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15화>
* * *
상림의 딸 상소윤이 입술을 삐죽이며 방으로 들어왔다.
“진짜 짜증 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진유성이 아이스크림을 전부 먹어 치운 게 화가 난다.
상소윤은 애초에 아이스크림을 큰 걸로 2개를 사 왔다.
한데 진유성은 몸속에 돼지가 들었는지 2개를 단번에 해치워 버렸다.
이러니 화가 안 나겠는가.
그러나 그녀도 알고 있었다.
상소윤이 진짜 화가 난 것은 아이스크림 때문이 아니라는 걸.
며칠 전의 일 때문이었다.
처음 상소윤은 진유성이 집으로 들어온다고 했을 때 별다른 불만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불만을 갖지 못할 만큼 놀랐다고 하는 게 옳았다.
엄마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으니까.
“이제는 우리 딸한테도 말해 줄 때가 된 거 같아.”
“응? 뭐가?”
“아빠의 정체에 대해서.”
“정체? 무슨 정체?”
“아빠는 한국 사람이 아니야.”
“엥? 그게 무슨 소리야?”
“아빠는…… 북에서 왔어.”
엄마의 이야기를 듣고 상소윤은 크게 놀랐다.
아빠가 영화에서나 보던 남파공작원이라니 말이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엄마는 철석같이 아빠를 믿고 있는 것 같았지만, 혹시라도 진유성이란 애가 아빠의 자식이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었다.
물론 이 걱정은 진유성과의 첫 만남에서 많이 희석되었다.
‘잘생겼네.’
생긴 게 아빠랑 너무 딴판이었다.
아빠가 험상궂고 부리부리하게 생겼다면, 진유성이란 남자애는 선이 굵은 얼굴은 아니었다.
걱정이 좀 가시긴 했지만, 그래도 철저해야 했다.
상소윤은 곧장 장대수 이사한테 전화했다.
“삼촌, 혹시 친자 확인 검사 같은 거 할 수 있으세요?”
장대수 이사는 상림의 회사의 창업 공신이자, 상소윤이 삼촌이라고 부르는 사람이었다.
엄마, 아빠를 제외하면 가장 좋아하는 어른이기도 했다.
-아이고, 우리 소윤이는 누굴 닮아서 이렇게 철두철미하지? 네 아빠는 완전 헐랭이인데 말이야.
“헐랭이가 뭐예요?”
-아. 취소취소. 아빠한테 말하면 안 된다.
아빠가 북에서 왔다는 이야기를 빼고 적당히 각색한 이야기를 들은 장 이사는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물론 삼촌이 아빠에게 상황을 보고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검사 결과 진유성은 아빠의 아들도, 사촌도 아니었다.
완벽한 타인이었다.
‘진짜 북에 두고 온 전우의 아들인가?’
상소윤은 엄마에게 사실을 알려 주었다.
엄마는 딸이 친자 검사까지 했다는 것에 조금 놀란 눈치였지만, 더 이상 말을 보태진 않았다.
그렇게 마음이 개운해진 상소윤은 진유성에게 잘해 줄 생각이었다.
북에서 힘든 생활을 했다는 게 안쓰러웠기 때문이었다.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얼굴도 잘생겼고, 간첩 출신이라는 것에 대한 호기심도 있었다.
‘꼭 영화 속 주인공 같잖아.’
그러나 이런 상소윤의 다짐이 깨진 것은 순식간이었다.
어느 날 주말.
친구들과 약속이 있어 한껏 꾸민 상소윤은 집을 나서려다가 거실에서 이상한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는 진유성을 발견했다.
진유성은 매일같이 컴퓨터를 하거나, TV를 보거나, 책을 읽을 뿐이었다.
벌써 집에 들어온 지 일주일이 넘었는데 나가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아직 한국에 친구가 없으니까.’
엄마의 말에 따르면 진유성이 학교에 가기 위해서는 신분 문제가 해결돼야 할 거라고 했다. 아마 아빠가 백방으로 알아보고 있을 거라고.
