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6-
클레이는 자신의 말을 지켰다. 밀리안의 사정액을 한번 받아먹은 뒤, 바로 몸을 뗐다. 나른한 얼굴로 뜨거운 숨을 내쉬는 밀리안을 안고 욕실로 들어가 씻긴 뒤, 침대에 눕혔다. 살이 트지 않도록 크림을 듬뿍 바르며 마사지까지 해 주고 난 뒤에야 그의 몸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
“아까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야?”
“……아.”
“말해 봐.”
“웃지 않는다고 약속해주면요.”
“웃는다고? 내가?”
“조금, 유치한 것 같아서…….”
밀리안이 그 어떤 유치한 생각을 했더라도 절대 비웃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절대 웃지 않겠다고, 클레이가 맹세까지 하자 밀리안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너무 행복해서요. 조금, 자랑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뭐?”
“……웃지 않기로 했잖아요.”
절대 웃지 않겠다고 성호까지 그리며 맹세할 때는 언제고 클레이가 큰소리로 웃었다. 밀리안은 머쓱하게 시선을 피했다. 아예 몸까지 돌릴 기세여서 클레이는 황급히 표정을 가다듬으며 그의 몸을 붙잡았다.
“좋아서 그래. 당신이 그런 말을 하니까.”
귀엽기도 하지. 누군가에게 자랑하고 싶을 정도로 행복하다는 말이 얼마나 값진 말인지,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게 분명했다. 알았다면 이렇게 부끄러워하지 않았겠지. 자랑하고 싶은 사람은 자신이 더 했다. 세상의 모든 지면과 언론을 통틀어 광고를 하고 싶지만, 밀리안을 생각해 참고 있는 중이었다.
“어떤 방법으로? 당신이라면 생각해 둔 게 있을 것 같은데.”
“그건.”
밀리안이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클레이는 그의 말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귀담아들었다.
* * *
밀리안이 소셜 네트워크에 태교 일기를 올린 첫날, 그의 팔로우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그동안 남성의 임신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그렇게 좋지 않았다. 아무리 오메가의 인권이 높아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여성의 임신이 당연한 베타의 세상에선 남성의 임신이란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남성 오메가가 임신하면 되도록 몸을 숨기는 편이었다. 과격한 보수주의자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클레이 디어와 결혼한 오메가가 태교 일기를 올렸을 때 많은 사람의 관심이 집중됐다. 간혹 욕설을 하거나 성희롱을 하는 무례한 사람이 있긴 했지만, 모두 클레이에 의해 법의 심판을 받고 잠잠해졌다. 괜히 손가락 한번 제멋대로 놀린 대가로 평생 일해도 절대로 갚지 못할 빚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요란스럽던 연애 공표와 돈을 쏟아부었던 호화로운 결혼식처럼 태교 일기라는 것도 그러리라는 기대와 달랐다. 사진은 하루에 하나씩만 올라왔다. 별다른 코멘트도 없었다. 올리는 시간도 일정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기다리는 사람이 많았다.
밀리안은 자신의 배를 감싼 클레이의 손을 찍은 사진을 올렸다. 똑같은 반지를 나눠 낀 두 사람의 손이 동그란 배 위에서 겹쳐진 사진은 호응도가 매우 높았다. 얼굴이 나온 것도 아니고, 자극적인 사진도 아니었지만 두 사람의 애정이 고스란히 묻어 나왔기 때문이었다.
형체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태아의 성장한 초음파 사진이 하나 올라온 날 처음으로 코멘트가 달렸다.
[레이나& 조쉬]
아이들의 이름이었다. 쌍둥이라는 사실은 처음 밝혀서 반향이 컸다. 계정주는 아무런 말이 없는데 방문한 사람들의 코멘트가 엄청나게 긴 줄을 이었다.
그다음 날은 드디어 사람의 얼굴이 찍힌 사진이 올라왔다. 편안한 얼굴로 자는 남자의 볼을 만지고 있는 여자의 반지를 낀 손. 클레이 디어가 찍은 사진이었다.
[나의 디어]
이쯤 되자 그 클레이 디어가 정말 충실한 가정생활을 유지할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가진 사람들조차 말문을 잃었다. 그날 오후에는 처음으로 두 번째 사진이 올라왔다.
이번에는 밀리안 디어가 찍었을 게 분명했다. 클레이 디어가 카메라를 향해 웃고 있는 사진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사진 밑에도 [나의 디어]라는 똑같은 코멘트가 달렸다.
하루에 사진이 두 개가 올라온 것은 이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임신으로 인해 부은 남자의 발이 찍힌 사진이 올라오기도 했다. 그날의 코멘트는 [귀여워]였다. 사람들은 이제 누가 사진을 올리는지 파악할 수 있었다.
