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외전 9화
“하하…….”
그는 공허한 상실감을 추슬렀다.
모든 게 견딜 수 없이 우스웠다.
이 모든 비극이 미쳐 버린 한 외신外神의 횡포에서 비롯된 일이었다니.
이것은 ‘나’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주인공은 따로 있었다. 그는 불행히 휘말린 부속물 따위에 불과했다. 신은 그에게 기회를 준 것이 아니다.
허무하며, 허망하다!
계속해 봤자 의미나 있을까?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니, 그보다도 못했다.
견지오를 구하고자 발버둥 쳤던 그의 숱한 몸부림은 결국 부질없는 삽질이었다.
회의감과 자괴감이 해일처럼 떠밀려 왔다. 벗어나려 했지만, 가슴에 이는 절망감까지 떨쳐 낼 순 없었다.
승산 없는 투쟁.
이해득실이 무의미하니 계산속 밝은 마피아로 평생을 살아온 그에겐 더 이상 지속할 이유가 없었다.
키도는 그대로 계속 걸어갔다.
북해를 떠나, 시라쿠사를 떠나, 지중해를 떠나서 더 멀리. 견지오가 있는 세상을 뒤로하고.
계승 67회 차.
잠적, 혹은 체념이었다.
✧
잠적하면서 흘려보내는 삶은 더없이 평화로웠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세상 전체가 미친 별에게 휘둘리고 있으니 풍파를 피하기 어렵지만, 그에게만큼은 해당 사항이 없었다.
키도에게는 ‘무주의 땅’이라는 완벽한 도피처가 있었으니까.
세상과 동떨어진, 죽고 버려진 자들의 안식처.
죽은 듯이 잤다가 깨어난 날에 다시 육신이 어려져 있거든 지오가 또 한 번 죽었구나 싶었다.
아무것도 해 보지 못한 채로 그는 그렇게 몇 번이고 과거로 되돌아갔다.
반복된 회귀의 주체가 이쪽이 아님을 확실하게 확인받는 순간들이었다.
몇 번이나 그리 반복되었을까.
키도는 문득 권태를 느껴 땅으로 돌아갔다. 견지오가 있는 곳은 아니었다. 그곳만은 병적으로 피해 한국과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을 골랐다.
오랜 시간 무풍의 모래 바다에서 지내다 보니 바람이 그리워져서.
북극의 극지極地.
얼어붙은 찬 바람이 뺨을 때렸다.
키도는 깊숙이 숨을 들이마시고 정처 없이 거닐기 시작했다.
그동안 정신을 놓고 지각없이 시간을 흘려만 보낸 탓에 현재 자신이 몇 살인지, 세상이 또 어떻게 바뀌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진실로 죽은 사람처럼 방황하던 그때.
“…….”
웬 동굴을 발견했다.
하얀 빙수정으로 가득한 얼음 동굴이었다.
사방에서 눈보라가 사납게 몰아치는데, 이곳만은 비켜 나간 듯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원인 모를 불안감 같은 게 들었다. 키도는 그 앞을 한참 서성거리다가 홀린 듯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
정말로 우스운 일은,
이제는 정말 잊어버릴 만도 한데 회귀를 반복하면 반복할수록 초반 회 차의 기억은 빛이 바래긴커녕 더욱더 선명해지고 있다는 것.
최초의 기억은 특히나 그랬다.
「이런 은혜도 모르는 금수 같으니. 이게 아무 때나 쓰는 건 줄 알아?」
「내가 님을요. 내가 너 지켜 주면 되는 거 아니냐구. 이미 한 번 지켜 줬는데 두 번은 못 할 게 또 뭔데?」
황금빛 눈.
키도는 차가운 얼음덩어리 안에, 눈을 뜬 채로 박제된 견지오를 올려다봤다.
얘는 여기 왜 이러고 있는 걸까.
또 몇 번이나 죽은 걸까.
전투 도중이었는지, 찬란한 황금빛 마력으로 물든 눈이 여전히, 한 점 변함없이 그가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빛나지나 말지.”
눈부시지나 말지.
왜 잔혹하게 환한 빛으로 항상 그 자리에 있어서 하염없이 올려다보게 만드는가.
「지중해에서 제일 값진 것은 너야.」
왜, 나 자신조차 듣고 싶은 줄도 몰랐던 말들이 매번 다른 사람도 아닌 네 입에서만 나오는가.
어째서 늘 너여야만……!
키도는 엎드려 끅끅 울었다.
덥수룩해진 머리칼, 가다듬지 않아 추해진 몰골로 그는 상처 입은 짐승처럼 구부정 몸을 말고 한없이 처량하고 초라하게 흐느꼈다.
「모르겠습니다. 이게 사랑? 신부님, 제가 그 여자를 사랑합니까?」
구해 주지 못해서 미안해.
너를 사랑해.
네가 나를 살게 한 날부터 그랬어.
나는 그때 그 순간부터 살았어. 네가 준 생이었어. 죽어 있던 나를 네가 살렸어.
사랑이었는데 계속 부정만 해서 미안해.
내 사랑은 그리 대단하지도 않은데, 아무런 힘도 없는데 내가 착각했어.
