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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19화 (19/337)

<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19화>

기분이 한껏 좋아진 상림이 컴퓨터 모니터를 힐끔 보더니 물었다.

“근데 그건 왜 검색하십니까? 이 헬멧은 또 뭐고요?”

“오다 샀다.”

“이걸 사셨다고요?”

상림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더는 묻지 않았다.

진유성이 남의 물건을 훔칠 위인은 아니기도 했고, 상림도 이런 물건이 얼마나 하는지 몰랐다.

“근데 아이언맨이 뭐냐?”

“영화 주인공이에요. 영화가 뭔지는 아시죠?”

“알아. 근데 이렇게 생긴 사람이 있다고? 얼굴이 이래?”

희한하다는 듯이 가면을 쳐다보는 진유성을 보며 상림이 슬쩍 웃었다.

“아뇨. 이건 주인공이 입는 슈트, 그러니까 가면이에요.”

“아, 탈을 쓰고 활동하는 인물이구나?”

“그런 셈이죠. 한번 보실래요?”

“영화란 게 재밌나? 저번에 명나라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봤는데 눈뜨고 못 봐 주겠던데.”

“제목이 뭐였는데요?”

“몰라.”

설명을 들어 보니, 케이블 채널에서 재방송하는 삼류 무협 영화를 본 모양이었다.

시대 고증도 개판이었을 거고, 액션 신도 엉망이었을 거니, 재미가 있으려야 있을 수가 없다.

‘어쩐지 영화에는 관심도 안 두시더니.’

맨날 다큐멘터리와 소설을 보면서도 영상 콘텐츠에는 일절 관심 없던 이유가 여기 있었다.

평소 같으면 상림은 그러려니 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관대한 진유성 덕분에 기분이 좋은 상태라서 좀 더 호의를 베풀게 되었다.

“이 영화는 재밌을걸요? 제가 결제해 놓을 테니 심심할 때 한 번 보셔요.”

상림이 로그인을 하며 중얼거렸다.

“요즘 각성자들 데리고 시리즈 다시 찍고 있던데, 그래도 전 오리지널 시리즈가 가장 재밌더라고요.”

각성자의 등장으로 영화 산업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실제 스킬을 활용해 영화를 찍거나, 각성자를 배우로 활용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배우가 각성자일 경우 대역 없는 초고난이도의 액션이 가능했다.

실제 비행기에서 뛰어내리고, 시속 100킬로미터로 달리는 자동차를 갈아탈 수가 있다.

얼핏 생각하면 SG가 각성자의 연기 활동을 막을 것 같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SG는 각성자가 지나친 신인류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경계한다.

일반 대중의 입장에서도, 각성자를 관리하는 SG 입장에서도, 각성자는 인간이어야 했다.

그래서 SG는 각성 등급이 낮은 하위 각성자들 중 연예 재능-보통은 외모-이 뛰어난 이들을 A급 각성자로 포장해 연예인으로 만들기도 했다.

또는 각성 전부터 배우였던 이들의 활동을 용인해 주기도 했고.

상림은 진유성이 궁금해하지도 않은 정보들을 주저리주저리 떠들며 영화를 결제했다.

“여기 플레이 리스트 보이시죠? 이 순서대로 보셔야 재밌습니다.”

아이언맨 시리즈뿐만 아니라, 연동되는 세계관의 영화들까지 결제한 상림의 당부에 진유성이 귀찮다는 듯 손을 저었다.

“심심할 때 볼 테니까, 가서 잠이나 자.”

“오늘은 내공 수련 안 합니까?”

“술 마셨잖아. 내일 일찍 퇴근해서 한 시진(2시간) 정도 달리고 와라.”

“알겠습니다.”

상림이 꾸벅 인사하고는 방에서 나갔다.

진유성은 그 뒤로 한참 동안 인터넷 세상을 돌아다녔다. 인터넷이란 요물은 참 신기해서, 봐도 봐도 끝이 없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시계를 보니, 어느덧 새벽 1시가 지나 있었다.

‘이만 잘까?’

고민이 된다.

무공이 고강한 진유성의 신체는 수면에 큰 영향을 받지 않는다.

신체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 일주일에 서너 시진(6~8시간) 정도는 자야겠지만, 운기행공으로도 충분히 수면을 대체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진유성은 중원에서 매일매일 네 시진(8시간)씩 잤었다.

이유는 딱 하나.

할 게 없어서.

그러나 할 게 넘쳐 나는 한국에서는 자는 시간이 아까웠다.

‘너무 오래 안 자서 정신적으로 피곤하긴 한데…….’

상림이나 유혜연은 모르겠지만, 진유성은 이 집에 들어온 후로 잠을 거의 안 잤다.

수면 시간이 열흘을 합쳐야 두 시진밖에 안 됐다.

새롭게 접한 문물이 재밌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너무 오랜 안 잔 탓인지 정신적인 피로감이 느껴졌다.

진유성의 신체는 운기행공으로 잠을 대체할 수 있지만, 뇌는 그렇지 않았다.

