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21화>
“아, 맞어. 상림아.”
“예?”
“내가 생각을 해 봤는데, 헬리콥터는 너무 비싼 것 같더라. 재벌들도 가난한 여자를 쫓을 때나 어렵게 타고, 좀비 사태의 생존자들을 위한 최후의 보루더라고.”
“어…… 비싸죠. 엄청 비싸요.”
상림은 진유성의 상식을 지적하고 싶은 마음을 꾹 눌렀다.
자신에게 유리한 이야기가 나올 것 같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요?”
“내가 너한테 헬리콥터를 사 달라고 했던 건, 이 세계 대해 너무 무지했던 것 같다.”
“……!”
상림은 그 순간 드라마와 영화에 대한 찬양의 미사여구를 백 가지쯤은 떠올렸다.
상식을 드라마에서 배우면 어떤가! 드라마도 상식 위에 지어진 건데!
“그래서 좀 현실적인 걸로 약조를 변경하려고.”
“변경이요?”
“내 너에게 죄를 짓도록 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냐?”
“죄요?”
죄라는 단어에 상림이 기묘한 표정을 짓자, 진유성이 말했다.
“천마신교 제삼교리.”
-천마신교 제삼교리(第三敎理).
천신에게 거짓을 고하는 자, 그 죄가 깊어 영겁토록 고통받을지어다.
제삼교리에 따르면 진유성에게 헬리콥터를 사 준다고 약속했는데,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죄를 짓는 셈이 된다.
상림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이나 생각하는 거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천마신교 교리는 UN 인권위 제소감이다.
아니, 제소가 확실하다.
‘이건 뭐 마피아도 아니고.’
그러나 상림은 한 가닥 기대를 품었다.
진유성이 상식을 갖췄으니, 헬리콥터처럼 말도 안 되는 물건은 아닐 것 아닌가?
“그래서 뭐가 갖고 싶으십니까?”
“말.”
“말이요?”
“어.”
예상치 못했던 말이었지만, 말이라면 나쁘지 않았다.
상림은 과거에 재벌 일가의 승마장을 시공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승마장에 말을 제공할 회사에 몇 가지 도움을 준 적이 있었다.
대표가 엄청나게 고마워하며 말을 살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하라고 했는데, 그 인연을 지금 써먹을 수 있을 것 같다.
“혹시 몰라서 드리는 말씀인데, 말은 아무 데서나 못 탑니다. 정해진 곳에서만 타야 해요.”
“나도 그 정도는 안다.”
“좋습니다. 그럼 주말에 함께 목장에 가시죠. 마침 제가 아는 곳이 있습니다.”
“아냐. 내가 이미 봐 둔 말이 있다.”
상림이 고개를 갸웃했다.
‘봐 둔 말이 있을 수가 있나? 혹시 경마 경기를 보신 건가?’
상림이 조심스레 물었다.
“주인이 있는 말을 뺏어 올 수는 없습니다.”
“주인이 없는 말이다. 돈을 내면 내가 주인이 되겠지만.”
상림이 유기마 센터라는 게 세상에 있을까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이, 진유성이 주섬주섬 스마트폰을 꺼냈다.
그러곤 사진을 하나 보여 주었다.
진유성이 내민 스마트폰 화면 속에는 흑마 한 마리가 늠름한 자태를 선보이고 있었다.
상림은 저도 모르게 외마디 탄식을 내뱉었다.
“아, 씨바.”
페라리였다.
* * *
상림은 진유성에게 한국 문화에서 차를 가리키는 ‘애마’와 ‘말’이 완전히 다르다는 걸 설명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서, 한국법상 18살에 차를 운전할 수 없다는 것까지 설명하자 진유성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나라의 법이 안 된다면 어쩔 수 없지.”
“네.”
“그럼 이 말은 내가 차를 몰 수 있는 나이가 되면 받도록 하마.”
“……그건 나중에 얘기하시죠.”
대답을 얼버무린 상림은 재빨리 진유성이 관심을 보일 주제로 대화를 돌렸다.
“교주님, 곧 전학 날짜가 나올 것 같습니다. 아마 보름 내로요.”
“학교라…….”
“왜요? 내키지 않으십니까?”
“글쎄. 싫다, 좋다의 문제가 아니라 잘 모르겠어. 내가 학교에 꼭 가야 하나?”
“꼭 가셔야 합니다. 위장 신분을 안정화시키는 데는 학생만 한 게 없거든요.”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주민등록증을 발급받고, 졸업을 하는 것만으로 위장 신분은 완벽히 안정화된다.
“뿐만 아니라 SG에게 확실히 정체를 숨길 수도 있고요.”
서울역 게이트를 클리어한 정체불명의 각성자가 고등학생일 거라고 누가 생각하겠나.
