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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3화 (3/337)

<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3화>

Quest 1. 타협하는 천마님

진유성이 고개를 들자 <서울역>이란 글자가 새겨진 거대한 간판이 보였다.

물론 읽을 수는 없었다.

“뭐라고 쓰여 있는 거야?”

진유성이 서울역으로 온 이유는 간단했다.

기감을 확장해 보니 이 근방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오가며, 가장 많은 사람들이 잠을 자고 있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완전히 새로운 세상에 왔지만, 인간의 삶은 비슷하지 않겠는가?

아마 여기가 객잔일 것이었다.

‘객잔이 참으로 화려하고 넓구나.’

세상 만물이 신기한 진유성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역 안으로 들어섰다.

마지막 지하철을 타기 위해 분주히 서두르던 몇몇 사람들이 그를 힐끔거렸다.

고등학생이나 되어 보이는 소년의 옷이 아주 특이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진유성은 주변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기감이 향하는 서울역 보행자 통로로 향했다.

이윽고 수많은 낭인들이 보였다.

낭인들은 신문지나 박스-진유성의 눈엔 최고급 포단으로 보였다-를 덮고 잠을 자거나, 술을 먹거나, 언성을 높이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허허. 풍류를 아는 낭인들이 많구먼.”

진유성이 적당한 빈자리에 엉덩이를 들이밀었다.

그러자 주변의 낭인들이 그를 쳐다보았다.

제법 사나운 눈초리도 있었다.

‘오랜만이군, 이런 기분.’

늘 만인의 선망과 존경을 받고 살던 그가, 지금은 낯선 이를 경계하는 눈빛을 받고 있었다.

천마신교의 교주가 되기 전, 강호를 주유할 때나 느꼈던 기분이다.

“anjdu dl vltejddlsms?”

진유성을 쳐다보던 옆자리의 낭인이 거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말을 이해할 순 없지만 필시 낯선 이의 출신 성분이나 사문에 대해서 묻고 있는 것이리라.

‘어디…….’

낭인을 응시하던 진유성이 내공을 끌어올려 언어 습득의 마도술을 펼쳤다.

진유성이 펼치는 마도술은 지금은 흙으로 돌아간 멀더에게 배운 것으로, 빠르게 타인의 언어를 배우는 기술이었다.

낭인이 뭔가에 홀린 듯 진유성의 눈을 쳐다보기 시작했고, 그의 의식에 새겨진 언어 체계가 전달되었다.

잠시 뒤, 마도술에 홀려 있던 노숙자가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할 일이 있었는데 깊은 잠에 빠져 있다가 일어난 기분이었다.

그때 진유성의 입이 열렸다.

“쉬이벌, 여가 어디다냐?”

“…….”

“뭐여? 지금 내 말을 무시해브는 것이여?”

마도술에는 한 가지 사소한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공통의 언어’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언어’를 배운다는 것이었다.

잠시 당황했던 노숙자가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아따 사투리가 찰지고만. 고향이 어디여?”

“나? 고려여.”

“고려? 거 나라 이름 아니당가? 암튼 나한테 뭔 일이여?”

“잠자리를 얻을라고.”

진유성은 당연히 낭인이 객잔 주인을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뭐여, 젊은 친구가 동종업계였어?”

“그려.”

새로운 세계에서 자신은 교주가 아닌, 낭인으로 봐도 무방했다.

“근데 동상, 왜 반말이여? 이 성님 성함은 권경재니까, 권 형이라고 불러라잉.”

“형은 무슨. 내 나이가 백이 넘은 지 한참 됐는디.”

“백 살이 넘었다고?”

“그려. 나가 불혹이 되기 전에 반로환동을 해부러 가지고 그런 거여. 초고수랑께.”

반로환동?

초고수?

권경재는 순간 진유성의 지능이 부족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 보니 입고 있는 옷도 치렁치렁 늘어진 희한한 디자인이었다.

어쩌면 정신병원 같은 곳의 환자복일 수도 있다.

‘어쩐지 젊은 놈이 뭔 노숙이라고…… 쯧쯧. 멀쩡하게 생겨 가지고.’

노숙자가 결심한 듯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따라오랑께.”

잠시 뒤, 권경재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대여섯 명의 노숙자들이 모여서 소주를 까고 있는 온풍기 앞이었다.

권경재가 가운데 앉아 있는 떡 벌어진 어깨의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김 씨, 여기 자리 남제? 어제 장 형이랑 박 형이랑 쌈박질하다가 잡혀가 부렀잖어.”

40대 초반쯤 되어 보이던 남자가 비스듬하던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자리는 남는데…… 왜?”

“이 핏덩이가 잘 곳이 없어부러. 좀 도와주소.”

“뭐? 이 어린놈이?”

김 씨라 불린 남자, 김인창이 진유성을 살폈다.

어린 나이에 노숙자가 되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러자 진유성을 데려온 권경재가 머리에다가 대고 손가락을 빙빙 돌렸다.

“야가 이거여, 이거.”

“멀쩡하게 생겼는데?”

“지가 백 살이 넘었대. 고려 사람이고.”

