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2-
“혹시, 저 죽습니까?”
“……뭐?”
“꼭 당장이라도 제가 죽을 것처럼 굴어서요. 그냥 입덧입니다. 남들도 다 하는. 조금만 지나면 식욕도 돌아올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누가 누굴 걱정해. 클레이는 조금 황당한 얼굴로 저를 위로하고 있는 밀리안을 바라봤다. 남들도 다 한다니. 설혹, 남들도 이렇게 힘든 과정을 거쳐 아이를 낳는다고 하더라도 그건 밀리안이 아니었다. 하지만 따질 수도 없게 밀리안이 핼쑥한 얼굴을 하고선 기분 좋게 웃고 있었다.
“쌍둥이를 가질 줄은 몰랐습니다.”
“…….”
클레이는 정말 대니얼을 죽이고 싶었다. 한참 뒤에야 밀리안이 쌍둥이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조금 더 덩치가 큰 아이가 하나를 가리고 있었다고, 멍청하게 웃던 얼굴이 떠오르자 저도 모르게 이가 갈렸다. 하지만 임신한 밀리안 앞에서 험한 말을 할 수가 없어 클레이는 간신히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일란성일까요, 아니면 이란성일까요?”
“글쎄. 하지만 어떻든 예쁠 거야.”
자신을 따라 결국 웃음을 보이는 클레이를 향해 밀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니까 아이를 미워하지 마세요.”
“……내가 언제,”
“아니라면 됐습니다.”
“…….”
눈치만 빨라져서는. 클레이를 혀를 내찼다. 아이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밀리안을 힘들게 하는 아이를 탓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사실은 가장 큰 잘못을 한 사람은 자신인데.
밀리안을 깔끔하게 씻긴 후, 클레이는 그를 안아 다시 침대로 향했다. 속을 게워 내고 씻기까지 하니 그새 체력이 다했는지 밀리안은 벌써 잠들어 있었다. 클레이는 밀리안의 배를 손으로 쓸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빠 힘들게 하면 안 돼. 이제 적당히 하지 않으면 너 태어나면 엄마한테 혼날 거야.”
제발 뭐라도 먹자고, 거의 애원하듯 말했다. 대체 누굴 닮아서 이렇게 예민한 건지. 잠시 후, 밀리안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러다 더는 못 참겠는지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렸다. 클레이는 머쓱한 얼굴로 밀리안의 배에서 손을 뗐다.
“……깨어 있었어?”
“어떻게 혼내려고요?”
태어나도 갓난아이 아니냐고, 밀리안이 토를 달았다. 그 와중에도 계속 웃고 있었다. 클레이는 어깨를 으쓱 들어 올렸다.
“태어나자마자 혼낸다고는 안 했어.”
“그럼 언제요?”
“한, 열 살쯤 되면?”
“그때까지 기억하고 있으려고요?”
“죽을 때까지 못 잊을걸?”
침중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밀리안의 웃음이 멎었다. 가벼운 장난으로 생각하던 그와는 달리 클레이는 아픈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가, 알파여서 미안해. 베타였다면 당신을 이렇게 힘들게 하지 않았을 텐데…….”
“클레이.”
“당신이 너무 말라서 무서워.”
그럴 리가 없는데, 그래선 안 되는데, 자꾸 이상한 상상을 하게 된다며 클레이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혼자 남겨질까 봐 두렵다. 점점 마르기만 하는 밀리안을 볼 때마다 심장이 덜컥덜컥 내려앉았다.
남성 오메가는 원래 이렇다고, 태반이 제대로 자리를 잡기까지 힘들 거라는 말을 대니얼을 통해 들어서 각오를 했지만, 눈으로 직접 보니 이건 사람이 겪을 일이 아니었다.
밀리안은 울 것 같은 얼굴로 자신을 보는 클레이를 향해 팔을 벌렸다. 클레이는 마른 팔을 보고 입술을 꾹 깨물더니 조심스럽게 그의 품에 안겼다. 밀리안이 클레이의 등을 토닥였다.
“안 죽습니다. 멀쩡히 살아서 아이도 낳고 당신과 오래 살 거니까, 벌써 죽을 사람처럼 대하지 마세요.”
“응.”
“이상한 상상도 그만하시고요.”
“……응.”
