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11화 (11/337)

<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11화>

“솔직히 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몇 번 해 봤습니다.”

“에이, 무슨 신이야? 절대 아니야.”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신이면 나한테 지겠냐?”

상림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졌다고요? 교주님이 싸워서 이겼단 말입니까?”

“어.”

“진짜요?”

“아, 진짜라고. 왜 이렇게 못 믿어?”

“자, 자세히 좀 말씀해 보십쇼.”

“게이트 안에서 만난 이상한 놈이 내공을 가져가려길래 죽자고 싸웠지. 먹지도 자지도 않고 달포는 싸운 거 같은데.”

“달포…….”

한 달도 넘게 미친 듯이 싸웠다는 소리다.

진유성이 인상을 찌푸리며 기억을 더듬었다.

희한한 일이다.

기억을 더듬으면 더듬을수록 흐릿함이 조금은 선명해진다.

“분명히 내가 이겼어. 그러니까 놈이 말하더군.”

* * *

[날 죽이면 그대는 영겁토록 이면의 공간에 갇히게 된다. 나와 함께 죽을 생각인가?]

“복잡한 문제는 차차 고민해 보자고. 일단 너부터 죽이고.”

[그것이 그대의 성정인가? 그래서 내가 패배한 것인가?]

진유성이 인상을 찌푸렸다.

놈에게서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싸우는 중에도, 죽음을 앞둔 순간에도 그렇다.

지금도 살려 달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그저 정보를 전달할 뿐이다.

그래서 저 말은 거짓이 아니다.

하지만…….

머뭇거리지 않는다.

그게 진유성이었다.

검이 곧게 뻗어 나갔다.

빛처럼 뻗어 나간 진유성의 검이 미증유의 존재를 찌른 순간.

[이곳은 상실의 공간.]

[그대를 구성하는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야만 통과할 수 있다.]

[하지만 그대의 무(武)는 규칙을 뛰어넘었기에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대는 ‘--’의 9할을 잃고, ‘무’의 1할을 잃겠는가.]

[아니면 ‘무’의 9할을 잃고, ‘--’의 1할을 잃겠는가?]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지만, 진유성은 고민 없이 한 가지를 선택했다.

[통과하라.]

[그대는 자신을 온전히 보존한 최초의 통과자이다.]

[그럼, 그대가 문을 닫을 수 있을지 지켜보겠다.]

* * *

“아!”

진유성이 탄성을 내질렀다.

줄곧 궁금해하던 비밀이 한 가지 풀렸다.

“어디 갔나 했더니…… 그때 내 입멸검이 사라진 거였어.”

“아! 그러고 보니 교주님께 입멸검이 없었군요.”

입멸검(入滅劍).

진유성이 얻은 최초, 최고, 최후의 기연이자, 천마신교를 상징하는 신검.

사실 입멸검 자체는 천마신교와 상관이 없었다.

생존대를 이끌던 진유성은 마교의 잔당을 흡수하기 위해서 그럴듯한 뭔가가 필요했는데, 내세울 만한 게 입멸검뿐이었다.

“입멸검은 좀 아쉽다. 세상에 하나뿐인 검이었는데.”

“입멸검이 없으면 교주님의 입멸공도 쓸 수 없는 거 아닙니까?”

“그건 오의(奧義)에 한해서 그렇고, 전후반부 12초식은 문제없어.”

진유성이 입맛을 쩝 다시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된 거야. 뭐, 놈이랑 했던 대화 사이사이에 내용이 더 있었던 거 같긴 한데 자세하게 기억은 안 나는군.”

상림은 진유성을 새삼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교주님이 대단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자신이 신이라고 생각했던 존재까지 이겨 버릴 줄은 몰랐다.

“결국 교주님은 입멸검과 내공의 구 할을 잃은 것입니까?”

“그렇겠지. 이제 보니 단전이 텅 비어 있었던 것도 그저 싸우느라 소모한 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네.”

“근데 선택지의 다른 하나는 뭐였습니까?”

“글쎄? 별거 아니었던 거 같은데…….”

“별거 아니었으면 내공을 선택하지 않았겠습니까? 뭔가 중요한 것이었겠죠.”

“몰라. 진짜 기억 안 나는데…… 뭐였을까?”

상림이 궁금해하자 진유성도 덩달아 궁금해졌다.

당시에 대수롭지 않게 선택했던 기억만 남아 있고, 선택지는 기억이 안 났다.

“야, 상림아. 너는 뭐랑 내공이랑 바꾸겠냐? 엄청 소중한 것으로.”

상림이 단호하게 답했다.

“머리숱이요.”