미쳤다는 소리에 김인창이 진유성을 훑어보는 순간, 마도술이 시전됐다.

언어 습득의 마도술은 대상의 수가 많으면 많아질수록 평범한 구어에 가까워진다.

“으음…….”

진유성은 잠시 현기증이 나서 비틀거렸다.

다수에게 마도술을 동시 시전하는 것은 정신력에 큰 부담을 준다.

멀더가 말하길, 서역 최고의 마도술사들도 두 명이 한계라고 했다.

하지만 진유성은 일곱 명의 낭인들에게 동시 시전했음에도 고작 어지러움을 느낄 뿐이었다.

사실 어지러움은 별문제가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내공이 바닥을 보이는군.’

내공이 막대하게 소모됐다는 점이었다.

본래 진유성의 내공은 대해(大海)와 같이 넓고 깊어 끝을 알 수가 없었다.

아무리 언어 습득의 마도술이 최상위 술법이라지만, 과거의 진유성이라면 이따위 것은 수천 번도 넘게 사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는 지닌 바 내공의 대부분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그놈은 뭐였을까?’

진유성은 문득 게이트 안에서 만났던 미증유의 존재에 대해서 떠올렸다.

외양에 대한 기억은 흐릿했지만, 놀랍도록 강한 존재라는 건 확실했다.

그놈 때문에 내공을 잃었다.

[그럼, 문을 닫을 수 있을지 지켜보겠다.]

놈과 나눈 대화는 이보다 훨씬 길었지만, 이상하게 잘 기억나진 않았다.

마치 꿈속에서의 대화를 떠올리는 것처럼 아스라한 잔상만 떠오를 뿐이었다.

‘원래의 내공을 되찾으려면 시간이 꽤 걸리겠군.’

정신을 차리자마자 운기행공을 하려 했으나, 이곳은 대기에 탁기가 지나치게 짙다.

숨만 쉬어도 미세한 먼지가 들어오는데 오죽하겠는가.

이런 탁기 속에서 억지로 내공을 쌓으면, 그건 독이 된다.

하지만 진유성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어딘가엔 맑은 기운이 있어서 운기행공을 할 수 있겠지.’

진유성은 미래의 일을 걱정하는 종류의 인간은 아니었고, 지금 정도의 내공만 있어도 감히 그를 해할 자는 없었다.

그때 술법 때문에 멍해져 있던 노숙자들이 정신을 차렸다.

그들은 어지러움에 비틀거리는 진유성을 보며 혀를 찼다.

“그래…… 우리끼리라도 돕고 살아야지. 여기 와서 앉아.”

멀더의 술법에는 한 가지 부가적인 효과가 있는데, 무의식을 공유했기 때문에 막연한 친밀감을 느낀다는 것이었다.

노숙자 권경재가 그를 도와준 것도 이러한 이유가 있었다.

감각이 예리한 이들은 되레 거북함을 느끼기도 했으나, 다행히 눈앞의 낭인들은 아니었다.

진유성이 선선히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고맙다.”

“비틀거리던데 어디 아픈 건 아니지?”

“괜찮아. 그냥 잠깐 어지러워서 그래.”

진유성과 김인창이 대화를 나누는 순간, 권경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 날 속였어!”

“뭐? 누가?”

“이 동상! 아까는 사투리를 썼단 말여! 난 동향 사람인 줄 알고……!”

“머리가 아픈 친구라며? 그래서 그런가 보지.”

“하지만……!”

“자꾸 잘 시간에 시끄럽게 소란 피울 거야?”

김인창이 눈을 부라리자 권경재가 고개를 푹 숙였다.

김인창이 온풍기와 가까운 통로에 자리를 잡은 건, 그가 왕년에 깡패였다는 소문 때문이었으니까.

기가 팍 죽은 권경재가 혼자 구시렁거리다가 사라졌다.

권경재는 배신감을 느끼겠지만, 어쩔 수는 일이었다.

방금 전 진유성이 마도술을 시전한 노숙인들이 전부 서울 토박이였으니까.

그렇게 권경재가 사라지고, 진유성은 김 씨 패거리들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침낭도 없는 진유성이 불쌍해 보였는지 몇몇 노숙자들이 신문지나 박스 따위를 주었다.

‘이 무슨 놀라운 감촉이란 말인가!’

신문지의 부드러움에 감탄하며 얼굴에 비비고 있던 진유성이 문득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한데, 셈은 어디서 치르지?”

“셈? 무슨 셈?”

“주인장한테 숙박비를 치러야지.”

김인창이 피식 웃었다.

서울역에서 누가 숙박비를 걷는단 말인가.

“외상으로 달아 놔. 그럼 나라님들이 알아서 걷어 가니까.”

“뭐야, 엄청 편하잖아?”

“허이구, 애새끼가 반말하는 건 적응이 안 되네. 난 김인창이다. 넌 이름이 뭐냐?”

별거 아닌 질문에 진유성이 잠깐 고민했다.

피휘(避諱)라는 단어가 있다.