“몸은 좀 힘들긴 하지만, 그래도 당신의 아이라서 태어날 날이 기대돼서 참을 수 있어요.”
가족. 그를 버린 가족이 아닌, 온전한 가족. 사랑하는 사람과 만드는 따뜻한 일상이 기대된다. 밀리안은 조용히 그의 목소리를 듣고만 있는 클레이의 등을 몇 번 더 쓰다듬다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주세요, 그거. 먹겠습니다.”
“정말이야?”
그렇게 빌고 빌어도 안 먹겠다고 버티더니. 클레이가 눈을 크게 뜨자 밀리안이 어색한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사실, 예전에 에릭에게 받았을 때 그걸 먹고 조금…….”
“조금?”
“……이상한 꿈을 꿔서…….”
“꿈?”
꿈이라고? 약을 가지러 가려던 클레이의 몸이 움찔 굳었다. 밀리안이 계속 시선을 피하는 게 수상했다.
“야한 꿈이라도 꿨어?”
“…….”
“누가 나왔는데?”
밀리안은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을 했다. 새빨갛게 붉어진 눈가가 먹음직스러웠지만, 저걸 다른 사람이 먼저 봤다고 생각하니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다. 고작 꿈일 뿐인데, 왜 이렇게 짜증이 나지? 클레이는 표정을 관리하기 위해 노력했다. 밀리안은 죄가 없다. 무슨 죄가 있겠어. 스스로 꿈을 제어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자신은 그걸 먹고 뜨거운 몸을 주체하지 못하는 밀리안을 상상하다 힘든 밤을 보냈었다. 매일, 밀리안이 꿈에 나타나서 미치는 줄 알았는데, 그는 다른 사람과…….
“클레이, 표정이…….”
“아.”
망할. 클레이는 잔뜩 일그러진 표정을 손으로 가렸다. 고작 꿈 따위에 질투를 하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황당했지만, 그래도 짜증이 났다. 그녀는 숨을 깊게 들이켰다 천천히 내쉬었다. 그걸 여러 번 반복하니 조금이나마 진정이 되는 기분이었다. 밀리안은 괜히 죄인이 된 심정으로 클레이의 눈치를 살폈다.
“그래서 안 먹겠다고 한 거였습니다.”
“먹어. 먹고 내 꿈을 꾸면 되지.”
“그걸, 제가 마음대로 할 수,”
“뭐라고?”
“아니요, 아무 말도…….”
자신이 뭘 잘못한 건가 하는 억울함이 들긴 했지만, 클레이의 표정이 너무 험악해서 제 생각대로 말을 끝맺을 수가 없었다.
“난 당신 꿈만 꿨는데.”
“……제, 꿈을요?”
“그래. 이걸 먹으면 몸이 달아오른다는 걸 알고 있었거든. 당신이 잔뜩 사정하고 잠에서 깨어나 무슨 표정을 할지 상상하다 결국 당신 꿈을 꿨지.”
꿈에 나타난 밀리안은 안지 않고는 못 버틸 정도로 야해서 돌아 버리는 줄 알았다. 그 이후 어떤 사람과도 섹스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자신이 현실에서 했던 모든 경험을 통틀어도 밀리안과의 몽정만 못 했다. 그때를 떠올리자 클레이는 살짝 입맛을 다셨다.
“그때만 해도 당신은 딱딱하기 그지없었는데, 꿈에서만큼은 내게 나긋나긋하게 안겨서 떨어지지 않았어. 온기가 필요한 것처럼.”
“……네?”
클레이의 말이 이어질수록 밀리안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가 기억하고 있는 꿈과 매우 흡사한 내용이 나올 때마다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덕분에 늦잠이 늘어서 큰일이었어. 당신을 놓고 깨고 싶지 않았거든.”
“…….”
“아, 그러고 보니 당신도 그때 유독 회사에 늦게 출근했지.”
“…….”
밀리안은 눈도 깜박이지 않고 그녀를 바라봤다. 클레이도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는지 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멍하니 응시했다.
잠시 후, 클레이는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작게 중얼거리는 말에 밀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리가 없는데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클레이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설마 당신도 내 꿈을 꿨던 건 아니지?”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왜 ‘아무래도’야? 얼굴, 기억 안 나?”
“꿈이잖아요.”
