 프리미엄ㅋㅋ 부자네ㅋㅋ
└지식인에서 플렉싱하네.
대부분의 우매한 것들이 믿지 않을 거라는 건 진유성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한 명쯤은 쓸 만한 답을 주지 않을까?
원래 인터넷이란 게 그렇다.
쓸데없는 정보의 홍수 속에 중요한 것들이 숨어 있다.
그때였다.
댓글을 새로고침하던 진유성의 눈에 누군가의 정성 어린 답변이 보인 게.
* * *
김성동은 나이는 젊지만 판타지 소설계에서 알아주는 인기 작가였다.
그런 그가 지식iN에 들어온 것은 실수였다.
포털 사이트에서 웹툰 게시판을 누르려고 했는데, 그 옆에 있는 지식 게시판을 잘못 누른 것이었다.
“뭐야.”
투덜거리며 지식 게시판을 닫으려던 김성동의 눈에 이라고 적힌 메인 페이지의 질문이 들어왔다.
타 차원에서 온 절대자가 학교에서 뭘 해야 하는지 묻는 엉뚱한 질문.
사람들 대부분이 이 엉뚱한 댓글에 조롱성의 댓글을 달고 있었다.
하지만 김성동은 질문자의 의도를 한눈에 알아봤다.
‘슬럼프에 빠졌구나.’
판타지 작가가 전개 슬럼프에 빠진 게 분명하다.
이건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통한 영감을 얻기 위해 작성한 질문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으면 12만 9천 원짜리 프리미엄 결제를 했을 리가 없잖은가.
김성동은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지금이야 절정의 인기 작가가 됐다지만 자신도 슬럼프에 빠져 허덕일 때가 있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댓글을 훑어보는데 아무리 봐도 조롱밖에 없다.
“사람들 너무하네. 아이디어라도 좀 주지.”
결국, 김성동이 팔을 걷어붙였다.
“절대자가 학교에 간다라. 일단 좀 뻔한 클리셰네. 그럼…….”
클리셰를 그대로 답습하는 건 그리 좋지 않았지만, 딱 봐도 신인 작가인 것 같다.
신인 때는 한 번쯤 클리셰의 정석을 경험해 보는 것도 좋으리라.
그래야만 나중에 클리셰 비틀기를 할 수도 있는 거다.
그렇게 결정을 내린 김성동이 긴 댓글을 쓰기 시작했다.
└학교는 생각보다 정적인 공간입니다. 구성원들이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비슷한 일상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학교 자체보다는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에 집중해야 합니다.
우선 절대자가 학교에 갔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로…….
* * *
사람들은 흔히 아주 밝은 빛을 두고 태양처럼 밝다는 표현을 쓰곤 했다.
그렇다면 이곳의 어둠은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태양조차 집어 삼킬 만한 어둠?
무저갱 끝자락에 내려앉은 것 같은 어둠?
뭐라고 표현하든 자연적인 어둠은 아니었다.
이러한 어둠 속에 세 명의 남자가 있었다.
만약 이 어둠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세 명의 남자가 백인 남성이라는 걸 알 수 있을 것이었다.
또한 세 사람이 완전히 똑같이 생겼다는 것도.
[조만간 부모의 형질을 통해 각성 상태의 아이들이 태어날 것 같군.]
[반가운 소식이군.]
[페이즈 2가 머지않은 건가.]
한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남자들의 화제가 바뀌었다.
[극동아시아의 작은 나라에서 이상한 일이 있었더군.]
[대한민국의 이야기인가?]
[대한민국 수도의 이름이 서울이었던가?]
본래 대화란 듣는 자와 말하는 자가 나뉘는 행위이다.
하지만 어둠 속의 세 사람은 단 0.1초의 오차도 없이 동시에 말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의사소통에도 문제가 없어 보였다.
[대한민국이라. 고맙게도 시스템에 가장 잘 적응해 준 나라이지.]
[무슨 일이 있었지?]
[서울역에서 아무런 징후 없이 게이트가 열렸더군.]
[왜?]
[게이트에 귀속시켜 둔 보스 몬스터가 각성하려 했던 모양이야.]
[보스 몬스터라니. 정말 인간스러운 표현이다.]
[아, SG와 일을 하다 보니 인간들의 용어가 입에 붙었군. 필터(Filter) 몬스터로 정정하겠다.]
[서울역 필터 몬스터는 어떤 개체였지?]
[누카 종족에서 500년 만에 나온 불세출의 영웅이지.]
[아, 그 녀석. 제법이었지. 기억이 난다. 개체명이 린트콕이던가?]
[맞다. 그런 이름이었어.]
쉴 새 없이 대화를 주고받던 세 명의 남자 중 한 명이 물었다.
[그럼 필터 몬스터가 각성을 하려는 바람에 시스템이 폭주를 선택한 건가?]
[그래.]
[게이트는 폭주했겠군. 아쉬운 일이다.]
[아니, 폭주하지 않았다. 그게 이상하다.]
[클리어가 됐다고? 주변에 한국 각성자들이 많았나?]
[그렇지도 않다. SG도, 한국 정부도 누가 각성했는지를 찾지 못하고 있다.]
[직접 찾아봤나?]
[인간 각성자가 벌인 일은 맞다. 하지만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레벨업을 한 흔적조차 없고.]
[거슬리는군.]
그 순간, 세 명의 남자 중 성격이 가장 급한 이가 말했다.
[사소한 일에 신경 쓸 필요 없지 않나? 그래 봐야 인간이다.]
[사소한 일이 대의를 망치기 마련이다.]
[중원의 절대자를 잊었는가? 그도 인간이다.]
‘중원의 절대자’란 단어에 잠시 침묵하던 세 명의 남자들이 대화를 이었다.
[뭐, 우리도 인간으로 태어났으니까.]
[다들 주제에 집중하지. 게이트가 클리어됐다면 필터 몬스터는 살아 있는 건가?]
[그렇다.]
[린트콕을 필터링시키는 건 어때?]
[그건 페이즈 2의 계획이 아닌가?]
[페이즈 1에서도 한 번쯤 충격을 줄 때가 됐다. 어차피 한국에는 강한 각성자가 많잖아.]
[하긴, 어차피 린트콕은 폐기 처분해야 하니까. 난 찬성이다.]
[좋아. 둘이 찬성한다면 나도 찬성하지.]
의견이 일치되자 이야기는 순식간이었다.
[난 한국의 SG를 움직이지.]
[난 린트콕을 맡겠다.]
[내가 필터링을 준비하면 되겠군.]
칠흑 같은 어둠이 서서히 물러나기 시작했다.
[아주 오랜만에 식사를 할 수 있겠군.]
[부디 한국인들의 영성이 풍족하길.]
[……신격(神格)을 위하여.]
그렇게 어둠이 완전히 물러나고 나타난 풍경은…….
금방이라도 중세시대의 귀족들이 만찬을 즐길 것만 같은 고성(Old Castle)의 최상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