왕과 황제의 이름은 그 무엇보다 존엄하기에 그 누구도 황제의 본명을 부르거나 써서는 안 되는 걸 뜻했다.

실제로 실수로 황제의 이름을 쓰거나 읽어서 유배를 당한 이들도 많았다.

고려의 왕과 대명제국의 황제가 이럴진대, 그들의 위에 있던 진유성은 어땠겠는가?

그 누구도 진유성의 본명을 입에 담지 않았다.

신주청과 상림도 그랬다.

진유성은 상관없었지만, 대외적인 천마신교 교주의 권위를 생각해 그들이 노력한 것이었다.

그래서 진유성은 낯선 이들에게 이름을 알려 주는 게 좀 껄끄러웠다.

정확히는 과거의 친우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렇게 쉽게 이름을 알려 주면 그간 친우들의 노력과 배려가 왠지 무시당하는 것 같지 않은가.

‘뭐, 새로운 세계에 온 이상 아무 상관없는 일이지만…….’

어디 사람이 늘 이성적이던가?

진유성은 그런 생각을 하며, 교주가 되기 전 ‘생존대’에서 중원을 주유할 때의 이름을 꺼냈다.

“왕후.”

“왕후? 무슨 중국 이름 같네. 아, 너 설정이 고려랬지.”

“설정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진짜 고려 사람이라니까.”

왕후란 가명은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씨가 따로 있냐는 말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진유성은 실제로 고려의 왕자였기에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어도 상관없다는 나름의 농담이기도 했다.

생존대는 이런 재미없는 농담거리라도 없으면 전혀 웃을 일이 없던 상황이었다.

“그래, 왕후. 너 몇 살이야?”

“몰라. 백 살 이후로 정확히 안 세어 봐서.”

“아, 그러셔? 그럼 술 한잔해도 되겠네?”

“없어서 못 마시지.”

김인창이 종이컵을 하나 꺼내서 소주를 따라 주었다.

보통의 노숙자들은 소주 한두 병에 목숨을 걸지만, 김인창의 패거리는 그렇지 않았다.

왕년에 깡패였다고 소문이 도는 김인창은 노숙자치고는 많은 돈을 가지고 있었다.

별생각 없이 김인창이 주는 소주를 받아 마신 진유성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맛있다……!’

맛있어도 너무 맛있다.

중원에서 고급 술이란 고급 술은 다 마셔 본 그였지만, 이처럼 깔끔하고 개운한 술은 처음 마셔 본다.

게다가 술을 담고 있는 용기는 어떤가.

초록색으로 영롱하게 빛나는 것이 완전히 보석이다, 보석.

“맛있냐?”

김인창의 물음에 소주에 흠뻑 빠져 있던 진유성이 물었다.

“세상에 이거보다 맛있는 술이 있냐?”

“뭐? 이건 젤 싸구려야, 인마. 우리같이 돈 없는 놈들이 먹는 거.”

“돈…… 돈만 있으면 더 맛있는 걸 먹을 수 있다는 거지?”

“그렇지.”

“여기서 돈은 어떻게 버는데?”

“그걸 알면 우리가 여기서 이러고 있을 리가.”

하긴, 낭인들은 대부분 떠돌이고 모아 놓은 돈도 없다.

빼빼 마른 남자가 말했다.

“일확천금 노리려면 그냥 확 게이트에 들어가서 각성해야 하는데 말이야.”

“옛날에 용산역에 있던 장, 장 뭐였지? 아무튼 그놈, 운 좋게 게이트에 들어가서 각성했다잖아. 지금 외제 차 끌고 다닌대.”

“그럼 뭐 해? 지금은 SG가 게이트 발생하는 족족 클리어해서 민간인들은 구경도 못 하는데.”

“개새끼들. 우리 같은 놈들한테도 기회를 줘야지, 나라에서 다 해 먹으면 어쩌라는 거여?”

“그래도 몇 년 전을 생각해 보면 지금이 낫지. 그때는 게이트 때문에 뒈질까 봐 벌벌 떨었잖아.”

흥미롭게 이야기를 듣고 있던 진유성이 물었다.

“게이트가 뭐냐?”

“게이트를 모른다고?”

“어, 몰라.”

“그, 클리어하면 각성하고, 클리어 못 하면 터져서 뒈지는…… 그걸 몰라? 세상이 그거 때문에 뒤집어졌었는데?”

“클리어는 또 뭐야?”

“괴물들을 다 죽이는 거지.”

“게이트는 누가 만든 건데?”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세상 사람 아무도 모르는데.”

진유성은 낭인의 설명 속에서 자신이 알고 있는 게이트와 이들이 말하는 게이트가 많이 다르다고 느꼈다.

‘이름만 같은 걸까?’

진유성이 그런 생각을 할 때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왕후.”

“어, 왜.”

“……넌 뭐 하던 놈이냐? 어떻게 살았는지는 대충 기억할 거 아니야?”

“나? 좀 긴데.”

“해 봐. 시간은 많으니까. 자자, 술 한 잔 받고.”

진유성이 가득 따라진 소주를 만족스럽게 보면서 천천히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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