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외전 3화
뿌우우우우-!
이탈리아에 최고 등급 각성자는 아직도 나타나지 않았고, 시칠리아섬은 바벨에서 도태된 국가들이 모두 그렇듯 점점 구시대로 회귀하고 있었다.
지금 들어오는 기차가 대표적인 예.
우수한 각성자들을 보유한 강국들은 마석과 마력을 이용해 혁신에 혁신을 거듭하고 있다는데, 이곳은 창고에서 과거의 유물이나 꺼내 와 굴리고 있다. 우습게도.
시라쿠사역.
오솔로니 패밀리의 저명한 쓰레기를 알아본 행인들이 두려움에 차 힐긋대며 지나간다.
몰리는 시선 한가운데서 키도는 권태로운 낯으로 시가 연기를 흘렸다.
‘한국이라…….’
다섯 번째 S급이었나?
알려지지 않은 첫 번째를 제외하면, 미국, 네팔, 중국에 이은 다음.
S급 각성자의 탄생은 지닌 힘만큼이나 파급력도 상당하기에 몇 날 며칠 온 세상이 떠들어 대서 모를 수가 없었다.
물론 그가 동양의 작은 나라에 신경 쓰는 것은 그런 이유가 아니었지만.
‘한국계 성이었어.’
바벨은 친절하게 상태창을 여러 언어로 번역할 줄 알았고, 거기서 보여 준 [숙명]의 상대가 지닌 성씨는 다른 여지 없이 한국계였다.
5년 전 그날.
결국 그는 티모시 릴리와이트에게서 [역할]을 양도받지 않았다.
욕심이 나지 않았다면 당연 거짓말.
[심판자]가 됨으로써 세계로부터 약속받을 수 있는 특혜는 잠깐 살펴봐도 어마어마했으므로.
그래도 덥석 물기엔 영 찜찜해서.
“덕분에 꽤나 돌아가야 했지만.”
“네?”
“아니.”
세계가 제시한 특혜를 포기했기에 그의 상태창은 여전히 알아볼 수 없는 글자로 깨져 있다.
하지만 각성자의 길은 이미 체념했던 것이라 속이 좀 쓰리긴 해도 두 번 포기한다고 더 슬퍼할 것도 없었다.
귀도 마라말디는 신중한 남자였다.
‘판의 사이즈가 커도 너무 컸어. 세계라니, 딱 봐도 목숨까지 내놔야 하는 일인데……. 게다가.’
남의 숙명을 내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상대방의 얼굴 정도는 먼저 봐야 이치에 맞지 않나?
티모시와의 연락은 아직 끊지 않았다.
이 끈을 끊지 않고 이어만 놓는다면,
정말로 그와 티모시에게 세계가 부여한 것이 ‘숙명’이라면, 마땅히 그들 앞에 자연스레 찾아오지 않겠나 싶었다.
우연처럼…… 혹은 운명처럼.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삐이이이익!”
“스, 습격이다!”
“카포! 피하십시오! 각성자 테러입- 아아악!”
뒤흔들리는 땅 위에서 키도는 급하게 몸의 균형을 다잡았다.
연쇄적인 폭발 테러.
수년째 이어지는 마피아 대항쟁 덕에 짐작 가는 이유는 너무나 많다.
멀리서 들어오고 있던 기차가 붉은 폭발에 휘말려 그대로 선로를 이탈했다.
추락하는 기차에서 각성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서둘러 뛰쳐나오는 게 보였지만, 뿌옇게 일어난 흙먼지 덕에 곧 가려졌다.
‘젠장!’
삐이이이-.
이명이 폭발에 먹먹해진 귀를 적신다.
‘역에서 당장 벗어나야 해.’
키도는 이 악물고 품을 뒤적였다. 하지만 소란에 그의 코트가 벗겨져 긴급 대피용 스크롤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티모시가 생일 선물로 준 방어용 반지는…….
‘두고 왔군, 집에.’
제기랄, 오늘 무슨 날인가?