집을 나서려던 상소윤이 멈칫하고는 진유성을 불렀다.
“야.”
“왜 그러느냐.”
“아, 진짜 말투. 너, 그, 뭐 사다 줄까, 나갔다 오면서?”
“필요 없다.”
진유성은 시선조차 주지 않고 TV에만 몰두했다. 누가 봐도 상소윤에게 관심이 없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상소윤은 그런 진유성을 보면서 슬쩍 웃었다.
지금껏 상소윤이 연예기획사에서 받은 명함을 합치면 20장이 넘고, 남자한테 고백받은 횟수는 그보다 훨씬 많았다.
그중에 관심 없는 척을 하던 사람이 없었을까?
많았다. 그것도 엄청 많이.
‘귀여운 자식.’
괜히 놀리고 싶어진 상소윤이 진유성 앞에 서자, 진유성이 인상을 찌푸렸다.
인류가 처음 달에 발을 디디는 역사적인 순간을 보고 있는데, 상림의 딸이 TV를 막아서니 짜증 난다.
“비켜, 안 보인다.”
“오늘 친구들 만날 건데, 나 어때?”
“헛소리하지 말고 비키라고 했다.”
“아, 어떠냐고!”
진유성이 인상을 찌푸린 채로 상소윤을 힐끔 보았다.
옷은 예쁘다.
이 세계의 옷은 모양도 좋고, 질도 좋고, 색도 예쁘다.
하지만 호박에 줄을 긋는다고 수박이 되겠는가?
화려한 옷을 입으니 못생긴 얼굴이 더욱 두드러져 보인다.
“박색하구나.”
“어?”
“박색하다고 했다. 비켜라, 안 보인다.”
진유성이 손을 휘휘 젓자, 떨떠름한 표정을 짓던 상소윤이 별말 없이 집을 나섰다.
‘박색? 무슨 뜻이었지?’
사실 그녀가 말없이 나온 건, 쪽팔리게 단어 뜻을 모르는 티를 내지 않기 위해서였다.
상소윤이 정말 박색이란 단어를 모르는 건 아니었다.
다만 자신을 평가할 때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단어라 순간적으로 뜻이 헷갈린 것이다.
상소윤은 핸드폰을 열어 박색이란 단어를 검색했다.
* 박색(薄色) :
아주 못생긴 얼굴
“짜식이, 부끄럼타기는.”
말도 안 되는 평가에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려고 했으나, 뭔가 찝찝했다.
진유성의 태도와 눈빛.
그건 절대 거짓을 말하는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설마……?’
정원에 서서 뭔가를 생각하던 상소윤이 후다닥 집으로 들어가 진유성 앞에 섰다.
“야!”
“또, 왜.”
“너 진짜 나한테 못생겼다고 한 거야?”
닐 암스트롱이 달 표면에 인류의 첫발을 내딛는 중요한 장면을 보고 있던 진유성은 짜증이 났다.
문득 인터넷에서 본 단어가 떠올랐다.
말귀를 못 알아들으니, 요즘 말로 해 줘야 알아먹을 듯하다.
“응. 대존못.”
진유성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던 상소윤이 주먹을 꽉 쥐더니 문을 꽝 닫고 나가 버렸다.
진유성은 이제야 조용해졌다는 듯 만족스러운 미소로 TV에 집중했다.
진유성은 전혀 몰랐지만, 그날부터 둘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었다.
* * *
방에서 유튜브를 보고 있던 진유성은 상림이 집으로 들어오는 기척을 느꼈다.
소리를 흘리고 있던 진유성이 정신을 집중하니, 투정을 부리는 상소윤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 내꺼 아이스크림을 다 먹었다니까!’
‘그랬어? 우리 딸 화나겠다.’
‘진짜 짜증 나!’
‘아빠가 따끔하게 뭐라고 해 줄게.’
진유성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말만 한 처녀가 하는 짓을 보면 영락없는 계집아이다.
진유성이 살던 명나라의 결혼 적령기는 남자는 15~18세였고, 여자는 13~16세였다.