오만하고 어리석었어. 다른 단어가 있을 거라고…… 사랑이었는데 결국 다 사랑이었는데 몰라서 그렇게 부르지를 못했어.
남들 다 한다고 깔봤던 그 천박하고 역겨운 걸 내가 해.
사랑해.
너는 나에게 구원을 보여 줬는데.
나는 어찌하여 너의 구원이 될 수 없는지.
“미안해…… 끄흐으흑, 미안, 미안해, 끄으으윽, 미안해, 미안…….”
신이시여, 성스러운 마리아여.
세상이여, 세계여!
나는 그녀를 심판할 수 없습니다. 가엾고 불쌍한 내 사랑을, 나의 어린 왕을 감히 심판할 수가 없습니다.
그만하고 싶습니다.
관두고 싶습니다.
이제 그만 나를 놓아주세요.
나의 그녀를 제발 놓아주소서.
자비를 베풀어 우리의 죄를 사하사 부디 평안에 들게끔 도와주소서.
✧
[당신은 실패했습니다.]
[천문이 심판자의 자격을 부정합니다. 과반의 동의를 얻어 당대 심판자에 대한 자격 심사가 진행됩니다.]
[성계 규약에 따라 당신의 역할이 임시 박탈됩니다.]
[심판]의 이름이 박탈되었다.
포기한 지 꽤 됐는데, 생각보다 오래 걸린 감이 있다.
바벨은 세계가 그에게 부여할 역할을 고민 중이니 기다리라고 전했다.
키도는 무덤덤하게 받아들였다.
반복한 횟수가 늘어나자 기억할 게 많아져 계승의 속도도 더뎌졌다. 그가 한 번에 기억을 넘겨받지 못하는 동안 지오는 또 무수하게 죽어 갔다.
키도는 조용히 그녀를 관조했다.
꾸준히 퇴색하고 쇠락하는 기억과 시간 속에서, 빛이 바래지 않는 것은 위대한 마법사의 짧고 찬란한 생뿐이었다.
별도 이래서 그녀를 못 놓았을까?
점점 그 미친 별을 이해하게 된다는 게 그는 끔찍했다.
‘하지만 결국 이건…… 일종의 기만 아닌가?’
지오에게 진실을 알려 주고자 접근할 때마다, 증오스러운 그 외신은 바벨을 이용해 번번이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키도는 어느 순간 생각했다.
기억만 하지 못할 뿐 견지오도 힘들지 않을까.
관계외자인 그조차 이렇게 지치고 힘이 드는데, 그녀가 아끼고 사랑한 우리의 세계가 이렇게 처참히 망가지고 있는데, 과연 지오는 괜찮을까.
어느덧 4000번째 계승.
마침내 하고 싶은 게 생기는 순간이었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먹구름이 아득하게 낀 하늘, 몰아치는 황금빛 벼락 사이로 흑룡이 포효하고 있었다.
일주일째 쉼 없이 이어지고 있는 이계 정복자들과의 전쟁.
오늘은 12월 31일이다.
견지오의 스물한 번째 생일까지 만 하루도 남지 않았다.
드물게 오래 버틴 생이었지만, 키도의 눈에는 싸움의 승패가 훤히 보였다.
지오가 패하고 죽을 것이다. 그녀는 스물한 살이 될 리 없으므로.
그렇게 내일이 왔고,
그의 예상은 한 점 빗나가지 않았다.
4001번째.
다시 돌아온 키도는 침착하게 판을 그렸다.
이번에는 이전과 완전하게 다른 목적으로.
그가 그리는 판의 규모가 커질수록 황무지 같던 무주의 땅에도 머무는 사람이 자연히 늘어났다.
어느 날, 그들이 그에게 물었다.
“우리는 이름 같은 거 없어? 사람도 늘어나고 슬슬 체계를 잡아야 할 것 같은데.”
집단의 이름.
그는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봤다.
해가 보이지 않는 땅이었다. 또한 앞으로 해야 할 일은 모든 것을 ‘뒤집는’ 일.
미쳐 버린 별에게 맞서 완전히 다른 그만의 방식으로 그녀를 사랑하는 일.
“해방解放.”
키도, 바벨의 반역자이자 세계 최악의 테러리스트가 될 마피아가 선언했다.
“<해방단>이라고 해.”
심사 중이라고 떠 있던 타이틀의 문자가 바뀐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더 이상 푸르지 않은 남자의 눈 위로 선명한 창이 덧그려졌다.
『집행자執行者』
『사명: 왕을 처형해 세계를 해방하라』
✧
티모시를 죽였다.
그를 살해한 게 물론 처음은 아니다.
그러나 이토록 한 점의 망설임 없이 악랄하게 죽인 것은 수많은 회 차 속에서도 맹세코 처음 있는 일이었다.
키도는 워싱턴 기념탑, 순백의 오벨리스크에 박제된 오랜 친우의 시신을 감상하듯 올려다봤다.
‘혹시 난 이러고 싶었을까?’
어쩌면 나는 너를 원망했을지도 모르겠다, 벗이여.