상림이 생각하기에 아직 사람들은 서울역 게이트의 주인공을 찾아 헤맬 것이었다.
못 찾겠다고 포기하기엔 진유성이 보여 준 힘이 너무 고강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보다 중요한 건…….’
학교에 다니다 보면 진유성에게 상식이 생길 거라는 점이었다.
페라리를 사 달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입에 담지 않을 상식!
“학교는 가야겠네. 정체를 숨기려면 어쩔 수 없지.”
상림이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의 입장에선 진유성의 정체가 드러나는 건 위험한 일이었다.
무력으로 억제할 수 없는 교주님을 억제하기 위해 SG에서 자신을 이용할 거니 말이었다.
‘한데 교주님은 정체를 숨길 필요가 있나?’
정체가 드러나면 귀찮은 일이 많긴 할 거다.
하지만 그가 아는 진유성의 성격이라면, 나서서 정체를 밝히진 않아도 꽁꽁 숨기진 않을 것 같다.
뭔가를 열정적으로 숨기는 것도 꽤 귀찮은 일이기 때문이었다.
“교주님.”
“엉?”
“생각해 보니까 교주님은 왜 정체를 숨기려 하십니까?”
“히어로들은 늘 그러던데?”
“어, 음. 그렇긴 하죠.”
상림이 ‘그럼 그렇지’라는 표정을 짓자 진유성이 슬그머니 주먹을 들었다.
“뒈질래? 어째 갈수록 불경해지는 것 같다.”
상림이 찔끔하자, 진유성이 말을 이었다.
“상림아.”
“네.”
“난 중원에서의 일을 반복하고 싶지 않다.”
“중원에서의 일이요?”
상림의 반문에 진유성이 드물게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난 천마신교에서 전술핵 같은 존재였다.”
전술핵.
모든 사람들이 그 압도적인 파괴력을 알고 두려워하는 존재.
전술핵에 대한 두려움은 국가의 분쟁이 어느 선을 넘지 않도록 억제하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억제력은 핵이 발사되지 않을 때에야 비로소 진가를 발휘한다.
정말 핵이 발사되면 그때부터 너 죽고 나 죽고의 이판사판 전쟁이 벌어진다.
천마신교에서 진유성이 그랬다.
그는 천마신교에서 전술핵 같은 존재였다.
진유성이 나서는 순간, 그를 신으로 모시는 이들로 인한 성전(聖戰)이 시작된다.
이것은 비약이 아니었다.
진유성이 실제로 겪은 일이었다.
“내 힘이 공개되면 이곳에서도 비슷한 일이 진행될 거야.”
자신을 포섭하기 위해 수많은 유혹과 협박이 이어질 것이다.
또는 가질 수 없는 위험 요소를 제거하려는 쪽도 있을 것이고.
“내가 힘을 드러내 모든 이들을 굴복시키면 결국 천마신교의 교주처럼 되는 거야.”
“……그렇겠죠.”
“새로운 세상까지 와서 그러고 싶지 않다.”
진유성의 말에 상림은 적잖이 놀랐다.
매일 드라마 대사나 따라 하고 있던 진유성이 이토록 깊은 통찰력을 발휘할지 몰랐다.
전술핵이란 걸 이해한 것도 신기하고, 그게 현대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이해한 것도 신기하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진유성은 중원이 탄생한 이래 출현한 유일무이한 고수이다.
고금제일(古今第一)이란 칭호가 부족할 정도다.
고수란 깨달음이 깊은 이들이고, 깨달음이란 지성의 영향을 받는다.
‘맞아…… 교주님은 원래 굉장히 똑똑하셨지.’
정도맹에게 쫓기던 생존대 시절, 진유성의 기지가 아니었다면 그들은 죽어도 수십 번을 죽었을 것이었다.
생각해 보면 진유성의 무공보다 두뇌에 놀랐던 적이 더 많았다.
‘근데 지금은 왜 이 모양이지?’
상림은 금방 정답을 깨달았다.
천마신교의 교주로 산 백 년.
그게 진유성에게 생각하는 힘을 빼앗아 간 것 같았다.
천마신교의 교주는 생각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
교주가 ‘나무’를 ‘꽃’이라고 부르면, 다음 날부터 중원의 모든 이들이 나무를 꽃이라고 부를 테니.
그 버릇이 남아서 아직도 막무가내로 우기고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상림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우리 애가 머리는 좋아요. 좋은 머리를 안 써서 그렇지…….”
“뭐?”
“아, 아닙니다. 실존하는 유니콘을 본 기분이라 말해 봤어요.”
딱!
부지불식간에 날아온 진유성의 손바닥이 상림의 머리를 때렸다.
“아! 왜 때리십니까!”