100년 가까이 각인된 숙면이란 행위가 갑자기 사라지면, 뇌에서는 이상 신호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진유성은 고민했다.

자고 싶지는 않지만 자야 할 것 같다.

그런 진유성의 눈에 문득 상림이 결제해 준 영화의 리스트가 보였다.

‘흠. 영화나 좀 보고 재미없으면 자야겠다.’

진유성은 리스트의 제일 위에 있는 영화를 클릭했다.

잠시 뒤, 타이틀이 올라오며 영화가 시작되었다.

‘흠.’

처음엔 이해하기 힘들었다.

언어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문화가 와닿지 않은 것이었다.

‘그만 볼까?’

하지만…….

진유성은 곧 영화에 빠져들었다.

* * *

한남동에서 고급 피규어 가게를 운영하는 김진태는 아침에 가게 문을 열며 고개를 갸웃했다.

보안 시스템을 해제하고 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왠지 위화감이 느껴졌다.

평소와 뭔가가 다른데…….

뭔지 모르겠다.

‘가게가 깨끗해진 것 같기도 하고?’

고개를 갸웃하던 김진태는 결국 위화감의 정체를 발견하지 못하고 업무를 시작했다.

평소처럼 진열장을 청소하고, 어제 들어온 피규어를 진열하고, 판매 목록을 기록하는 등 바쁜 일과가 이어졌다.

그렇게 저녁이 되고, 알바생과 업무를 교대를 하는 순간.

김진태는 위화감의 정체를 알아냈다.

“사장님, 메인 디피 상품 팔린 거예요? 절대 안 판다면서요?”

“뭔 소리야, 내가 그걸 왜 팔아? 내가 그걸 사려고…….”

“어우, 지겨워. 미국에 직접 가서 치열한 경매 끝에 사 왔는데, 경매 상대가 인터넷에 이름만 검색하면 나오는 부호라는 거요?”

“잘 아네. 갑자기 고놈은 왜?”

“왜긴 왜겠어요? 없으니까 그러죠.”

“뭐, 뭐?”

김진태는 순간 심장이 덜컥했다.

태풍이 오던 날 코앞에 간판이 떨어진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지금만큼 간담이 서늘하진 않았다.

김진태가 헐레벌떡 매장의 입구로 향했다.

매장 입구에는 초고가의 합금 유리로 만들어진 진열대만 있었다.

진열대만.

진열대만……?

진열대만!

아이언맨1을 찍을 때 실제 영화 촬영에 사용됐던 헬멧이 사라져 있었다.

더 열받는 건, 헬멧 대신 천 원짜리 한 장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는 것이다.

“으아아아아아!”

김진태의 절규가 한남동 길거리를 울렸다.

* * *

일요일임에도 학원에 다녀온 상소윤은 한참 동안 과제를 하느라 바빴다.

‘에이 씨, 주말인데.’

1학년 때까지만 해도 성적 압박이 별로 없었는데, 2학년이 되니 부쩍 엄마한테서 압박이 들어온다.

처음에 아빠는 허허 웃으며 학교에서 배우는 것으로 충분한 거 아니냐고 했지만, 성적표를 본 이후로 태도가 바뀌었다.

평소에 공부 같은 거 안 해도 된다던 아빠의 태도 변화에 상소윤은 배신감을 느꼈지만…….

“딸아. 공부를 잘할 필요는 없단다. 진짜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거기에 올인해도 돼.”

“근데 인간적으로…….”

“꼴등은 하지 말자.”

할 말이 없었다.

‘하긴. 내가 부잣집 외동딸치고는 지나치게 성적 압박이 없긴 했지!’

상소윤은 그렇게 현실에 순응했지만, 재미없는 건 재미없는 거다.

방에서 컴퓨터와 휴대전화를 하며 게으름을 피우던 상소윤이 과제를 시작한 건 밤이 되어서였다.

하지만 공부 못하는 학생의 특징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상소윤은 일단 책상 청소를 시작했고, 책상 청소가 끝나니 배가 고파졌다.

‘뭣 좀 먹고 할까?’

저녁을 대충 먹었더니 배가 고팠다.

거실로 나온 상소윤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힐끔 쳐다봤다.

‘얘는 하루 종일 안 보이네.’

맨날 소파에 앉아 티비를 보던 진유성이 보이지 않자, 괜히 신경이 쓰인다.

어젯밤 말실수 때문이었다.

‘계속 부모님 생각하면서 슬퍼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부엌의 불을 켜려는데, 먼저 부엌에 와 있던 누군가의 뒷모습이 보였다.

‘진유성?’

어둠 속인 데다 뒷모습이었지만, 체구나 서 있는 모습이 꼭 진유성이다.

그런데…….

진유성이 울고 있었다.

울음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지만 어깨가 파르르 떨린다.

“야, 너 왜 그래?”

화들짝 놀라 다가가려는데 진유성이 손을 뻗어 그녀를 제지했다.