그때는 하늘에 맹세코 클레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자신과 달리 당당한 여자여서 부럽고 대단하다고는 생각했지만, 명백히 지금과 비슷한 감정이 아니었다. 그러니 제 꿈에 나타난 여자가 클레이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꿈에서 깨고 나면 여자의 얼굴이 안개 낀 듯 뿌옇게 보이기도 했고.
밀리안의 설명에 클레이가 기가 찬 얼굴로 짧게 웃었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솔직한 거 아냐? 뭘 하늘에 맹세하기까지 해?”
“사실이니까요.”
“이건 좀 억울해. 난 그때부터 이미 당신에게 홀려 있었는데 말이야.”
“그렇다고 하기엔, 다른 파트너와 섹스도 했었지 않습니까?”
“…….”
“생각나게 한 사람은 당신입니다.”
기분이 나빠졌는지 밀리안의 목소리가 퉁명스러워졌다. 순식간에 상황이 전복되자 클레이가 납죽 엎드렸다. 밀리안에 비해 자신의 과거가 썩 깨끗하지 못한 건 그녀의 약점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지금의 밀리안은 입덧으로 인해 당장 어떻게 돼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약해진 상태였다. 그런 밀리안의 심기를 상하게 할 말을 한 게 용납이 안 됐다. 아무리 본의가 아니었더라도.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응?”
“……당신이 잘못한 일은 아니죠.”
“아니야. 잘못한 게 맞아. 미안해.”
“…….”
말은 클레이가 잘못하지 않았다고 했지만, 그래도 그녀의 사과가 달가웠다.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와 관계를 가졌던 것에 미안하게 생각해 줘서 좋았다. 그만큼 자신이 클레이에게 중요한 사람임을 뜻하는 것 같아서.
“좋아요. 용서하겠습니다.”
밀리안이 마음 넓게 그녀의 죄를 사하자 클레이가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럼 이제 약을 먹지 않을 이유가 없는 거지?”
“네.”
만약 이걸 먹고 다시 그때의 꿈을 꾼다면, 그건 클레이일 것이다. 분명히.
* * *
“아.”
작은 티스푼에 봉긋하게 올라온 갈색의 진득한 액체에서 이상한 냄새가 풍겼다. 밀리안은 눈을 살짝 찡그리고는 입을 벌려 받아먹었다.
“윽.”
“토할 거 같아?”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저, 맛이 좀 이상해서.”
“다행이야.”
안도한 클레이와 마찬가지로 밀리안 역시 이 이상한 걸 먹고도 속이 멀쩡한 게 신기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이 맛은 도저히 견딜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밀리안은 물을 달라고 하려다 조금 전에 물비린내를 맡고 속을 게워 냈던 걸 떠올렸다.
“클레이, 잠시만.”
“응?”
순순히 고개를 숙이는 클레이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언제나 제게 열려 있는 입술 사이로 혀를 집어넣으니 클레이의 타액이 넘어왔다. 역시 달다. 마치 어미 새에게 먹이를 받아먹는 것처럼 밀리안은 클레이의 타액을 빨아먹었다. 이상했던 맛이 금세 가라앉자 밀리안은 천천히 입술을 뗐다. 클레이는 미묘한 표정으로 손으로 입술을 더듬었다.
“맛이 너무 이상해.”
“그렇죠?”
밀리안은 속에서 옅게 올라오는 열기에 한숨을 내쉬었다. 제발 아무런 꿈도 꾸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니, 만약 꿈을 꾼다면 클레이의 꿈을 꿨으면 했다. 그는 버릇처럼 클레이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달콤한 향기를 흘리는 부드러운 살결과 따뜻한 체온이 몸을 이완시켰다.
고요한 공간에 고른 숨소리만 흘러나오자 클레이는 가만히 고개를 들었다. 영양이 부족한 입술에 갈라진 각질이 선명했다. 클레이는 팔을 위로 뻗어 침대 선반에 올려진 크림을 잡았다. 그리고 꼼꼼히 그의 피부에 발랐다.
밀리안의 잠이 조금이라도 평온하길 바라며 페로몬을 더 짙게 풀었다. 창백한 혈색이 조금은 안정을 찾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이 힘든 시간이 빨리 지나기를. 지구 반대편에서만 구할 수 있는 음식을 찾아도 좋으니 식욕이 돌아오길 간절히 바라고 바랐다.