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랜선조교기록 (313)화 (313/313)



〈 313화 〉후기

만약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했을 테고,  거기에 대해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겠지만,

"……진짜로 자네."



지금으로선 그녀를 깨워야 한다는 충동에서 심술 이상의 이유를 찾을  없었다.



머리도 묶지 않고 잠들어버린 것이 조금 걱정됐지만, 설마 목이 졸리기야 하겠어?


아직은 하루 정도 클렌징을 건너뛴다고 해서 큰일 나는 나이도 아니잖아.

모처럼 예쁘게 입고  옷이 구겨지는 건 조금 걱정되지만……뭐 어때. 자도록 놔두자.


"……일어나면 클리닝 비용까지 줘서 집에 보내면 되겠지."



물론 절대로 받을  없다며 한사코 거절하겠지만……억지로라도 찔러줘야지 뭐.


그게 남자 혼자 사는 방에 찾아와 잠들어버린 아가씨에게 손대는 것보단 나을 듯 했다.

나 : 불만이면 두들겨서 깨울까?

길동3리 : 자게 냅둬 미친놈아
길동3리 : 깨우긴 뭘 또 깨워


나 : ㅋㅋㅋㅋㅋㅋㅋㅋ



키보드를 두드리던 나는 고롱고롱 숨소리를 내며 잠든 그녀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불과 몇 시간 전 고백을 받고 사귀게 된 남자의 앞이라곤 생각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잠버릇이 고약했다는 건 아니다.

오히려 숨은 쉬고 있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조용했다.

숨을 내쉴 때마다 작게 몸이 들썩이는  보고 있으니까 살아있구나 싶은 거지.

옆에서 보고 있으면서도 어떻게 한  뒤척이지도 않고 잘 수 있는지 신기할 정도다.

하지만……그렇네.

남자친구의 특권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조금은 즐거워지는 기분이다.


어쨌든  사귀기 시작한 여친의 잠든 얼굴 같은 건 흔하게 볼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말이야.

평소엔 누가 잡아먹기라도 하는 것처럼 긴장하는 주제에 무방비하게 자고 있는 것도 바보 같고.



"……"


하긴. 자는 얼굴까지 관리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냐만은,


"……설마 다른 사람 앞에서도 이러는 건 아니겠지."


다행스럽게도 그녀에 한해서 그런 걱정은 접어둬도 괜찮을 것 같았다.

마음 속 깊이 그녀를 믿고 있기 때문은 아니다.

그냥 친구가 없거든, 이 녀석.

동아리 활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같이 점심을 먹을 지인도 없다.

내일 제출해야 하는 과제보다 공강이, 전달받지 못한 휴강이 더 무서운 평범한 아싸다.

그런 부분에선 오히려 신뢰하고 있다고 말해도 괜찮을지도 모른다.

나 : 오늘은 답지 않게 말도 꽤 했고
나 : 고백받는다는 생각 때문에
나 : 긴장도 많이 했을 테니
나 : 졸린  자체는 이해하지만



그런 주제에 온종일 긴장의 끈을 놓치 않았을 테니 지치는 것도 충분히 이해한다.

역시 "내일 고백할 거니까 예쁘게 입고 나와."라고 말했던  화근이었던 걸까.

그녀는 정말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꾸민 다음 약속 장소에 나왔다.


물론 노력한다고 해서 언제나 최선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아니지만,

어쨌든 그녀에게 있어선 영혼을 빠트렸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이틀간이었겠지.



"……"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자 혼자 사는 집에 따라오는 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만약 다른 남자 같았다면 무슨 짓을 당해도 괜찮다는 합의로 받아들였을 거다.


그리고 나라고 해서 특별히 뭔가 다를 것도 없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무방비한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그런 충동은 들지 않았다.


매력이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좀 지나칠 정도로 사랑스러운 게 문제였다.

길동3리 : 캬아아악 

나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동3리 :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길동3리 : 새벽 2시에 남의 연애사를
길동3리 : 그것도 저런 되도 않는 개소리를
길동3리 : 듣고 있어야 하는지 진짜로 모르겠다



모니터 너머에서 담배를 뻑뻑 태우고 있을 광경을 상상한 나는 웃어버렸다.

조금  불평을 빙자해 여자친구 자랑을 시도해볼까 싶었지만……관두자.




네버다이 : 아침은 돼야 귀가하시겠군요.

나 : 금방 일어날 것 같긴 한데
 : 그럼 좀 더 이야기하다가
나 : 첫차 다니기 시작하면
나 : 뭐라도 좀 먹인 다음에 보내야죠




앞서 말했던 것처럼 필요하다면, 그리고 하고 싶다면 누가 어떻게 생각하든 알  뭐람.


낼모레 서른인 아저씨의 기분 같은 건 상관하지 않고 실컷 자랑했을 거다.


하지만 나는 그녀에 대해 그다지 아는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아웃사이더에, 말수가 적고, 성격이 어둡고, 또…


점점 험담이 되는 것 같아 그만두겠지만, 정말로 그뿐이다.


오래 전부터 그녀에게 그런 마음을 품고 있었다는 건 분명하다.

하지만 마음을 먹는 건 어제였고, 여자친구라고 정해진  오늘 오후였다.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고 다닐 만큼 잘 알지 못한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야 뭐, 말 잘 듣는 강아지에 대한 자랑이라면 하루 종일이라도 할 수 있겠지만.


