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26화 (26/337)

<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26화>

* * *

속초생태공원이 한눈에 보이는 최고급 펜션의 뷰는 꽤 멋졌다.

괜히 숙박 비용이 서울 도심의 5성급 호텔에 맞먹는 게 아닌 듯했다.

11시쯤 펜션에 도착한 상림의 가족은 짐을 풀고 주변의 자연 경관을 구경하다가 두 그룹으로 나뉘었다.

아름다운 바닷가의 백사장을 구경하는 유혜연과 상소윤.

자연이 그대로 간직된 등산로에 오르는 상림과 진유성.

“나랑 소윤이는 매운탕 집에서 점심 때울 거야. 등산로 중턱에 유명한 백숙 집 있다니까, 유성이랑 당신은 거기서 먹어요.”

“응, 알았어.”

“산 탄다고 무리하진 말고.”

“응.”

상림의 반응을 본 유혜연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디 아파요?”

“응? 아니. 왜.”

“좀 긴장한 거 같아 보이는데?”

“아닌데? 운전을 오래해서 그런 가 봐. 산 타면서 땀 좀 빼야겠네.”

사실은 긴장한 게 맞았다.

아내와 딸이 떠나고 나면 생사현관을 타통할 예정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상황을 설명할 수는 없었다.

“그래요. 유성아, 우리 간다.”

“재밌게 노세요, 외숙모.”

진유성의 인사를 받은 유혜연이 상소윤과 팔짱을 끼고 바닷가로 향했다.

두 사람이 더는 보이지 않을 때쯤, 진유성이 입을 열었다.

“돈은 준비됐냐?”

“무슨 마피아 같은 멘트예요. 보내 드릴게요.”

상림이 투덜거리며 진유성의 계좌로 200만 원을 이체했다.

저 계좌를 터 준 게 자신의 아내이며, 들어 있는 돈의 100퍼센트가 용돈이라는 걸 생각하면 뭔가 억울했다.

핸드폰으로 입금을 확인한 진유성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가자.”

“어디로요?”

“산으로.”

* * *

“헉! 헉!”

상림이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정말이지 죽을 것 같다.

하지만 악마 같은 진유성은 만족하지 못한 모습이었다.

“움직여! 더 빨리 움직이라고!”

“주, 죽을 거 같아요!”

“그럼 죽어!”

“으아아악!”

진유성이 휙 하고 다가와 상림의 명문혈을 가격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엄청난 고통이 밀려왔다.

“아악!”

“뛰어!”

더는 못 움직일 것 같았는데 어디선가 기운이 샘솟았다.

진유성이 자극한 명문혈은 신체를 구성하는 혈도의 중심이 되는 혈이었다.

내공을 전수할 때 명문혈을 이용하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러니 이 명문혈을 자극하면 신체에 남은 기운이 전신으로 고루 퍼지며 일시적으로 힘을 회복할 수 있었다.

“헉, 헉.”

상림은 그 뒤로도 산을 오르고 올랐다.

본래 속초생태공원은 자연 보호를 위해 지정된 등산로를 벗어나면 안 됐고, 그러지 못하도록 지키는 보안 요원들도 있었다.

하지만 진유성의 예리한 기감 앞에서 그들의 역할은 무용지물이었다.

그렇게 진유성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상림을 더 험하고 더 깊은 곳으로 밀어 넣었다.

그가 상림을 괴롭히는 건 아니었다.

근육이 자극되면 혈도가 말랑말랑해지고, 기운이 통하기 좋은 상태가 된다.

그러기 위해서 최대한 상림을 한계까지 몰아세우고 있는 것이었다.

“야? 걷냐? 걸어?”

물론 갈구는 게 재미없다는 건 아니지만.

“어쭈, 빠져 가지고 이제 교주 말도 무시하냐?”

“사, 살려…… 살려…….”

상림은 이제 제대로 말조차 하지 못할 만큼 지쳐버렸다.

걷는 것보다 느리게 산을 올리던 상림이 풀썩 쓰러지려는 찰나.

진유성이 상림의 명문혈을 가격했다.

“우웩!”

상림이 검은 피를 토했다.

명문혈을 자극한 덕분에 그동안 쌓은 수많은 탁기와 울혈을 토해 내는 순간이었다.

상림이 그대로 기절하자, 진유성은 번개 같은 몸놀림으로 상림을 곱게 눕혔다.

원래 진유성의 진기 수발 능력이라면 생사현관 타통이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한국, 아니 지구는 좀 이상했다.

자연환경과 무관하게 천지간에 탁기가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이렇게 되면 생사현관 타통을 위해 온몸의 혈도를 활짝 여는 순간 탁기가 내려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건 새하얀 옷을 입고 진흙 위를 뒹구는 것과 마찬가지, 그러고도 옷이 깨끗하길 바라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하지만…….