유난스러울 정도로 노골적인 애정 표시를 하는 날은 대체로 클레이 디어가 사진과 코멘트를 올렸다. 밀리안 디어의 코멘트는 조금 딱딱하고 단조로웠다. 이 점을 사람들은 재밌어했다. 클레이 디어의 외모와 재력이라면 남자가 더 애달아야 마땅한데도 두 부부의 관계는 반대로 역전되어 있었다. 물론 밀리안 디어도 드문드문 애정을 표시하긴 했지만, 클레이 디어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태교 일기는 결국 마지막이 왔다.
붉은 기가 남은 갓난아이 둘의 사진과 함께 [사랑해]라는 코멘트가 끝이었다. 그 뒤로는 아무리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았다.
* * *
클레이는 산소호흡기를 연결한 채 잠들어 있는 밀리안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마치 눈물샘이 고장 난 것처럼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밀리안이 쉽사리 마취에서 깨어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다.
꼬박 스무 시간이 지나고서야 밀리안이 드디어 눈을 떴다. 밀리안은 눈을 뜨자마자 클레이를 발견하고 웃었다. 그녀의 얼굴이 잔뜩 부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밀리안의 웃음과 반대로 잠시 멎었던 클레이의 눈물이 다시 쏟아졌다.
“저 안 죽었습니다.”
“나도 알아. 죽는다는 말 좀 하지 마.”
그가 깨어나지 않는 시간 동안 클레이는 지옥을 다녀왔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니까 제발 무사히 일어나 달라고 평생 해 보지 않았던 기도도 했다. 속이 탔던 건 벤틀로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는 고혈압이 심해져 다른 병실에 누워 있는 상태였다. 상황이 이러니 대니얼을 비롯해 병원 관계자들은 숨도 못 쉬고 바짝 긴장한 상태였다. 혹시라도 일이 잘못되면 초대형 소송이 걸릴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은요?”
“잘 있어. 둘 다 건강해.”
아마도. 밀리안이 깨어나지 않으니 클레이는 병실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다. 아이들은 모두 건강하다는 말을 대니얼에게 들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을 거다. 그리고 그게 거짓말이면 목을 따 버릴 것이다. 밀리안은 옅게 웃으며 클레이의 손을 살짝 흔들었다.
“괜찮습니다. 저 멀쩡해요.”
“응. 사랑해. 깨어나 줘서 고마워.”
클레이가 밀리안의 손등 위에 얼굴을 묻었다. 끊이지 않는 눈물 탓에 손등이 축축하게 젖고 있었다. 밀리안은 개복수술을 하고 난 뒤라 클레이를 안아 줄 수 없다는 게 아쉬웠다. 손가락을 움직여 클레이의 손을 살짝 쥐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벤틀로는, 어디에 있습니까?”
“옆 병실에서 누워 있어.”
“아니, 왜…….”
“혈압이 너무 높아져서. 괜찮다고 하니 당신은 당신 회복부터 생각해.”
클레이는 허리를 숙여 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살았다. 드디어 몸속에 산소가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다시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이번엔 참을 수 있었다. 클레이는 밀리안의 머리를 가만히 쓸었다. 다신 못 하겠다. 사람이 견딜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 과정을 어떻게 이겨 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한 번으로도 심장이 터질 것 같은데, 다음에도 이런 경험을 하면 그대로 죽을지도 모른다.
* * *
걸을 수 있을 정도로 몸이 회복되자 밀리안은 클레이와 함께 바로 아이들을 보러 갔다. 침대에 잠들어 있는 아이들은 매우 작았다. 살아있는 생명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너무 작아요.”
“예쁘지?”
“네.”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예뻤다. 클레이의 유전자가 워낙 강해서 그런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이들이 벌써 이목구비가 선명했다. 보통은 빨간 원숭이 같던데. 밀리안이 신기하다는 듯이 중얼거리자 클레이가 짧게 웃었다.
“우리를 닮았는데 당연하지.”
“하하.”
아무리 생각해도 전적으로 클레이의 유전자 덕인 것 같은데. 밀리안은 굳이 정정하지 않고 웃기만 했다. 클레이가 그렇게 생각하는 게 좋았기 때문이다. 기분이 묘했다. 쌍둥이여서 잠도 제대로 못 잤다. 몸이 수시로 붓고 아이들의 무게에 내장이 눌려 숨을 쉬는 것도 고역이었다. 마지막쯤엔 걷지도 못해 모든 걸 클레이에게 의지해야 했다. 그렇게 고생했는데도 아이들을 보니 다 잊혔다.
클레이와 그의 아이. 가족.
밀리안은 행복해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이 다 풀어진 얼굴로 아이들을 보며 웃고 있는 벤틀로를 바라봤다. 그리고 클레이의 손을 잡았다. 목이 꽉 막힌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 감정이 벅찼다. 클레이와 사랑하게 된 이후로 모든 행복을 다 겪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매일 새로운 행복이 그를 기다렸다.
울지 않으려고 애써 참는데, 불가능했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물기가 흘러내렸다. 죽는 날까지 절대로 존재하지 않으리라 포기했던 것이 모두 제게 왔다. 힘들었던 것에 대한 보상처럼.
밀리안이 눈물을 닦으려는데 클레이가 더 빨랐다. 그녀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의 눈가를 조심스럽게 손으로 닦았다.