그러곤 천천히 몸을 돌렸다.

어둠 속에서도 촉촉이 젖어 있는 눈동자가 보인다.

슬픔과 그리움이 담겨 있다.

천천히, 진유성의 입이 열렸다.

“I am Iron Man.”

딱!

진유성이 핑거 스냅을 하는 순간 밝은 빛이 터져 나왔다.

환한 빛에 상소윤이 눈을 질끈 감았고, 눈을 뜨니 진유성의 모습은 흔적도 없었다.

“어…… 어…….”

놀란 상소윤이 말을 잇지 못하다가 냅다 소리를 질렀다.

“엄마! 엄마아아! 아빠!”

상소윤의 비명 소리에 집 안의 불이 켜지며 방에서 상림과 유혜연이 튀어나왔다.

잠시 뒤.

상림과 유혜연은 기가 허해진 상소윤이 헛것을 본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덕분에 그녀는 다니기 싫던 학원을 끊을 수 있었고, 며칠간 유혜연이 만든 정성 넘치는 보양식 속에서 살았다.

하지만 상림은 진실을 알고 있었다.

“아니, 교주님! 아무리 영화가 재밌었어도 그렇지. 내공까지 쓰면서 따라 하면 어쩝니까?!”

“3000만큼 미안해.”

“야!”

* * *

아이언맨 사건 이후로 진유성은 한동안 영화에 미쳐 살았다.

가리는 영화도 없었다.

재미만 있다면 코미디 영화도, 블록버스터 영화도, 공포 영화도, 멜로 영화도 가리지 않았다.

오죽하면 영화를 보는 데 하루 24시간이 모자라다며 잠을 자지 않았고, 모든 영화를 8배속으로 돌려 봤다.

더 어이없는 건 8배속으로 보는 영화가 한 개도 아니고, 동시에 두 개라는 것이었다.

기가 막힌 상림이 그렇게 영화를 보면 들어오긴 하냐고 물어보니, 대답이 가관이었다.

“너 생사결(生死結 : 목숨을 건 싸움)에 돌입하면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거 알지? 시야각이 넓어지고, 상대방 근육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도 훤히 보이고.”

“당연히 알죠.”

“왜 그런 거 같냐?”

“집중력이 최고조에 올라서 그런 거 아니에요?”

“틀린 말은 아닌데, 정확히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 내공이 상단전을 자극해서 그런 거야. 생존 확률을 올리려고.”

“……설마?”

“어.”

진유성은 내공을 이용해 인지능력을 최대한 끌어올린 상태로 영화를 보고 있었다.

그러니 8배속 재생하는 영화를 동시에 두 편이나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이런 미친 교주 놈이…….’

상림은 진짜 할 말을 잃었다.

제아무리 고수라도 해도 생사결의 상태를 임의로 만들긴 힘들었다.

목숨을 건 싸움 끝에 깨달음을 얻는다는 말이 괜히 있겠는가?

생사결의 상태에 돌입하면 평소에 이해하지 못했던 무공의 오의를 불현듯 깨닫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었다.

한데, 그런 초집중력의 상태를 만들어서 영화나 보고 있다니.

심지어 자신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 순간에도 진유성의 컴퓨터에서는 2개의 영화가 재생 중이었다.

“나가, 정신 사나우니까. 어, 아니다. 네가 재밌게 본 영화 목록이나 적고 가라.”

상림은 기막혀 하면서도 기억을 더듬어 20개 정도의 영화를 적었다.

한데 전부 다 진유성이 본 영화들이다.

‘하긴 8배속으로 두 개씩 24시간을 보는 거 아니야? 남아나는 영화가 없겠다.’

러닝타임을 3시간으로 잡아도 하루에 128개씩 영화를 보는 거다.

실제로는 그보다 적겠지만, 적어도 하루에 80개씩은 보는 것 같았다.

그렇게 진유성은 2주 가까이 영화 속에서 살았다.

남들이 재밌다는 영화는 다 본 모양인지 어느 순간부터 영화를 보는 시간이 적어졌다.

하지만 진유성이 다시 한번 빠져든 것이 있었으니, 바로 드라마였다.

그는 한국 드라마든 외국 드라마든 가리지 않고 미친 듯이 탐닉하기 시작했다.

의외로 진유성은 한국 드라마를 가장 좋아했다.

등장인물의 대사가 마음에 든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래서 진유성은 드라마 속 대사를 자주 써먹곤 했다.

“야, 밥 시켜 먹을래?”

상소윤의 물음에 진유성이 잔잔한 미소를 띠며 답했다.

“시켜 줘, 그럼.”

“뭐?”

“상소윤, 명예 소방관.”

“꺼져, 미친놈아! 꺄아아악!”

기겁을 하며 도망치는 상소윤을 보며 진유성이 고개를 갸웃했다.

드라마를 볼 때 너무 좋아서 가슴이 찌릿하던 장면이었는데 말이었다.

그렇게 진유성은 평범함에서 조금 먼 모습으로 한국에 적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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