머리로는 한국에서 18세면 소녀라는 걸 알고 있지만, 가슴에 와닿진 않았다.
‘쯧쯧. 상림도 걱정이 많겠어.’
진유성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상림이 2층으로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내공으로 문을 열어 주니, 상림이 들어오자마자 투덜거렸다.
“내공으로 열지 마시라니까요.”
“어차피 네 발소리 들을 때만 그러니까 걱정할 필요 없다니까.”
“그래도 습관이 무서운 법입니다.”
그렇게 말한 상림이 침대에 걸터앉으며 진유성이 다루고 있던 컴퓨터의 모니터를 슬쩍 쳐다보았다.
상림이 컴퓨터 화면에 떠 있는 축구 선수 스페셜 영상을 보더니,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왜요? 축구 선수 하시게요?”
“아니. 내가 하면 반칙 아니냐?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지.”
“그런 걸 떠나서 안 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요즘은 스포츠 선수들 각성 테스트 받아요. 옛날에 각성자가 선수한 거 걸려서.”
“안 한다니까.”
고개를 끄덕인 상림이 물었다.
“그나저나 왜 자꾸 소윤이랑 싸우시는 겁니까? 애 아이스크림은 왜 또 뺏어 드셨어요?”
“아이스크림 맛있어.”
“맛있으면 같이 드셔야죠!”
“그게 네 딸이 사 온 건 줄 내가 알았냐? 그냥 있길래 먹었지.”
상림이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그건 그렇다고 쳐도…… 어른이 좀 져 줘도 되잖아요? 딸애가 투덜거리면 미안하다, 앞으로 조심할게, 하시면 되는 거 아닙니까?”
“상림아, 생각해 봐라.”
진유성이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의 생각을 풀어냈다.
“난 어른이지?”
“네.”
“네 딸은 아이지?”
“그렇죠.”
“아이가 어른을 공경하지 않고, 덤벼들면 어떻게 해야겠어? 혼내 줘야겠지? 아이를 위해서라도.”
“그런데요?”
“하지만 난 현재 아이 취급을 받고 있으니, 어른의 자세로 네 딸을 혼내 줄 수가 없어. 해서 아이의 자세로 혼내 주었다.”
“…….”
“이제 내 깊은 뜻을 알겠지? 다 널 위해서야.”
똑같은 수준에서 말싸움했다는 걸 참 그럴듯하게도 말한다.
‘하아…… 애를 둘 키우는 기분이다.’
상림이 불경스러운 생각을 하면서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진유성에게 건넸다.
“됐고, 이거나 받으십쇼.”
“뭐야, 이건?”
“이제부터 쓰게 될 교주님의 신분입니다.”
황급히 종이를 받아 든 진유성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주 긴장된 어투였다.
“네 딸의 생일이 언제지?”
“소윤이요? 9월 14일입니다.”
“좋다, 아주 좋아.”
상림이 눈을 껌뻑이다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설마 생일 때문에 그러시는 겁니까?”
엄밀히 따지면 사촌들 간에는 친구가 없다.
하루라도 먼저 태어난 사람이 손윗사람이 되고, 하루라도 늦게 태어난 사람이 손아랫사람이 된다.
물론 요즘은 시시콜콜 따지지 않고 동갑내기 친구가 되기도 한다만, 옛날 사람들 중에는 그런 걸 용납하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진유성은 옛날 사람들 중에서도 최고 옛날 사람이었고.
그런 진유성으로선 다행히도 그가 얻게 된 생일이 상소윤보다 며칠 빨랐다.
종이에 2005. 09. 04라고 적혀 있었으니까.
“당연하지. 이제 내가 손윗사람이 됐으니 딸아이에게 예의를 지키라고 말해라.”
“고작 열흘 차이인데요?”
“실제로 따지면 백 년도 넘는다.”
“실제로 따질 수가 없으니까 그렇죠.”
“일체유심조.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
“아니, 그게 거기서 쓰일 말은 아니지 않나요?”
“어허! 시끄럽다!”
