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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커를 위한 바른 생활 안내서 특별 외전 8화 (351/352)

특별 외전 8화





다시 되돌아온 바로 그 순간.


그는 벼락같이 깨달았다.


두 번째가 있으면, 마땅히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내려치는 힘에 거울이 산산조각 난다.


키도는 떨리는 손으로 거울을 더듬었다. 제 얼굴 위로 갈라진 균열의 개수를 짐작할 수 없었다.


본능적이고 섬뜩한 공포가 밀려왔다.


운명이 그에게 보내는 애도였다.





1. 견지오는 죽는다. 21번째 생일 전에 반드시. 하지만 그 전에 언제 죽는지는 알 수 없다. 제일 빠르게 죽었을 때 걘 고작 아홉 살이었다. 이런 씨발. 불규칙적.


2. 스무 살 생일이 넘으면 아우터 게이트가 열린다. 아직도 살아 있냐고 그녀를 처단하러 오는 것처럼.


3. 서쪽 파수꾼은 나의 계승이 내가 살아온 삶의 횟수와 일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내가 기억하기 이전부터 이 세상이 반복되고 있다는 뜻이다.


4. 그 파수꾼은 내게 심판의 자격이 없다고 비난했다. 아니다, 경멸이었나?


5. 오늘로 나는 27번째 회귀했다. 내 고유 타이틀에서 [마리아의 신도]가 사라진 것은 13번째로 회귀할 때였다. 성모는 그때부터 내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을 것이다.


6. 내 회귀는…….



아니지.



6. 이건 ‘나’의 회귀가 아니다.



“…….”



누군가 세계를 돌리고 있다.


왜?





“으, 차가워. 이거 발 담글 온도는 아닌 것 같은데? 아무리 지중해라도 1월이면 겨울 바다 아냐?”


“그러게 왜 들어가. 이리 와, 자기야. 닦아 줄게.”


“됐어. 마법 뒀다가 뭐 해. 뭔 휴가 와서까지 시중을 들겠다고. 그러다가 파파라치한테라도 찍히면 내가 님 발닦개로 썼다고 또 뒤집어짐.”


“내가 좋아서 하는 건데. 그래도 자기 그런 거 신경 안 쓰잖아. 아니면 달링, 어디서 이상한 기사라도 읽었어?”


바닷가에서 걸어 나온 작은 발을 감싸 닦는데, 물기가 다 마를 때까지 지오는 말이 없었다.


키도는 갸웃하며 올려다봤다.


“왜 말이 없어. 나 또 뭐 밉보였나?”


“아니, 그냥.”


지오가 고개를 저었다.


무언가 생각에 잠긴 얼굴로 그의 미소와 젖은 그의 바짓단을 번갈아 보더니 앉으라고 옆을 툭툭 친다.


명에 따라 그가 앉자 뜬금없는 말이 불쑥 던져졌다.


“저기요. 예전부터 생각한 건데 님 가식 떨면서 자학하는 짓 그만하지? 할 거면 하나만 하든가. 짜증 나게 뭐 하는 거야.”


“내가 뭘?”


“나 사연 있는 남자예요~ 내 미소는 ×나 아름답지만 개슬퍼 보이죠~ 이딴 컨셉질 좀 그만하라고. 재수 없어.”


“하하, 내가 그랬어?”


“세상에 사연은 님만 있냐구. 이쪽도 만만치 않거든? 애비도 없고 친구도 없고 사는 거 빡세고 힘들어. 다들 똑같은데 그냥 사는 거지. 내일의 해나 기다리면서.”


“어째서?”



“뭐가?”


“내일의 해를 왜 기다리냐고.”


“그야…….”


피식 웃은 그녀가 멀리 막 떠오르고 있던 태양을 가리켰다.


“안 예뻐? 저 예쁜 것도, 이 세상도, 못난 우리랑 같이 살아 보겠다고 저렇게 숨 쉬는데. 이쪽도 으쌰으쌰 해야지.”


“…….”


“그리고 뭐 세상만 널 품어 주겠어? 사연 있는 너라도 꾹 참고 좋아해 주는 사람들도 있고.”


“……그래? 누가 날 그렇게 좋아해 주는데?”


“나.”


“다시 말해 봐, 달링.”


“어휴. 세상에서 제일 잘나고 위대한 견지오 님께서 사연 많고 허접한 키도 새끼를 좋아해 주신다고요. 됐음?”


“…….”


키도는 침묵하다가 덤덤히 되물었다.


“내 눈이 파랗지 않아도?”


보석처럼 파랗고 반짝거려서.