진유성은 중원이 배출한 고금제일의 무인, 아니 무신.

고오오오오.

진유성의 몸에서 뿜어 나오는 기운이 반경 1장(약 3미터)를 통제하기 시작했다.

그의 내공이 천지간의 탁기를 밀어냈고, 대기 중의 불순물을 밀어냈다.

이제 진유성 상림을 둘러싼 반경 1장은 세상에서 가장 청정한 공간이 되었다.

진유성은 기세를 몰아 상림의 단전을 자극했다.

아직 얼마 없는 상림의 내공이 진유성의 자극에 미친 듯이 들끓기 시작했다.

진유성은 그 내공을 이끌고 임맥과 독맥을 공격했다.

쾅!

쾅!

본래 생사현관을 타통하는 것은 목숨을 걸 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진유성은 상림의 임독양맥을 단숨에 타통시켰다.

상림이 다시 한번 대주천의 경지에 오르는 순간이었다.

상림의 혈도를 따라 막힘없이 흐르는 내공이 백회혈, 명문혈, 회음혈, 용천혈을 통과해 원을 그렸다.

후웅-

한 번의 대주천이 이루어질 때마다 회전하는 내공의 덩어리가 커졌다.

후웅-

그렇게 몇 번의 대주천을 반복했을까?

무의식 속에서 운공하던 상림은 갑자기 정신을 차렸다.

“아…….”

상림은 눈을 뜨는 순간 깨달았다.

자신이 생사현관이 타통됐고, 절정의 경지에 올라섰다는 걸.

감각의 질이 완전히 달랐다.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미각.

오감이 받아들이는 정보량의 폭이 말도 안 되게 넓어졌다.

‘그래. 맞아. 이런 기분이었어.’

상림은 그와 동시에 주변 1장에 펼쳐진 진유성의 배려가 느껴졌다.

진유성은 자신의 내공을 이용해서 모든 탁기와 불순물을 밀어내고 있었다.

감동적이다.

산을 오를 때만 해도 너무 힘들어서 속으로 진유성을 엄청나게 욕하고 있었는데…….

과거의 자신이 미워질 정도로 감동적인 장면이었다.

“교주님…….”

상림의 촉촉한 목소리에 진유성이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계산 잘못했다. 오백은 더 받아야겠어.”

* * *

산을 내려오는 상림의 발걸음을 가벼웠다.

마음만 가벼운 게 아니라, 실제로 몸도 가벼웠다.

내공의 양은 부족할지 몰라도 수발이 자유로워지니 적은 양으로도 큰 효과를 낼 수 있다.

‘기분 최고군.’

진유성에게 500만 원을 더 뜯겼다지만, 이번 거래는 상림이 생각하기에도 꽤 합당한 가격 같았다.

교주님은 반경 3미터를 완벽하게 통제했다.

이를테면, 3미터짜리 호신강기를 펼친 셈이었다.

호신강기를 펼치는 데 어느 정도의 내공이 드는지를 잘 알고 있으니, 내공 소모를 생각하면 오히려 500만 원이 싸다고 생각됐다.

하지만 상림이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진유성이 내공을 허공에 뿌린 것은 맞았다.

밀도가 더 높은 진유성의 내공이 공간을 채우면 탁기를 비롯한 불순한 기운들이 밀려나니까.

하지만 진유성은 내공을 호신강기처럼 유형화된 형태로 만든 것이 아니다.

그저 기운의 형태로 뿌리기만 한 것이다.

그리고 상림의 생사현관 타통이 끝나자 그 기운을 다시 단전으로 회수했다.

소실되는 내공이 아예 없진 않았지만 그건 극소량에 불과했다.

상림의 상식으로는 허공에 내공을 뿌리면 사라지겠지만, 진유성은 압도적인 내공 구속력을 타고난 이었다.

‘뭐, 내가 고생한 건 맞으니까.’

진유성은 콧노래를 부르는 상림을 보며 속으로 웃었다.

이상한 노래를 흥얼거리던 상림이 입을 열었다.

“교주님, 교주님.”

“왜.”

“이제 탈모도 해결되겠죠? 모공에서 힘이 샘솟고?”

“옛날엔 너 머리숱 많았지?”

“그렇죠. 추수철의 밀밭처럼 풍성했죠.”

“그렇게 돌아올걸? 이미 난 흰머리가 까매지진 않겠지만, 새로운 머리가 날 땐 검은색일 거고.”

“흰머리가 아니라 새치…… 아니 무슨 상관이야. 난 다시 태어났는데.”

기뻐하던 상림이 슬쩍 진유성의 눈치를 보곤 물었다.

“그것도…… 돌아오겠죠?”

“그게 뭐야?”

“아, 왜 그거 있잖습니까. 무력보다 심력보다 중요한 거. 남자의 자신감.”