이런 실수를 하다니.
“마라말디 그 씹어 죽여도 모자란 새끼부터 찾아!”
“저기! 저기 있다!”
‘목표는 이쪽이었나.’
키도가 헛웃음을 흘렸다.
각성자들이 껴 있는지 곳곳에서 터지는 색색의 빛무리가 보였다. 아무리 그가 신체를 단련하고, 악착같이 살아남는 독기를 자랑한다 한들 초인인 저들과 정면으로 맞설 순 없었다.
그럴 마음도 전혀 없으시고.
그는 미련 없이 뒤돌아 온 힘을 다해 달렸다.
“엄마아아아!”
“사람 살려, 살려 주세요!”
역 밖은 대피하는 인파로 북적이며 난리라 섞이는 데 무리가 없었다.
근처에 널브러진 시신 한 구로부터 모자를 벗겨 낸 키도가 그것을 그대로 눌러쓰며 잰걸음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형아, 저 형아 배에 피가……!”
“쉿.”
삿대질하는 꼬마의 손을 누르고 그는 골목, 더 깊은 골목으로 숨어들었다.
폭발 과정에서 날아온 파편 하나가 그의 복부에 박혀 출혈이 멈추지 않고 있었다.
설상가상 등 뒤에선 발소리가 따라붙기 시작한다.
숨죽인 보폭. 어둠을 빌려 살아가는 자들 특유의 발걸음이었다.
좀도둑 따위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안타깝게도 이 땅의 암흑은 모조리 그와 같은 쓰레기들이 집어삼켰다.
마피아.
그것도 적대 마피아가 분명했다.
‘질긴 목숨도 여기까지인가.’
바닥의 핏자국이 길어진다.
이렇게 흔적을 남기고 있으니 찾지 못하는 것도 머저리지. 키도는 킬킬거리며 골목 안에 주저앉았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그거 내가 한다고 할걸.
고작 후보자인 저와 달리 어쩌면 티미는 지금쯤 이미 만났을지도 모르겠다.
시야가 가물가물하다. 체온이 내려가며 추워졌다. 한기가 뼛속을 파고든다.
만약 죽게 된다면 꼭 지중해, 그가 태어난 곳이 보이는 데서 모든 걸 정리하고 싶었건만…….
“[엥, 뭐야.]”
“…….”
“[유럽은 이렇게 반짝이는 것도 땅에 굴러다녀? 누가 남의 나라 보물까지 훔쳐 가는 도둑국 아니랄까 봐. 떼잉… 쯔쯔. 배가 불렀지 하여튼. 해적과 감자의 나라답네.]”
‘그건…….’
의식이 멀어진다.
키도는 쓰러지면서 생각했다. Stupido.
‘그건 영국이야, 멍청한 한국인 꼬맹이…….’
✧
“허억!”
키도는 식은땀에 젖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렇게 무방비하게 정신을 잃어 본 게 대체 얼마 만이지? 아찔하기 그지없었다.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던 그는 이내 저를 빤히 보는 한 쌍의 눈을 발견했다.
“……뭐야?”
착각이었나?
잠깐, 세로 동공이었던 것 같은데.
‘아니지. 인간이 세로 동공이라니, 내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착각을.’
그가 헛웃음을 뱉는 동안에도 상대는 여전히 이렇다 할 말이 없다.
평정심을 되찾은 키도가 눈꼬리를 휘어 여우 웃음을 머금었다.
본능적인 판단이었다. 일단 구해 준 듯하고, 어리지만 분명 여자니까.
“자기가 날 구해 준 거야? 고마워.”
“…….”
“처음 보는 얼굴인데, 여기 토박이는 아니지? 시라쿠사에는 언제 왔어? 혼자야?”
“…….”
음…….
‘과묵한 타입인가?’
여유 만만하던 키도의 웃음이 점차 어색해졌다. 애가 어리긴 어린가 보다. 그의 매력이 먹히지 않다니.