“왜 자꾸 이럴 때만 말투를 바꾸는지 속하는 정말 의문입니다.”
“야, 너 헬리콥터는 언제 사 올 거냐? 설마 약속을 어길 생각은 아니겠지?”
진유성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기세를 높이자 상림이 찔끔했다.
누가 봐도 대화 논리가 부실하니 꼬투리를 잡는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금이 저렸다.
배부른 퓨마가 아기 원숭이들한테 장난을 칠 때 원숭이가 이런 기분일까?
결국 상림이 말을 돌렸다.
“제가 이 신분을 얼마나 어렵게 구했는지 아십니까? 거기 종이에 적힌 이름 좀 보십쇼.”
“응?”
화제 전환이 먹혔는지 진유성이 종이를 보고는 말했다.
“무엄하구나.”
“설마 감히 본명을, 뭐 이런 말씀을 하시려는 건 아니죠? 저 그럼 진짜 화낼 거예요.”
“아니, 난 그냥 어색해서…….”
“그럼 아예 다른 이름으로 해 드려요? 왕후는 노출됐으니까 안 되고, 김철수 이런 걸로?”
상림의 말에 잠시 생각하던 진유성이 고개를 저었다.
막상 완전히 새로운 이름으로 하자니 또 정이 안 붙는다.
‘뭐, 새로운 세계니까.’
진유성이 고개를 끄덕이자, 상림이 말했다.
“전 몇 년 동안 제 이름 못 썼습니다. 이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데요.”
상림이 아무리 번듯한 건설회사의 사장이라고 해도, 없는 신분을 만들 수는 없다.
타인의 신분을 사서, 진유성이란 이름으로 만든 것에는 정말 많은 돈과 노력이 들었다.
한국에서 이름을 바꾸는 건 쉽지만, 성씨를 바꾸는 건 어렵다.
특히 미성년자의 성씨 개명은 더욱 어렵고.
그래서 처음부터 진씨를 찾아 헤맨 것이었다.
“상림아, 근데 이 신분의 원래 주인은 어떻게 된 거냐?”
“게이트 사태로 알게 모르게 죽은 이들의 신분을 사고파는 블랙마켓이 있습니다. 서류상으로는 살아 있었지만, 사실은 이미 죽은 아이였죠.”
“그렇군.”
“아무리 한국이 게이트 사태 이전과 삶의 질과 가장 비슷한 나라라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많이 썩어 버렸죠.”
진유성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상림에게 손짓했다.
“볼일 다 봤으면 나가. 난 컴퓨터 좀 하려니까.”
“교주님, 내일은 나가서 세상도 구경하고 그러십쇼. 맨날 집에 있으니까 소윤이랑 싸우는 거 아니에요.”
“흠. 그럴까?”
“네. 쇼핑이라도 좀 하세요. 아니면 뭐 특별히 하고 싶은 거 있으세요?”
“딱히.”
“서울역은 되도록 가지 마시고, 혹시 얼굴이 드러날 일이 있으면 가면이라도 쓰십쇼. 아직은 위험해요.”
상림이 말을 이었다.
“아, 참. 그리고 나가서 외국인 있으면 멀더의 술법 좀 쓰고 오시고요.”
“그건 왜?”
“고등학교에 가려면 외국에 있었다는 설정이라도 필요할 거 같아서요.”
“고등학교에 꼭 가야 해? 네 딸을 보니까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일들이 많던데.”
상림이 단호하게 말했다.
“무조건 가셔야 합니다.”
진유성은 한국의 공통 정서와 기본 상식을 너무 모른다.
이런 건 가르치려고 해도 가르칠 수 없는 것들인데, 고등학교에 다니게 되면 많은 부분이 해소가 된다.
‘그럼 헬리콥터를 사 달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도 안 할 거고.’
게다가 위조 신분을 안정화시키는 데는 학력만 한 게 없다.
“아무튼 내일은 좀 나가서 노세요. 마침 토요일이네요.”
상림이 지갑에서 5만 원짜리 3장을 꺼내서 책상에 내려놓고 방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