“…….”

“내공을 되찾으면 머리숱도 풍성해지겠죠?”

진유성이 상림의 머리를 슬쩍 살폈다.

아직까진 크게 티 나지 않지만, 확실히 머리카락에 생기가 없다.

조금만 있으면 탈모가 진행될 거 같다.

“보지 마십쇼!”

“음, 그래.”

진유성의 반응에 멋쩍게 머리를 매만지던 상림이 주제를 돌렸다.

“하면 교주님은 지금 내공이 일 할밖에 없는 겁니까? 뭐, 일 할도 많긴 하겠지만.”

“아냐. 좀 되찾았어.”

“어떻게요?”

“게이트 안에서 몬스터들 때려잡으니까 내공을 주더라고.”

“게이트 안에 몬스터가 있었어요? 그냥 통과한 거 아니에요?”

“아니, 천신궁 게이트 말고 서울역인가? 거기 열린 게이트.”

“……아?”

순간 상림의 머리가 핑핑 돌아갔다.

바로 몇 시간 전에 서울역 게이트가 기적적으로 클리어됐다.

말도 안 되는 기적이었고, 사람들은 S급 각성자가 나타났을 거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SG와 정부는 침묵하고 있다.

그 원인이 눈앞에 있다.

“그, 그럼 교주님이 서울역을 클리어한 겁니까?”

“어. 레벨업이란 걸 하면 내공이 생기더라고. 그래서 좀 열심히 했지.”

상림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큰일났군요. 일단 쇼핑부터 해야겠습니다.”

“쇼핑? 쇼핑…… 뭔가를 산다는 뜻이지? 갑자기 왜?”

“복장이 너무 눈에 띄어요. 혹시 이름은 밝히셨습니까?”

“본명은 아니고, 강호에서 쓰던 이름.”

“왕후?”

“어.”

“그건 다행이군요.”

SG나 정부에서 서울역 클리어의 주인공을 추적할 근거는 외모와 옷차림뿐이다.

진유성이 SG의 주목을 받는다는 건 상림에게는 나쁜 소식이었다.

각성자는 소중한 인적자원이다.

그래서 정부와 SG에서 엄청난 편의를 제공하고, 수많은 혜택을 준다.

하지만 이것은 정부와 SG가 요구하는 의무와 규칙을 순순히 따르는 각성자들에게만 해당됐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진유성이 남의 말을 따를 리가 없다.

진유성은 기본적으로 선한 사람이지만, 선하다는 게 고분고분하다는 것과 동의어는 아니다.

또한 정부와 SG가 하는 일들이 모두 선한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게이트란 거악과 싸워 인류를 지키기 위해 악행을 저지르기도 한다.

부당한 명령에 항명한 각성자들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것도 보았다.

각성자를 컨트롤하려는 SG와 진유성이 붙으면?

‘SG가 개박살 나겠지.’

무력은 답이 없다.

무력이 안 통하면 SG는 가족과 친지에게 경제적인 압박을 가할 것이다.

말을 안 들으면 네 가족이 피해를 볼 수 있다는 경고를 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불법이지만, 지금 같은 시대에는 정치인이나 법조인들도 국가 안보를 위해서 쉬쉬한다.

그럼 여기서 진유성 때문에 압박받는 이가 누가 되겠는가?

진유성의 유일한 지인이며, 앞으로 한 집에서 살 동거인.

‘나밖에 없잖아!’

건설업은 정부가 툭 치면 무너지는 사업이다.

인허가 서류에 장난치는 것만으로도 회사를 없애 버릴 수 있다.

위기의식을 느낀 상림이 허둥지둥 나가려는데, 그의 휴대전화로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자를 확인한 상림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무슨 일이야, 우리 공주니임?”

-아빠, 엄마가 어디냐는데?

진유성은 상림의 간드러지는 목소리에 놀랐고, 아빠라는 호칭에 놀랐다.

‘혼인을 했구나…….’

생각해 보면 당연하다.

22년이란 긴 세월 동안 마음이 맞는 여인이 없었을까.

게다가 이곳에서는 중원에서처럼 책임져야 할 무거운 짐이 없다.

잘된 일이었다.

‘그나저나 저게 목소리를 전달해 주는 기계였군.’

게이트 안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습관처럼 저걸 매만졌었다.

진유성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도 상림의 여식은 아비에게 이런저런 물건을 사 와 달라고 말하고 있었다.

“문자로 보내 주면 아빠가 사갈게. 알았지?”

-브랜드 잘 보고 사 와!

“알겠어, 알겠어.”