‘그래도 기절하기 전에 목소리를 들었던 것 같은-’
“……[× 됐다.]”
툭 튀어나오는 한국어.
대뜸 욕설이다.
키도는 놀람을 감추고 일단 웃었다.
그러자 그런 그를 빤히 보며 소녀가 다시 한숨을 푹 쉰다. 어두워진 안색으로 땅이 꺼져라 푹푹 내쉬는 얼굴이 세상의 모든 근심과 역경을 짊어진 듯했다.
“[×바…… 뭔 개소린지 하나도 못 알아먹겠네. 하, 쓰읍…… 내 코가 석 잔데 어쩌다가 이런 무쓸모 양키 새끼를 주워 와서…… 어이, 뭘 쳐다봐? 곱게 생기면 다야? 한국말도 못 하는 게 콱 씨.]”
“…….”
“[한국말은 기본 교양 아니냐구. 그 뭐냐 세종 대왕 할배가 되게 참신하게 만든 글자라고 그랬는데, 이런 리스펙트도 모르는 무식한 서양 놈아. 웃음이 나와?]”
한국인들의 자존감…… 이 정도였나?
당연한 얘기지만, 기본 교양일 리 없었다.
하지만 우연인지 불행인지 이 자리의 키도에게만큼은 어느 정도 해당하는 얘기였다.
그의 지능은 대단히 우수한 편이었으며, [숙명]의 상대가 한국계인 것을 안 이상 학습하고 있던 여러 언어에 한국어 하나 끼워 넣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었으니까.
결론: 다 알아 듣는 중.
“…….”
갈등은 짧다.
키도는 민첩하게 판단 내렸다.
‘모르는 척하자.’
말이 통하면 더 귀찮아질 상대였다.
사회 밑바닥에서 벼리고 벼린 생존 감각이 내린 판단이니 믿을 만하리라.
“이탈리아어 하나도 몰라? 이런, 시뇨리나.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시라쿠사에 올 생각을 다 했어?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아니면 너도 티모시 그 얼간이처럼 어디 나사 하나 빠진 또라이야? 응? 멍청하긴.”
방긋방긋 살갑게 눈웃음치며 일부러 억양을 빠르고, 더 어렵게 발음했다.
하나도 못 알아듣는 주제에 소녀가 그를 따라 어색하게 웃는다.
“[뭐래, ×발아…….]”
웃음을 참기 어려웠다.
‘귀엽긴 하네.’
키도는 통증이 이는 배를 움켜쥐고 자세를 편안히 했다. 상대가 무해하고 만만한 외국인이란 판단이 들자 긴장도 풀렸다.
“자기, 이름이 뭐야?”
“[그만 쫑알대…….]”
“이름이 뭐냐고.”
“[하, 엄마, 흥선 대원군님…….]”
이런 간단한 영어도 못 알아듣는다고?
대한민국의 교육 수준을 내심 경멸하며, 키도는 눈웃음을 머금은 채 천천히 말했다.
“Your Name, babe. N, a, m, e.”
“[아~ 이름이 뭐냐구?]”
손짓 발짓까지 덧붙여서 말해 주자 그제야 대화가 통했다. 알아듣자마자 바로 초롱초롱해지는 눈빛이 꽤나 귀엽-
“지오.”
“…….”
시라쿠사 안쪽, 구 시가지의 골목.
허름하게 구멍 뚫린 휘장으로 석양빛이 내려앉는다. 그 아래서 새까만 흑발이 황금색과 핏빛을 머금었다.
두 개의 눈물점이 특징적인 눈매가 보기 좋게 휜다. 소녀가 피식 웃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마이 네임 이즈 지오, 견. 견지오. 나이스 투 미츄. 아임 파인. 땡큐. 앤 유?”
심장이 쿵, 소리와 함께 내려앉았다.
키도는 그대로 얼어붙어 바라봤다.
정말로 우연하게 그의 앞에 들이닥친, 세계가 부여한 그의 예비된 [운명]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