지오가 마음에 든다고 했던 눈이었다.


그러나 봄베이 사파이어처럼 맑고 새파랬던 그의 강청색 눈은 회귀를 되풀이하면서 어느 순간 빛이 바래 칙칙한 잿빛으로 퇴색했다.


“사파이어처럼 파랗지 않아도, 그래도 여전히 좋아?”


“누가 너 보고 사파이어래? 얼굴 좀 잘났다고 별 희한한 수식어를 다 갖다 붙여 주네.”


“정말로 괜찮아?”


지오가 특유의 시큰둥한 얼굴로 그를 돌아봤다.


좋아한다고 말하면서도 태도에 일말의 변화조차 없는, 지독하게 무심하고 무신경한 여자였다.


스무 살의 지중해.


생일을 축하해 주고 싶다고 억지 쓰듯 졸라 그의 고향인 시라쿠사로 데려왔다.


그들 눈앞에는 고대 그리스 신전이, 등 뒤에는 끝없는 지중해가 펼쳐져 있었다.


그 호화롭고 그리운 풍경 속에서 그의 변치 않는 구원자가 말했다.


“키도 너는 넌데 괜찮지 않을 게 뭐가 있지? 그깟 눈 색깔이 뭐라고. 난 그딴 하찮은 색깔 돌멩이 따위엔 관심 없어.”


39번째 계승.


필사적으로 동료를 모았다.


프랑스의 성녀가 될 여인을 가로채고, 파문당하기 전의 네팔 수도승을 사문과 이간질하고…… 이름난 영웅들을 싹싹 긁어모아 그의 시한부 왕에게 충성하도록 만들었다.


세간에서 그를 두고 킹 메이커니, 음험한 흑막이라느니 수군거렸지만 알 바냐 싶었다.


목표는 하나였다.


저 찬란한 빛을 하루라도 더 연명케 하려고.


쟤의 뭣 같은 운명을 아득바득 늘리고 싶어서.


그 과정에서 참 모질게도 굴었다.


견지오의 의사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불필요한 다정함은 내다 버리고, 부모 잃고 형제와 생이별한 어린아이를 조롱하고 비웃으면서 멱살 잡듯 높은 곳으로 끌어올렸다.


미울 텐데.


그래서 그가 미워야 마땅할 텐데.


“그리고 흠…… 님은 사파이어보다는 에메랄드 쪽 아냐?”


“왜?”


“에메랄드 유명하잖아. 경매장에서 들었어. 녹색 각설탕이랬나? 엄청 부서지기 쉽다며. 연약해 빠진 게 너랑 딱임.”


“너무해.”


“그래도.”


해풍이 불었다. 목덜미를 살짝 넘는 흑색 칼단발이 나부낀다.


1월 1일.


새해의 첫 번째 태양이 떠오르고 있는 시각.


키도는 순간 눈이 부셔 눈꺼풀을 경련하듯 깜빡였다.


견지오가 그런 그를 돌아보며 웃었다. 환하게.


“지중해에서 제일 값진 것은 너야. 그딴 돌멩이들에 감히 비교할 게 아니지.”



“…….”


“여보세요?”


“……부탁이니까 그런 말 하지 마.”


“뭐야, 그 반응은. 생일 기념으로 기껏 스윗하게 말해 줬더니.”


“다정하게 구는 거 안 어울려, 지오.”


“야.”


“…….”


“……잠깐, 너 울어? 야. 키도.”


다정한 사람도 아니면서 그런 다정한 말을 입에 올리지 마.


내게 함부로 다정하지 마.


북받치듯 어떤 감정이 그를 거칠게 적셨다.


절대 안 그럴 것 같은 여자가 변덕 부려 적선하는 한 줌의 다정을 개처럼 매달리고 엎드려 싹싹 핥아 먹고 싶었다.


조금만 더 달라고, 나는 겨우 이걸 위해서 몇 번이고 삶을 되풀이하고 있다고 온 가슴을 내려치며 엉엉 악쓰고 울고 싶었다.


나를 소중하다고 안아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나를 귀하다고, 값지다고 말해 준 사람도 없었어.


오직 너야. 전부 당신이야.


세상을 감고 감아 되돌아와도 나를 알아봐 주는 사람은, 진창에서 나를 건져 올려 주는 사람은 너야. 너밖에 없어, 나에게는…….





파수꾼을 찾아갔다.


‘심해의 요수’라고도 불리는 세계 서쪽의 파수꾼인 그는 키도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의 바다로부터 기원한 자였다.


