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9화>
* * *
기적 같은 서울역 D등급 게이트 클리어 소식이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을 때.
진유성은 서울역에서 멀지 않은 명동에 있었다.
그가 명동에 온 이유는 간단했다.
새로운 세상이 궁금했으니까!
그래서 기감을 확장시켜 인근에서 가장 활기가 넘치는 곳을 찾아왔다.
진유성의 기대를 부응하듯, 명동은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통제구역이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사람이 넘쳐 났다.
게이트의 위험이 해결됐다는 희소식을 듣고 주말을 즐기기 위한 사람들이 쏟아졌다.
“이 무슨……!”
처음 보는 도심은 별천지였다.
어떻게 세공했는지 모를 투명한 유리 건물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높았으며, 온갖 기물에서는 가락과 영상이 흘러나왔다.
‘내가 꿈을 꾸는 게 아닐까? 어떻게 이런 게 존재하지?’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게 세상을 구경하고 있던 진유성이 문득 쯧쯧 하고 혀를 찼다.
자신의 옆을 스쳐 지나가는 여자의 지나치게 간소한 옷차림 때문이었다.
“어찌 저런 복장을 하고 대로를 활보한단 말인가…… 허, 참. 말세야, 말세.”
진유성이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그는 눈을 감아도 주변의 모든 사물을 볼 수 있는 고수…….
“큼큼.”
진유성은 게이트가 클리어되자마자 남들의 눈을 피해 자리를 떠났다.
타국의 각성자였던 강새룡의 반응을 보건대 게이트가 클리어된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진행될 일은 뻔했다.
이 나라의 황제 혹은 그가 부리는 이가 자신을 찾아올 것이며, 노고를 치하하면서도 이방인을 견제할 것이다.
이 세계의 황제라고 해도 고개를 숙일 생각이 없으니 신하들과 마찰이 일어날 것이다.
‘포상금 정도야 받을 수 있겠지만…….’
엄청난 무공을 지닌 진유성이 굳이 포상금에 목 맬 이유는 없다.
내공이 회복이 안 될 때면 몰라도 말이었다.
돈을 벌면 일단…….
‘저것부터 사야지!’
진유성은 하늘 높이 두두두두 하는 소리를 내며 날아다니는 기물을 쳐다보며 눈을 반짝였다.
하늘을 나는 마차다.
진유성이 보는 것은 언론사의 취재용 헬리콥터였다.
“멋져…….”
너무 멋지다.
저 기물은 남자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웅심을 자극한다!
‘혹시 모양도 막 바꿀 수 있지 않을까?’
헬리콥터를 보며 한동안 설레던 진유성이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았다.
“야, 저 물건 이름이 뭐냐?”
고등학생이나 되어 보이는 소년의 반말을 들은 행인이 날 선 반응을 하려다가 멈칫했다.
‘인방 몰카 같은 거 아니야?’
소년의 특이한 복장에 얼토당토않은 질문을 생각하면 그럴 가능성이 있다.
“헬리콥터.”
주변은 쓱 둘러본 행인은 결국 대충 대답하고는 사라졌다.
‘헬리콥터라…….’
분명 난생처음 듣는 말인데, 알고 있던 단어 같다.
언어 습득의 마도술로 익힌 언어는 꼭 예전에 사용하던 언어 같다.
오랜 시간 사용하진 않았지만, 입에 착 달라붙는 익숙한 느낌.
사실 이건 진유성이 마도술을 여러 차례, 그리고 다수에게 시전해서 그런 것이었다.
본래 마도사들은 진유성처럼 무식하게 마도술을 쓰지 않았다.
보통은 학식 깊은 대학자에게 마도술을 시전하고, 그 언어를 직접 공부를 했다.
마력 소모가 감당 안 될뿐더러, 뇌에 과부하가 걸리기 때문이었다.
물론 진유성은 멀쩡했지만.
멀더가 이 모습을 봤으면 어땠을까?
“역시 교주님이십니다! 억만창생! 신교천하!”
수십 년 전에 죽은 멀더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진유성이 쓰게 웃었다.
새로운 세계에 도착해 모든 것이 신기하고 기쁘지만, 과거의 친우들이 그립다.
그 순간이었다.
“……?!”
깜짝 놀란 진유성이 두 눈을 깜빡였다.
인파들 속에서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원래라면 그저 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야 했다.
새로운 세계에 왔는데 아는 사람을 발견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상림?’
상림이기에 가능성이 있다.