“괜찮아. 울어도 돼.”
“…….”
“사랑해.”
그녀의 목소리도 잔뜩 잠겨 있었다. 밀리안이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같은 말을 돌려주지 못했지만, 클레이는 모두 들었다는 듯 환하게 웃었다.
조용히 두 사람을 보고 있던 벤틀로는 아예 고개를 돌려 손수건에 얼굴을 묻었다.
* * *
큰 수술을 한 밀리안을 대신해 아이를 돌보는 건 클레이와 벤틀로가 전담했다. 아이들은 건강했지만, 그만큼 기운이 넘쳤다. 쌍둥이라 그런지 두 아이는 서로를 특별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잠시라도 떨어트려 놓으면 미친 듯이 울어서 귀가 시끄러울 정도였다. 특히 레이나가 심했다. 하루는 조쉬를 깔고 뭉개서 조금이라도 늦게 발견했더라면 큰일이 났을지도 모른다.
클레이는 레이나를 안고 분유를 먹이며 심각한 얼굴로 잔소리했다. 조쉬는 레이나가 볼 수 있는 바로 앞에서 벤틀로가 분유를 먹이고 있었다.
“조쉬는 약해, 레이나. 네 힘으로 뭉개면 큰일 난다고.”
“우우웅!”
아직 태어난 지 한 달도 안 됐으니 말을 알아들 리가 없는데, 레이나는 있는 힘껏 젖병을 빨면서 불만스러운 소리를 냈다. 그리고 조쉬를 향해 팔을 휘저었다. 클레이는 조쉬를 잡게 하는 대신 자신의 손가락 하나를 대 줬다. 아이는 클레이의 손을 팍하고 쳐냈다.
클레이는 얼얼할 정도로 내쳐진 자신의 손을 봤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조쉬에게는 나름대로 조심하고 있는 것 같다. 만약 이 정도 힘으로 조쉬를 대했으면 조쉬의 연약한 피부가 남아나지 않았을 게 분명했기 때문에.
그때 아이 방문이 열렸다. 한숨 자고 일어난 밀리안이 그들을 찾아온 것이다. 그는 먼저 클레이의 볼에 키스한 뒤 레이나와 조쉬를 바라봤다.
“착하게 잘 있었니?”
밀리안의 말에 레이나가 먼저 방긋방긋 웃었다. 아이들은 차분하고 다정한 그의 목소리를 좋아했다. 저를 대할 때는 완전히 다른 모습에 클레이는 아기도 내숭을 부릴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우리 애들은 정말 순해요.”
보통은 제어가 안 된다고 하던데. 밀리안이 너무 신기하다며 말하자 클레이가 슬쩍 눈을 굴려 벤틀로를 바라봤다. 벤틀로는 클레이의 시선을 피해 조쉬에게 분유를 먹이는 것에 집중했다.
“왜요? 아니에요?”
“당신 말이 맞아.”
정확히는 조쉬만 순한 거지만. 완전한 거짓말은 아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밀리안도 레이나의 성격을 알게 될 테니 지금은 잠시 착각하게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클레이가 밀리안의 입술에 살짝 키스하면서 젖병의 위치가 달라지자 레이나가 칭얼거렸다.
“주세요. 제가 하겠습니다.”
“안 돼. 당신 아직 다 낫지 않았잖아. 내가 하게 둬.”
“그럼 젖병만 주세요.”
“그 정도라면.”
클레이가 밀리안에게 젖병을 넘겼다. 이미 반 이상 비운 젖병은 레이나의 식욕에 빠른 속도로 줄었다. 조그마한 입을 오물거리며 젖병을 무는 게 귀엽고 신기했다. 아이는 벌써부터 클레이와 똑같았다. 그 와중에 눈동자만 그를 닮은 투명한 갈색이었다. 반대로 조쉬는 얼굴은 저를 닮고 머리카락과 눈동자는 클레이와 같았다. 어떻게 이렇게 배분이 됐는지 놀라울 정도였다.
“어떻게 이렇죠?”
“그러게.”
두 사람이 뒤섞였다는 증거가 두 아이를 통해서 나왔다. 감정이 울컥해 밀리안이 입술을 깨물자 클레이가 그러지 말라고 손으로 제지했다.
“안 그래도 입술이 많이 텄단 말이야. 깨물지 마.”
“곧 좋아질 겁니다.”
“당연하지. 내가 제대로 보살펴 줄 거니까.”
그때 젖병에서 아무것도 나오지 않자 레이나가 손을 허우적거리며 밀어냈다. 얼마나 먹었다고 배가 통통하게 부풀었다. 밀리안은 킥킥 웃으며 아이의 배에 얼굴을 비볐다. 아이는 기분 좋은 듯 신나게 몸을 뒤척이다 어느새 잠들었다. 고개를 돌리니 조쉬도 입가에 분유를 매단 채로 잠들어 있었다. 두 아이를 침대에 눕히자 천사가 따로 없었다. 보기만 해도 웃음이 저절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