“아, 뭐. 정력?”

“네.”

“돌아오냐고 묻는 건 잃었다는 건데…… 너 고자라도 됐었냐?”

“아니, 고자라니요! 그냥, 좀 고개를 숙인 거지…….”

진유성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건 머리숱보다 더 빨리 돌아오지. 심기체와 관련된 건데. 이미 돌아왔을걸?”

“……!”

상림의 얼굴에 비장미가 떠오르더니, 진유성에게 한 가지 부탁을 건넸다.

상림의 부탁을 들은 진유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500만 원이나 더 뜯어냈으니 이 정도 부탁은 들어줘도 될 것 같다.

잠깐 쑥스러운 표정을 지은 상림이 물었다.

“근데 교주님.”

“응?”

“제가 한국으로 오고 중원에서 90년을 더 사셨다고 했죠?”

“엉. 그치.”

“혹시 혼인은 하셨습니까? 아니면 혼인은 못했어도 정인이 있었다던가.”

사실 예전부터 궁금했던 건데, 묻질 않았다.

어차피 교주님은 중원으로 돌아갈 수 없으니 과거의 기억을 들추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멸마대, 그리고 생존대를 거쳐 대명제국을 통일한 진유성, 신주청, 상림은 중원에서 혼인하지 않았다.

혼인하게 되면 여자 쪽 집안에서 막강한 권력을 쥐게 될 텐데, 고결함이 없는 권력자는 반드시 부패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상림은 게이트 너머로 사라지고, 신주청은 죽었다.

진유성이 아무리 고강한 무공을 가지고 있어도 그도 사람이기에 외로움을 탔으리라.

교주님도 그런 상황에서는 배우자를 맞이하지 않았을까?

이게 상림이 가지고 있던 궁금증이었다.

“아니? 내가 혼인을 왜 해?”

“외롭지 않으셨습니까?”

“외로웠지. 하지만 내가 혼인을 하면 나라가 개판이 나잖아. 가뜩이나 신으로 취급받았는데.”

진유성의 대답에 상림은 적잖이 놀랐다.

결국 진유성은 끝까지 그들의 대의를 위해 고독마저 감내했다는 말이니까.

“하지만…….”

“네?”

“아니다. 아무튼 혼인하거나 정인이 있진 않았어.”

“그렇군요.”

상림이 내친김에 그동안 궁금하던 것을 물었다.

“주청이 형님은 어떻게 돌아가셨습니까?”

“주화입마.”

“주화입마요? 교주님 다음으로 강하던 주청이 형님이?”

“사실 나도 잘 몰라. 내 생각에는 주청이가 날 위해 무리했던 것 같다.”

천마신교의 2인자였던 신주청은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지 못하고 조금씩 늙어 갔다.

워낙 고강한 무공을 가지고 있는 탓에 그 속도는 느렸지만, 어쨌든 그는 세월과 함께 흘렀다.

하지만 진유성은 늙지 않았다.

오히려 어려졌으며, 더욱 고강해졌다.

“주청이는 마지막 벽을 넘으려 했던 것 같아. 자신마저 죽으면 내가 너무 외로울 테니까 나와 같은 경지에 오르려고 했던 거지.”

그러나 신주청은 마지막 벽을 넘지 못했고, 폐관 수련 중에 소천했다.

그 시신을 거둔 것은 진유성이었다.

상림은 충격에 빠져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생각해 보면 중원에서도 그랬다.

상림은 적당한 선에서 자신을 위한 즐거움을 찾았다면, 신주청은 늘 진유성의 뒤를 쫓았다.

“……그렇군요.”

“뭐, 다 지난 일이잖아? 너도 22년 동안 개고생했다며?”

“정확히는 한 17년 정도 했죠. 최근 5년은 잘 먹고 잘 살았습니다.”

“고생했다.”

그때 속초생태공원의 등산 진입로가 보였고, 저 멀리 숙소로 잡은 펜션도 보였다.

어느새 산을 다 내려온 것이었다.

“교주님.”

“엉?”

“가서 맛있는 거 드시죠.”

“좋지. 식도락은 이 세계가 훨씬 발전한 거 같아.”

“그거 다 조미료 맛입니다. 몸에 안 좋아요.”

“뭐 어때. 어차피 난 독기를 자연 배출하는데.”

“그럼 돈독도 배출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어쭈, 개기냐?”

진유성의 손이 상림의 뒤통수를 노리는 순간, 이제 초절정 고수가 된 상림이 보법을 밟으며 공격을 피해 냈다.

하지만 이어진 진유성의 손놀림에 결국 뒤통수를 헌납해야 했다.

퍽!

“아파요!”

“아프라고 때린 거야.”

그들이 서로의 상처를 위로하는 방식이었다.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