우유부단한 네가 이룬 수없는 실패 덕에 세계가 대체자를 찾지 않았더라면, 그 여름날의 네가 시칠리아에 오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나의 고통은…….
하지만 친애하는 티미 릴리.
그래도 네가 견지오를 내게 데려와 줬기에, 지금 흐르는 이 눈물의 의미는 원망이 아닌 애도일 것이다.
“티모시!”
“안 돼, 대장!”
“귀도 마라말디 너……! 네놈은 아비도 없고 믿고 따르는 신도 없느냐! 어찌 사람이 돼서 이럴 수 있단 말입니까!”
증오에 찬 눈으로 동료였던 자들이 그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키도는 비정하게 미소 지었다.
웃을 수밖에 없었다.
“믿고 따르는 신도 없다니, 내 종교관을 오욕하지 마. 내 신앙은 지고하고 진실해.”
다만 내가 믿는 나의 가련한 신은 머리 위에 있는 너의 것들과 달리 나의 품 안으로 추락해 있을 뿐이다.
✧
세계는 보는 자의 시각에 따라 선하기도, 한없이 악하기도 하다.
[집행자]는 세계 선善의 안배를 받는 심판자와 달리, 회생 불가능할 정도로 망가진 심판자를 반추하여 세계가 내놓은 위악의 답이었다.
어디 한번 철저하게 악해져 보라고.
올라갈 수 없다면, 끝까지 내려가 보라고.
키도는 자조했다.
‘내가 못 할 것 같아?’
지켜봐라.
어차피 성공은 글러먹었다.
4000번을 되풀이하고 소모당한 그의 삶이 곧 증명이었다.
필멸자의 자율 의지에 맡기는, 어중간한 중도의 [심판]은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내가 옳다.
이 길이 옳아.
“아, 그래. 이번엔 백도현이 제시간에 찾아간 거야. 그렇지? 누가 일을 망쳤나 했더니 그렇게 된 거였어. 이제야 이해되네. 그래서 견지록의 부활이 실패했다는 걸 알면서도 자결하지 않았구나. ‘희망’이 남아 있어서.”
“……너.”
“그런데…… 과연 그럴까?”
“개수작 부리지 마.”
“자기야, 놀랄 것 없어. ‘심판자’는 겁 많고 불쌍한 세계가 고르는 거야. ‘집행자’는 그 심판자의 스페어로…… 오직 실패한 심판자만이 계승 가능한 타이틀이지. 왜 그런 얼굴이야? ‘회귀’가 가능하다는 걸 이제는 알잖아.”
“…….”
“백도현이 돌아간다고 뭐 얼마나 달라질까, 나도 궁금하네.”
옳아야 할 텐데.
쿨럭!
키도는 피를 한 움큼 토해 냈다.
길고 길었다.
모든 것이 종장에 다다르는 지금, 그가 주저앉아 있는 곳은 우습게도 도피처이자 안식처라고 생각했던 이름 없는 땅이었다.
견지오가 걸어온다.
그녀를 억압하고 괴롭히던 모든 굴레에서 벗어나 완벽한 승리자의 모습으로.
눈부셨다. 언제나처럼.
“누가 이랬어?”
“걱정하-”
“절대 아니니까 착각 말고. 내가 조질 놈을 누가 선수 쳤나 궁금해서 묻는 거니 대답해.”
“화나게 했거든. 수천 번을 돌았는데…… 저자가 현실, 에까지 나타난 건 이번이 처음, 이야…… 하아, 화가 많이 났나 봐…… 하, 하하……. 큰일 났네, 우리 지오…….”
“……수천 번?”
“그럼.”
“…….”
“내가 그 정도도 안 해 보고 널 포기했을까 봐?”
한때 그를 좋아한다고 당차게 고백했던 그녀가 이제는 일말의 온기도 없는 눈으로 그를 싸늘하게 내려다본다.
어리석은 그가 너무나 늦게 깨달아 한 번도 되돌려 주지 못했던 답은 그렇게 영원히 지나간 시간 속에만 머물게 되었다.
키도는 사무치는 회한에 잠겨 웃었다.
제 꼴이 비참해서 울었다.
“벗어나게 해 주고 싶었는데.”
“…….”
“백도현은 당신한테, 뭐가 그렇게 달랐을까……?”
허황된 것을 꿈꿨던 듯하다.
이 더러운 손에 감히 닿을 수 없는 것을 욕심낸 형벌이었을지도.
나의 몫이 아니었던 거지.
바다 주제에 해를 탐내어선 안 되었던 거지.
‘미안해.’
그리고 고마웠다.
이런 나라도 값지다고 해 주어서.
나의 태양, 나의 위대한 기적.
사랑하는 내…….
모든 것이 끝나 가고 있었다.
결말이다. 느껴졌다. 비로소 이제야…….
손을 뻗었으나 닿지 못했다. 그렇게 최후의 최후까지 끝끝내 지오에게 닿지 못한 채로, 그의 손이 허공을 배회하다가 떨어졌다.
키도는 고요히 눈을 감았다.
방황도, 투쟁도, 잠적도 아닌……
마침내 안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