상림은 유일하게 진유성과 같이 천신궁의 게이트를 통과한 사람이었으니까.
진유성이 상림을 향해 다가가는 순간.
타인의 시선을 느꼈는지 상림의 두 눈도 진유성을 향했다.
“……!”
“……!”
시공간을 뛰어넘어 재회한 두 사람의 눈에서 뜨거운 감정이 일렁였다.
그간 상림과 함께 헤쳐 온 수많은 일들이 떠올랐다.
노예의 신분으로 팔려온 정도맹의 멸마대.
그곳에서 겪은 지옥 같은 일상들.
제거 명령을 눈치채고 함께 도망친 일.
정도맹의 고수들에게서 도망치며 겪은 지옥들.
마교의 잔당을 흡수하며 만든 천마신교.
그리고 중원 제패까지.
상림은 신주청과 함께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나쁜 시절과 가장 좋은 시절을 함께한 인물이었다.
마침내 격정의 감정 속에서 진유성의 입이 열리는 순간.
“상……!”
상림이 후다닥 도망쳤다.
“……놈의 자식아!”
진유성이 어이가 없어서 잠시 멈춰 있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상림의 모습이 좀 이상했다.
허둥지둥 사람들 사이로 달려가는 게 꼭 무공을 배우지 못한 일반인 같았다.
과거에는 상림이 도망치면 진유성은 열다섯 호흡을 써야만 그를 잡을 수 있었다.
진유성을 상대로 열다섯 호흡이나 도망칠 수 있다는 건 대단한 것이었다.
‘혹시 상림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며 진유성이 몸을 움직였다.
등 뒤에 있던 진유성이 홀연히 눈앞에 나타나자 남자가 깜짝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교, 교주님?!”
“오냐.”
“어떻게 무공을? 교주님은 내공을 잃지 않으신 겁니까?!”
진유성이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지금…… 날 알아봤으면서 도망쳤다는 걸 이실직고한 거지? 엉?”
백 년 가까이 그리워했던 수하, 아니 친우의 배신에 진유성의 목소리에는 절로 기운이 실려 나왔다.
“억만……!”
찔끔한 상림이 부복하며 ‘억만창생, 신교천하’를 외치려는데, 그들을 쳐다보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뭐지? 영화 찍는 건가?”
“카메라가 없는데?”
“남자애 잘생겼다. 배우인가?”
“BJ 아냐?”
40대 중후반의 남자가 10대로 보이는 소년 앞에 호위무사처럼 한쪽 무릎을 꿇고 부복하는 모습이 얼마나 이상해 보일지.
상림은 알고 있었다.
그가 한국으로 온 지 벌써 22년이 지났으니까.
상림이 슬그머니 엉덩이를 들어 올리는데, 무시무시한 기운이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진유성의 내력이 유형화된 힘으로 압박하는 것이었다.
‘지, 진짜 무공을 안 잃으셨나?’
몸을 움직이는 경신법 정도는 약간의 내공만 있어도 운용할 수 있다.
하지만 내기가 유형화된 힘을 가지려면 최소한 갑자 단위의 내공이 필요하다.
그 순간, 상림은 기지를 발휘했다.
엉겁결에 한국말로 대화가 시작됐지만, 그들은 중원어로 대화가 가능하다.
워낙 안 쓴 지 오래돼서 거의 까먹긴 했지만 ‘억만창생, 신교천하’는 기억한다.
‘근데 한국에 온지 꽤 되신 건가? 한국말을 잘하시는데?’
상림은 그런 생각을 하며 중원어로 벌컥 소리를 질렀다.
“억만창생! 신교천하!”
드디어 상림의 어깨를 짓누르던 기운이 사라졌다.
상림이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며 고개를 푹 숙였다.
‘부, 부끄럽다.’
중원어로 외쳤지만, 그래도 수치스러워서 죽을 것만 같았다.
상림은 재빨리 진유성에게 다가가 말했다.
“자리를 옮기시죠.”
“너 왜 못 본 척했어?”
“일단 조용한데 가서 이야기하자니까요.”
“어쭈? 개기냐?”
“아, 쫌!”
상림은 삐진 진유성을 어르고 달래서 근처 조용한 카페로 향했다.
잠시 뒤, 카페 프라이빗 룸에 도착한 상림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진유성을 쳐다보았다.
솔직히 22년은 너무나 긴 시간이었다.
중원어도 거의 다 까먹었고, 몇몇 사람을 제외하면 사람들의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진유성은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지금, 기억 속의 얼굴이 상림의 눈앞에 있었다.