만약  전의 내게 인터넷에서 만난 여자와 주종 관계를 맺게 될 거라고 이야기 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그녀의 강력한 요구에 의해 그렇게 된 결과라고 한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라고 해봤자 "야동 적당히 봐라 미친 새끼야." 정도가 고작이었을 거다.

하지만  달 전의 내게 같은 말을, 그리고 곧 그녀와 사귀게 될 거라고 한다면


조금 떨떠름한 표정과 함께 "구라치지 말고. 진짜로? 진짜? 대답해 빨리!"라고 다그쳤을 테지.


분명 그랬을 거다.



그리고 새근새근 잠든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는 지금은



"……조금 정도는 찔려봐도 괜찮지 않을까."



필사적으로 욕망과 싸우고 있었다.


잠든 고양이를 앞두고 싸워야 하는 충동과 비슷한 종류의 것이었다.


과연 말랑말랑한 발바닥 젤리가 눈앞에 있는데 참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같은 의미로, 잠들어 있는 여자친구를 만지작거리고 싶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해볼까."



감히 주인님 앞에서 잠든 게 괘씸해서 그랬다고 하면 통할까. 변명이 될까.


어제까지는 확실하게 주인님이었는데 말이야.

과연 오늘도 그런지에 대해선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결국 문제는 그거였다.

SM 파트너.

서브미시브.


노예.


강아지.

그리고, 여자친구.

그녀의 이름이 적힌 자기소개서에 한 줄이 더해진 셈이다.

그리고 나 역시 남자친구인 동시에 주인님.


도저히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은 역할을 동시에 해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주인님과 사귄다는 게 어떤 건지 제대로 고민하고 대답한 거겠지만

"자는 얼굴만 보면 아무 생각도 없어 보이는데."



태평스럽게 집까지 따라와서 잠들어버린 SM 파트너  여자친구라니,

대체 어떤 얼굴로 지금 이 광경을 지켜봐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장담은 못하겠지만……아마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새하얀 다리와 허벅지를 그대로 노출한 여친이 내 침대에 누워 있을 때는.



"……"



여자친구의 자는 얼굴은 사진으로 찍어도 되던가 안 되던가.


어디까지가 허용범위고, 또 어디까지가 아웃인지 알 수 없어서 상당히 골치 아팠다.


만약 남자친구의 앞이라 안심한 거라면 간단하다. 그 믿음을 지켜주면 된다.

머릿속으로 어떤 망상을 즐기든, 실제로 행동에 옮기지만 않으면 되는 거다.

NO인지, NO를 가장한 YES인지 못 알아봤다가 미움 받는 건 싫으니까.


하지만 긴장을 푼 이유가 주인님 앞이라서 그런 거라면?




지켜줘야 하는 건 같지만, 그 믿음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해석해야만 한다.

벌써부터 건방지다는 구실로 벌을 줄 수 있는 온갖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가.



그리고 그건 그녀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남자친구를 믿는 것과, 주인님을 믿는 거랑은 전혀 다른 문제니까.



차라리 어깨를 붙잡고 탈탈 흔들어 깨운 다음,

"넌 긴장감이 없는 거냐? 생각이 없는 거냐?"라고 따져 묻고 싶을 정도다.


물론 그녀 입장에선 집으로 데려온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 거냐며 어리둥절하겠지만.



길동3리: 칙칙하게 남자 셋이서
길동3리 : 새벽을 지세우느니
길동3리 : 그게 훨씬 낫긴 하지



오전 2시. 야심한 시간이다.

그리고  못 드는 시간이다.

채팅을 두드리며 작게 하품하던 나는 왼쪽 손등으로 시선을 던졌다.


고백이 너무 늦었다며 꼬집은 손톱자국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었다.


나 : 으랑이 일어나기 전에
나 : 서둘러 탈주해야지
나 : 안 그러면  뭐하나 들여다 볼라

남자친구라고 받아들였기 때문에 꼬집었다……라고 한다면 확대해석일까.


만약 여전히 주인님이라고 생각하고 생각하고 있었다면




"……"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관두기로 했다.

그녀가 일어난 다음 물어보면 될 일이다.


문제의 정답을 눈앞에 두고 갈팡질팡하는 것도 칼로리 낭비지.

실컷 고민하는 척 떠들었지만 결국은 한가한 새벽의 시간 때우기거든.

새벽 2시면 나 같은 야행성 인간이 가장 활동하기 좋은 시간이다.

그리고 동시에 엄청나게 한가한 시간이기도 하다.


어차피 잠들  없다면 고민이나 망상에 빠지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내 침대를 여자친구가 차지하고 있다는 것도 좋은 핑계고.

그리고 무엇보다,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혼자 고민해봤자 소용 없잖아.


소위 '사서 걱정'이라는 영양가 없는 고민이라는 거다.



나 : 그럼 다음에 봅시다들



그리고 어차피……그렇잖아?


그녀와 사귀는 동안 비슷한 고민을 몇 번이고 반복할 텐데 D-1부터 우중충할 생각을  필요는 없지.

그러니까 지금은 우선

"……휴대폰, 휴대폰."

곤히 잠든 여자친구의 얼굴을 촬영한 다음 배경화면으로 설정해두자.

그래야 그녀가 일어난 다음 엄청나게 죄송스러워하는 대신, 당장 지워달라며 펄쩍펄쩍 뛰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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