“드디어 모든 진실을 알 결심이 섰나? 오래도 걸렸구나. 나약해 빠졌긴.”


“누가 세상을 돌리고 있지? 다른 이야기는 필요 없어, 고트샤. 그것만 알려 줘.”


파수꾼이 못마땅한 듯 키도를 훑었다.


이 세상의 바다 자체인 그는 바다가 낳은 사산아인 저 시체 인간이 퍽 신경 쓰였다. 그게 아니었다면 이런 귀찮은 호의 따윈 베풀지 않았으리라.


“나는 네가 마음에 들지 않아.”


“나돈데. 설마 당신이 좋아서 이 먼 데까지 왔을까. 시간 없으니 우리 빨리 용건이나 보고 헤어지자.”


“■■ ■■■.”


성의 없이 툭 뱉어진 말에 키도가 인상을 구겼다.


“뭐? 제대로 말해.”


“똑바로 말했다. 네 격이 미천하고 모자라 들리지 않을 뿐이지, 인간.”


이죽이던 파수꾼이 웃었다.


“아! 이렇게 말하면 알아듣겠군?”


키도는 불길함을 느꼈다. 방금 필터링된 이름을 듣자마자 엄습했던 공포가 다시금 등줄기를 적셨다.


파수꾼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마왕의 성약성. 바로 그자다.”


“…….”


“우리는 【전지全知의 악마】라고 부르지.”


긴 이야기가 시작됐다.


중간에 끊고 싶었지만, 끊을 수 없었다.


키도는 무력하게 저를 둘러싼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것은,


한 위대한 존재의 무한한 집착에 대한 이야기였다.


“네 전대 심판자는 수없는 실패를 거쳤어. 너도 그놈을 만나 봐서 잘 알겠지만, 우유부단해서 한심해 빠진 작자지. 원래 세계 선善 쪽에 있는 것들이 대개 그러 해. 그놈이 초반에 제대로 성공하기만 했다면 너까지 휘말리진 않았을 텐데.”


“…….”


“더는 안 되겠다 싶은 세계가 후보자를 찾기 시작했고, 세계율을 비틀어 억지로 너를 이 궤도에 밀어 넣었지. 참으로 어렵게도 골랐건만…… 너마저 이런 꼴이라니.”


파수꾼이 나지막이 혀를 찼다.


동정심에서 비롯된 건 아니었다.


파수꾼이 지키는 것은 오로지 [세계].



타락하면 또 모를까, 세계의 마지막 방벽인 그들이 한낱 미물의 희로애락에 사사로이 공감할 리 없었다.


비록 그의 눈앞에 서 있는 미남자가 연속된 실패와 회귀에 지쳐 형편없이 망가진 꼴일지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후보는 언제나 안배되어 있다. 티모시 앙겔로스 릴리와이트가 너의 존재를 몰랐듯, 너 역시 아직 그의 존재를 모르고 있을 뿐.”


명심해라.


[역할]은 대체될 수 있다.


파수꾼의 경고는 서릿발처럼 차가웠다.


키도는 그대로 도망치듯 북해를 떠났다.





시라쿠사 대성당.


나이가 지긋이 든 신부는 고즈넉한 고해실에 앉아 신자의 말을 잠자코 기다리는 중이었다.


오늘 그에게 찾아온 신자는 입이 무거운 편이었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빛의 각도가 고꾸라지는 몇 시간 동안 말 한마디 없었다.


“형제님, 두려워 말고 주님의 자비를 믿으십시오.”


“신부님.”


“예.”


“저는 마피아입니다.”


“…….”


“오르티자 마굴가에서 자랐죠. 친모는 살해당한 임산부였고, 친부는 알 수 없습니다. 제가 첫 숨을 뱉은 것은 익사한 그녀의 배에서 억지로 끄집어낸 지 10분이 지난 다음이었답니다. 마굴가 사람들 말로는 불쌍해서 장례를 치러 주려고 꺼냈다는데, 설마요. 배가 빵빵하니 아이템이라도 있을까 싶어 갈랐겠죠. 그래도 덕분에 살았습니다. 그게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요.”


“…….”


“마굴가에서 자란 아이는 던전 정찰병으로 쓰입니다. 하급 헌터들과 각성자가 되고 싶은 짐꾼들이 값도 치르지 않고 저들 편한 대로 이용해 먹죠. 먹은 게 없어 몸집도 작고, 배운 게 없어 멍청하지만, 눈치만 빨라서 말은 잘 듣거든요. 저는 그렇게 사는 게 끔찍할 만큼 싫었습니다. 그래서 이 시칠리아에서 가장 힘이 세다는 사람들을 찾아가 발을 닦아 주고, 밑을 핥으며 그들 아래로 들어갔습니다. 그렇게 마피아가 됐어요. 셀 수 없을 정도로 사람을 많이 죽였습니다. 죄 없는 사람들까지도요.”