‘더 어려지긴 했지만.’
마지막으로 본 진유성의 모습은 30대 초반의 외양이었는데, 지금은 꼭 십 대 같다.
상림이 진유성과 십 대 시절을 함께 보냈기에 바로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교주님? 언제, 아니 왜 한국에……?”
“일단 날 무시한 합당한 이유부터 대지 않으면 넌, 오늘, 여기서, 죽는다.”
진유성의 무시무시한 협박에 상림이 침을 꿀꺽 삼켰다.
사실 진유성을 보자마자 도망친 것은 저도 모르게 나온 반사적인 행동일 뿐이었다.
‘군대 선임을 만난 기분이잖아!’
진유성과 함께한 즐거운 기억도 많은데, 그 못지않게 갈굼당한 기억도 많다.
중원에 있을 때는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하지만 한국에서 22년을 살다 보니 과거를 떠올릴 때마다 그런 생각도 들었다.
‘인권위에 신고하면 징역 100년은 떨어지는 거 아니야?’
그래서 뇌는 반가웠으나 몸이 먼저 움직여 버렸다.
아마 도망가다가도 몇 초 뒤면 곧장 교주님한테 돌아갔을 거다.
‘하지만…….’
사실대로 말하면 진유성이 용서할 리가 없다.
미친 듯이 머리를 굴리던 상림이 슬픈 표정을 지으며 운을 뗐다.
“또 환영을 본 줄 알았습니다.”
“환영?”
“예…… 이곳, 한국에 오고 나서 저는 아주 긴 시간 동안 교주님의 모습을 봤습니다. 하지만 제가 소리를 지르며 다가가면 연기처럼 사라졌죠. 헛것이었단 말입니다.”
“음…….”
“한데, 헛것을 보면 볼수록 제 마음에 병이 들더군요. 불면에 시달리고, 간신히 잠이 들면 악몽을 꾸고, 기력이 쇠하고…….”
상림이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의원의 말로는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고향에 대한 스트, 지독한 심마가 들었다고 했습니다. 교주님은 고향을 상징하는 상징적인 인물이라서 나타나는 것이고요.”
“향수병 같은 건가.”
“비슷하지만 증세가 굉장히 심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전 이 세상의 누구와도 알지 못했고, 말도 하지 못했으니까요.”
상림이 진유성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아무래도 먹히는 것 같다.
“어느 날 의사가 그러더군요. 환영에게서 도망치는 게 병을 치료하는 첫걸음이라고.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곳이라고 단단히 선을 그으라고. 그 뒤로 몇 년간 환영을 볼 때마다 무시하고 도망쳤습니다.”
“……그랬군.”
“예. 환영을 안 본 지 꽤 오래됐는데…… 요즘 제가 좀 힘든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또 심마가 든 줄 알고 재빨리 도망쳤던 것입니다. 송구합니다.”
상림이 고개를 푹 숙였다.
상림의 사죄를 받은 진유성이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생각해 보면 자신은 곧장 언어를 익혔지만, 상림은 그렇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이방인처럼 몇 년을 떠돌아다니다 보면 심마가 들 법도 하다.
‘무공을 잃으면서 심신의 단단함이 무너진 탓도 있겠지.’
상림은 무공을 잃었다.
그의 단전은 완전히 텅 비어 있었다.
진유성이 어찌 된 연유인지 물으려는 찰나, 카페의 알바생이 프라이빗 룸으로 들어왔다.
“저기, 주문하셔야 하는데.”
“아, 네. 바로 주문할게요.”
꾸벅 인사한 알바생이 나가자 상림이 메뉴판을 쳐다보았다.
“뭐 드시겠습니까?”
“여긴 뭐 하는 곳이야?”
“뭐긴요. 커피 파는 곳이죠. 설마 카페가 처음이십니까?”
“당연하지. 이 세계에 도착한 지 하루밖에 되지 않았는데.”
“네? 한데 어찌 한국말이 이렇게 능숙하십니까?”
“기억 안 나? 멀더의 술법 중에 언어를 익히게 해 주는 거 있잖아.”
“아! 그럼 교주님도 천신궁의 게이트를 넘어서 어제 도착하신, 아니 일단 음료부터 시키시죠. 밖에서 자꾸 쳐다보네요.”
상림이 예의상 진유성에게 메뉴판을 건네자, 메뉴판을 슬쩍 본 진유성이 고민도 없이 하나를 골랐다.
“에스프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