“알아듣진 못했는데 내 욕하는 거 같아서.”
“…….”
귀신같이 알아차리는 걸 보니 역시 영리하다.
딱!
“이번엔 왜요!”
“속으로 내 욕한 거 같아서.”
“이번엔 아니었거든요?!”
“그럼 미안.”
상림은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진유성이 정체를 숨길 마음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상림이 보기엔 진유성의 생각에는 비약이 꽤 있었다.
상림이 알기로 각성자 집단은 몇 개 없었다.
SG가 전 세계 게이트 관리와 각성자 관리의 70퍼센트 가까이를 독점했고, 멕시코, 중국, 북한이나 중동 연합 같은 곳이 SG와 분리됐을 뿐이었다.
게다가 처음에야 각성자가 없으면 세상이 망할 것 같은 분위기였지만, 지금은 또 그렇지도 않다.
한국처럼 완벽히 안전을 유지하는 나라는 드물지만 대부분의 선진국은 사회 시스템을 확실히 안정화시켰다.
‘게이트에서 괴물이 꾸물꾸물 나오는 것도 아니고, 실패하면 그저 터질 뿐이잖아.’
서울역 같은 곳에서 터지면 난리가 나겠지만, 지방 도시에서는 오히려 게이트가 터져서 경제가 살아난 곳들도 있었다.
폐허가 된 곳에 계획 구역을 건설할 수가 있으니까.
‘뭐, 게이트 관리세 때문에 세금은 좀 많이 내지만.’
아무튼 이런 이유로 상림은 진유성이 세상에 정체를 드러내도 암살자가 올 것 같진 않았다.
그냥 회유 경쟁이 엄청난 정도가 아닐까.
‘내가 모르는 각성자들만의 비밀이 있을 수도 있지만.’
“무슨 생각인지 알겠습니다. 아무튼 전학 수속 밟겠습니다.”
“그래. 나도 가기 싫은 건 아니야. 재밌어 보이기도 하던데.”
“공부는 모르겠지만, 일단 학창 시절은 재밌을 겁니다.”
“공부도 뭐, 네가 나한테 성적 압박을 주진 않을 거 아니야?”
“저는 몰라도 제 와이프는 주지 않을까요?”
“뭐? 왜?”
“아내의 눈에는 교주님의 미래가 불투명해 보이니까 그렇죠.”
상림이 잠시 생각하더니 말을 이었다.
“생각해 보니까 불투명해 보이는 게 아닌데요? 불투명하잖아요. 졸업하면 뭐 하고 사실 겁니까?”
“뭔가 하겠지.”
“그니까 뭐요?”
“아, 몰라. 뭐라도 하고 살겠지.”
“교주님, 진로라는 건 최대한 빨리 결정해야 하는 겁니다. 요즘은 백세 시대라고 하잖아요.”
“백 살 넘었다.”
“아무튼요. 원래 고등학교 때부터 진로에 대한 굳건한…….”
“아 시끄러워! 정 할 거 없으면 게이트에서 몬스터들 때려잡으면 되지!”
“정체 숨기신다면서요?”
“세상에 먹고 사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있냐? 아니면 끝까지 너한테 빌붙어 줘? 페라리는 언제 사 줄 건데?”
“각성자가 참 좋은 직업입니다. 무력이 있으니 어디 가서 무시받을 일 없지, 사회적인 지위도 있지, 돈도 많이 벌…….”
돈?
상림은 그 순간 떠오르는 생각에 깜짝 놀랐다.
각성자는 고수익을 올리는 직업군이다.
각성자의 수익은 마정석, 아이템 같은 부산물에서 나오는데, 듣기로는 게이트를 클리어하면 공헌도에 따라 자동으로 부산물이 분배된다고 했다.
그런데…….
진유성은 D등급 게이트를 클리어했다.
그것도 거의 혼자서.
“교, 교주님.”
“엉?”
“인벤토리 한번 열어 보실 수 있습니까?”
“인벤토리? 그거 밖에서도 쓸 수 있어?”
“그런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안 써 보셨습니까?”
“어. 안 써봤는데? 갑자기 그건 왜?”
“궁금한 게 있어서 그렇습니다. 한 번만 열어 보세요.”
진유성이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열었어.”
“아, 그거 타인한테 목록을 공유할 수 있습니다. 아마 저한테 공유한다고 말하면 될 거예요.”
“말은 무슨.”
다른 각성자들은 시스템에게 말을 거는 모양이지만, 진유성은 말을 걸지 않았다.
심상을 전달하면 시스템은 알아서 작동한다.
말로 하는 것보다 훨씬 빠르고 정확하기도 하다.
진유성이 인벤토리 목록을 상림에게 공유하는 순간, 상림이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