“……아멘.”


“미안하다거나 잘못했다고 생각이 들진 않았습니다. 죽이지 않으면 제가 죽어야 했으니까요. 솔직히 어느 순간부터는 그렇게 사는 방식이 편하기도 했습니다. 계산이 깔끔하잖아요? 벤데타. 피에는 피로. 마피아들에게서 가장 배울 만한 교훈이었습니다. 그러다가.”


“…….”


“한 여자애를 만났습니다. 죽어 가던 저를 살려 줬어요. 본인 말로는 거래라고 하는데, 누가 봐도 걔가 손해 보는 거래였어요. 애가 어려서 그런가, 세상 물정을 몰랐나 봐요. 오죽하면 한 번 살려 준 것도 모자라 불구였던 제 형제의 팔을 고쳐 주고, 저 때문에 죽기까지 했겠습니까? 살면서 수많은 호구를 등쳐 먹었지만, 그런 대단한 호구는 처음이었습니다.”


“…….”


“그래서인가 한 번도 남한테 아쉬운 소리 하거나 신께 빌어 본 적 없는데, 저절로 무릎이 꿇렸어요. 저를 지켜 준다는 걔의 말이 너무 듣기 좋아서 그 애에게도 똑같이 되돌려 주고 싶었거든요. 저는 살면서 그렇게 듣기 좋은 말을 처음 들어 봐서요.”


“…….”


“기회도 생겼습니다. 그땐 신께서 자비를 베풀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신은 아니었네요. 그렇게 한 번, 두 번, 세 번… 저를 기억도 못 하는 애를 쫓아서, 그 여자를 살리려고 삶을 되풀이했습니다. 지금은, 어디 보자. 60번이 넘었나? 언젠가부터 세질 않아서 모르겠네요. 이래 봬도 제가 신부님보다 나이가 많습니다.”


“아멘…….”


“끝은 항상 비슷했지만, 과정까지 전부 비슷하진 않았어요. 우리는 많은 것을 함께했습니다. 신부님께서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아주 많은 일들을요. ……그 많은 것을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걔도 걔지만, 그쯤 되니 저도 조금씩 헷갈리더군요. 나는 무얼 위해 이러고 있지? 이쯤 했으면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나? 얘는 아무것도 모르는데. 내가 갖고 싶어서, 탐을 냈던 사람은 사실 이 사람이 아니지 않나. 기억이 없는 사람을 그 사람이라고 볼 수 있나? 근본적인 질문까지 던지게 됐습니다. 하지만.”


“…….”


“하지만…… 이상하죠.”


“…….”


“이상하게도 후회는 되지 않아요. 네. 저라는 인간이 송두리째 망가지고 있는데 후회가 들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설령 걔가 몰라준다 해도 결국 그 애를 살리고 싶었던 건 저였으니까요. 다 제 의지였습니다. 자기만족일까? 아니면 오기일까요, 그것도 아니면 너무나 이런 짓을 오래 반복해서 이젠 빈껍데기 집념만 남아 버린 걸까.”


남자가 자조하듯 웃는다.


가만히 듣던 신부는 말했다.


“그분을 사랑하시는군요, 형제님.”


“…….”


“…….”


“……모르겠습니다.”


“…….”


“저는 그냥, 그 애의 옆에서 잠들고 싶을 뿐이에요.”


“…….”


“함께 밥을 차려 먹고, 함께 낙서나 하면서 웃고 떠들다가… 걔의 숨소리를 들으면서 조용히 잠에 들고 싶습니다. ……이젠 정말 그것 말고는 없는데.”


“…….”


“이게 사랑? 신부님, 제가 그 여자를 사랑합니까?”


“…….”


고해 성사는 어느덧 끝이 난 듯했다.



숨 막히는 침묵 뒤, 칸막이 너머로 그가 떠나려는 모습이 보였다. 말문이 막혀 있던 신부는 서둘러 성호를 그렸다.


“주여, 용서와 평화를 주소서. 성부와 성자의 성령의 이름으로 당신의 죄를-”


“상관없습니다. 신부님.”


달칵, 로사리오가 끊어져 흔들렸다.


참 오래도 걸고 있었다.


젊은 미남자는 그대로 일어나 정중히 묵례했다.


“더는 신을 믿지 않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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