상림은 흐뭇하게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이제 고2가 된 딸이 요즘 갖고 싶은 게 많다.

“딸이야?”

“네? 아, 네. 그렇게 됐습니다. 흐흐.”

“딸애 이름은 뭐야? 아, 참. 너 여기서도 이름이 상림이냐?”

“그대롭니다. 어떻게든 성과 이름은 유지하고 싶어서 손 좀 썼죠. 제 딸 이름은 상소윤입니다.”

“네 딸이면 귀엽겠네.”

“귀여운 게 아니라 엄청 예쁩니다! 주변에서 그냥 아이돌 하라고, 미스코리…… 어, 아무튼 엄청 예쁩니다.”

“그래?”

“네. 그나저나 갑자기 웬 칭찬입니까? 교주님답지 않게.”

“대견해서 그러지. 말도 안 통하는 곳에서 무공도 잃었는데 가정을 꾸리고 번듯하게 살아간다는 게. 일도 하고 있나?”

“그럼요. 저 어엿한 건설회사 사장입니다. 제가 얼마나 힘들게 살았는지 알면 우실걸요.”

“사장? 그럼 돈도 좀 벌겠네?”

“크게 부족함은 없죠.”

상림이 슬쩍 웃으며 말을 이었다.

“갖고 싶은 거 있으시죠? 안 하던 칭찬까지 하시는 걸 보면?”

“큼, 티 났냐?”

“뭔데요? 말씀해 보십쇼.”

“소맥이란 게 비싼가? 그게 먹어 보고 싶은데.”

상림이 웃었다.

상전으로 모셨던 교주님이지만 이 세계에서는 아이나 다름이 없다.

자신도 처음 이 세계에 떨어졌을 때 갖고 싶은 게 어찌나 많고, 먹고 싶은 게 얼마나 많았던가.

문득 한 평짜리 고시원 방에서 처량하게 라면만 먹던 시절이 생각났다.

말도 잘 안 통하고, 신분증이 없어서 일자리도 못 구하던 그 시절.

“소맥은 드시고 싶은 만큼 사 드리겠습니다. 또 뭐 있습니까?”

“하나 있긴 한데…… 진짜 사 주려고? 좀 비쌀 거 같던데.”

“그럼요. 약속합니다.”

한국에 도착한 지 하루밖에 안 됐는데 뭐 얼마나 대단한 게 갖고 싶겠는가. 지금은 비닐봉지만 봐도 신기할 때다.

끽해 봐야 스마트폰일 터.

“헬리콥터.”

“네?”

“헬리콥터가 갖고 싶어.”

“……모형 말씀이시죠?”

“아니, 사람이 타고 날아다니는 거 있잖아. 지금도 하늘에 몇 개 떠 있네.”

“헬리콥터는 가격이 좀…….”

상림의 말에 진유성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지금 본 교주를 능멸한 것이더냐? 네 입으로 약속하지 않았더냐?”

“아니, 왜 이럴 때만 위엄 있는 말투 쓰십니까…….”

“어허!”

진유성의 서릿발 같은 기세에 상림이 찔끔했다.

“나중에 사 드릴게요, 나중에.”

“약속한 거다.”

“아, 음. 약속은 아니고.”

“어허!”

“알았어요. 일단 나가자니까요.”

상림은 입고 있던 의 로고가 박힌 외투를 진유성에게 건넸다.

옷의 재질에 감탄하며 점퍼를 입던 진유성이 물었다.

“근데 벌써 가? 네 인생에 대해서는 하나도 못 들었는데?”

“그건 차차 말씀드리겠습니다. 교주님 옷이랑 딸아이 물건도 사야 하고, 말도 맞추려면 시간이 별로 없네요.”

“무슨 말을 맞춰?”

“가족들한테 그럴듯한 이유는 대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 참. 우선은…….”

상림이 진유성에게 귓속말로 무슨 말을 건네고는 카운터로 향했다.

잠시 뒤, 진유성과 상림이 떠난 카페.

“사장님! 연기 나는데요?”

“이거 뭐야? 왜 이래?”

원인은 모르겠지만 카운터 옆에 있던 CCTV 녹화용 컴퓨터의 하드가 녹아내렸다.

이윽고 사장은 프라이빗 룸의 테이블도 녹아 있다는 걸 발견했다.

처음엔 손님들이 그랬나 싶었는데, 마그마를 들고 다니지 않는 이상은 인위적으로 할 수 없는 흔적이다.

“뭐야, 씨.”

이유를 알 수 없었던 카페 사장은 이 모든 게 서울역 게이트 때문일 거라고 근거 없이 투덜거렸다.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